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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五胡)의 쟁패 14 - Genocide

348년, 석호의 태자 석선이 참혹하게 처형당하면서 조의 태자 자리는 비게 되었다. 벌써 두번이나 태자를 갈아치운 석호로서는 새로 세우게 될 태자도 안심할 수 없었다.어찌하여 오로지 나쁜 아들만 낳아서 나이가 20세만 넘으면 번번히 아버지를 죽이고자 하는가!何爲專生惡子,年逾二十輒欲殺父!석호는 결국 10세의 어린 아들 석세(石世)를 태자로 삼아 ...

오호(五胡)의 쟁패 11 - 전설의 폭군

역사상 많은 폭군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연산군을 대표로 꼽을만 하고, 전 세계에도 많은 폭군들이 있었다. 누명을 썼던 폭군들도 많았을 것이고, 개혁을 추구한 것이 포악한 정치로 기록된 군주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진짜 악덕을 짊어지고 악명을 떨친 폭군들도 있다. 그들 가운데 둘째 가라면 서러울 폭군이 있다. 후조(後趙)의 3대 황제 석호(石虎)가 ...

오호(五胡)의 쟁패 10 - 승자의 혼미

329년, 상규(上邽 : 감숙성 천수)를 점령하고 전조의 마지막 숨통을 끊음으로써, 석륵의 후조는 화북의 패권을 놓고 벌어진 전쟁에서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전조에 복속되어 있던 저족의 수령 포홍과 강족의 수령 요익중은 후조에 항복했으며, 농서(隴西)의 걸복부는 후조의 침입을 두려워하여 서쪽으로 도망쳐 버렸다. 화북에 남아있는 독자적인 세력은 사실상 하...

오호(五胡)의 쟁패 8 - 낙양의 결전

328년 7월, 후조의 장수 석호(石虎)는 4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지관(軹關)을 지나 전조의 하동(河東)을 공격하였다. 전조가 병주 지역에 가지고 있던 최후의 거점을 공략한 것이다. 하동은 곧 무너지고, 석호는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포판(蒲阪)을 공격하였다. 포판이 떨어지고 나면, 전조의 수도인 장안까지는 그야말로 코앞이었다.석호의 공격 소식을 전달받은...

오호(五胡)의 쟁패 7 - 두 개의 조(趙)나라

근준의 반란이 한창이던 318년 겨울, 유요는 죽은 유찬을 대신해서 한(漢)의 황제에 즉위하고 석륵을 조공(趙公)에 임명한다. 당시까지 유요와 석륵은 미묘한 협력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유요는 자기 세력 안에서 최대의 세력인 석륵을 적당히 우대해줄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근준이 토벌되고, 토벌되는 과정에서 미묘한 대립각을 세우게 된 양대 세력은 정해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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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역사학 방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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