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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망양(五胡望洋) 3 - 엄친아의 최후

요장, 모용홍, 모용충에게 포위되다시피 한 장안의 부견은 일촉즉발의 위기에 몰려 있었다. (걸복건귀는 머나먼 농서에 처박혀 있으니 제외하더라도.) 요장은 북서쪽에서 세력을 펼치고 있었고, 모용홍은 그야말로 장안의 코앞에서 장안으로 진격해 오고 있는 형편이었다. 모용충은 하동(河東)에서 격파당해 모용홍에게 투항하였지만, 포위의 형세에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오호망양(五胡望洋) 2 - 시랑(豺狼)의 무리들

383년 12월, 부견이 패잔병 10만 명을 수습하여 장안으로 귀환하였을 무렵까지도 화북의 정세는 상당히 안정적이었다. 곳곳에서 위험 요소가 점차 불거져 나오고 있기는 했지만, 표면적으로는 각지의 세력들 모두 자중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사실상 유일한 분란거리는 농서의 걸복국인(乞伏國仁)이 일으킨 반란 뿐이었다.============걸복...

오호(五胡)의 쟁패 27 - 비수대전(淝水大戰)

383년 7월, 부견은 동진 원정을 공식적으로 선포하고 대규모 징발을 개시한다. 장정 10명 당 1명을 징집하여 보병 60만, 기병 27만의 대군을 구성한 것이다. 그야말로 전례가 없는 엄청난 대군이었다. 여기에 서역으로 원정을 떠난 10만 명, 기타 수비군들까지 합치면 100만을 훌쩍 넘는 경이적인 군대다. 이렇게 엄청난 대군이니 전선의 규모도 압도적...

오호(五胡)의 쟁패 26 - 나는 관대하다.

375년, 왕맹이 세상을 떠났다. 엄친아 부견을 폭주하지 않도록 견제하며 패자의 길로 인도하던 길잡이가 사라진 것이다. 왕맹은 저세상으로 떠나기 직전까지 부견과 진 정권의 안위를 걱정하여 "동진을 도모하지 말고 선비와 강족을 제거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그러나, 부견은 끝내 그의 유언을 따르지 않는다.왕맹 사후의 부견은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지고 광...

오호(五胡)의 쟁패 25 - 화북 통일

370년, 연이 멸망하면서 부견의 진(秦)은 화북 최강의 세력이 되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연의 멸망과 함께 진으로 편입된 땅은 6주(州)의 군(郡) 157개, 호구수가 246만, 인구로 따지면 999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진서> 지리지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해당 지역(유, 기, 병, 청, 사, 예주)의 호구수는 ...

오호(五胡)의 쟁패 24 - 하늘이 불타던 날

호뢰관 서쪽 땅 내놓으라능.엄친아 부견이 빚을 청구하자, 모용평과 모용위에게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달랜다고 그대로 줄 수도 없는 노릇. 결론은 어떻게든 무마시켜야 한다. 그러나 모용평이 한 대답은 세련되지도 못했고 현실적이지도 않았다. 물론 아무리 세련되고 현실적이라도 부견은 받아들이지 않았겠지만.지난번에 땅을 잘라준다는 것은 사신이 잘못 ...

오호(五胡)의 쟁패 21 - 一人之下萬人之上

360년대의 중국은 옛부터 천하 쟁란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라고 하는 정족지세(鼎足之勢)가 구축되어 있었다. <삼국지연의>의 영향으로 솥발처럼 늘어선 천하의 모습을 화북, 강동, 촉으로 아는 경우가 많지만, 실상 천하삼분지계의 원조는 항우와 유방이 서로 싸우던 시기에 고안된 것이다. 관중, 관동, 하남(강남)으로 분열된 것이 그 원래 형태...

오호(五胡)의 쟁패 19 - 엄친아, 등극하다.

부견(苻堅)은 338년에 저족의 수장 포홍의 막내아들 부웅(苻雄)과 구씨(苟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중국에서 위대한 이의 출생이 항상 그러하듯 꿈에서 신령님 하나 쯤 나타나 주시고, 12개월 씩이나 뱃속에서 어머니 자양분을 빨아 먹으며 찬란한 광채와 함께 태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중국의 모 인물을 연상케 하는 체형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팔의 ...

오호(五胡)의 쟁패 17 - 관중의 패자

    강통의 <사융론(徙戎論)>에서 말한 것처럼, 서진 시기의 화북, 특히 관중 지역은 인구의 절반이 융적(戎狄)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이민족과 한족이 뒤섞여 살고 있던 곳이었다. 대표적인 이민족이라면 역시 저족과 강족이지만, 그 외에도 선비족, 흉노족 등등 많은 이민족들이 말 그대로 잡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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