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1/06 23:27

광개토왕릉비에 나타난 수묘인 역사

1. 머리말

광개토왕릉비는 414년(장수왕 3년)에 장수왕이 광개토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19세기 말에 발견된 이래 광개토왕릉비는 고구려 역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1차 사료로써 관심과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특히 고구려의 독자적인 천하관과 광개토왕의 정복활동, 고구려 왕의 세계(世系) 등에 대해 잘 나타나있어 고구려 역사를 밝히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서문 격으로 제1면 1행에서부터 1면 6행에 걸쳐 추모왕(鄒牟王:주몽)의 건국신화를 비롯하여 대주류왕(大朱留王:대무신왕)으로부터 광개토왕에 이르는 대왕의 세계(世系)와 약력 및 비의 건립경위가 기술되어 있다. 두 번째 부분은 비문의 핵심을 이루는 부분으로 제1면 7행에서부터 3면 8행에 걸쳐서 대왕의 정복활동과 토경순수(土境巡狩) 기사가 연대순으로 기술되어 있다. 세 번째 부분은 제3면 8행에서부터 4면 9행에 걸쳐서 능을 지키는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의 명단과 수묘지침 및 수묘인 관리규정이 기술되어 있다.

기존의 광개토왕릉비에 대한 연구는 주로 두 번째 부분의 정복활동에 치중되어 있다. 특히 신묘년 기사의 내용을 두고 한·일 양국의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첫 번째 부분의 세계 부분이나 건국신화 등에 대한 연구도 계속 이루어지고 있으며 세 번째 부분 역시 고구려의 민 편제 방식에 대해 알려주는 자료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비문의 세 번째 부분에 나타난 고구려 수묘제에 대한 내용은 고구려의 민 편제에 대해서 알려주는 좋은 자료이다. 비문에 나타난 국연(國烟)과 간연(看烟)의 성격, 수묘제의 구성 등에 대해서 알아본다.


2. 비문의 내용


비문의 원문 및 해석

비문의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수묘인의 출신지와 구성을 열거한 첫 번째 부분과 수묘제 개혁을 지시한 광개토왕의 교언 및 시행에 대한 내용을 서술한 두 번째 부분이다.

첫 번째 부분에는 총 330가의 수묘인을 출신지별로 모두 나열하고 있다. 매구여에서 남소성에 이르는 지역에서 차출된 110가의 민은 구민(舊民)으로 칭해지며, 사수성에서 세성까지의 지역에서 차출된 220가의 민은 ‘새로 온 한(韓), 예(穢)[이후 신래한예(新來韓穢]’로 나타난다. 구민과 신래한예 각각은 국연 1가 대 간연 10가의 비율로 구성되어 있다.

두 번째 부분에는 광개토왕이 교언한 내용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서술하고 세부 시행 내용을 부기하고 있다. 각각 살펴보면 먼저 수묘제를 다시 정비할 것을 명한 교언이 나타나며, 그에 따라 신래한예와 구민 330가로 수묘호를 꾸린 시행 내용을 부기하였다. 다음으로 수묘제 정비에 대한 내용을 정리한 비를 세우도록 명한 교언이 나타나며, 마지막으로 수묘인을 사고파는 것을 금지하는 교언을 서술하고 있다.


3. 광개토왕의 교언과 수묘제의 정비

광개토왕은 교언을 통해서 수묘제가 문란해졌음을 걱정하고 이를 개혁할 것을 말하고 있다. 광개토왕의 교언과 그 시행 내역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기존 수묘제의 문제는 다음과 같다.

먼저 광개토왕은 구민들이 몰락하게 된 것을 지적한다. 구민들은 이전 왕릉의 수묘를 맡고 있는 기존 수묘인들로 보이며1), 이들이 몰락하였음을 걱정하고 있다. 또한 수묘인들의 입역(立役)에 대한 규정이 명시되어있지 않아 수묘인들이 섞이게 되었음을 지적하고, 마지막으로 수묘인들 간에 서로 매매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구민이나 신래한예 모두 그 출신지가 명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각각의 지역에서 국강상(國罡上)과 같은 묘역(墓域)으로 사민(徙民)되어 온 존재로 볼 수 있다. 고향을 떠나 묘역으로 이주하여 수묘역(守墓役)을 지는 구민과 신래한예는 수묘역에 대한 반대급부로 일정한 토지를 지급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고정적인 역(役)이 없는 일반민과 달리 고정적인 역을 지고 있는 수묘인들이 사회경제적으로 피폐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기존 왕릉의 수묘역을 지고 있던 구민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로 몰락하였을 것이다. 광개토왕은 이점을 걱정하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광개토왕 자신의 수묘인은 자신이 직접 약취(略取)해 온 신래한예로 충당할 것을 명하고 있다. 하지만 장수왕은 신래한예가 수묘의 법칙을 알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여 신래한예의 절반에 해당하는 구민을 추가로 뽑아 수묘인을 구성하였다.

이러한 수묘인의 구성에 대해서 비문에 명시된 구민과 신래한예 330가가 어떠한 형태로 입역하는지를 두고 많은 이론이 있다. 330가가 하나의 묘역을 관리하기에는 과도하게 많은 것을 이유로 광개토왕 이전의 모든 묘역을 관리하는 것이라는 주장2)이 있으며, 국연과 간연의 성격을 분석하여 국연 30가가 역을 지고 간연 300가는 국연의 활동을 경제적으로 보장하였다는 주장3), 비문에 나타난 祖王先王과 祖先王 구절을 분석하여 광개토왕의 선왕(先王)인 고국양왕과 조왕(祖王)인 고국원왕으로 상정, 330가가 이들 3부자의 묘역만을 관리하였다는 주장4),  국연이 직접 역을 지고 간연은 예비 수묘인이라는 주장5) 등 다양한 주장이 나타나고 있다.

한편, 광개토왕은 교언을 통해 수묘인을 매매하는 것에 대해서 금지하고 어기는 자를 처벌하는 조항을 신설하게 하였다. 이는 수묘인의 매매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매매가 이루어질 수 있는 바탕에는 수묘인의 성격이 일반 양민과 다름을 의미한다.

수묘인의 사회적 성격을 노예로 보는 입장도 있으나 그 구성이 가(家)로 이루어진 점이나, 매매 자체가 원래부터 불법이었던 점 등으로 볼 때 노예라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6) 그러나 공공연한 매매가 이루어졌던 점으로 볼 때 번상제(番上制)로 입역하는 양인(良人)으로 보기도 힘들 것 같다. 그러므로 수묘인은 묘역 근처로 강제로 사민되고 촌락을 이루어 수묘역을 담당하였던 전문적 직역인(職役人)집단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7)


4. 수묘인의 구성과 국연·간연

수묘인은 크게 구민과 신래한예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구분은 비문에 명시된 출신지와 광개토왕의 교언으로 미루어 볼 때 광개토왕 이전의 피지배민과 광개토왕 이후의 피지배민으로 볼 수 있다. 광개토왕은 그 교언에서 직접 ‘내가 몸소 다니며 약취(略取)해 온’ 신래한예로 수묘인을 구성할 것을 명하였다. 신래한예 수묘인의 출신지를 분석해보면 총 35개의 지역 가운데 최소 23개, 최대 26개에 달하는 지역이 영락 6년 조 원정에서 정복한 지역과 일치하고 있다. 또한 확인되지 않은 일부 지명도 영락 6년 조의 결락 부분과 대응을 감안할 때, ○○城으로 표현된 지역은 모두 영락 6년에 정복한 지역에 기본적으로 포함된다고 이해된다.8) 결국 신래한예는 기본적으로 영락 6년, 백제와의 전쟁을 통해 획득한 정복지에서 차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구민은 광개토왕 이전 대에 차출되어 수묘역에 종사하고 있던 기존의 수묘인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구민의 차출은 기본적으로 5부족과는 별도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고구려는 5부민, 구민, 신래한예의 순으로 주민의 구성이 확대되어 갔던 것이다.9) 구민과 신래한예는 원칙적으로 차이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구민 역시 고구려가 영토를 확장하는 가운데 어느 시점에서 정복된 존재이며, 신래한예는 광개토왕이 직접 정복하여 새롭게 고구려 사회에 편입된 존재인 것이다. 즉, 지배층인 5부족과 피정복된 여러 민으로 구성된 것이 고구려의 기본적인 통치조직인 것이다.

수묘인은 다시 국연과 간연으로 나뉜다. 국연과 간연은 구민에 10가, 100가, 신래한예에 20가, 200가로 도합 330가이다. 국연과 간연의 비율이 정확하게 1:10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국연과 간연을 어떠한 존재로 해석하는지에 대한 주장들은 매우 다양하다.

국연을 피정복민 가운데 호민(豪民)에 해당하는 지배층 혹은 부유층으로, 간연은 하호(下戶)에 해당하는 피지배층 혹은 평민층으로 보는 주장10)이 다수를 이루며, 국연은 직접적으로 역을 지는 존재이고 간연은 경제적으로 국연을 뒷받침했다는 주장11), 국연이 직접 역을 지고 간연은 결원을 대비한 인원이라는 주장12) 등이 있다. 또한 국연·간연을 호민·하호층으로 보는 주장 역시 광개토왕릉비 건립 당시에 양 계층이 모두 차출되었다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국연은 정복될 당시부터 국도로 사민되어 온 피정복지의 지배계층으로 보는 입장으로 양분된다.


5. 맺음말

광개토왕릉비에 나타난 수묘인연호조에 대한 의견은 아직까지도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은 채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고구려의 하부 구조를 알려주는 사료가 부족한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신라의 경우 풍부하게 남겨진 기록과 더불어 금석문, 장적, 고분 등의 다양한 1차 사료가 남아있어 민의 편제와 구성을 고구려에 비해 상세하게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는 신라에 비해 부족한 사료로 인해 사회의 구조를 알기 어렵다.

그러한 점에서 광개토왕릉비의 수묘인연호조는 매우 중요한 1차 사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비록 수묘인연호조에 대한 명확한 해석이 합의되지 못하고 있지만, 앞으로 신라 및 중국, 일본 등지 자료와의 비교, 다양한 유물·유적 분석 등의 방법을 동원하여 연구를 거듭한다면 언젠가는 고구려 사회의 모습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주석 및 참고문헌>


 

1) 김현숙 <廣開土王陵碑를 통해 본 高句麗守墓人의 社會的 性格> 한국사연구, 1989, 5쪽.

2) 김현숙 <廣開土王陵碑를 통해 본 高句麗守墓人의 社會的 性格> 한국사연구, 1989

3) 조법종 <廣開土王陵碑文에 나타난 守墓制硏究 - 守墓人의 編制와 性格을 중심으로-> 한국고대사연구 8. 1995

4) 이도학 <광개토왕릉비문의 國烟과 看烟의 性格에 대한 再檢討 - 被征服民 施策과 관련하여-> 한국고대사연구 28. 2002

5) 김락기 <高句麗 守墓人의 구분과 立役方式 - 廣開土王陵碑 守墓人烟戶條를 중심으로-> 한국고대사연구 41. 2006

6) 김현숙 <廣開土王陵碑를 통해 본 高句麗守墓人의 社會的 性格> 한국사연구, 1989, 24~25쪽

7) 김현숙 <廣開土王陵碑를 통해 본 高句麗守墓人의 社會的 性格> 한국사연구, 1989, 33~34쪽

8) 조법종 <廣開土王陵碑文에 나타난 守墓制硏究 - 守墓人의 編制와 性格을 중심으로-> 한국고대사연구 8. 1995, 228~231쪽

9) 이도학 <광개토왕릉비문의 國烟과 看烟의 性格에 대한 再檢討 - 被征服民 施策과 관련하여-> 한국고대사연구 28. 2002, 102쪽

10) 김현숙 <廣開土王陵碑를 통해 본 高句麗守墓人의 社會的 性格> 한국사연구, 1989

   이도학 <광개토왕릉비문의 國烟과 看烟의 性格에 대한 再檢討 - 被征服民 施策과 관련하여-> 한국고대사연구 28. 2002

11) 조법종 <廣開土王陵碑文에 나타난 守墓制硏究 - 守墓人의 編制와 性格을 중심으로-> 한국고대사연구 8. 1995

12) 김락기 <高句麗 守墓人의 구분과 立役方式 - 廣開土王陵碑 守墓人烟戶條를 중심으로-> 한국고대사연구 41. 2006

어제 3시간만에 날림으로 완성한 레포트다. 회사 다니면서 레포트를 쓰려니 정말 힘들군... 아무튼 한시름 놓았군.

ps. 주말에는 졸업 논문을 써야 한다. 왜 졸업 논문은 자필로 써서 내야 하는 거지??? 팔좀 아프겠군.


덧글

  • 한단인 2007/11/07 01:39 # 답글

    헉..3시간만에 쓸만한 레포트 같지는 않습니다만..

    그나저나 졸업논문을 자필로 쓰라는 건 아마도 인터넷에서 긁을 생각을 말라는 의도 같습니다만.. 너무 무식한 방법 같네요. 어차피 인터넷에서 긁어 논문을 구성한 뒤에 그냥 베껴서 자필로 쓰면 되는데 말에요. 힘드시겠어요.

    근데 언제 제출이세요? 저는 이번주 까지 제출인데 아직 챕터 하나도 제대로 완성을 못시켜서 돌아버리겠습니다. 8월부터 조금씩 준비하고 있었는데 얼마나 대단한 글이 나오려고 이 생쑈를 하는지 모르겠어요. 일이 이 정도로 커질 줄이야.. 글을 쓰면 쓸수록 말이 꼬여서 또 무언가를 찾아보고 보완하고, 보완하는 중에.. 얘기는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저 어떻해야 할까요?
  • 야스페르츠 2007/11/07 07:57 # 답글

    한단인님//하하... 쓰는데만 3시간 걸렸다는 의미죠. 자료 준비 같은 건 벌써 두달전부터 했던거니까요...

    저도 논문 제출이 다음주 월요일이에요..... 그래서 지금 골치가 좀 아프죠... 그나마 논문은 완성되 있으니까 다행이지만.ㅋ

    아무튼 힘내세요~!!
  • 상규 2007/11/08 08:59 # 삭제 답글

    나도 졸업논문쓸때 삼일을 집에 틀어박혀서 배꼈다는...^^
    고생하시게~~~
  • 야스페르츠 2007/11/09 00:40 # 답글

    상규형//헉... 난 반나절 밖에 시간 안잡아놨는데... 클났다...ㅡㅡ;
  • 김수철 2008/04/20 15:07 # 삭제 답글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초도리 섬 금구도 광개토왕릉 서기414년 9월29일 이장했음 관심가져 주세요
    이곳 巖下老佛만 성하니 일에추진에 어렵습니다 s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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