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0/15 00:49

선종 9산선문(九山禪門) 역사

오늘 하루 종일 만들었던 발표문이다. 한국사상사라는 강의에서 나말려초의 사상 중 선종 9산선문에 대한 발표를 하게 되어 하루 종일토록 짜집기한 발표문.

 

1. 9산선문의 성립

9세기 전반 교종사찰에 의탁하여 터를 닦은 선종은 9세기 중엽부터 지방을 중심으로 여러 산문을 세워 독립하기 시작한다. 특히 당 무종(武宗) 회창(會昌) 연간(841~46년)에 일어난 폐불 사건1)으로 사부첩(祠部牒)이 없는 외국승들은 모두 본국으로 쫓겨났으며, 이에 따라 유학승들이 대거 귀국하게 되었다.

최치원의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에 나타난 귀환승은 다음과 같다.

절 ․ 이름

위창문고몽암주

동국대 사산비명

규장각 문창집

비고(추정)

북산의(北山義)

 

 

 

도의(道義)

남악척(南岳陟)

 

 

 

홍척(洪陟)

태안철(太安徹)

혜철(惠徹)

 

혜철(慧徹)

혜목육(慧目育)

 

 

 

현욱(玄昱)

지력문(智力聞)

 

 

 

 

쌍계소(雙溪炤)

혜소(惠炤)

 

혜소(慧昭)

신흥언(神興彦)

충언(忠彦)

혜언(惠彦)

충언(忠彦)

용암체(湧岩體)

각체(覺體)

 

진구휴(珍丘休)

각휴(覺休)

쌍봉운(雙峯雲)

혜운(慧雲)

각운(覺雲)

혜운(惠雲)

도윤(道允)

고산일(孤山日)

품일(品日)

범일(梵日)

성주염(聖住染)

보리종(菩提宗)

무염(無染)

표1 「지증선사비」에 나타난 귀환승2)

 

대체로 신행에 의해 본격적으로 수용의 막을 올린 선종은 이들 중 알려지지 않은 몇몇이 그 성립의 여건을 조성하고, 알려진 일부는 성립의 기초를 확실하게 다졌다고 할 수 있다.3)


2. 9산선문 계승의 실제

나말려초 9산선문의 사자상승(師資相承)의 실제를 통해 각 산문의 정확한 계보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산문의 계보 정리 순서는 초대 조사의 국내 활동시기를 기준으로 한다.)

산    문

위   치

개창 조사

법    맥

비    고

희양산문

(曦陽山門)

경북 문경군 희양산

봉암사(鳳巖寺)

지증도헌

(智證道憲

:827~882)

신행(神行:704~779)→준범(遵範)→혜은(慧隱)→도헌→양부(楊孚)→긍양(兢讓:878~956)

긍양 이전은 북종선

935년 긍양이 봉암사를 중창한 후 남종선 계통으로 변함.

가지산문

(迦智山門)

전남 장흥군 가지산

보림사(寶林寺)

보조체징

(普照體澄

:804~880)

도의(道義:?~?,821귀국)염거(廉居)→체징(體澄)

도의는 체징이 산문을 개창함에 따라 종조(宗祖)로 추증됨.

실상산문

(實相山門)

전북 남원시 지실사

현 실상사(實相寺)

홍척(洪陟:?~?,

826귀국)

홍척수철(秀澈)

산문의 개창 시기는 가장 빠름.

봉림산문

(鳳林山門)

경남 창원시 봉림동

봉림사(鳳林寺)

심희(審希

:855~923)

현욱(玄昱:788~869)

→이관(利觀)

  심희→찬유(粲幽)

 

동리산문

(桐裏山門)

전남 곡성군 동리산

태안사(泰安寺)

혜철(慧[惠]徹

:785~861)

혜철도승△△(道乘)

      상방여(上方,如)

광자윤다(廣慈允多)

도선(導詵)이 배출된 산문.

성주산문

(聖住山門)

충남 보령시

성주사(聖住寺)

낭혜무염

(郞慧無染

:801~888)

무염→원랑대통

     △△심광→법경현휘

      자인선사

      대경려엄

 

사자산문

(獅子山門)

강원도 영월군 사자산

흥녕선원(興寧禪院)

현 법흥사(法興寺)

절중(折中

:826~900)

도윤(道允:798~868)

절중

 

사굴산문

(闍崛山門)

강원도 강릉시

굴산사(掘山寺)

범일(梵日

:810~889)

범일→개청(開淸)

      행적(行寂)

 

수미산문

(須彌山門)

황해도 해주시

광조사(廣照寺)

이엄(利嚴

:866~932)

이엄

 

표2 선종 9산선문4)

그림1 9산문의 위치 지도5)

 

한편, 9산선문의 계보에 속하지 않았던 선사들에 대한 금석문도 적지 않게 보인다. 이에 따라 9산선문이라는 개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다른 어휘로 대치하여 사용하기도 한다.6) 9산선문에 속하지 않은 대표적인 선사로는 해룡왕사(海龍王寺)의 보요선사(普耀禪師), 서운사(瑞雲寺)의 순지(順之:?~?, 870년 귀국), 쌍계사(雙溪寺)의 혜소(慧昭:774~850)등이 있다.

이러한 9산선문은 고려 중기 이래 현재까지 사용되어온 일종의 공인된 개념어이다. 9산선문을 결정지은 조건을 추측해보면, 첫째, 후삼국 통일 이전에 국사와 왕사의 지위에 오르거나 이에 비견될 예우를 받은 이들을 개창조로 삼고, 둘째, 그 후예들 가운데 뛰어난 승려들이 계속 배출된 곳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당대의 선종을 총망라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을 대표한 것은 9산선문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7)

3. 9산선문과 선종의 사회적 기반

9산 선문 선사들은 대체적으로 왕실과 거리를 둔 긴장관계를 유지했다. 산문이 일단 정착되거나 중인들의 추앙을 받은 뒤에는 왕실의 초청이 있었지만, 선사들은 초청을 대부분 거부했다. 이러한 왕실의 산문 접근은 맹 집요하다고 할 정도였는데, 이는 왕실의 대산문정책이 거의 불가항력이었음을 반증한다. 다시 말해 다양한 신분계층이 산문을 지지하는 것을 의식한 행위로 해석되는 것이다.

더욱 주목할 것은 거대규모의 사원 조성이 지역사회 신도들의 자발적이고 공개적인 후원으로 이루어진 점이다. 왕실은 오히려 사원이 조성되고 난 후에 이를 인정하고 있다. 이는 신라 하대, 지방사회의 역동성과 민중들의 힘의 성장을 반영한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민중 속에서 사상, 경제, 기술, 산업, 예술이 고루 성장했던 것을 뜻하며, 중앙권력이 하대의 정쟁(政爭)을 거치면서 사실상 경주 일대를 벗어나지 못한 힘의 약세를 노출시킨 것이기도 하다.

이상의 사실에서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듯이, 이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성장한 지방민들의 사회경제적 토대 위에서 9산선문의 성립이 가능했던 것이며, 비록 특정한 신분집단이나 개인적인 지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민 이외의 일정한 세력 일변도의 지지 속에서 그 기반을 세웠던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8)

한편, 나말려초의 격동하는 사회변화에 따라 산문의 사회적 관계도 변화를 맞게 되었다. 이 시기(886~ 900년)에는 신라 멸망의 주요한 계기가 된 농민봉기가 대규모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사회변화에 따라 농민전쟁 이전에는 다양한 민의 지지위에 다양한 신분집단과 균형잡힌 관계를 유지했던 선사들이 886년 이후에는 농민군의 약탈과 위협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름

(산문)

조우시기

조우 내용

대처

낭공행적

(사굴)

889년 이후,

900~906

오대산 진전사에서 곤경을 당함.

효공왕의 초청으로 경주에 들어감.

낭원개청

(사굴)

889년 이후

오대산 진전사에서 여러 번 초적떼의 습격을 받음.

민규 알찬, 왕순식 태광이 후원한 뒤로 습격이 없음.

진공충담

(봉림)

899년 이후

우리나라를 위태롭게 여기고 머물려는 뜻을 버림.

중국으로 유학함.

광자윤다

(동리)

897년 직전

산적들이 옷과 물건을 노략질하고 스님을 윽박지르다 물러남.

참을 인(忍)자를 새기며 계속 머무름.

진경심희

(봉림)

897

광주 송계선원에서 전란을 피함.

명주를 거쳐 김해에 정착(김율희와 아들 김인광이 후원)

법경현휘

(성주)

898~906

머물던 곳에서 무주로 난을 피해 남해의 절에 머물다, 겁탈과 노략질하며 떠돌던 도적 무리의 습격을 받음.

도적의 우두머리를 교화하여 제자로 거둠.

대경려엄

(성주)

909

월악에서 전쟁의 포화가 느껴져 소백산으로 감.

기주 제군지사 강훤 상국이 후원함.

선각형미

(가지)

910년 전후

무위사에 머물다 난세를 의식하던 차에 왕건의 대면 요청을 받음.

철원으로 옮김.

진철리엄

(수미)

915

김해가 도적의 소굴에 붙어 있어 몸을 돌보기에 편하게 여기지 않음.

영동 남쪽 영각산에 머무름.

진공충담

(봉림)

918년 직후

전쟁의 기운이 드러나 수심에 잠겨 김해를 떠남.

왕건의 왕사가 됨.

정진긍양

(희양)

924년 이후

들도적과 산오랑캐의 분쟁을 피하려 함.

은거(실제로는 견훤이 후원)

표2 선사들이 농민봉기 이후의 혼란에 대처하는 상황9)

이때부터 호족과 선사들의 밀착관계가 형성되었으며, 후삼국쟁패가 치열한 지역에서는 세력권의 변화에 따라 연고지의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거나 새로운 변화를 꾀하게 되었다. 즉, 선종의 관념성이 지닌 현실인식의 한계가 농민전쟁 이후 농민군에게 물리적 압박을 받으면서 점차 지배계급에 의탁하는 변화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대표적으로 호족과 밀착된 산문으로는 봉림산문과 사굴산문이 있다. 봉림산문의 심희는 김해의 가야계 김씨세력인 김율희(金律熙)와 김인광(金仁匡) 부자의 후원으로 봉림사를 열고 신라 경명왕의 초청에 응하는데, 이 사실로 미루어 특정지역을 중심으로 후삼국 세력과 각기 연결되는, 후삼국 경영체제의 일환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 심희 제자의 분포 모습도 친신라지역에 펼쳐져 있음이 눈에 띈다.

한편 사굴산문의 행적은 김해 지방의 가야계 김씨 세력인 소충자(蘇忠子)와 소율희(蘇律熙) 형제의 후원을 받고, 신덕왕의 요청으로 남산 실제사에 머문다. 또한 개청은 알찬(閼飡) 민규(閔規)와 왕순식(王順式)의 후원을 받고, 뒤이어 왕건과 인연을 맺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9산선문은 대부분 그들을 후원하는 유력한 호족의 근거지와 가까운 곳에 자리 잡았다. 선종은 진골 중심의 중앙집권적 지배체제에 반발하여 일어난 호족들에게 독립할 수 있는 사상적 근거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교종은 경전(經典)이라는 기성의 권위를 강조함으로써 현실에서의 골품제도가 가지는 권위를 정당화시켜 주었다. 거기에 반해 선종은 경전이라는 기성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스스로 깨달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호족들이 골품제도라는 기존의 권위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성장하고 자립할 수 있다는 현실적 근거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 주석 및 참고문헌

 

1) 중국 당(唐)나라 무종(武宗)의 회창 연간(會昌年間)에 있었던 불교 탄압. 중국 역사상 3회째의 대규모 폐불이었다. 842년 이후 승니의 환속이 적극 권장되었으며, 특히 845년에는 대탄압 명령이 내려져 사찰 4,600개소, 작은 절 4만여 개소가 폐쇄되고, 승니 환속 26만여 명, 사전(寺田) 몰수 수십만 경(頃), 그리고 사찰 노비의 해방이 15만 명에 이르렀다.

2) 허흥식, 「선종의 계승과 소속사원」,<고려불교사연구>, 일조각, 1986. 234쪽의 표

3) 추만호, 「9산선문의 성립」, <나말려초 선종사상사 연구>, 이론과실천, 1992, 60~61쪽.

4) 추만호, 「9산선문의 성립」, 위의 책, 62~98쪽에서 정리.

5) 두산백과사전 EnCyber & EnCyber.com, 선종9산 항목.

6) 허흥식, 「선종 9산파설의 비판」, 위의 책, 160~176쪽.

7) 국사편찬위원회, 「신라 하대 사상계의 동향」, <한국사>

8) 추만호, 「9산선문의 성립」, 위의 책, 159쪽.

9) 추만호, 「9산선문의 성립」, 위의 책, 167쪽. 발췌 편집.



덧글

  • 한단인 2007/10/15 01:17 # 답글

    나말여초 시기나 불교는 문외한이라서 잘 몰라 질문드립니다.

    우선.. 민중세력의 전반적인 성장과 선종 지지가 9산선문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본문에 나온 것 같은데, 이 경우는 신라 왕실 자체의 왕위 쟁탈전에 따른 지방통제력 약화도 원인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성장이라는 표현이 근대적 진보와 의미가 맞물리는 듯한 느낌도 드는데(특히 민중의 성장이라는 것에서 더..) 그래서인지 썩 어감이 적확하진 않은 느낌입니다.

    두번째로 선종의 관념적 인식이 민중과는 잘 안맞아 민중 봉기 때 봉변을 당하는 결과로 나타났다고 하셨는데 왕실의 교종 단체보다는 그래도 민중에 가까울 텐데도 봉변을 당하는 이유가 이전부터 선종이 민중보다는 호족과 밀착상태였었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마치 서양의 종교 개혁 당시 초반에 민중 지지적이던 루터가 민중들의 봉기 과정에서 뭐가 잘 안맞자 바로 영주에 대한 지지로 돌아선 예도 있고 해서.. 추가적으로 그럼 이 당시 정토종 계열의 민중 친화적 종파가 민란의 사상적 배경에 영향을 미친 것인지 아닌지가 궁금합니다.

    셋째, ...질문할 거리가 있었는데 위의 질문 2개를 쓰다보니 잊어먹었습니다. 제가 뭘 질문하려고 했던 걸까요..? 가 세번째..라고 하면 절 때리실 건가요? (포로리 버전으로 치면 '때릴꺼야? 때릴꺼야?' 정도 되겠군요. 퍽퍽!)
  • 야스페르츠 2007/10/15 16:11 # 답글

    한단인 님// 저도 불교 쪽에는 문외한인지라 발표 준비를 하면서 애로사항이 많았답니다....
    그래도 어설프게나마 제 추측을 섞어서 대답을 드리자면,

    첫번째 부분은 제 발표문 상에도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중앙의 약화와 지방의 강화 중 어느쪽이 더 비중이 큰가는 함부로 단정지을 수 없는 문제겠지요. 게다가 저 스스로도 발표하면서 느꼈던 의문이지만, 초대 조사들의 경우는 민중과의 결합을 통해 명성을 얻는 모습을 보이지만, 정작 '산문'의 개창 시기에는 민중 보다는 호족과의 결탁이 더 뚜렷하게 보이는지라... 애매한 부분입니다.

    두번째 부분도 같은 맥락에서 애매하게 생각됩니다. 제가 참고한 추만호의 책에는 민란의 발생도 '민중의 힘'이 성장하였던 배경 하에서 일어났던 것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만, 민란이 힘의 성장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조금 억지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민란의 사상적 배경까지 추적하려면 아예 논문을 하나 쓰는게 낫겠네요....
    아무튼 저도 선종이 민 보다는 호족과 더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셋째는.... 스스로 꿀밤을 드십시오. (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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