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8/29 21:43

김부식과 <삼국사기> 역사

작년 한국사학사(韓國史學史) 강의에서 발표했던 발표문이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궁금증과 연구가 일전에 올린 바 있는 졸업 논문으로 발전했다. 물론 아직 심사는 받지 않았지만...(사실 학부 졸업 논문을 심사해봤자 뻔하니 상관없다)

그냥 자료삼아 올려본다.

김부식과 <삼국사기>


(1) 편찬 배경 및 과정

   1) 시대적 배경

고려 왕조가 건국된 후 200여 년이 지나자 국내외적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국내 정치에 있어서는 왕권이 신권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등으로 왕권은 실추되고 국토가 황폐해졌다. 전근대 시대에 있어서 왕실의 위협은 국가의 존립과도 밀접하게 관련된다. 이와 같은 시대를 경험하고 현실을 인식하고 있던 김부식은 삼국의 역사를 편찬함에 있어 내분을 극도로 경계하고 왕권의 강화를 역설하였다.

예종․인종 대에는 대간(臺諫)의 정치적 비판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정치 풍토 속에서 다수의 대간 출신자들이 편찬에 참여한 『삼국사기』는 그 구성과 사론을 통해 풍부한 비판 의식을 표출하였다.1)
한편, 대외적으로는 여진족의 금이 일어나 거란을 멸하고 송을 공격하여 중국 북부를 차지하였다. 이에 따라 고려는 새로운 외교관계를 설정해야 했는데, 당시 실권자였던 이자겸은 금과의 사대관계를 강행함으로써 평화적인 관계수립을 이루어냈다. 반면 묘청은 고구려 계승의식을 강렬하게 표출하여, 현실을 무시한 대외팽창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직접 체험한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대외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2) 김부식의 생애

김부식은 문종 29년(1075)에 태어나 고려 문벌귀족사회의 절정기를 살고 의종 5년(1151)에 생을 마쳤다. 그의 가문은 신라 왕족인 경주 김씨로 증조부 김위영이 태조 때 활약한 이래 그의 형제들에 이르기까지 고려 정계에서 많은 활약을 펼쳤다.

예부시랑좌간의대부(禮部侍郞左 諫議大夫) 김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김부식은 숙종 때 등과한 후 대간계통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중앙 정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또한 『예종실록』편찬에 참여하여 『삼국사기』를 편찬할 수 있는 중요한 경험을 쌓았다. 그는 유교적 왕도 정치를 추구하여 당시의 실권자였던 이자겸의 전횡에 유교적 법도를 들어 저항하였으며, 도참사상에 근거한 서경천도운동에 반대하였다. 1135년 묘청의 난이 일어나자 총사령관이 되어 이를 진압하였으며, 서경파를 축출하고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인종 18년 그의 정적이었던 윤언이가 정계에 복귀하자 김부식은 인종 20년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2)

『삼국사기』가 편찬되기 시작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김부식이 관직에서 물러난 뒤인 인종 23년(1145)에 편찬이 완료되었다. 이후 김부식은 『인종실록』의 편찬에도 참여하였고 의종 5년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3) 편찬 목적

『삼국사기』의 편찬 목적 및 동기가 나타나있는 자료는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여 인종에게 바치면서 올린 글인 「進三國史記表」3)를 들 수 있다. 이 글에서 김부식은 두 가지 편찬 동기를 들었는데, 첫째는 당시 사대부 관료들이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을 개선하기 위함, 둘째는 고기(古記)의 문장이 다듬어지지 않고 내용이 소략하여 이를 보충하기 위함이다.

김부식이 직접 밝힌 편찬 목적 이외에 다른 동기를 추측해 볼 수 있다. 유학자인 김부식은 유교적 왕도 정치를 구현하고 실추된 왕권의 강화를 위해 편찬하였을 것이다. 이에 더 나아가 『삼국사기』가 불교 및 전통적 문화를 부정하고 유교사관을 정립하기 위하여 편찬되었다는 주장도 있다.4) 그러나 김부식이 유교의 성장을 위해 노력한 것은 사실이나 불교를 배제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형이 승려로 출가했던 사실이나, ‘관란사(觀瀾寺)’라는 사찰을 지었다는 점5)이 이를 입증한다. 또한 그가 전통문화를 부정하였는지에 대해서도 재고할 필요가 있다. 그는 전통문화를 유교적 관점에서 비판하려 하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기왕의 사실을 삭제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라의 왕호(王號), 갈문왕(葛文王), 즉위년칭원법(卽位年稱元法) 등의 전통적 기사가 그대로 『삼국사기』에 실렸던 것이다.

또 다른 동기로 김부식이 신라 중심의 역사를 쓰기 위해 『삼국사기』를 편찬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고려 초에 고려를 고구려 계승 국가로 인식하였던 것을 신라 계승 국가로 바꾸려는 동기에서 편찬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삼국사기』가 편찬되기 직전에 벌어진 서경천도운동과 묘청의 난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 계승의식이 강하게 드러난 묘청의 난을 직접 진압한 김부식은 서경파의 고구려 계승의식을 억누르는 한편, 자신과 혈연적으로 연결6)된 신라를 우대하기 위하여 『삼국사기』를 편찬하였을 것으로 볼 수 있다.

   4) 편찬 과정

『삼국사기』의 편찬이 시작된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묘청의 난을 진압하고 난 직후 감수국사(監修國史)에 임명된 것으로 보아 이 시기부터 편찬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김부식이 관직에 있을 때가 아닌 은퇴한 후에 완성된 것으로 보아 은퇴 직후 왕명에 의해 찬술되기 시작하였다는 설도 있다. 편찬에 참여한 8인의 참고(參考)와 2인의 관구(管句) 중에는 간관(諫官) 출신의 인물들도 있어 정치적 비리와 비례(非禮)를 비판할 수 있었다.7) 실질적인 편찬의 주역은 이들 참고와 관구였을 것으로 보이나, 서문, 사료의 선택, 체재, 사론 등은 김부식이 직접 서술하거나 관여하였다고 생각된다.

『삼국사기』의 원 사료는 내용 안에서 주로 고기(古記)라 서술되는 것으로 이를 『구삼국사(舊三國史)』라고 추측한다. 『구삼국사』가 주요 내용의 핵심이 되었으며 부족한 것은 중국의 사서와 국내의 여러 저술들을 활용하였다. 『화랑세기(花郞世紀)』,『계림잡전(鷄林雜傳)』 등의 저술들이 편찬에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용한 것으로 밝힌 기록의 수가 매우 적고, 신라의 기록은 상세하나 사료를 구하기 어려운 고구려, 백제의 기록이 매우 빈약한 것으로 보아 자료의 수집이 여타 사서에 비해 미흡했던 것으로 판단된다.8)


(2) 체재와 성격

   1) 서술 체재

『삼국사기』는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모델로 쓰인 사서이다.9) 삼국‘사기(史記)’라는 책의 이름도 그러하며, 구성 체재 또한 『사기』에서 효시를 이룬 기전체(紀傳體)를 채택하였던 것으로 보아 사마천의 역사 서술을 모델로 한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기전체는 중국의 정사(正史)가 취하는 체재로 김부식은 『삼국사기』 역시 정사임을 강조하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는 삼국시대의 역사를 다룬 단대사(單代史)로 여겨진다. 『사기』등의 극히 일부를 제외한 중국의 정사는 모두 전대(前代)의 한 왕조만을 서술의 대상으로 한다. 김부식이 『사기』를 모델로 하였다고 하나, 역시 ‘정사’임을 중요시한 만큼 중국의 정사가 취하는 ‘단대사’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10)

『삼국사기』가 중국 정사체인 기전체를 취하였다고는 하나 그 체재는 중국과는 매우 다르다. 전체 50권 가운데 「본기(本紀)」 28권, 「연표(年表)」 3권, 「잡지(雜志)」 9권, 「열전(列傳)」 10권으로 구성되어 「본기」가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열전」 중심의 중국 정사와는 달리, 『삼국사기』의 「열전」은 10권, 69명에 불과하며, 그 중에도 김유신의 열전이 3권에 달한다. 이는 중국과는 다른 삼국의 특성을 나타내려 한 것이다.

   2) 내용 구성

    ⅰ) 본기(本紀)

『삼국사기』는 삼국의 역사를 「본기」로 서술하고 있다. 『고려사』가 역대 왕의 기록을「세가(世家)」로 취급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이는 김부식이 삼국과 고려를 중국의 역대 왕조와 대등한 국가로 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부식이 사대주의자(事大主義者)라는 비판과는 매우 다른 모습이다. 이러한 자주적 역사인식은 김부식이 살았던 시대가 송, 요, 고려의 삼국이 정치적으로 대등한 입장에서 정립하였던 때라는 것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본기」는 전 28권 중, 고구려에 10권, 백제에 6권, 신라에 12권(통일신라 7권)을 분배하여 삼국의 기사가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고 있다. 오히려 신라가 고구려, 백제에 비해 300여 년 더 지속되었다는 것을 볼 때, 권수만 놓고 본다면 신라사가 소홀하게 취급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동국사략(東國史略)』에서 신라를 정통으로 본 것과 달리 삼국 모두를 「본기」로 기록하여 동등한 국가로 다루었다. 그러나 실제 내용을 살펴보면 고구려, 백제에 비해 신라사가 훨씬 풍부하고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사기』 전체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분히 신라 중심적으로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는 가야 및 발해를 정통 왕조로 인정하지 않았다. 가야는 본기나 열전에 조금 모습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며, 발해는 아예 무시되었다. 이는 김부식이 삼국을 정통으로 보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였음을 강조하기 위해 고구려 계승 국가를 표방한 발해를 의도적으로 무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ⅱ) 잡지(雜志)

총 9권의 「잡지」는 「지리지(地理志)」에 4권을 할당하여 삼국의 강역을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가 요동(遼東)을 경영한 것을 명시하고, 압록강 이북의 성으로 당에 항복치 않았던 성 11개를 열거하고 있다. 이는 압록강 이북의 땅까지 국토로 포함시키는 강렬한 영토의식이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11)

또한 통일신라의 강역을 3분하여 각각을 삼국의 강역으로 인식하였다는 점을 볼 수 있다. 신라의 9주를 3개 주씩 삼국의 영역으로 파악하고, 이들 영역에 대한 원래의 지명을 기록할 때도 그렇게 파악하였다. 이 때문에 한산주(漢山州)와 삭주(朔州) 등은 원래 백제의 강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의 강역으로 인식되어 그 고지명(古地名)도 고구려의 지명으로 서술되었다. 이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중시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신라 중심적인 인식은 「잡지」 전체에 대해서 적용된다. 제사, 악, 색복, 거기, 기용, 옥사, 직관에 이르는 대부분의 기사가 신라의 기사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ⅲ) 열전(列傳)

중국의 정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약한 「열전」은 삼국에서 활약한 69명의 인물들에 대한 개인 전기이다. 전체 10권 가운데 김유신 열전이 3권으로 가장 방대하며, 다양한 인물 군상을 체계적으로 서술하는 중국의 열전과 달리 통일전쟁에서 활약한 무장들의 전기가 중심이 되고 있고, 순국한 인물을 중시하고 있다. 「열전」 역시 신라인이 압도적으로 많으며 특히 백제인은 3명에 불과할 정도로 소략하다.

    ⅳ) 사론(史論)

김부식은 「본기」와 「열전」에 걸쳐 자신의 의견을 서술하고 있다. 이를 통해 김부식의 역사인식을 살펴볼 수 있다. 총 31편의 사론은 본기에 23편, 열전에 8편이 실려 있다. 사론은 성격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포폄적(褒貶的) 사론과 역사학적 사론이다. 포폄적 사론은 사실의 잘잘못을 비판하는 것으로, 전체 분량의 2/3를 차지하며 이는 역사를 비판하는 안목이 뚜렷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역사학적 사론은 사실의 규명, 전거의 문제 등을 서술하고 있다. 이는 다시 『삼국사기』를 서술하는데 있어서 원칙을 제시하였거나 서술의 이유를 밝힌 사론, 역사의 원인과 결과를 밝히려 한 사론, 사료의 부족함을 밝힌 사론, 역사해석을 논한 사론으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사론이 나타난다는 사실은 『삼국사기』가 정치의 교훈서로서만이 아니라 역사서라는 인식이 크게 작용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12)


(3) 김부식의 역사인식

   1) 유교적 역사인식

김부식의 역사인식은 유교적인 사관에서 출발한다. 그가 쓴 사론의 비판 기준으로 인용된 서적은 유교 경전인 『춘추(春秋)』,『서경(書經)』,『맹자(孟子)』,『주역(周易)』 등이었다. 유교의 기본 이념인 인의와 예를 강조하고 있는 점, 그리고 김부식 자신이 유학자라는 점에서 그의 역사인식이 유교적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ⅰ) 합리주의적 역사 인식

김부식은 있을 수 없는 일을 기록한 신이적(神異的)인 사료를 믿지 않았다. 그로 인해 신빙성이 떨어지는 고대의 설화적인 사실이나, 불교 사상 등이 상당 부분 탈락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동일한 사료를 인용한 「동명왕편」,『삼국유사』와 비교해보면 탈락된 부분을 일부 살펴볼 수 있다.13) 이는 김부식이 유학자로서 믿을 수 없는 설화나 기록을 유교적 합리성에 입각하여 취사선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부식은 그의 사론을 통해,


이것은 더욱 궤괴(詭怪)하고 믿을 수 없으나, 세속에서 서로 전하여 그것을 사실로 여긴다.14)


그 말이 괴이(怪異)하여 믿을 수 없으나, 신(臣)이 역사를 편찬함에 있어 그 전한 바가 오래인지라 그 말을 깎아 없애지 못하였다.15)


라고 하였던 것처럼 유교적 합리성에 배치되는 것이라도 함부로 삭제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중국의 역사서에서 당태종이 고구려에 대패한 사실을 기록하지 않은 것을 비난하였다.16) 이것으로 볼 때 김부식은 유교적 합리성에 입각하여 믿을 수 없는 기록은 삭제한 사실이 있으나 그럼에도 많은 신이한 사실들을 남겨두었던 것이다. 믿을 수 없는 기록에 대해서는 적절한 기준을 두어 표현상의 불가신적(不可信的)인 정도를 누그러뜨려 현세적이고 합리적인 해석으로 개서(改書)하였다.17) 김부식이 이러한 개서까지 불사하면서 합리적인 역사 서술을 강조한 것은 그가 유학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도참사상에 빠져 묘청 등을 중용했던 당시 국왕 및 지배계층의 태도가 잘못이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김부식은 사료에서 문헌 자료를 중시하였다. 그는 새로이 인용한 자료에 대해서는 근거를 일일이 밝혔다. 또한 그는 문헌 자료를 비판하여 이용하였다. 중국 사료와 국내 사료가 상치될 경우 국내자료를 우선적으로 취하였고, 서로 다른 내용의 자료가 전할 때는 자신이 옳다고 판단되는 자료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이설(異說)을 주(註)로 붙여 처리하였다. 이것으로 볼 때 김부식은 문헌 실증과 사료 비판을 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18)

    ⅱ) 도덕주의적 역사 인식

김부식은 그의 사론을 통해 역사적 기록을 포폄(褒貶)하고 유교적 도덕을 강조하였다. 이는 『춘추』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미언대의(微言大義), 춘추필법(春秋筆法)이라는 개념으로 정리되어 동양 역사관의 한 전형을 형성하게 된다. 유교에서의 역사서술은 사실의 기록인 동시에 후세에 교훈을 주는 수훈적(垂訓的) 특성을 지닌다.

이러한 김부식의 도덕주의적 역사 인식은 나라의 흥망을 도덕과 연결시켜 설명하는 것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신라의 삼보(三寶)에 대해 논하며 선을 행하고 정치를 바로 하는 일 외에 나라의 보물이 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주장하였으며, 인민을 지나치게 수탈하거나 관리의 횡포로 백성이 불만을 갖게 되면 국가가 유지될 수 없다고 여러 사론에서 논하고 있다.19)

김부식은 이러한 역사 서술을 통해 도덕적 세계를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추구하였다. 그 도덕주의의 핵심은 도덕을 이룩하는 주체인 인간의 임무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임무를 위해 죄악을 처벌하는 군왕을 강조하고, 처벌뿐 아니라 ‘선한 권력’으로서 역할을 다하여 현명한 인재를 등용하고 올바른 정치를 펼 것을 주장한다.20)

한편 『삼국사기』는 하늘의 뜻과 인간의 활동이 연관을 가진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하늘의 뜻인 천재지변과 인간의 활동인 정치, 외교, 전쟁이 확실한 연관성을 가지고 기록된 것이다. 이것은 천재지변이 오행사상(五行思想)을 통해 군왕의 정치행위와 결부됨으로써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정치적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21) 하늘이 군왕의 정치를 판단하여 부도덕함을 꾸짖는 것으로 인식한 것이다.

    ⅲ) 영웅주의적 역사 인식

『삼국사기』 「열전」은 김부식이 영웅주의적 역사 인식을 여실하게 나타낸 부분이다. 역사에 있어서 개인의 역할을 강조하며 개인의 능력과 역할을 유교적 충의(忠義)에 접목시켜 교화의 수단으로 삼았다. 이는 개인으로서의 영웅이 아닌 현명한 신하, 뛰어난 장군으로서의 영웅을 중요시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유신의 열전이 3권에 달하는 것으로 보아 김부식의 영웅관에 가장 부합되는 인물은 김유신이다. 또한 열전에서 그의 사론이 붙은 8명 중 6명이 무장, 즉 영웅적 활약을 펼친 인물이다. 본기에 실린 안시성주에 대한 사론까지 포함하면 무려 7편의 사론이 영웅적 활동을 포찬하였다. 또한 화랑의 군사적인 성격을 매우 강조하였는데, 이는 현전하는 『화랑세기』 필사본의 내용과 상충하는 부분이다. 이 또한 영웅주의적 역사 인식의 일환으로 나타나는 해석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2) 모화 또는 사대주의적 역사인식

모화(慕華)는 일종의 문화적 사대주의라고 할 수 있다. 사대주의가 큰 나라의 정치질서 속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라면, 모화는 문화적으로 우월한 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여 정치, 사회적 안정을 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여러 가지 면에서 모화, 사대의 인식을 표출하고 있다.

먼저 모화적 역사인식이 나타난 부분을 살펴보면, 동성혼을 중국의 예법에 비추어 비판한 것, 왕의 아버지를 갈문왕에 봉한 것을 비판한 것, 독자 연호 사용을 비판한 것 등이다. 이 외에도 여러 사론에서 『춘추』,『맹자』 등을 근거로 들어 비판한 것을 살펴볼 수 있다. 중국의 예법을 지고(至高)의 가치로 여기고 모든 비례(非禮)를 중국의 예법에 근거해 비판했다.

이러한 문화적 사대 인식이 나타나게 된 것은 유학자인 김부식에게 있어서는 당연한 것이라 하겠다. 오히려 김부식은 여러 사실들을 비례한 것으로 비판하면서도 사실 자체를 기록함에는 객관성을 유지하였다. 이는 조선 시대에 사대주의적 역사서와 비교해 볼 때 매우 자주적이며 합리적인 역사 서술 태도이다. 물론 우리 전통의 사실을 기록함에 있어 그것을 자랑스러워하며 기록한 것이 아닌, 부끄러운 것이나 사실을 직서함이 마땅하다고 여긴 점은 명백한 문화적 사대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22)

한편 실질적인 사대주의 인식이 나타난 부분을 살펴보면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 원인을 논한 것을 비롯하여 여러 사론에서 큰 나라인 수, 당의 정치질서에 편입되지 않음을 비판한 것이 있다. 그러나 그 내용 역시 자세히 살펴보면 큰 나라와 화목하지 않고 무모한 전쟁을 벌여 멸망에 이르렀다는 논조가 밑바탕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중국과 고구려의 전쟁을 상세하게 기록하면서 포찬하고, 중국의 사가가 패배한 사실을 기록치 않음을 비판하는 등 자주적인 면모도 강하게 표출된다. 이는 무모한 전쟁을 벌여 멸망에 이른 것은 잘못이나 침략에 맞서서는 단호하게 대항해야 한다는 의식이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당에 대한 신라의 사대를 옳게 여기면서도 신라의 내정에 대한 당의 간섭은 부정적으로 서술한 것을 찾을 수 있다.23)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삼국사기』에서의 사대주의는 조선 시대의 맹목적인 사대가 아닌 큰 나라의 질서에 편입하여 평화를 구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신라중심의 역사인식

『삼국사기』가 완성된 때는 묘청의 난이 시작된 후 10년이 지난 시점이다. 또한 김부식이 감수국사(監修國史)라는, 이름에서부터 역사 편찬과 밀접한 연관을 지닌 직책에 임명된 시점이 묘청의 난이 진압된 직후라는 사실만 보아도, 『삼국사기』의 편찬이 묘청의 난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묘청의 난이 서경천도운동에서 비롯되었으며 서경천도운동이 고구려 계승의식의 강렬한 표출임은 명백하다. 이 때문에 『삼국사기』는 신라중심적 사서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24)

실제로 『삼국사기』는 신라의 기록을 압도적으로 우위에 놓고 있다. 「본기」의 분량, 「열전」에 수록된 인물의 수 등이 그러하며, 「잡지」에 이르면 거의 대부분이 신라의 기록이다. 분량 뿐 아니라 내용 면에서도, 신라의 삼국통일을 강조하는 면면이 확실하게 나타나며 후삼국 시대를 삼국의 재건이 아닌 신라에 대한 반란의 수준으로 기록한 점도 그러하다.

심지어 김부식은 신라를 우위에 놓기 위해 기록에 일부 수정을 가했다. 고구려의 국호는 후기에 ‘고려’로 약칭 된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김부식은 중국 측 기록을 인용하면서 ‘고려’로 되어있는 기록을 일일이 고구려로 바꾸어 기록하였다. 미처 고치지 못한 것이 「고구려본기」 이외의 서술에서 발견된다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25) 또한 견훤의 백제를 후백제로 개서하고, 궁예의 고려는 아예 국명조차 기록하지 않았다. 이는 김부식이 신라를 우위에 놓기 위해 고의로 조작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반대로 용어를 통일시키고 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용어를 구분하기 위해 개서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궁예가 고려를 건국한 것을 탈락시킨 것은 명백한 신라중심적인 역사 서술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왜곡으로 지적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신라의 건국 기원을 삼국 중 제일 빠른 것으로 올려 잡은 것이 있다. 그러나 이는 김부식의 손으로 조작된 것이 아닐 개연성이 높다. 오히려 삼국 통일 후 신라인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 그대로 전해졌다는 설이 더 타당하다. 김부식이 명백한 역사적 사실을 날조하였다면 이규보, 일연 등이 이를 덮어두었을 리가 없고, 『삼국사기』의 반포 이후에 큰 물의가 일어나지 않았던 점을 감안하면 신라 건국 기년이 그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26)

이러한 김부식의 신라중심적 역사 서술에 대한 반론으로는 당시의 현실적 한계였다고 보는 설이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300여 년을 이어왔으며, 다시 고려로 이어져 200여 년을 지낸 후에야 『삼국사기』의 편찬이 이루어 졌으므로 고구려, 백제의 기록은 부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신라는 고려에 의해 군사적으로 병탄(倂呑)된 것이 아니라 평화적으로 흡수되었고 이로 인해 신라의 귀족들은 그대로 고려의 지배층이 되었다. 신라의 기록들이 많이 전해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반면 고구려, 백제는 신라에게 정복되었으며, 더 나아가 백제는 후삼국 때에 이르러 다시 한번 정복되었다. 백제의 기록이 남아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고구려는 고려가 계승의식을 표방하였기 때문에 소략하나마 기록이 적지 않게 남았을 것이다. 이러한 당대의 실제 사료 비율과 『삼국사기』의 기록 비율은 일치할 것이 분명하다.


(4) 『삼국사기』의 사학사적 위치

『삼국사기』의 서술에는 고려 중기에 이르러 발달한 유교의 영향이 크다. 『삼국사기』가 우리나라 최초의 기전체 사서로 편찬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시기 유학의 성숙과 관련된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전의 사학으로부터 영항을 받은 것을 무시할 수도 없을 것이다.

통일신라 이후로 기전체의 각 부분에 해당하는 형태의 여러 저서들이 편찬된 것을 볼 수 있다. 김대문의 『화랑세기』,『고승전』 등은 열전의 효시라 할 수 있으며, 『한산기』, 『악본』, 『삼대목』 등은 각각 지리지(地理志) 악지(樂志)의 효시라 할 수 있다. 최치원의 『제왕연대력』은 연표 형식의 저서일 것으로 추측된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이와 같은 저서들이 편찬된 것은 문화인식의 폭이 넓어진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기초적 문화정리의 축적을 바탕으로 『삼국사기』의 편찬이 가능했던 것이다.27)

한편 김부식의 역사인식은 이전시대의 여러 사학자들과 관련이 있다. 이를 살펴보면, 먼저 김대문의 역사인식을 들 수 있다. 김대문은 신라적 전통을 계승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김대문 사학의 영향 아래 김부식은 신라 왕호에 대한 견해, 화랑에 대한 많은 기술이 가능하였다. 한편 최치원의 역사인식은 최초의 유교적 역사인식이라는 점에서 김부식의 사학과 관련이 깊다. 다음으로 최승로의 역사인식을 들 수 있다. 최승로는 보편적인 유교 정치이념으로 역사를 비판했다는 점에서 중세 사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김부식은 최승로와 동일한 관점에서 역사를 보았다는 점에서 그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중세적인 역사인식에서 편찬된 『삼국사기』는 다분히 유교적인 사서이다. 고대의 신이사관 및 초기 유교 사상이 반영된 여러 원전 사료들을 유교적 합리성을 바탕으로 비판하여 더 나은 역사서술로 발전시킨 것이다. 중세적 역사서술의 특징으로 보편적인 입장에서 역사를 서술하려 한 것을 들 수 있다. ‘유교’라는 보편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후대에도 그대로 이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역사를 추구했던 것이다. 이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사관 제도나 실록 편찬 등에서도 알 수 있다. 김부식은 이러한 보편성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보편성을 추구하기 위해 주체성을 상당부분 포기한 것도 사실이다. 고대의 역사 서술에 비해 보편적인 가치인 유교에 비추어보아 부합되지 않는 주체적인 기록들이 상당부분 소실된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 민족의 고대적 삶의 모습이 상당부분 왜곡되었다는 점은 『삼국사기』의 명백한 한계이다. 그러므로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갖는 이러한 약점은 『삼국유사』의 출현을 요청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주석
 

1) 정구복, 1999 『韓國中世史學史(Ⅰ)』 pp.242~243.

2) 김영대, 2004 「金富軾의 歷史認識 硏究」『전주대 교육대학원』 pp.8~9

3) 『東人之文四六』券10, 『東文選』券44.

4) 김철준, 1973 「高麗中期의 文化意識과 史學의 性格」『韓國史硏究』9.

5) “敦中與弟敦時 重修富軾所創觀瀾寺” (『高麗史』券 98, 「列傳」11, ‘金敦中傳’).

6) 『高麗史』 券97, 「列傳」10, ‘金富軾傳.’

7) 조동걸 外, 1994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上 pp.64~65

8) 정구복, 1999 『韓國中世史學史(Ⅰ)』pp.255~256

9) 최영성, 2001 「三國史記의 歷史意識 : 韓國儒學史上 三國史記의 意義와 관련하여」『韓國思想과 文化』13 pp.102~103

10) 최영성, 2001 「三國史記의 歷史意識 : 韓國儒學史上 三國史記의 意義와 관련하여」『韓國思想과 文化』13 pp.103~105

11) 조동걸 外, 1994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上 pp.77

12) 정구복, 1999 『韓國中世史學史(Ⅰ)』pp.264~267

13) 김철준, 1973 「高麗中期의 文化意識과 史學의 性格」『韓國史硏究』9. pp78~81

14) “此尤詭怪不可信 然世俗相傳 爲之實事” (『三國史記』 「新羅本紀」券12 ‘敬順王’ 九年 論.)

15) “其言可怪而不可信 臣修史 以其傳之舊 不得刪落其辭” (『三國史記』 「百濟本紀」券6 ‘義慈王’ 二十年 論.)

16) "而新舊書及司馬公通鑑不言者 豈非爲國 諱之者乎" (『三國史記』 「高句麗本紀」券10 ‘寶藏王’ 八年 論.)

17) 최영성, 2001 「三國史記의 歷史意識 : 韓國儒學史上 三國史記의 意義와 관련하여」『韓國思想과 文化』13 pp.107~108

18) 정구복, 1999 『韓國中世史學史(Ⅰ)』pp.263~264

19) 『三國史記』 「新羅本紀」券12 ‘景明王’ 五年 論, ‘敬順王’ 九年 論, 券10 ‘元聖王’ 五年 論, 「高句麗本紀」券10 ‘寶藏王’ 二十七年 論,「百濟本紀」券6 ‘義慈王’ 二十年 論.

20) 윤천근, 1995 「金富軾의 歷史哲學」 『退溪學』7. pp19~21

21) 조동걸 外, 1994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上 pp.68~69

22) 서의식, 2004 「三國史記의 事實 認識과 歷史硏究者의 姿勢」『歷史敎育』92. pp.234~240

23) 윤종일, 1982 「金富軾의 歷史認識의 一硏究」『경희대 석사학위논문』pp.32~34

24) 김당택, 2001 「高麗 仁宗朝의 西京遷都 ․ 稱帝建元 ․ 金國征伐論과 金富軾의 ≪三國史記≫ 편찬」『歷史學報』170.

25) 『삼국사기』「新羅本紀」券6 ‘文武王’ 九年, 十一年, 「年表」上 序文, 「列傳」券6 ‘崔致遠傳’

26) 정구복, 1999 『韓國中世史學史(Ⅰ)』pp.262

27) 조동걸 外, 1994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上 pp.48


★참고문헌

 

조동걸 外,  1994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上 창작과 비평사

정구복, 1999 『韓國中世史學史(Ⅰ)』집문당

이기백, 1976 「三國史記論」『文學과 知性』7

윤종일, 1982 「金富軾의 歷史認識의 一硏究」『경희대 석사학위논문』

윤천근, 1995 「金富軾의 歷史哲學」 『退溪學』7

하현강, 1977 「金富軾(1075~1151年)의 歷史意識」『自由』61

김영대, 2004 「金富軾의 歷史認識 硏究」『전주대 교육대학원』

서의식, 2004 「三國史記의 事實 認識과 歷史硏究者의 姿勢」『歷史敎育』92

최영성, 2001 「三國史記의 歷史意識 : 韓國儒學史上 三國史記의 意義와 관련하여」『韓國思想과 文化』13

김당택, 2001 「高麗 仁宗朝의 西京遷都 ․ 稱帝建元 ․ 金國征伐論과 金富軾의 ≪三國史記≫ 편찬」『歷史學報』170

김철준, 1973 「高麗中期의 文化意識과 史學의 性格」『韓國史硏究』9


덧글

  • 慕華 2008/08/10 13:45 # 답글

    삼국사기를 꼭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 blue 2010/03/28 22:07 # 답글

    일본 고대사 부문에서는 '일본서기'의 연대가 잘 안 맞아서 이른바 '주갑설'이라는 것으로 연대를 200년 정도 내려서 보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비슷한 시기를 다루고 있는 '삼국사기'에서도 이 주갑설을 채용하여 설명하는 경우가 많아서, 삼국사기에 언급된 왕조들의 초기 역사는 믿을만한 것이 못 되고 중국 사서에서 관련 서술이 등장하는 왕 대의 역사를 올려서 쓴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고 하더군요. 뭐..그래서 우리가 국사책에서 배웠던
    '2세기 태조왕', '3세기 고이왕'이라는 대목은 다 삼국사기의 초기 기사를 믿을 수 없는 것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어떤 책에서 봤습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전 이쪽 분야에 관련 지식이 전혀 없고, 어떤 책에서 이런 대목을 봤기 때문에 그저 궁금해서 질문드리는 것이지 '筆禍'를 불러일으키고 싶은 의도는 전혀없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 야스페르츠 2010/03/29 00:59 #

    초기기사를 그대로 믿는 학자는 일단은 없겠지요. 그걸 그대로 믿는다면 삼국의 초기 군주들은 모두 120년 이상씩 살았던게 되니까.. ㅡㅡ;;; 수정론은 불가피합니다만, 저도 어느 정도의 수정이 합리적인지는 잘 모릅니다. 솔직히 교과서나 개설서가 그나마 가장 중립적이고 객관적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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