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7/21 00:30

내 논문 역사

  <<삼국사기>>에 나타난 김부식의 사실왜곡과 신라정통의식


Ⅰ 머리말


<<삼국사기(三國史記)>>는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사서로 삼국시대의 상세한 역사를 전하는 유일한 기록이다. 삼국시대를 다룬 다른 기록인 <<삼국유사(三國遺事)>>가 존재하지만, 이는 사실상의 야사(野史)이며, 설화와 종교 관련 기록들만 전하고 있는 등 이름 그대로 ‘유사(遺事)’이다. 그 외 기타 사서들이나 중국사서의 기록들은 단편적인 편린들만 제공하고 있을 뿐이다. 그만큼 <<삼국사기>>는 중요한 사서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료의 부족은 <<삼국사기>>를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안목으로 바라보는데 있어서 큰 장애로 작용한다. 이 책을 제외하고 삼국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이니 <<삼국사기>>에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내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또한 <<삼국사기>>는 고려 인종의 명에 의해 편찬된 관찬사서(官撰史書)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김부식 개인에 의해 편찬이 주도된 사찬사서(私撰史書)에 가깝다는 문제가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전적으로 믿을 수 없게 하는 이유이다.

김부식 개인이 <<삼국사기>>의 역사 서술에 끼친 영향에 대한 연구는 이미 많은 방향에서 이루어져 왔다. 단재 신채호는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사대주의로 점철된 개악서(改惡書)라고 혹평하기도 하였으며1) 이러한 인식은 김철준에게 이어져 유교적인 역사가로서 불교적인 내용과 전통적인 고유사상을 삭제하였다고 비판되었다.2) 한편 최근에는 김부식의 역사서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려는 견해가 힘을 얻고 있다. 역사가를 당시의 지적 분위기와 관련지어 파악하고 그 시대의 여러 가지 상황과 관련지어 이해함이 온당한 태도라고 보는 것이다.3)

이렇듯 <<삼국사기>>는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한 문제점 가운데 하나가 <<삼국사기>>에 나타난 사실 왜곡이다. 부족한 편린이나마 존재하는 <<삼국유사>>를 비롯한 여러 사서들과 교차 검증을 통해 진위가 파악된 것이다. 이것에 대한 지적은 계속 있어왔다. 또한 그러한 왜곡들 가운데 일부는 김부식의 강렬한 목적의식 하에 이루어졌다고 추측된다.

먼저 김부식과 <<삼국사기>>에 대해서 간략하게 알아본 후 진위 파악이 가능한 명백한 왜곡들을 살펴보고 그 가운데 숨겨져 있는 김부식의 목적을 알아본다.


Ⅱ 김부식과 <삼국사기>에 대한 개관


1. 김부식(金富軾)의 생애

김부식은 고려 중기에 활약한 정치가이자 유학자, 역사가로, 문종 29년(1075)에 태어나 고려 문벌귀족사회의 절정기를 살고 의종 5년(1151)에 생을 마쳤다. 그의 가문은 신라 왕족인 경주 김씨로4), 증조부 김위영이 태조 때 경주의 주장(州長)으로 임명된 이래 경주의 향리 계층으로 이어져 왔다. 이렇듯 김부식의 가문은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전통적인 문벌귀족은 아니었다.

예부시랑좌간의대부(禮部侍郞左 諫議大夫) 김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김부식은 10세 무렵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그리 높은 지위의 가문이 아니었기 때문에 김부식과 그의 형제들은 과거를 통해 중앙관료로 진출해야 했다. 김부식은 숙종 때 등과한 후 대간(臺諫)계통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특히 한림원(翰林院)에 발탁되어 20여 년간 근무함으로써 자신의 학문을 크게 성장시킬 수 있었다. 예종 11년에는 임금에게 경사(經史)를 강의하는 임무를 맡았다. 또한 송에 사신으로 행차하여 북송이 몰락하는 과정을 직접 목격하였으며, <<예종실록(睿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여 <<삼국사기>>를 편찬할 수 있는 중요한 경험을 쌓았다.

인종이 즉위하면서 외척인 이자겸은 국정을 농단하였다. 이 시기 김부식은 이자겸의 전횡에 비례(非禮)를 이유로 반대한 일이 있으나 직접적으로 대항하지는 않고 묵종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이자겸 집권기에 순탄하게 승진하였다.5) 인종 4년 이자겸이 피살됨으로써 이자겸의 전횡은 끝났으나 이로 인한 혼란과 궁궐의 소실 등을 이유로 서경파가 득세하였다. 이 시기 김부식은 추밀원사(樞密院使)로 승진하여 재추(宰樞)의 반열에 오르는 등 정치적 지위가 급성장하였다.

묘청 등의 서경천도운동은 인종 7년 무렵부터 대두되기 시작하여 서경에 궁궐을 축조하고 인조도 자주 행차하였다. 서경파의 정지상 등은 묘청과 백수한이 성인이니 모든 정치를 그들에게 물어서 행하자고 하면서 연판장을 돌렸다. 조정 신료들 가운데 오직 평장사(平章事) 김부식, 참지정사(參知政事) 임원애, 승선(承宣) 이지저만이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서경 서기(瑞氣) 조작의 탄로, 행차 때의 악천후 등이 잇따름에 따라 김부식 등의 반대파 의견이 우세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김부식 일파는 인종 12년(1134) 인종의 서경 행차를 막는데 성공하였다.

서경천도가 불가능해지자 묘청 등은 인종 13년(1135)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김부식은 총사령관이 되어 이를 진압하였으며, 이 전공을 이용하여 정적(政敵)인 윤언이를 축출하고 정권을 잡았다. 이때 김부식은 공신으로 책봉되었는데 그 관직 가운데 감수국사(監修國史)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부터 <<삼국사기>>의 편찬이 시작되었을 것으로 본다.

인종 18년 이후 그의 세력이 약화되고 윤언이가 정계에 복귀하자 위기를 느낀 김부식은 인종 20년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삼국사기』는 김부식이 관직에서 물러난 뒤인 인종 23년(1145)에 편찬이 완료되었다. 이후 김부식은 <<인종실록(仁宗實錄)>>의 편찬에도 참여하였고 의종 5년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2. <<삼국사기>>의 편찬과 김부식의 역사인식

<<삼국사기>>가 편찬된 시기는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등 대내적인 혼란과 더불어 북송이 몰락하고 여진족의 금이 득세하는 국제질서의 일대 개편 시기였다. 김부식은 이러한 배경 하에 <<삼국사기>>를 편찬하여 국가의 안위(安危)와 치란(治亂)을 강조하고 대외관계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삼국사기>>의 편찬에 참여한 10인의 편사관(篇史官)들은 대부분 대간 계통의 관직을 역임한 인물들로 이는 역사를 비판적인 안목으로 볼 수 있게 하는 토대가 되었다.

총 31편의 사론(史論)을 통해 김부식의 역사인식을 추측해 볼 수 있다. 김부식은 유학자였기 때문에 <<삼국사기>> 전반에 걸쳐서 유교를 근거로 고대의 전통 문화에 대한 비판 의식을 표출하였다.6) 또한 유교적인 합리주의에 입각하여 괴력난신(怪力亂神)과 같은 불가신적(不可信的)인 기록을 삭제하거나 합리적으로 개서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당시까지 행해지고 있던 전통 문화에 대한 이해·옹호와 함께 유교적인 술이부작(述而不作), 이실직서(以實直書)의 원칙에 따라 많은 전통 습속(習俗)과 신이(神異) 기사를 남겨두기도 하였다.7)

한편 <<삼국사기>>는 신라 중심적인 사서로 평가받는다. 이는 김부식의 출신과 묘청의 난을 진압했던 경력 등이 근거가 된다. 내용 면에서도 신라의 기사가 압도적으로 많고 신라를 중심적으로 서술했음이 명백한 부분이 있다. 또한 일부 기록은 신라를 중시하기 위해 개서한 것으로 판단되기도 한다.



Ⅲ <<삼국사기>>에 나타난 사실 왜곡


<<삼국사기>>에 확인해 볼 수 있는 사실 왜곡은 크게 2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유교적인 합리주의에 입각하여 불가신적인 기록을 개서, 삭제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특별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고의적으로 개서, 삭제한 것이다.


1. 합리주의적인 개서 및 삭제

김철준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비교하여 김부식이 개서한 예를 세 가지 들었다.8)  그 가운데 두 가지는 지증왕과 진평왕의 신체가 장대하다는 것을 설화적으로 표현한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삼국사기>>는 이를 신체가 장대하다는 현실적인 표현으로 개서하였다. 이는 고대의 기록을 합리적으로 개서한 것으로 볼 수 있다.9) 한편 세 번째 예로 경문왕이 국선(國仙)이었다는 사실을 삭제한 것이 있는데 이는 <<삼국사기>>가 사료집으로 편찬되지 않은 이상 일부 기록이 탈락되었다고 해서 비판할 수 없다는 반론이 있다.10)

이러한 개서, 삭제는 김부식이 유학자로서 믿을 수 없는 설화나 기록을 유교적 합리주의에 입각하여 취사선택하였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논어(論語)>> <술이(述而)>에는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하지 않는다.’11)고 하였으며 이는 유가(儒家)의 역사 서술에 있어서 기본 원칙 가운데 하나였다. 유학 자체가 일상생활의 현실적인 점을 중시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김부식은 그의 사론을 통해,


① 이것은 더욱 궤괴(詭怪)하고 믿을 수 없으나, 세속에서 서로 전하여 그것을 사실로 여긴다.12)


② 그 말이 괴이(怪異)하여 믿을 수 없으나, 신(臣)이 역사를 편찬함에 있어 그 전한 바가 오래인지라 그 말을 깎아 없애지 못하였다.13)


라고 하였던 것처럼 유교적 합리성에 배치되는 것이라도 함부로 삭제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삼국 시조의 탄생 설화나 이차돈의 순교 등의 기록이 수록되었던 것이다. 유학자로서는 대단히 풍부한 신이 기사를 남겨두었던 셈이다.

그리하여 <<삼국사기>>에는 유가의 정사(正史)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수의 신이 기사가 수록되었다. 또한 그 외에 믿기 어려운 기록에 대해서도 일정한 기준을 두어 표현상의 불가신적(不可信的)인 정도를 누그러뜨려 현세적이고 합리적인 해석으로 개서(改書)된 채 전해지게 되었다.


2. 고의적인 개서 및 삭제

고구려의 국호는 장수왕 20년 무렵부터 ‘고려(高麗)’로 개칭된 것으로 보인다.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에도 고려태왕(高麗太王)으로 나타나고 고구려 유물인 연가칠년명불상(延嘉七年銘佛像)에도 ‘고려국낙랑(高麗國樂浪)’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장수왕 20년 무렵 이후의 중국 사서에도 대부분 고려라 기록되어 있다. 책봉명(冊封名)이나,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건립한 비석에 ‘고려’라 쓴 것은 이것이 단순한 약칭(略稱)이 아닌 국호 개칭의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장수왕 15년의 평양 천도와 관련하여 국호를 개칭한 것으로 볼 수 있다.14)

또한 <<삼국유사>>에는 고구려를 극히 일부의 예를 제외하면 일관되게 고려로 칭하고 있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가 모두 <<구삼국사(舊三國史)>>로 통칭되는 원전사료를 참고했음이 분명하다는 점에서 볼 때 <<구삼국사>>는 고구려가 아닌 고려로 기록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렇듯이 <<삼국사기>> 이전에 편찬된 원전 사료들은 모두 고구려를 고려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국호 개칭에 대한 기사를 전혀 싣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장수왕 이후 중국의 책봉명 등, 중국 사서에서 옮긴 부분에 나타난 ‘고려’를 모두 ‘고구려’로 고쳐 기록하고 있다. 미처 고치지 못한 것을 <고구려본기> 이외의 서술에서 일부 발견할 수 있다.15)

<<삼국사기>>에 고구려의 국호 개칭에 대한 기사가 전혀 없는 것은 백제, 신라의 기록과 대비해 볼 때 매우 이상한 부분이다. 신라는 국초에 혁거세왕이 ‘서나벌(徐那伐)’이라 국호를 정한 이래 탈해왕 대의 계림(鷄林) 개칭, 기림왕 대의 신라 복귀, 지증왕 대의 신라 국호 확정 등 국호의 개칭에 대한 기사를 충실하게 싣고 있다. 또한 그 국호의 의미까지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16) 백제 역시 마찬가지로, 온조왕 대에 십제(十濟)에서 백제로 개칭한 사연, 성왕 대에 남부여(南夫餘)로 개칭한 것 등을 싣고 있다. 반면 고구려는 그 국호에 대해서 간단한 의미조차 언급되고 있지 않다. 고구려 국호에 대한 언급은 유리명왕 31년 신(新)의 왕망이 고구려를 조롱하며 하구려(下句麗)라 부른 것이 유일하다.

고구려의 국호 개칭에 대한 사실이 전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위와 같은 개서를 용어의 혼란을 피하기 위한 합리주의적인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그렇다면 중국의 사서들이 갑자기 고려라 국호를 바꾼 사실을 이상하게 여긴 사론이나 주(註)가 나타나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를 들어 살펴본다.


①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정관(貞觀) 6년 임진 정월에 죽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신당서(新唐書)>>와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모두 ‘정관 5년 신묘에 신라 왕 진평이 죽었다’고 하였으니, 어찌하여 그것이 잘못되었을까?17)


② <<신당서>>에는 남복(男福)이라고 하였다.18)


  ①은 진평왕의 사망 기사에 나타난 주로 국내 기록인 고기와 중국 사서를 비교하여 국내 기록을 취하고 중국 사서가 틀렸음을 밝히고 있다. ②는 보장왕이 당에 태자 복남(福男)을 보내 제사에 참가하게 한 기사에 나타난 주로 태자 복남의 이름에 관한 이설(異說)로서 <<신당서>>의 기록을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삼국사기>>에는 여러 사료를 비교, 검증하여 사용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중국 사서에 ‘고려왕’이라 기록되어 있다면 이를 국내 기록과 같은 일정한 근거를 통해 ‘고구려왕’이라 개칭하였음을 주나 사론을 통해 밝히는 것이 마땅하다.

이상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고구려의 국호와 관련된 개서는 고의적인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19)


발해는 고구려의 멸망 이후 고구려의 계승을 자처하며 건국된 국가이다. 현재까지 발해의 주요 구성원이 고구려인인지 말갈인인지를 두고 많은 논란이 있어왔지만, 발해의 실체가 무엇이든 관계없이 스스로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는 의식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또한 발해와 통일신라는 국경을 직접 마주 대하고 있던 국가이다. 그렇다면 평화적이거나 군사적이거나 교류가 적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발해에 대한 기록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가장 중요하고 객관적인 기록인 <본기>에는 발해와 관련된 기록이 성덕왕 32년, 원성왕 6년, 헌덕왕 4년, 이렇게 3건 뿐이다. 성덕왕 대의 기록은 당의 요청으로 발해와 전쟁을 벌인 기록이며, 원성왕, 헌덕왕 대의 기록은 발해에 사신을 보냈다는 내용이다. 사행(使行)에 대한 2건의 기사는 발해라는 국호 대신 북국(北國)이라 칭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본기>를 제외한 기록에서 발해 관련 기사는 모두 4건으로 <지리지(地理志)> 고구려조에 2건, <열전(列傳)> 김유신전, 최치원전에 각기 1건씩 나타난다. 김유신전의 기록은 <본기>의 성덕왕 32년 기록과 같은 내용이다. <지리지>의 기사는 발해가 고구려의 옛 땅에 세워졌음을 <<신당서>> <발해전(渤海傳)>, 가탐(賈耽)의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에서 인용하여 말하고 있으며, 최치원전에는 고구려의 유민이 모여 발해를 세웠음을 언급하는 최치원의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이렇듯 <<삼국사기>>에는 발해 관련 기록이 극히 적다. 또한 발해가 언제, 어떻게 건국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왜가 국호를 일본이라 바꾸었다는 기록20)이 존재하는 것과 비교해보면 매우 이채로운 부분이다. 물론 <<삼국사기>>에는 중국 왕조의 흥망에 대해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는 상대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이기에 구태여 기록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면 발해의 흥망에 대한 기록은 널리 알려져 있다고 보기 어렵다.

발해에 관한 기록이 실전되었기 때문에 기록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국내 자료가 모두 멀쩡한데 발해와 관련된 외교기록만 실전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라 이름 하였던 것처럼 삼국을 제외한 타국의 역사는 굳이 기록하지 않았다고 해서 비판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그러나 타국의 역사가 아닌 타국과의 외교 기록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외교 기록은 타국의 기록이 아닌 삼국과 직접 관련된 기록인 것이다.

한편 북국이라는 호칭을 살펴보자. ‘북국’은 신라인 스스로가 그렇게 인식하고 불렀을 가능성이 높다. 바로 북쪽 국경을 마주 대하고 있는 국가이며, 스스로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하고 있는 만큼 명목상이든 실질적이든 같은 계통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렇게 특별한 호칭으로 부를 수 있을 만큼 밀접한 관계에 있던 국가의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것처럼 적을 리가 없다. 이는 고의적인 삭제일 가능성을 의심하게 하는 부분이다. 반대로 북국이라는 호칭을 김부식이 발해를 무시하려는 의도로 사용하였다면 그 역시 고의적인 삭제가 가해졌다는 의미가 된다.

또한 성덕왕 대의 기록과 <지리지>, ‘김유신전’ 등에서 발해를 ‘발해말갈(渤海靺鞨)’이라 칭하였다는 점도 주목된다. 물론 발해말갈이라는 호칭이 <<신·구당서(新·舊唐書)>>를 비롯하여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칭호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였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발해의 출신에 대해 명확하게 밝히고 있는 기록은 최치원전의 편지뿐이며, 그 외의 다른 기록들은 발해와 고구려의 연관성을 밝히고 있지 않다. <지리지>의 기록도 단지 고구려의 옛 땅에서 건국되었음을 언급하고 있을 뿐,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하였다는 것은 문맥으로도 추측하기 어렵다. 이 역시 고의적인 왜곡일 가능성이 있다.


<<삼국유사>>의 <왕력(王曆)>에 따르면 궁예는 901년 고려라 국호를 정하였다. 견훤의 경우 후백제(後百濟)라 기록되어 있으나 사실은 백제라 칭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궁예가 고려라 국호를 정한 사실은 삭제된 채 칭왕(稱王)한 기록만 남아 있으며21) 견훤의 백제도 후백제로 기록되어 있다.

후백제의 경우 용어의 혼란을 피하기 위한 합리적인 개서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삼국사기>>의 예가 아니더라도 여러 사서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개서이다. 그러나 궁예의 건국 기사에서 국호인 ‘고려’가 삭제된 것은 명백하게 고의적인 삭제라고 볼 수 있다. 앞서 고구려의 예, 즉 고려 국호를 고구려라 개칭한 전례를 따르자면, ‘고구려’로 바꾸어 기록하거나 ‘후고구려’라 기록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국호 자체를 삭제해버렸다. 이는 매우 뚜렷한 목적의식 하에 왜곡을 가한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한편 <<삼국사기>>의 <지리지>는 전 4권 가운데 3권을 통일신라의 9주에 각기 3개주씩 할당하고 있다. 1권은 상주, 양주, 강주로 이는 옛 신라의 강역으로 파악되었다. 2권은 한주, 삭주, 명주, 3권은 웅주, 전주, 무주로서 각기 고구려, 백제의 강역으로 파악되었다. 이에 따라 각 군현의 건치연혁(建置沿革)을 기록하면서 각기 그 고지명(古地名)을 해당 국가의 지명에 비정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강역으로 파악된 한주(漢州)의 대부분과, 삭주(朔州)의 상당 부분은 원래 백제의 강역이었다. 그러나 김부식은 이들 지역의 고지명을 고구려의 영역으로 파악하여 백제의 옛 강역을 알 수 없게 하였다.

김부식이 한주 및 삭주에 걸쳐 있던 백제의 옛 강역을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진흥왕 14년, 성왕 31년 기록에 따르면 신라는 백제로부터 빼앗은 땅에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이 신주는 진흥왕 18년 북한산주로 바뀌었으니 이것이 곧 한주다. 이는 김부식이 한주가 본래 백제의 영역임을 알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물론 백제 역시 고구려로부터 그 땅을 빼앗았던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그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 시기 삼국의 <본기>에는 신라가 고구려의 10여 성을 빼앗은 기록만 존재할 뿐, 백제의 영토 확장 기사는 없다. ‘거칠부전’에 신라와 백제가 함께 공격했다는 기록만 존재할 뿐이며 이 역시 백제의 영토 확대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이는 적어도 <<삼국사기>> 상의 기록만 놓고 본다면 신주가 원래부터 백제의 땅이라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볼 때 김부식은 지금과 같은 인식, 즉 성왕 대에 백제가 한강 하류 유역을 일시 회복하였다는 인식이 아닐 수는 있지만 한주가 백제의 영역이었다는 사실은 알았을 것이다. 그 상세한 지명은 알지 못했지만, 대강의 영역은 알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지리지>는 삼국의 영역을 정확하게 3개 주씩 할당하여 배분하였다. 이는 매우 관념적이고 상징적인 면이 엿보인다. 현대의 지리 관념으로 살펴보면 고구려의 영역으로 비정된 한주, 삭주, 명주는 비정상적으로 넓다. 당시 신라인이나 고려인에게 지금과 같이 명확한 지리 관념이 존재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또한 9주의 배분이 땅의 넓이가 아닌 인구, 생산력 등을 고려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구성 면에서 볼 때 이는 매우 상징적인 지방 편제이다. 이러한 관념적인 구성은 명백한 왜곡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특정한 목적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게 한다.



Ⅳ 사실 왜곡과 김부식의 신라정통의식


위에서  <<삼국사기>>에서 나타나는 고의적인 왜곡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이러한 왜곡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에 대한 실마리는 <지리지>에서 나타난 관념적인 지리 인식을 통해 찾을 수 있다.

9주에 대한 인식이 김부식에게서 비롯되었는지, 아니면 신라인이 통일 후에 시작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물론 9주를 실제로 설치, 운영하였던 것은 신라인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9주를 정확하게 삼분해서 옛 삼국의 영역으로 인식하였던 것은 신라인에게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분명하다. 바로 신라의 ‘삼국통일’을 강조하는 것이다.

혼란을 종식시키고 통일을 이룩한 국가라면 당연히 ‘통일’이라는 점을 매우 강조한다. 이는 고려의 후삼국 통일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고려는 ‘삼한일통(三韓一統)을 강력하게 내세움으로써 복속된 백제, 신라를 포용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신라 역시 삼국을 통일한 후에 통일이라는 면모를 강하게 표출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 예로 보덕국왕을 들 수 있다. 이는 나당전쟁의 명분을 위해 정치적으로 옹립된 괴뢰 정권이지만, 동시에 고구려 유민에 대한 위무 차원에서 실시된 정책이다. 그 외에도 9서당(誓幢), 5소경(小京) 등을 통해 통일 국가로서 피정복민을 회유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9주에 대한 관념적인 분할 역시 이 시기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고려는 그 국명에서 알 수 있듯이 건국 초기에는 고구려의 계승 국가로 자처했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했듯이 후삼국을 통일한 후에는 고구려 계승 의식을 숨기고 ‘삼한일통’을 강조하였다. 고구려 계승 의식은 표면적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대외관계에 있어서 유용한 도구로서 사용되었음은 서희의 대거란 외교에서 명백하게 알 수 있다. 또한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을 통해 미루어 짐작하건대 고구려 계승 의식은 삼한일통 다음가는 중요 이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통해 조금 다른 인식을 주장한다. 신라인에 의해서 형성된 9주 관념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여기까지는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는 고려가 제일목표로 강조하였던 삼한일통 관념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궁예와 견훤에 대한 왜곡이 바로 그것이다.

고려가 후삼국의 통일을 강조했다는 것은 동시에 후삼국의 성립을 인정하였다는 의미가 된다. 즉, 견훤과 궁예는 각기 고려와 백제의 건국자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궁예와 견훤을 <열전>의 마지막에 싣고 있다. 기전체에 있어서 <열전>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모반을 꾸민 반신(叛臣), 반역을 꾀한 역신(逆臣), 외부의 이민족이다. <<삼국사기>>에는 반신이나 역신과 같은 제목은 없으나, 9권에는 창조리, 연개소문을 두어 <반신열전>의 구색을 갖추었으며 10권은 궁예와 견훤을 넣었으니 이는 <역신열전>에 다름이 아니다.

결국 <<삼국사기>>는 후삼국을 삼국의 재현(再現)이 아니라 신라에 대한 반란자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이는 고려의 삼한일통에 정면으로 일침을 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의 가장 중요한 이념이었던 삼한일통에 대항하여 김부식 내어놓는 것은 무엇인가.


후삼국을 신라에 반역하여 나타난 반란자 집단으로 인식하였다는 것은 곧 신라를 ‘정통(正統)’ 국가로 본다는 것이다. 즉 고려는 재현된 후삼국을 홀로 통일한 국가가 아닌 정통인 신라를 계승한 국가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은 <<삼국사기>>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경순왕 9년의 기사와 그에 대한 사론을 통해 고려 현종이 신라 왕실의 외손이라는 것을 두 번씩이나 강조하였다.

신라를 정통으로 보기 위해서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는 곧 발해에 대한 무시로 이어진다. 발해가 고구려 계승을 명백하게 천명하였기 때문에 김부식은 발해를 확실한 실체로 기록할 수 없었다. 고구려 계승을 천명한 발해의 존재를 명확하게 하면 곧 신라의 삼국통일이 부정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발해의 기록은 고의로 삭제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구려·고려의 국호와 관련된 문제는 어떻게 볼 것인가. 이것은 고려가 신라를 계승한 국가라고 인식한 것과 관계가 있다. ‘고려’가 고구려를 가리키는 국호임은, 그것이 개칭된 것이건, 단순한 약칭에 불과하건 관계없이 분명한 사실이다. 실제로 앞서 언급했듯이 고려는 건국 초기에 고구려 계승 국가임을 분명히 했다. 이는 그 국호만 보아도 명백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고구려의 <본기>를 작성하면서 모든 고려를 고구려로 개칭하였다. <고구려본기>를 제외한 다른 부분에는 일부 고려라 기록된 것을 찾아볼 수 있으나 <본기>는 철저하게 고구려로 일관하였다. 이는 고려와 고구려의 연관성을 가능한 한 약화시키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궁예의 국호를 삭제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견훤의 국가를 후백제라 서술하였기 때문에 궁예의 국가는 자연스럽게 후고구려로 인식된다. 후(後)는 어차피 용어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붙인 것이므로 이는 곧 고구려와 백제이다. 이러한 인식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이때 궁예의 국호가 고려라는 것을 밝히면 고려와 고구려는 동격이 되어버릴 것이다. 이는 고구려와 고려의 관련성을 희박하게 하려는 김부식의 의도에 반하는 것이다.

물론 궁예를 반역자로 기술한 이상 위와 같은 이유가 아니더라도 궁예와 왕건의 관계는 새롭게 설정할 필요가 있다. 기존 고려의 인식처럼 후삼국을 정상적인 국가로 본다면 궁예와 왕건의 관계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궁예를 반역자로 서술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궁예와 왕건의 밀접한 관계를 새롭게 설정할 필요성이 생겼다. 그렇기에 고려는 궁예의 고려를 이어받은 것이 아닌, 반역자 궁예를 처단하고 새롭게 들어선 국가로서 재설정된 것이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은 신라 왕족의 후손이다. 이로 인해 김부식과 <<삼국사기>>는 신라 중심적이라는 비판에 시달려왔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는 일견 사실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과연 <<삼국사기>>가 신라 ‘중심적’인 역사서일까?

정통론이라는 것은 분명 정통을 ‘중심적’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분명 체재나 내용 등 모든 면에서 삼국을 동등한 국가로 대우했다. 삼국을 모두 <본기>로 서술하고, 각국을 ‘아(我)’로 칭하고 삼국간의 전쟁 역시 동등한 입장에서 서술하였다. 물론 신라의 기록이 압도적으로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김부식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 당시까지 전해져오던 사료가 가지는 한계라고 보는 편이 더 옳다. 그렇다면 김부식의 신라정통의식은 무엇인가.

사실 김부식의 신라정통의식은 단순한 신라 중심주의가 아니다. 신라를 유일하게 정통, 중심으로 보는 것은 고구려와 백제가 우리 역사가 아니라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김부식이 신라 왕족의 후손이라고 해도 이처럼 어리석기 짝이 없는 주장을 할 리가 없다. 오히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통해 삼국 모두를 동등한 정통 국가로 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동등한 국가들이 마침내 신라에 의해 통일되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즉, 신라라는 국가 자체를 중요하게 본 것이 아니라 삼국을 통일한 신라를 중요시한 것이다.

고려는 삼한의 통일을 강조함으로써 전대 왕조인 신라의 삼국통일을 무위로 돌려버렸다. 후삼국이 삼국의 재현이라는 것은 곧 신라의 삼국통일이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김부식은 이러한 인식에 반발한 것이다. 그는 <<삼국사기>>를 저술함으로써 기존에 고려에 존재하던 삼한일통 관념과 고구려 계승 의식을 대체하여 새로이 신라의 삼국통일과 그 계승을 강조하려 하였던 것이다.



Ⅴ 맺음말


<<삼국사기>>는 단재 신채호의 비판 이래 항상 논란의 중심에 있어왔다. 그러한 논란 가운데 가장 큰 주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신라 중심적으로 왜곡된 역사서라는 것이다. 신라 중심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다양하게 적용되었다. 대륙을 질주한 고구려가 아닌 궁벽한 반도에 틀어박힌 신라가 중심이라는 의미, 김부식 개인의 영달을 위해 신라를 중심으로 삼았다는 의미 등등.

그러나 김부식의 신라 중심주의, 신라정통의식은 그렇게 거칠고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김부식은 삼국을 동등한 주체로 보고 역사를 서술하였다. 김부식이 정통으로 본 것은 삼국 가운데의 신라가 아니라 삼국을 통일한 신라였던 것이다.

김부식은 신라를 정통으로 삼는 역사를 서술하기 위해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고의적인 왜곡을 일부 첨가하였다. 고구려의 후기 국호로 추측되는 고려를 모두 고구려로 개서하였고, 후삼국을 반역자로 격하하였으며, 발해를 무시하였다. 이러한 왜곡을 통해 <<삼국사기>>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강하게 강조하였으며 더 나아가 고려가 통일된 신라를 계승한 국가임을 천명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이후의 사가(史家)에게 그대로 계승되었다. 조선 시대에 유행하였던 강목체(綱目體) 사서의 정통론(正統論)이 바로 그것이다. 유교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역사의 정통 체계를 철저히 갖추고자 하였던 당시 사가들은 김부식에 의해 처음으로 정리된 한국사의 정통 체계를 받아들였다.

이로부터 ‘삼국-통일신라-고려-조선’으로 이어지는 한국사의 정통 체계가 확립되었다. 이는 조선 시대를 거쳐 현대에까지 계승되었다. 또한 이러한 정통 체계를 통해 삼국과 각 왕조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함으로써 부여, 가야 등의 소국들에 대한 연구도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통해 한국사의 큰 틀을 완성시킨 것이다.

 


Ⅵ 참고문헌


<史料>

<<三國史記>>

<<三國遺事>>

<<高麗史>>

<<論語>>

<<中國正史朝鮮傳>> 역주1·2, 국사편찬위원회, 1990.


<論文>

신채호, <朝鮮歷史上 一千年來 第一大事件>, <<朝鮮史硏究草>>, 1929.

김철준, <高麗中期의 文化意識과 史學의 性格>, <<한국사연구>> 9, 1973.

이기백, <三國史記論>, <<문학과 지성>> 겨울호, 1976.

정구복, <金富軾>, <<韓國史市民講座>> 9, 1991.

정구복, <高句麗의 ‘高麗’國號에 대한 一考-三國史記의 기록과 관련하여->, <<호서사학>>19·20.

정구복, <<韓國中世史學史(Ⅰ)>>, 집문당, 1999.

서의식, <三國史記의 事實 認識과 歷史硏究者의 姿勢>, <<歷史敎育>> 92, 2004.


 

1) 신채호, <朝鮮歷史上 一千年來 第一大事件>, <<朝鮮史硏究草>>, 1929.

2) 김철준, <高麗中期의 文化意識과 史學의 性格>, <<한국사연구>> 9, 1973.

3) 정구복, <金富軾>, <<韓國史市民講座>> 9, 1991, 121~122쪽

4) <<高麗史>> 券 97, 列傳 10, 金富佾傳.

5) 정구복, <<韓國中世史學史(Ⅰ)>>, 집문당, 1999, 234쪽. 
6) 서의식, <三國史記의 事實 認識과 歷史硏究者의 姿勢>, <<歷史敎育>> 92, 2004, 234~240쪽. 

7) 정구복, <<韓國中世史學史(Ⅰ)>>, 집문당, 1999, 258~260쪽. 

8) 김철준, <高麗中期의 文化意識과 史學의 性格>, <<한국사연구>> 9, 1973, 78~83쪽.

9) 정구복, <<韓國中世史學史(Ⅰ)>>, 집문당, 1999, 259~260쪽.

10) 이기백, <三國史記論>, <<문학과 지성>> 겨울호, 1976, 873쪽.

11) “子不語怪力亂神” (<<論語>> <述而>)

12) “此尤詭怪不可信 然世俗相傳 爲之實事” (<<三國史記>> <新羅本紀> 券12 ‘敬順王’ 九年 論.)

13) “其言可怪而不可信 臣修史 以其傳之舊 不得刪落其辭” (<<三國史記>> <百濟本紀> 券6 ‘義慈王’ 二十年 論.)

14) 정구복, <高句麗의 ‘高麗’國號에 대한 一考-三國史記의 기록과 관련하여->, <<호서사학>>19·20, 1992 

15) <<三國史記>> <新羅本紀> 券6 ‘文武王’ 九年, 十一年, <年表> 上 序文, <雜志> 券2 ‘色服’<列傳> 券6 ‘崔致遠傳’ 등

16) “新者德業日新 羅者網羅四方之義” (<<三國史記>> <新羅本紀> 券4 ‘智證麻立干’ 四年.)

17) “古記云 貞觀六年壬辰正月卒 而新唐書· 資理通鑑皆云 貞觀五年辛卯 羅王眞平卒 豈其誤耶” (<<三國史記>> <新羅本紀> 券4 ‘眞平王’ 五十四年 註.)

18) “新唐書云男福”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券10 ‘寶藏王’ 二十五年 註.) 

19) 정구복, <<韓國中世史學史(Ⅰ)>>, 집문당, 1999, 261~262쪽.

20) “倭國更號日本 自言近日所出以爲名” (<<三國史記>> <新羅本紀> 券6 ‘文武王上’ 十年.) 

21) “弓裔稱王” (<<三國史記>> <新羅本紀> 券12 ‘孝恭王’ 五年) “善宗自稱王” (<<三國史記>> <列傳> 券十 ‘弓裔傳’)


덧글

  • 이천풍 2007/08/04 00:11 # 삭제 답글

    좋은 글이네요. 역사 지식이 짧아서 제대로 이해를 못해서 죄송합니다. 게다가 제가 아는 내용은 통설보다는 소수설쪽이라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네요. T.T
    그건 그렇고, 맞춤법에 대해 한마디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라는 표현을 문장 머리에 썼는데, 그것은 접속사가 아닙니다. 대명사도 아닙니다. 옳바르게 쓰자면 "그뿐만 아니라"라고 써서 앞의 문장 전체를 "그"로 받은 다음 "그밖에도"라는 뜻으로 "뿐만 아니라"를 붙여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통일이라느니 하는 표현은 쓰지 않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 이천풍 2007/08/04 00:14 # 삭제 답글

    저는 홈페이지가 없고, 조아라 ( http://yard.joara.com/knight2000 )에서 소설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정식 역사소설은 아니고, 대체역사소설입니다. 나름대로 아쉽게 여기는 조선 철종 시대의 역사를 제맘대로 윤색을 시켜버린 "기린의 꿈"이라는 소설입니다. 역사 판타지라고 보시면 될 듯... 전자우편은 knight2000 (at) hanmail.net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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