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3/12 16:16

왕을 참하라 雜想

1. 왕을 살해하는 행동을 일컬어 시해(弑害) 또는 시역(弑逆)이라고 한다. 시살(弑殺)이라고도 하는 모양인데, 결국 단어의 핵심은 시(弑)가 되겠다. 《설문해자》에 따르면 弑라는 글자의 의미를 신하가 군주를 죽이는 것臣殺君也이라 설명하고 있다.

사실 생각해보면, 이런 글자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왕을 살해하는 것 자체를 일컫는 단어(글자)가 있다는 것은,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동시에 왕이 살해당하는 일은 일반적으로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기도 하다. 어느 문화권이나 마찬가지지만 유교 문화권에서라면 더더욱 끔찍한 범죄가 아닌가.

어쨌든 단음절에 집착하는 중국어(한장어족)의 특성, 그리고 현존하는 거의 유일한 표의문자인 한자의 특성상 저런 글자가 있다는 것은 일견 이해가 될법도 하다.


2. 그런데 왕을 살해하는 행동을 가리키는 단어는 한자 문화권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얼불노를 보다보니 발견하게 된 사실인데, 영어에도 저 행동을 가리키는 단어가 존재한다.


Regicide

바로 이 단어가 "국왕 살해"라는 뜻이다.

이 단어의 어원은 라틴어에서 나온 것인데, 왕을 뜻하는 Regis와 살해를 뜻하는 cida(ceade)가 합쳐진 형태이다. 그런대로 잘 알려진 단어인 제노사이드(Genocide)와 비슷한 형태다.

위키백과 영어판에 따르면, 이 단어는 넓은 의미로 왕을 고의로 살해하는 행동이나 그런 행동을 한 사람을 가리키지만, 영국에서 주로 사용되는 좁은 의미로는 재판을 거쳐 왕을 합법적으로 처형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한다. 월광토끼 님께서 장기 연재 중이신 영국내전의 결말(?)인 찰스 1세의 처형이 대표적인 케이스로, 어떤 의미에서는 왕을 합법적으로 처형해버린 영국 특유의 단어(?)이기도 하겠다. 물론 그보다 앞서 메리 스튜어트의 처형도 사례의 하나로 위키백과에서 언급되어 있지만, 아무래도 망명 군주의 처형과 실제 자국의 군주를 처형한 사건은 격이 다르다고 봐야겠다.

찰스 1세의 초상화



3. 위키백과에 연결되어 있는 다른 언어판을 보면, 로망스어 계통의 언어에서는 대부분 영어와 비슷하게 라틴어에서 어원을 둔 독자적인 단어로 등재되어 있고, 게르만어 계통의 언어에서는 왕과 살해라는 단어를 직접 붙여 놓은 합성어로 되어 있는 점을 파악할 수 있다. 물론 Regicide도 합성어라고 할 수는 있지만, 어원으로 보자면 원래 라틴어 계통에서 생긴 합성어가 유입되어서 단어화된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라틴어를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진짜 라틴어에 저 단어가 단독으로 존재하는지는 판단 불가. ㅡㅡ;;

대부분이 인구어족 쪽의 위키백과로 되어 있는 가운데 일본어판 위키백과가 유일하게 포함되어 있는데, 독특하게도 시해와 같은 고유한 단어가 아닌 王殺し를 표제로 하고 있다. 내용도 서양사 기준의 국왕 살해를 중심으로 설명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일본어에서는 시해와 같은 개념이 잘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중국어 위키백과에서는 시해에 대한 항목은 없으며, 시(弑)로 검색을 해 보면 춘추필법으로 연결되는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다. 춘추필법으로 연결된 것을 보면 중국어 위키백과에서 왕을 살해한다는 개념을 특수하게 보지 않고 있다는 해석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시(弑)라는 글자 자체가 현대 중국에서는 잘 사용되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어찌보면 당연할 것이 공산국가에서 "봉건 군주의 살해를 가리키는 단어"가 사용될 이유가 없다. 춘추필법에 연결시켜 놓은 것도, 단순히 살해하다는 의미에도 대의에 따라 다른 단어를 사용했던 전근대적인 병폐(?)를 지적하는 것이도 하다.

참고로 한국어 위키백과에는 관련 항목 자체가 없다. 뭐, 한국어 위키백과에는 있는 것보다 없는 게 더 많으니 크게 괘념할 바는 아니겠다.



4. 이렇게 국왕 살해라는 개념에 대한 각국(?)의 이해를 보면서 재미있는 생각이 들었다. 원칙적으로는 있어서도 안되고 실제로도 극단적인 상황인 국왕 살해를 가리키는 단어가 존재한다는 점은 아주 흥미롭다. 단순히 국왕 살해라는 표현처럼 그냥 평범한(?) 단어를 나열하는 정도가 아니라, 합성어일지언정 아예 독자적인 단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말이다. 한자 문화권에서는 아예 해당 글자마저 존재할 정도로 극단적(?)이기도 하고.

시(弑)라는 한자에는 더 독특한 개념이 추가되어 있는데, 신하가 왕을 살해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확장되어서 "부모를 살해하는 것"도 시(弑)라 표현한다는 점이다. 영어 사전에서 시역(弑逆)을 검색하면 Regicide 말고도 Parricide도 함께 제시된다. 존속살해라는 의미이다. 충과 효를 동일시했던 유교 문화권의 독특한 특징이 반영된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영어판 위키백과에서는 "살인으로서의 국왕 살해'라는 문단에서 왕권신수설의 영향을 받은 Regicide라는 개념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주로 프랑스에서의 사례를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국왕 살해에 대한 재판과 처벌의 가혹함에 대한 내용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영국의 대표적인 국왕 살해(좁은 의미)의 피해자가 영국 유이(?)의 왕권신수설 신봉자라는 점은 생각해 볼만한 주제다. 프랑스의 사례에서는 넓은 의미의 국왕 살해로서 그 가해자에 대한 판결을 설명하고 있는데, 정작 영국에서는 좁은 의미의 국왕 살해로서 "합법적인 판결로 살해된 국왕"을 말하고 있으니, 아주 재미있는 대비라 할 수 있겠다.


그냥 망상을 펼쳐보자면, 원칙적으로는 있어서는 안될 끔찍한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에서 끊이지 않았던 국왕 살해가 이러한 단어가 탄생하게 된 배경일 것이다. 또한 이러한 단어가 존재한다는 것은 명문화된 법이 존재하는 사법 판결에서도 종종 사용되었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 프랑스의 사례에서처럼 최악의 범죄로서 국왕 살해를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측면에서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봉건적 절대군주의 존재가 거의 사라져버린 21세기, 아마도 시해, Regicide라는 단어가 사용될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제는 사어가 되어 버릴 이 단어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는 것도 흥미롭지 않을까 싶다.


왕살해자 제이미 라니스터


ps. 위키백과 영어판 Regicide 항목에는 '문학 속의 국왕 살해'라는 문단이 있다. 여기에 얼불노가 언급되어 있다. ㅋㅋㅋㅋ 그런데 사실 항목의 내용은 어떤 면에서 보자면 잘못(?) 작성되어 있다. Regicide의 의미에 중점을 둔다면 제이미 라니스터가 미친왕을 살해하고 왕살해자(Kingslayer)라고 조롱을 당하는 것을 메인으로 설명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정작 원작에서 Regicide라는 단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게 된 것은 3부에서 스포일러가 독살되면서부터이다. 아무래도 제이미 라니스터의 행적은 과거의 일이다보니 그냥 왕살해자라는 조롱거리로 주로 사용되는데 반해 3부의 상황은 현재진행형이다보니... 게다가 제이미가 살해한 왕은 제이미가 아니었어도 어차피 잡혀서 죽었을, 말 그대로 미친왕이었기 때문에 범죄를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는 Regicide가 사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 얼불노에서 죽어나간 왕이 어디 한두 명이어야지....

덧글

  • Let It Be 2013/03/12 16:25 # 답글

    에이지오브엠파이어2를 해보시면 regicide모드가있는걸 확인햔수있습니다
  • 야스페르츠 2013/03/12 16:32 #

    오... 그 게임을 안해봐서 모르겠네요. 어떤 모드입니까?
  • Allenait 2013/03/12 16:40 #

    시작하면 성이랑 왕을 주고, 왕이 죽으면 남아 있는 병력에 상관 없이 무조건 지는 모드입니다.
  • K I T V S 2013/03/12 18:21 #

    Regcide모드를 보니.. 토탈 어나힐레이션, 킹덤즈가 생각나네요..

    암과 코어의 지휘관을 살해하니 전 병력이 몰살...

    아니면 4대륙의 영엄한 지도자들을 살해하니 곧바로 패배... 이런 것이었고...
  • 을파소 2013/03/12 16:29 # 답글

    그런데 이 제목을 보면 어느 재미사학자가 생각나서 말이죠.(...)
  • 야스페르츠 2013/03/12 16:32 #

    ㅋㅋ 일부러 그 분을 오마쥬하느라 이렇게 제목을 정했습니다. ㅋㅋ
  • 2013/03/12 16:43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3/12 18:29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유독성푸딩 2013/03/12 16:51 # 답글

    弑라는 글자가 쓰인 사례를 하나 더 보자면
    김구 사망 후 백범김구시해진상규명위원회가 구성된 적이 있습니다.
    박정희도 마찬가지고....

    왕, 부모, 사회적으로 명망 높은 인사 등...어쨌든 반인륜적(???) 살해 전체에 해당되는 글자인 것 같네요.
  • 야스페르츠 2013/03/12 18:30 #

    정확한 용법까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ㅎㅎ 근데 최근의 분위기를 보면 시해라는 용어는 전근대 군주에게나 쓰는 용어라는 인식이 있는 건 확실해 보입니다.
  • 피그말리온 2013/03/12 17:02 # 답글

    서양은 모르겠는데, 동양의 경우 중앙집권화 되기 전에 각 부족의 힘이 강하던 고대 왕국에서는 신하가 왕을 죽이는 일이 생각보다 흔치 않았을라나요...옛날에 비 안오면 왕이 덕이 없어서 죽였다 이런 얘기를 들어본 것도 같아서...
  • 야스페르츠 2013/03/12 18:31 #

    비 안온다고 왕을 죽이던 건 부여 쪽의 일입니다. 중국 쪽에서는 어땠는지 모르겠네요.
  • Esperos 2013/03/12 19:20 #

    전세계적으로 보면 그거 비슷한 사례는 꽤 많습니다. 왕이 말 그대로 자연력, 신성함과 관련이 되다 보니...
  • 효우도 2013/03/12 17:14 # 답글

    원래 이런식의 왕살해나 부친살해는 그리스 신화시대 부터 많이 써먹어온 클리셰죠. 부친, 선대의 왕을 뛰어넘거나 계승한다는 의미로.
    리치킹도 그렇고.
  • 야스페르츠 2013/03/12 18:32 #

    ㅋㅋ 왕위를 계승하는 중ㅋㅋ
  • HWA 2013/03/12 17:42 # 답글

    질문이 있습니다만, 弑害 라는 단어를 왕 이외의 대상에게 쓰면 전부 오용인가요?
    아니면 권력자를 하극상으로 죽일 경우 전부 해당되는 개념인가요?
  • 야스페르츠 2013/03/12 18:33 #

    그런 것까지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일단 현대에 김구나 박정희에게 실제로 사용된 용례가 있는 걸 보면, 꼭 왕에게만 쓰인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춘추》에서 정립된 용법상으로는 절대 불가에 가까울 것이라 봅니다.
  • 無碍子 2013/03/12 23:02 #

    조선왕조실록에 弑害는 세 번 나옵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노비가 주인을, 그리고 고종년간의 국모살해를 弑害라고 했습니다. 국모살해는 왜인이 아니라 逆魁亂黨의 짓으로 표기합니다.

    이리본다면 시해는 백성이 임금을, 아랫사람이 상전을 자식이 부모를 죽였을 때만 써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백범이나 박장군의 경우는 시해라고 해도 되지만 을미왜변의 경우 살해범과 피살자가 상하관계나 군신관계가 아니므로 시해라기보다 살해라고 쓰는 게 더 합당하다고 봅니다.

  • Esperos 2013/03/12 17:54 # 답글

    regicide를 영어 어원 사이트에서 확인해보니까 1540년대에 처음 사용된 단어라고 하는군요. 시弑에 비하면 단어의 역사가 짧네요.
  • 야스페르츠 2013/03/12 18:33 #

    그렇군요. 의외로 짧네요.
  • 행인1 2013/03/12 23:26 # 답글

    1. 제이미 라니스터 같은 경우는 직책이 직책이다보니 '왕 살해자'라는 호칭은 실로 경멸의 뜻을 담았다고 밖에는...;;;

    2. '합법적인 판결에 의한 국왕 살해'라니 루이 16세가 떠오르는군요. 어지되었던 재판은 재판이었으니 말입니다.(물론 당시 찬성표 던졌던 국민공회 의원들중 1815년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은 '보복'을...)
  • 야스페르츠 2013/03/13 20:03 #

    영어판 위백에서는 영국의 대표적인 사례가 메인이긴 하지만 하단에 다른 국가의 사례를 목록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루이 16세도 포함. ㅎㅎ
  • 검은하늘 2013/03/14 00:31 # 답글

    이외로 이런 단어들도 번역할 게 있어서 다행인데...

    서양 애들이 저런 단어를 알긴할까요?
  • 야스페르츠 2013/03/14 19:48 #

    허허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시해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이 수두룩할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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