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8/19 11:59

《위서》 두막루전에 대한 사소한 고찰 역사

0. 일전에 위키백과에서 두막루에 대해 엄청난 규모(?)의 키배토론이 벌어진 적이 있다. 토론의 핵심은 '과연 한국 역사학계는 두막루를 부여의 후계 국가로 인정하고 있는가'라는 것이었고,딱 한 사람만 제외하고 대부분의 판단은 부정적이었다. 어찌보면 간단하게 끝날 수도 있는 토론이었지만, 기묘하게도 며칠을 끌었던 토론은 부여계 설을 주장하던 한 사람의 판정승(?)으로 끝이 났다.

두막루가 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솔직히 나 역시 토론이 시작될 무렵에도 그냥 그런 나라가 있었지 하는 수준에 불과했으니까. 그리고 대다수 '부정론자'들도 실정은 비슷했다. 부정론자들의 주장은 한마디로 정리된다.

'학계에서도 그런건 관심이 없다.'

의외로 건설적(?)인 방향으로 발전했던 이 토론은 논문들을 디비파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고, 실제 디비파본 결과도 비슷했다. 현재까지 찾아본 바로는 두막루를 메인 주제로 하여 논문을 발표한 학자는 겨우 두 사람(김정배, 유태용) 뿐이며, 그 둘은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부여계설을 주장했다. 그외에 두막루에 대한 구체적-직접적인 연구는 거의 없다시피하다. 물론 당시 토론에서 찾아내지 못한 논문들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나마 부여사 연구 전반에 대하여 정리한 연구사 검토 수준의 논문(박경철 1992 백산학보, 2005 선사와 고대)에서 두막루가 언급되는 경우가 있는 정도인데, 독특하게도 위 논문에서는 '종래 학계의 견해'라는 독특한 제한(?)을 붙여서 '부정론이 대세'라는 시각을 펼치고 있다. 물론 부정론을 언급한 뒤에 긍정론을 소개하고 있기는 한데, 역시 '주목을 끌고 있다', '귀추가 주목된다'는 뻔한 정치적 수사(?)로 마무리짓고 있을 뿐이다.

해당 토론에서 대다수의 의견은 '일반적인 학계의 의견은 부정론'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올바르다는 것이었다. 사실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학계에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데, 아무튼 그래도 대세를 따지자면 부정론이다'는 정도. 이에 대한 부여계론 지지자의 주장은 좀 경천동지할 수준인데, '두 사람의 논문 이후에 반박 논문 같은 것이 없었으니 두 사람의 논문이 학계의 대세이다'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비판이 들어오자 조금 수정한 것이 '판정승'으로 바꾼 정도?


어쨌든 위 상황에서 토론은 거의 정체상태에 이르렀고, 결론은 나온 것이 없는 상태이다. 그리고 항시 뒤끝 작렬하는 소심대마왕 필자는 저 상황을 타개할(?) 회심의 카드를 어젯밤 떠올리고야 말았던 것이다. ㄷㄷㄷ


1. 두막루에 관한 가장 중요한 사료는 역시 《위서》 〈두막루전〉일 것이다. 위 사료의 내용은 그렇게 복잡할 것 없는 내용이긴 하다. 그런데 어젯밤 뒤끝 쩌는 망상 끝에 퍼뜩 떠오른 한 구절이 있었다. 두막루와 관련된 모든 논문에서 한 목소리로 언급하는 것이기도 한데, "두막루전에 기록된 두막루의 풍습이 부여와 일치한다"는 것이었다.

전근대 중국의 사료라는 것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있다. 일종의 우스개소리이기도 한데, 전근대 중국에는 저작권 개념이 없었다는 것. 잘 정리된 기록이 하나 있으면 그것을 그대로 복사+붙여넣기를 하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대체로 출처를 잘 명시하는 편이지만, 출처 같은 건 그냥 씹어먹고 복붙하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복붙 전통 덕분에 소위 "소실된 사료"를 복원하는 경우도 많다고 하니 어떤 의미에서는 다행스러운 전통이기도 하다.

위와 같은 전통이 조금 뒤틀려서 적용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리고 바로 위 사료에도 그러한 뒤틀림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망상을 어젯밤 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

그리고 결론은 역시나..............................................................................


한마디로, 《위서》 〈두막루전〉의 내용은 신뢰성이 없다는 결론이다.


2. 앞서 말했듯이, 위 사료에 적힌 두막루의 풍습은 부여의 풍습과 비슷하다. 아니, 엄밀히 말해 일치한다.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일치한다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복붙이라 의심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똑같기 때문이다.


부여에 대한 가장 기초가 되는 사료는 《삼국지》〈동이전〉인데, 두 사료를 한 번 직접 비교해보자.


豆莫婁國,在勿吉國北千里,去洛六千里,舊北扶餘也。在失韋之東,東至於海,方二千里。

其民土著有宮室倉庫牢獄. 多山陵廣澤於東夷之域最平敞
其人土著,有宮室倉庫。多山陵廣澤,於東夷之域最爲平敞。

土地宜五穀不生五果
地宜五穀,不生五果。

其人麤大性彊勇謹厚不寇鈔
其人長大,性強勇,謹厚,不寇抄。

國有君王皆以六畜名官有馬加牛加豬加狗加大使大使者使者. 邑落有豪民名下戶皆爲奴僕
其君長皆以六畜名官,邑落有豪帥。

食飮皆用俎豆
飲食亦用俎豆。

大人加狐狸狖白黑貂之裘以金銀飾帽
有麻布衣,制類高麗而幅大,其國大人,以金銀飾之。

用刑嚴急殺人者死沒其家人爲奴婢
用刑嚴急,殺人者死,沒其家人爲奴婢。

男女淫婦人妒皆殺之已殺尸之國南山上至腐爛女家欲得輸牛馬乃與之
俗淫,尤惡妒婦,妒者殺之,尸其國南山上至腐。女家欲得,輸牛馬乃與之。

蓋本濊貊之地
或言本穢貊之地也。

붉은색은 〈두막루전〉으로 전문(全文)이다. 푸른색은 〈동이전〉 부여조로 관련된 부분만 인용한 것이다. 행구분은 임의로 했다.

솔직히 이 정도면 빼도박도 못하고 복붙이다. 유일하게 다른 부분은 하단에서 4번째 행인데, 의복에 대한 설명으로 앞부분의 복색 일반에 대한 구절은 고구려와 흡사하다는 내용이지만, 뒤의 대인의 복색에 대한 내용은 또 〈동이전〉과 대동소이하다.


3. 〈두막루전〉의 내용이 복붙이라는 점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역밸 제현들이시라면 잘 아실 것이다. 이러한 복붙이 말해주는 것은 분명하다. 최대한 긍정적으로 바라보아도 "두막루 풍습을 보니 부여랑 비슷하네? 귀찮은데 〈부여전〉 복붙"이라는 결론 밖에는 안나온다. 그리고 제대로 사료비판적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악의적으로 말해 "두막루가 부여의 후계라고 자칭하네?(혹은 저 동네 원래 부여 땅이잖아? 그럼 부여 후계겠네.) 그럼 〈부여전〉 복붙"이라는 결론도 충분히 가능하다.

한마디로 사료의 신뢰성을 보장받기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게다가 이 내용이 실린 사료가 무엇인가? 예사(穢史, 더러운 역사서)로 유명한 《위서》가 아닌가! 그리고 심지어, 이 《위서》는 일부분이 유실되어 《북사》로부터 복원하는 참혹한(?) 전래 과정을 거치기도 했다. 아직 확인을 하지는 못했지만, 《북사》〈두막루전〉의 기록이 《위서》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이 부분도 복원된 부분일 가능성이 있다. 복원된 부분이라면 사료의 신뢰성이 더더욱 곤두박질치게 될수도 있으리라.

이렇게 신뢰성이 떨어지는 기록을 그대로 신뢰하면서 "풍습까지 똑같네. 역시 부여의 후손"이라 주장하는 것을 인정해줄 수 있을까?


4. 〈두막루전〉을 제외하면 두막루에 대한 기록들은 더욱 적어지게 되는데, 그 중에서 두막루의 출자를 전하거나 암시하는 기록은 아래와 같다.

開元十一年又有達末婁達妒二部首領朝貢達末婁自言北扶餘之裔高麗滅其國遺人度那河因居之或曰他漏河東北流入黑水
《신당서》〈동이전〉

語與庫莫奚、契丹、豆莫婁國同。
《위서》〈실위전〉


《신당서》의 기록은 "두막루의 자칭"을 전하고 있다. 하지만 그 자칭을 뒷받침할 근거는 부재한 상황이다. 그리고 〈실위전〉의 기록에는 치명적인 기록이 있는데, 실위와 두막루의 언어가 같았다는 것이다. 부여계 언어는 고구려를 비롯한 요동 일대 제국들의 공통어 수준으로 널리 퍼져 있는데, 정작 두막루는 언어부터가 부여계가 아닌 실위계, 즉 북방유목민족 계통 언어라는 것이다.



5. 실제 박경철의 연구사 검토에서도 〈두막루전〉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두막루를 부여의 후계 국가로 보는 것에 회의적인 시각이라는 견해를 종래 학계의 견해로 소개한 바 있다. 그 회의적인 견해의 대표로 언급된 것은 노태돈과 박경철의 주장인데, 사실 현재까지도 두 주장을 직접적으로 확인해보지는 못한 상황이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박경철이 "연구사 검토"에 가까운 논문에서 본인의 주장을 대세로 서술한 점은 좀 치사한(....) 면이 엿보이기도 한다.

어쨌든 시론격 논문에 인용된 해당 회의론을 살펴보면 부여가 멸망한 뒤 부여의 옛 땅에 실위계-북방민족계통의 부족이 흘러들어와 살았고 후에 두막루를 건국했다는 입장(박경철)과 두막루인으로 상정되는 집단은 원래 그곳에 있었고, 후에 고구려가 세력을 확대함에 따라 고구려 및 부여를 인식하고 부여 멸망 뒤 흘러들어온 부여계 유민을 받아들이면서 부여의 후신을 자처하게 되었다는 입장(노태돈)이 있다. 박경철의 경우 이렇게 흘러들어온 前두막루가 고구려에게 밀려 북방-사료상의 두막루 영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는 해석이며, 노태돈은 부여의 유민이 흘러들어간 것이 해당 "밀려난 기록"으로 와전되었다고 본다.

엄밀히 말해 노태돈과 박경철의 논문은 모두 "두막루"를 주제로 삼은 것이 아니다. 역시 확인한 사실은 아니지만, 추측컨대 핵심 주제가 아니다보니 〈두막루전〉에 대한 사료비판이 없거나 부족하고, 그래서 〈두막루전〉을 왜 신용하지 않는지에 대한 충분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6. 이렇게 쓰다보니 필자의 연구사 검토(....)가 참으로 빈약하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긍정론의 두 논문도 역시 읽어보지 않은 상태라는 사실을 또 고백해야 하게 되었으니;;;;;;;;;;;;;;;;

박경철의 시론에는 앞서 나온 논문인 김정배의 논고만 "주목을 끌고 있는"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 유태용의 논문은 박경철의 시론보다 뒤늦게 나온 것이라(2004) 언급이 없는 상황이다. 어쨌든 김정배의 논고에서는 〈두막루전〉을 그대로 신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약점이라 할 수 있는 기록인 언어 문제는 단순히 "주변 세력의 영향에 따라 변화한 것"이라 인용되고 있을 뿐이다.

이 사소하다면 사소할 고찰을 시도하기 전까지 필자는 긍정론의 "언어 문제 해결책"을 대수롭지 않게 보고 있었는데, 〈두막루전〉의 신뢰성에 대해 심대한 의혹을 품게된 현재 긍정론의 해결책은 상당히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생각된다. 언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바뀔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김정배의 논고는 기본적으로 북부여와 부여를 구분하는 견해를 기반으로 하여 성립되기 때문에, 두막루의 영역 자체가 옛 북부여의 영역으로 되돌아간 것으로 상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다못해 원주민-피지배층의 언어에 영향을 받았다는 핑계(?)도 대기 어렵다. 그 땅은 원래부터 (북)부여의 영역이었으니까.


7. 이렇게 고찰을 하고 나니 그 동안 위키에서 벌였던 며칠에 걸친 키배가 허탈해지기까지 한다. 아직 가설 수준에 불과한만큼 위키백과에서 다시 토론을 열기에는 부족한 상태이다. 하지만 좀 더 연구사를 검토(....)하고 내용을 정리하면 적어도 유의미한 수준의 태클은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간만에 거의 밤을 새다시피하며 사료를 주물럭거렸구나.

호랑이 장가가는 날, 날백수 필자 씀.

덧글

  • 앨런비 2012/08/19 14:13 # 답글

    고기먹다 퇴각하고 한게 그거셍 'ㅅ'?
  • 야스페르츠 2012/08/19 14:34 #

    그런 거 아님. 폭풍 음주후 숙취에 시달리다가 유레카! ㄷㄷㄷ
  • 구천사백수십칠 2012/08/19 14:38 # 답글

    우윀 복붙 -ㅠ-
  • 야스페르츠 2012/08/19 14:41 #

    복붙의 폐해...
  • 놀자판대장 2012/08/19 16:03 # 답글

    소심이라고 하실 것 까지야.. 건설적인 토론을 이어갈 수 있다면 그걸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거죠.
  • 야스페르츠 2012/08/19 17:57 #

    건설적인 토론이라 쓰고 키배라고 읽는거죠. ㅋ
  • 초록불 2012/08/19 17:01 # 답글

    두막루는 부여의 후손이라고 알고 있었는데...(어디서 주워들었던 건가...-_-;;)

    그때문에 언어 문제가 혼란이 와서 골치가 아팠던 기억이...(요즘은 이런 데 신경을 안 쓰다보니...)

    두막루가 "자칭"이었고, 사실은 다른 족속인데 기록이 "복붙"이어서 그렇다면 해결이 될 수 있기도 하네요.
  • 야스페르츠 2012/08/19 17:58 #

    사실 언어 문제는 상당히 심각한 부분인데 말이죠. 긍정론 측이 너무 쉽게 간과해버린 감이 있습니다.
  • 耿君 2012/08/19 21:53 # 답글

    잘 읽었습니다. 충분히 논의할 만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원체 사료가 부족하여 결국 실체를 밝히기는 매우 어려울 듯 합니다.
  • 야스페르츠 2012/08/19 23:12 #

    어차피 확답은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죠.
  • 천리주단기 2012/08/21 23:36 # 삭제 답글

    조만간 토론(키배?!)이 재점화되는 건가요? 무운(!)을 기원합니다..;;
  • 야스페르츠 2012/08/22 00:55 #

    헉... 반갑습니다. 그런데 조만간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
  • 누군가의친구 2012/08/25 06:46 # 답글

    이건 과거판 Ctrl+C, Ctrl+V군요.ㄱ-
  • 야스페르츠 2012/08/25 18:53 #

    전근대 사료에서는 흔한 일이었죠. 다만 이렇게 뒤틀린 건 좀 적지만. ㅎㅎ
  • ㄱㄷㄴ 2012/09/01 09:32 # 삭제 답글

    두막루는 유목국가입니까 농경국가입니까
    위서에는 왕궁도 짓고 농사도 짓는다고 나와있는데
    만약 진짜로 복붙한거라면 두막루는 걍 실위족의 일파인 유목국가라는 건데.....
  • 야스페르츠 2012/09/02 20:29 #

    그, 그런 건 몰라효. ㄷㄷㄷ
  • 마에스트로 2012/09/01 17:35 # 답글

    언어의 문제도 생각해 볼 일이었군요. 흠.....
  • 야스페르츠 2012/09/02 20:29 #

    사실 언어가 제일 중요하죠.... ㄷㄷㄷ
  • 아사달 2012/10/06 12:11 # 삭제 답글

    두막루는 유목 국가가 아니라 부여와 마찬가지로 농경 국가였습니다.
  • 아사달 2012/10/06 12:12 # 삭제 답글

    아래 내용을 참고해 주세요.
    "두막루의 문화는 부여의 문화와 동일했다. 주변의 물길과 실위가 유목, 수렵, 어로에 종사했던 것과 달리, 두막루 사람들은 넓은 평원에서 농경 생활을 하면서 오곡(五穀)을 기르고 집과 창고를 지었다. 《위서》(魏書) 물길전에 따르면, 물길(勿吉)은 "두막루 등의 나라를 항상 깔보며 여러 나라들도 이를 두렵게 여긴다"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 두막루는 농경 민족으로서 물길과 실위 등 유목 민족의 침략을 상당히 두려워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두막루의 군장(君長)은 여섯 가축의 이름으로 관직명을 삼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임금 아래에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대사자, 사자 등 가축의 이름을 딴 관직명을 사용했던 부여의 풍습과 일치한다."
  • 아사달 2012/10/06 12:37 # 삭제 답글

    다음 단행본 서적에 두막루에 관해 자세한 설명이 나옵니다. 서점에서 판매하니까 구해서 읽어보세요.
    - 김정배 저, 《한국고대사와 고고학》, 신서원, 2000년 8월 29일.
    참고로 저자인 김정배 교수는 고려대학교 총장, 한국고대사학회 회장 등을 지낸 이 분야의 최고 권위자입니다.
    - 유태용, 〈두막루국 흥망사 연구 시론〉, 《백산학보》 제70호, 2004년 12월, 141~159쪽.
    그리고 이 유태용 논문이 가장 최신의 연구 결과입니다. 기존의 모든 연구를 리뷰하고, 총정리한 논문입니다.
    Xakyntos 님이 마음대로 추측을 남발하는 것은 자기 자유이겠으나, 적어도 학계의 논문 2편 정도는 읽어보고 글을 쓰시는 것이 좋을 듯하여, 알려드립니다.
  • 아사달 2012/10/06 12:46 # 삭제 답글

    두막루에 관한 기록은 중국 《위서(魏書)》 두막루조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북사(北史)》 두막루전에도 나오고, 《신당서》(新唐書)의 유귀전(流鬼傳)에도 나옵니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의 권1 부여 편에도 나옵니다. 이 사료들의 공통점은 모두 '두막루'는 부여를 계승한 후계 국가라고 서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게 모두 "더러운 예사"인가요? Xakyntos 님의 이런 주관적 해석과 잘못된 추측이 얼마나 많은 잘못된 역사 인식을 퍼뜨리는지 생각해 보시고, 앞으로는 좀 신중히 글을 써 주시기를 거듭 당부드립니다.
  • 아사달 2012/10/06 17:55 # 삭제 답글

    언어에 대해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두막루의 언어가 원래 부여의 언어와 동일했으나 이후 주변 민족의 영향으로 변경되었다는 사료 해석(김정배, 유태용 등)에 대해서 저는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동의'하는 편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중국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자주 가는데, 조선족들의 언어가 불과 60년만에 중국어와 상당히 많이 동화된 것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일상생활 용어에서도 조선족 언어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중간중간에 계속하여 한족말(즉, 중국어)를 마구 섞어서 사용합니다. 예를 들면, "제가 고중을 필업하고 설계 방면에 흥취가 있어서..."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한국어로 제대로 번역해 보면,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디자인 분야에 흥미가 있어서..."라는 뜻입니다. 필업=졸업, 설계=디자인, 흥취=흥미... 이런 것들이 전부 중국어에서 온 단어들입니다. 불과 60년만에 이렇게 언어가 많이 달라지는데, 두막루처럼 300년간이나 지나면 당연히 언어가 많이 달라질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김정배, 유필용 논문에서 언어에 대해 해명한 부분에 대해 '동의'를 하는 편입니다. 참고하세요.
  • 야스페르츠 2012/10/06 19:55 #

    별로 설득력이 없는 경험입니다. 조선족은 애초에 "국가" 단위로 격리-혼합된 사례로, 아예 개별 국가로 독립해 버렸다고 주장되는 두막루의 사례와는 전혀 무관합니다. 언어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한 부여계설의 약점입니다. 인구어족이 가득한 유럽 한복판에서도 순수 고립어인 바스크어는 끝까지 살아남았습니다. 상당히 오랜기간동안 독립국가도 아니었고, 심지어 주변의 모든 지역이 완전히 다른 어족인 상황이었는데도 그러했습니다.

    게다가 귀하의 경험 역시 언어학을 조금만 들여다보아도 치명적으로 약점이 생기는 문제입니다. 애초에 언어에서 "단어의 차용"은 너무나도 흔한 일입니다. 단적인 예로 일본어는 현재 영어에서 비롯된 외래어가 일본 고유 단어 및 한자어를 대체하는 현상이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죠. 조선족의 사례 역시 그러한 단어의 치환일 뿐, 언어의 변화라는 것은 귀하의 "잘못된 추측"일 뿐입니다.

    두막루요? 같은 부여계(?) 언어의 종주국인 고구려와 바로 국경을 맞대고 있고, 근방에 부여의 유민들도 수두룩했으며, 심지어 국가가 위치한 지역 자체는 부여계도 아니고 말갈계 언어인 퉁구스어족 집단이 더 가깝지 실위와 같은 몽골계 언어 집단과는 거리도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생각할수록 치명적인 약점이군요.
  • ㄴㄴ 2012/10/08 20:30 # 삭제

    개인적인 경험상 그런 식의 단어 혼용은 외국 유학 생활 6개월 정도만 해도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중 언어 생활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됩니다. 60년만에 달라지기는 무슨...-_-;;

    겨우 그런 걸 가지고 언어가 동화되었다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습니다.
  • 민소정 2012/10/07 23:04 # 삭제 답글

    達末婁, 大莫婁/盧 등의 이칭이 보이고, 수령의 이름이 諾皆諸군요.
    皆諸는 고구려어로 '왕'을 뜻하는 皆次(> okm 긔ㅈㆍ)와 같은 거일 겁니다.

    국호는 조금 당황스럽네요. 뒤의 2글자는 malo 비슷하게 읽혔겠지만, 達, 大, 豆은 발음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강 이름 他漏河의 他漏가 아마 국호의 達 또는 豆랑 같은 것 같은데... 達이 가장 기본형에 가깝겠고.
    극단적인 유음의 모음화를 상정하면 대충 때려맞출 수 있긴 합니다 (達+-i > 大, 達+-u > 豆).
    他漏가 1음절인지 2음절인지는 불명확하네요. 達의 coda가 r인지 l인지도 알 방법이 없어 보입니다.
  • 야스페르츠 2012/10/08 20:46 #

    흠... 언어는 어려운 문제입니다. ㅡㅡ;;
  • ㄴㄴ 2012/10/09 20:41 # 삭제

    고구려어로 '왕'을 뜻하는 말은 皆次가 아니라 그냥 皆, 可, 家 정도입니다. 긔ㅈㆍ는 남방어이고 고구려어와는 관계없습니다.
  • 아사달 2012/10/11 14:02 # 삭제 답글

    물론 야스페르츠 님이 제시한 사례처럼 수천년이 지나도록 자신의 언어를 지키는 경우도 있겠으나, 그렇지 않은 반대 사례도 많습니다. 아시다시피, 만주에 살던 수많은 민족, 부족들이 현재 90% 이상 중국 한족으로 동화되어 언어가 없어졌습니다. 거란족, 말갈족, 여진족, 만주족, 전부 언어가 없어졌습니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망한지 겨우 60여 년만에, 언어 자체가 한족 말에 동화된 경우입니다. 저희 회사 직원 중에 중국인이 좀 있는데, 민족은 만주족이지만 자신은 만주어를 한 마디도 모른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만주어를 하시고, 아버지는 몇 마디 알아들으시는데, 자기는 아예 한 마디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언어는 다양한 경우가 있으므로, 속단하기는 어려운 듯 합니다.
  • 야스페르츠 2012/10/11 17:26 #

    그 경우도 국가를 상실해 버린 경우에만 해당할 뿐입니다. 국가를 멀쩡히 온존하고 있는 민족/어족이 아무런 이유 없이 언어가 바뀌는 일은 없습니다. 게다가 "주변 언어"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에는, 두막루가 위치한 지역 자체가 선비계 언어와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오히려 영향을 받았으려면 선비계가 아니라 말갈계의 영향을 받아야 정상이죠. 찬성론 쪽이야말로 속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ㄴㄴ 2012/10/11 23:34 # 삭제

    뭔가 착각하고 계시는데 만주어는 한어에 '동화'된 게 아닙니다. 사용자 수가 줄면서 소멸된 거죠.
    만주어 자체는 死語로서 여전히 존재합니다. 다만 현실에서 상용하는 화자가 더 이상 없을 뿐입니다.
  • 아사달 2012/10/14 14:00 # 삭제 답글

    두막루에 대한 중국 측 여러 사서들의 내용은 매우 일관되게 "두막루는 부여의 유민들이 부여 멸망 직전에 옛 북부여가 있던 지역으로 옮겨가서 세운 국가이다. 풍습은 부여와 동일했고, 300년간 존재했으며, 당나라 때 두막루 대수령 낙개제가 조공을 와서, 두막루는 북부여를 계승한 나라이다라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만, 딱 한 가지 약점이 있다면, 두막루의 언어가 "고막해, 실위"와 같았다는 기록이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대한민국 역사학계의 김정배(한국고대사학회 회장, 고려대총장), 유태용 등의 학자들과 중국의 역사학자 쑨진지(중국 역사학계의 대부, 동북공정의 주역), 간즈겅 등은 두막루는 부여의 후계 국가가 맞으며, 언어는 원래 부여계였으나 후에 주변 민족의 영향을 받아서, 예맥계+동호계의 혼합으로 본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게 학계의 공식 의견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Xakyntos 님이 자신의 독자 연구를 바탕으로 반론을 제시할 수는 있으나, 아직은 근거가 취약한 듯 싶습니다. 두막루에 대해서 가장 취약한 부분인 언어 문제에 대해서도 語與庫莫奚、契丹、豆莫婁國同。이 문장 한 줄뿐인데, 아시겠지만 이 기록은 두막루의 부여 계승설을 부정하는 노태돈, 박경철 논문과 서로 차이가 있습니다. 이 기록이 설령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두막루는 거란과 언어가 비슷했다(같다?)고 되어 있지, 몽골 계통과 언어가 같다는 기록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두막루를 몽골 계통으로 봐야 할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두막루에 대해서는 부예의 후계 국가이거나, 아니면 언어로 볼 때 거란족과 유사하거나 둘 중에 하나인 것이지, 몽골족이라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는 추측에 불과합니다. 현재 대한민국 및 중국 학계의 의견은 부여계로 보는 것이 정설(통설, 다수설)이고, 반대 의견은 거의 없는 상태입니다.
  • 아사달 2012/10/14 14:12 # 삭제 답글

    두막루를 몽골족으로 보는 것은 어떠한 사서의 기록도 없는 막연한 추측에 불과하며,거의 모든 사서(그래봐야 몇 개 없지만)는 부여계로 보고 있으며, 오직 언어 문제를 근거로 거란계(동호계)로 해석할 여지는 남아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고막해는 '해' 부족의 일종이고, 거란족과 마찬가지로 '동호계'이며, 후에 거란에 흡수되었습니다. 고막해, 해, 거란, 동호 모두 몽골계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두막루는 부여계이든지 아니면 언어 기록을 근거로 거란계든지 둘 중에 하나로 봐야 하는데, 그 지리적 위치를 볼 때 거란과는 매우 멀리 동떨어져 있습니다. 두막루의 지리적 위치는 예전 고리국(=색리국=탁리국)이 있었던 곳으로 오늘날 송화강 북쪽에 있는 송눈평원 지대로서, 요동에서 주로 활동했던 거란족과는 지리적 위치가 매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이 점이 두막루=거란계통으로 보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입니다.
  • 아사달 2012/10/14 14:15 # 삭제 답글

    아시겠지만, 두막루의 영토는 이후 발해로 계승되었습니다. 두막루는 거란이나 말갈 혹은 몽골로 계승된 것이 아니라 발해로 계승되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학계에서는 두막루국가 서기 726년경 발해와 흑수말갈에게 멸망하여 국토가 두 나라에 양분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당시 발해는 무왕 대무예(大武藝)가 북진정책을 펼치면서, 제1송화강 중류를 경계로 하여 흑수말갈과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이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던 두막루는 발해와 흑수말갈의 대립 속에서 독자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고, 결국 나라를 빼앗겨 멸망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두막루가 있던 지역은 이후 발해의 전성기 때 철리부(鐵利府)와 회원부의 관할에 소속되어 발해의 영토로 흡수되었습니다.
  • 야스페르츠 2012/10/14 17:35 #

    1. 기본부터 잘못 알고 계십니다. 두막루의 언어를 "몽골계"라고 보았던 견해는 해당 사료의 주어가 "실위"였기 때문입니다. 과거 토론 과정에서 제가 실수해서 확인하고 정정 사과까지 했던 문제인데 갑자기 뜬금없는 말씀을 하십니까? 거란이나 고막해 등은 실위와 언어가 같은 사례로 두막루와 함께 거론된 것으로, 귀하의 해석은 뿌리부터 틀린 억측입니다.

    2. 벌써 몇번이나 말씀드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귀하께서 말씀하시는 "일관성"은 실체조차 존재하지 않는 허구입니다. 중국은 물론이고 국내 사료까지 "일관되게" 기록되어 있는 기자조선을 또 사례로 들어 드려야 하겠습니까?
    3. 도대체 토론 상대방의 말을 인풋을 제대로 하시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지경입니다. 말씀을 드리면 그것에 대한 피드백이 있어야 하는 법인데 귀하께서는 계속 상대방의 말을 아예 이해조차 못하시고 본인의 말씀만 계속 반복하시는군요. 점점 더 아사달 님께 실망만 하게 만드십니다.
  • 아사달 2012/10/14 20:02 # 삭제 답글

    각종 사서의 기록은 두막루가 부여계통의 국가임을 반복하여 적고 있습니다. 유일한 약점(?)이 "실위의 언어는 고막해, 거란, 두막루와 같았다"는 <위서>의 기록인데요. Xakyntos 님 본인이 <위서>의 기록이 신빙성이 많이 떨어진다고 했으니, 언어에 관한 이 기록도 혹시 신빙성이 떨어지는 말은 아닐까요? 수천년 전에 일어난 일이라 저도 뭐가 진실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실위=몽골계(칭기즈칸의 선조)이고, 고막해=거란=동호계이고, 두막루=부여계인데, 이 3개의 서로 다른 부족(종족 or 민족?)의 언어가 서로 같았다고 서술한 저 <위서>의 기록이 좀 신빙성이 떨어지지 않을까요? 아니면, 세 그룹의 언어가 다 같은 우랄-알타이어 계통이기 때문에, 한족의 언어와 많이 달라서, 그냥 같은 계통의 언어라고 기록한 것은 아닐까요? 그럴 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야스페르츠 2012/10/14 20:36 #

    1. 그 반복이 아무리 많아봤자 원본 사료 하나만 비판하면 모조리 다 꽝이라고 몇 번을 말씀드려야 알겠습니까? 그 반복은 애초에 "증거" 자체가 아닙니다. 반복이라는 용어를 답습이라고 바꿔 보면 자명하게 드러나죠.

    2. 사료비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시니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제가 《위서》의 기록이 의심스럽다고 한 것은 《삼국지》를 복붙한 수준의 기록임을 사료비판을 통해서 입증하려 한 것입니다. 〈실위전〉의 기록과는 다르죠. 〈실위전〉은 베껴 쓴 사료로 의심되는 것이 없으니까요. 같은 책이라고 해도 해당 부분의 상황에 따라 사료의 가치는 달라집니다.

    3. 게다가 동호(東胡)가 뭔지도 모르고 계시기에 역시나 아사달 님은 그런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동호의 정체 자체가 오리무중이긴 합니다만, 동호와 연관성이 있는 북방민족에는 엄연히 "몽골"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애초에 동호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해석은 몽골계와 퉁구스계가 혼합된 상태로 말하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부족이라고 보기도 힘들 뿐더러, 심지어 실위 역시 몽골계와 퉁구스계의 혼혈로 해석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즉, 실위 ≒ 고막해 ≒ 거란 ≒ 두막루인 상황이므로 여기서 두막루 혼자만 생뚱맞은 상태죠. 가장 간단한 해석은 두막루가 잘못 껴들어갔거나, 아니면 두막루가 부여가 아니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애초에 사료비판과 같은 외적 비판에 해당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귀하의 이번 의문 역시 허수아비치기가 되겠습니다.
  • 아사달 2012/10/14 21:57 # 삭제 답글

    1. 두막루의 언어에 대해 예맥계(=부여계)와 동호계(=거란계)의 혼합이라고 보는 학계의 견해가 있습니다. 시기적으로 보면, 두막루 국가 성립 초기에는 부여계 유민들이 건국하였으므로 부여계 언어에 가까웠을테지만, 300년이나 지난 후기에는 동호계 언어에 가까웠다고 학자들이 해석하고 있습니다. 실위(몽골)≒동호(거란)으로 보는 점은 상당히 논리적 비약이 있는데, 어쨌든 그 점과 관련하여, 두막루를 단일 민족 국가가 아닌 다민족 국가(부여계+동호계)로 볼 가능성은 없을까요? 그럴 경우 거란≒두막루 언어 등식도 성립하게 되니까요.
    2. 두막루의 대수령 낙개제(諾皆諸)라는 인물 아시죠? 당나라 현종 개원 12년(서기 724년)에 당나라에 와서 조공했던 인물입니다. 스스로 북부여의 후계라고 "자처"한 인물입니다. 정말 후예라서 자처한 것인지, 정치적 목적으로 후계를 자처한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북부여의 후계라고 자처하는 것이 두막루 입장에서 유리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는 있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쨌든 두막루는 곧 멸망했고, 영토는 모두 발해로 편입되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발해 부여부의 대수령 낙사계(諾思計)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같은 낙씨이고, 시대적으로도 거의 비슷하고, 직책도 '대수령'인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같은 Family일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낙사계는 한국사의 인물로 볼 수가 있습니다. 발해 부여부의 대수령이었으니 당연히 한국사의 인물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같은 Family인 것으로 "추측"되는 두막루의 낙개제 역시 한국사의 인물로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야스페르츠 2012/10/14 22:10 #

    1. 남이 말을 하면 좀 들으십시오. 동호, 실위, 거란 모두 역사가들의 해석상으로는 몽골계 + 퉁구스계의 혼혈이라니까요? 셋 다 동일한 계통이란 말입니다. 논리적 비약은 지금 귀하께서 하고 계시단 말입니다.

    2. 관심 없습니다. 저는 애초부터 두막루 자체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건 아사달 님께서 연구하시던가 찾아보십시오. 저는 관심 없으니.
  • ....-_-;; 2012/10/15 02:50 # 삭제

    애초에 동호계랑 몽골계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엄청난 병크인데...;;
    심지어 거란조차도 몽골계로 분류되고 있는 실정인데, 실위와 거란이 다른 계통이라니...

    이 분 진짜 뭔가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나 봅니다. ㅡㅡ;;
  • ....-_-;; 2012/10/15 15:22 # 삭제

    애당초 사료상으로도 실위와 거란은 같은 계통이며, 남쪽에 있던 자는 거란이라 불리고 북쪽에 있던 자는 실위가 되었다고 나옵니다. 그리고 그 실위의 일파인 몽올실위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몽골입니다.

    즉 동호≒거란≒실위≒몽골이며, 동호계=몽골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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