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5/16 15:18

《얼음과 불의 노래》 보면 볼수록 감탄스럽다 잡담

얼불노의 작가 조지 R. R.마틴의 내공이 참 놀랍다는 걸 느낀다.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번역판이 엉망이라서 문제일 뿐, 원작에서 엿보이는 작가의 내공은 정말 상상을 초월한다. 근래 원문으로 보면서 새삼 느끼는 사실이다. 많은 판타지 소설이 있지만, 그 가운데 이 정도로 자신이 창조한 세계에 대한 이해가 풍부한 소설이 몇이나 있을까? 아마 톨킨이 창조한 Middle-earth 말고는 없을 것 같다.


작가의 놀라운 내공을 보여주는 예를 들어보자면, 지명이 있겠다.

얼불노의 지명들은 모두 현실적이고 의미를 가진 것들이다. 솔직히, 우리가 영어 발음으로 된 이름만 들어서 멋있어 보일 뿐, 실제 지명들의 뜻을 생각해보면 정말 "촌스러울 정도로" 현실적이다. 왕국의 이름은 세븐킹덤즈, 별거 없이 그냥 칠왕국이라는 단순한 이름이다. 당연히 칠왕국을 구성하는 각각의 지명들이 존재하며, 그 지명들 역시 지극히 현실적이다. 동서남북의 네 방위에 있는 국가들은 그저 동부(The east), 서부(The West), 남부(The South), 북부(The North)라는 이름이며, 리버랜드(Riverland)라는 이름은 다른 거 볼 거 없이 그냥 강의 땅, 또는 강의 나라 정도의 의미이다. 스톰랜드(Stormland)도 마찬가지. 도른(Dorne)은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특별한 의미는 역시 없을 것 같다.

세부적인 지명들도 마찬가지다. 왕국의 수도인 킹스 랜딩(King's Landing)은 왕국이 건국될 때 왕이 처음 상륙한 땅이라는 뜻이다. 그냥 "왕의 상륙"이라는 의미인 아주 단순한 단어인 것이다. 스톰랜드의 수도는 스톰즈 엔드(Storm's End). 신들이 일으킨 폭풍도 이겨냈다는 전설이 있으며, 그냥 의미 그대로 폭풍의 끝이라는 의미다. 서부의 캐스틀리 록(Caterly Rock)에는 현자가 캐스터 가문을 속여서 쫓아낸 곳이라는 전설이 전해진다. 캐스터 가문과 바위(Rock)가 연관된 지명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북부의 수도 윈터펠(Winterfell)도 fell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수는 없지만 어쨌든 겨울언덕, 겨울이 떨어짐, 겨울의 사나움, 이런 식으로 겨울과 Fell의 결합이라는 것은 단번에 추론이 가능하다. 리버랜드의 수도는 리버런(Riverrun)... 무슨 할 말이 있을까? 동부의 수도 에이레는 우리나라에서 골때리게 음역을 해서 정체를 모르는 사람들도 있을텐데, 둥지라는 의미의 이어리/에어리(eyrie)라는 단어이다. 드라마를 보면 알겠지만 이 성은 까마득히 높은 곳에 위치해서 거의 허공에 떠 있다시피 하며, 둥지 그 자체다.

도시들 뿐 아니라 다른 지명들도 현실적이면서도 매력이 넘친다. 리버랜드 중앙을 흐르는 강의 이름은 트라이던트,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3줄기의 강이 합쳐지는 큰 강이다. 트라이던트가 삼지창이라는 건 다들 알테고... 북부와 나머지 지역(남부로 통칭)의 경계가 되는 지역의 지명은 넥(The Neck)... 목이다... 피요르드 해안처럼 해안선이 들쭉날쭉한 지역의 이름은 The Fingers, 3개짜리 섬의 이름은 Three Sisters....

이런 식으로 작중에 나오는 지명들은 모두 하나 같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 수 있는, 아주 현실적이면서 고풍스러운 지명들이다. 모두 지형을 나타내거나, 그 지역의 지배자들과 관련이 있거나, 아니면 무엇인가 전설이 얽혀 있는 아주 매력적인 세계관의 설정이다. 이런 요소들이 없는 지명도 대부분 아주 단순한 단어들로 구성되어 있다. 곰섬(Bear Island)이나 강철군도(Iron Islands)처럼. 멋을 부리지 않고 돌직구로 된 이름들이라고나 할까?

과연 톨킨의 세계관을 제외하고 현존하는 판타지 소설이나 기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 소설 가운데 이렇게 지명에서까지 현실적인 세계관을 갖춘 소설이 있을까? 대개는 그저 멋이나 부리느라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서양의 지명이나 단어들을 가져다 붙이는게 고작일 것이다.

번역본으로 보았다면 아마 무슨 의미인지 절대로 알아챌 수 없었을 요소들도 있고, 여러모로 원서로 읽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주 잘 빠진, 아니 후세에 회자될 명작을 보고 있는 것 같다. 후후후

덧글

  • rumic71 2012/05/16 15:31 # 답글

    <코난>시리즈의 아키로니아라든지, 하이보리아라든지, 킴메리아 등등 로마삘 팍팍 나는 이름이 더 멋스럽긴 하지요. 사람 이름도 그렇지만, 고대를 배경으로 하는데 영어가 튀어나오면 웬지 시대가 맞지 않는 듯한 위화감이...
  • 야스페르츠 2012/05/16 15:36 #

    ㅎㅎㅎ 그나마 그렇게 현실세계와 연관을 지어 놓고, 시대적 배경에도 신경을 쓴 정도면 많이 나은거죠. 근데 어차피 그것 역시 그냥 멋부리느라 붙인 이름이잖아효! (응?)
  • 치이링 2012/05/16 16:58 # 답글

    완전히 빠져드셨군요
  • 야스페르츠 2012/05/16 21:29 #

    ㅋㅋㅋ한 번 빠지면 절반 정도까지는 끝장을 보는 성격이라서요. ㅋㅋ
  • 크핫군 2012/05/16 17:11 # 답글

    근데 묘한게 이게 간지가 있어요(;;;)

    the king in the north!
  • 야스페르츠 2012/05/16 21:30 #

    그게 영어로 보고 들어서 그런 거지 완전히 우리식으로 로컬라이징하면 좀 거시기하다능. 뭐 그럭저럭 고풍스러운 맛은 있으려나... ㅋㅋㅋ
  • 셔먼 2012/05/17 00:28 # 답글

    무언가 간단하면서도 실속있는 지명이로군요. ㅎㅎ
  • 야스페르츠 2012/05/17 21:03 #

    ㅋㅋ 어쩌면 그냥 귀찮았을지도.. ㅋㅋ
  • 대공 2012/05/17 20:44 # 답글

    서양 이왕이면 지명의 유래들을 알고 싶네요
  • 야스페르츠 2012/05/17 21:03 #

    저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우리나라 지명도 궁금한 것이 많구요. 몇몇은 삼국사기나 여지승람 같은 것에서 지명 유래를 찾을 수 있긴 한데... ㅎㅎ
  • 굔군 2012/05/17 21:33 # 답글

    배경이 영국이랑 비슷한 것 같네요.
  • 허안 2012/05/18 11:28 # 답글

    희대의 명작이라는데 동감 마틴 할베에게 노벨문학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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