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3/28 21:24

모본왕 2년의 원정 기사에 관하여 역사

2년(서기 49년)봄, 장수를 보내 한(漢)의 북평(北平)·어양(漁陽)·상곡(上谷)·태원(太原)을 습격하였으나 요동태수 채동(蔡彤)이 은혜와 신의로써 이를 대하였으므로 다시 화친을 회복하였다.
二年春, 遣將襲漢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祭肜, 以恩信待之, 乃復和親。
《삼국사기》모본왕條 中


알만한 분들은 다 알고 계실지도 모르는 떡밥이겠으나, 배움이 천박한 필자는 최근에야 우연찮게 깨닫고 멍(...)하게 된 떡밥이기에 오늘 생각난 김에 포스팅을 해본다.


※ 《아틀라스 한국사》가 전하는 당시 고구려의 지도


위의 기사는 태조왕 3년의 요서 축성 기사와 함께 대륙 고구려(?)의 단골 떡밥으로 인용되는 기사다. 당시 요동군도 넘어서지 못하고 있던 통설 속 고구려가 상곡, 어양, 북평은 둘째치고서라도 무려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한 태원을 공격했다는 기록이다. 당연히,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 과연 이 기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 당시 공격을 받은 4개 군의 위치


필자는 어쩔 수 없는 배(초록)화교도인 관계로(-_-;;) 이 모든 떡밥을 넷 세상에서 최초로(?) 논파하였던 포스팅을 먼저 언급하고자 한다

난하요수설에 대하여(00/01/09)

일곱째,모본왕이 북평, 어양, 상곡, 태원으로 장수를 보내 습격케 했다는 점에서 김민후님은 지리적으로 너무 멀기 때문에 이 지역이 요동 또는 요동의 관할지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중 북평(아마도 우북평), 어양, 상곡은 한의 북방도시입니다. 이곳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 1월 1일에 방영된 역사 스페셜에서 다뤄진 바 있습니다. 북방 유목민족들이 이용하는 통로에 대해서 말이지요. 저는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우북평으로부터 어양-상곡-태원으로 쳐들어가겠다는 플랜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난하에서 태원까지도 불가사의하게 멀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이상의 내용이 종종 초록불 님을 비롯한 매식자들이 위 내용을 해명할 때 사용한 논리였다. 요서회랑이라 부를 수 있는 유목민족들이 주로 기동하는 통로가 있고 이를 통해 기동성 좋은 병력으로 약탈을 했다는 것이 기본 골자이다. 이는 태조왕 3년의 축성 기사에도 비슷하게 적용되곤 한다. 요하가 곡류하는 안쪽의 지역을 요서라고 언급했다는 식. 이런 해석은 기본적으로 해당 기록이 정확하다는 가정 하에서 최대한 합리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해석이다.


그런데 이 기사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게다가 그 해석은 무려 두계 마왕의 입에서도 흘러 나온 유서 깊은 내용이다. 두계가 번역한 《삼국사기》를 읽어 보았고 소장하고 있던 주제에 이제서야 이걸 본 필자도 참 한심스럽긴 하다... ㅡㅡ;;; 어쨌든 이 해석을 한 번 살펴보자.


일단, 이 기사의 출전에 대해서 먼저 찾아볼 필요가 있다. 《삼국사기》는 편년 형식의 기사에서 출전을 밝히는 일이 드문데, 이 기록 역시 마찬가지이다. 마치 고구려 고유의 기록을 토대로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상 원본은 따로 있다.

(광무제 건무) 25년 봄, 구려(句驪)가 우북평(右北平)·어양·상곡·태원을 노략질하였으나 요동태수 제융(祭肜)이 은혜와 신의로써 이를 초유하니 모두 다시 항복하였다.
二十五年春, 句驪寇右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祭肜, 以恩信招之, 皆復款塞。
《후한서》〈동이열전〉고구려條

사실상 토씨만 바꿔서 그대로 인용(?)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과연 《삼국사기》의 저본이 된 《구삼국사》, 아니 《구삼국사》의 저본이 된 고구려 고유의 기록에 과연 이 공격 기록이 있기는 할까 하는 생각도 든다. 《구삼국사》 자체는 분명 삼국시대 이후에 편찬된 것이 분명할테니 《후한서》를 참조한 위 기록이 있었을 테지만, 그 이전, 고구려 고유의 기록에는 없었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베껴쓰다시피 나타나지는 않았을 테니까.


이 〈동이전〉의 기록은 《후한서》의 다른 관련 기록들 속에서도 나타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는데, 이렇게 교차되는 기록이 서로 어긋난다는 것이 문제이다. 〈광무제기〉의 같은 해의 기록부터가 이 모양이다.

25년 봄 정월, 요동의 변경 바깥 맥인(貊人)이 우북평·어양·상곡·태원을 노략질하였는데 요동태수 제융이 이를 초유하여 항복시켰다.
二十五春正月, 遼東徼外貊人寇右北平、漁陽、上谷、太原, 遼東太守祭肜招降之。
《후한서》〈광무제기〉

이 기록이 뭐가 문제인가 싶을 사람도 있겠지만, 이 기록에는 해당 사건의 주체가 고구려가 아니라 맥인(貊人)으로 되어 있다. 한국사에서 맥은 작게는 고구려, 크게는 예맥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중국사에서 맥은 반드시 예맥만 가리키지는 않는다. 의외로 선비나 오환과 같은 흉노 이후의 북방민족들도 맥으로 불리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그렇다면 상곡이나 어양은 둘째치고서라도 태원처럼 내륙 깊숙한 곳까지 침구할 수 있는 맥인을 반드시 고구려로 한정해서 보아야 할 이유는 없다.



이를 뒷받침한다고 볼 수도 있는 기록이 있으니, 바로 위 침구를 제압(?)한 제융의 열전이다. 제융의 열전은 그의 형인 제준(祭遵)의 열전 바로 뒤에 부기되어 있다. 제융 열전과 해당 기사의 관계에 대해서 두계 마왕은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同書(권50) 祭肜傳)을 보면 당시 요동(遼東) 방면의 변해(邊害)는 흉노(匈奴)·선비(鮮卑)·오환(烏桓) 등이 가장 심하였고 고구려(高句麗)에 대하여는 다만 '高句驪之屬, 遂駱驛款塞'라 하였을 뿐이다.
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中

실제로 제융 열전에는 고구려가 딱 한 번만 언급될 뿐이다. 그리고 그 언급은 아래와 같다.

그 다른 종족 만리(滿離)와 고구려의 무리가 마침내 국경으로 나와 담비 갖옷과 좋은 말을 바치니 황제가 항상 그 배로 상을 내렸다.

其異種滿離高句驪之屬, 遂駱驛款塞, 上貂裘好馬, 帝輒倍其賞賜

《후한서》〈제융전〉中


제융의 신의 있는 이민족 정책으로 주변 이민족들이 평화적으로 복속했다는 치적을 찬사하고 있는 내용이다. 게다가 이 문장의 바로 앞에는 해당 사건이 벌어진 건무 25년의 일이 나타나고 있는데,그 내용 역시 선비족이 귀부하였다는 내용이다.


25년, 마침내 선비족을 불러 재물과 이득으로써 보이니 그 대도호 편하(偏何)가 사신을 보내 받들어 바치며 귀부하기를 원하였다. 제융은 받아들이고 은상을 내리니 점차 돌아와 복속하였다.
二十五年
, 乃使招呼鮮卑, 示以財利, 其大都護偏何遣使奉獻, 願得歸化, 肜慰納賞賜, 稍復親附
《후한서》〈제융전〉中


25년에 벌어진 침략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다만 앞부분에서 당시 요동 일대에서 흉노, 선비, 오환의 침략이 극심했다는 내용이 나타날 뿐이다. 고구려의 침략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하다못해 흉노, 선비, 오환 "등"의 침략이라는 표현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사료의 언급은 정확하게 저 세 종족으로만 끝난다.




보다시피 바로 해당 사건이 벌어진 해인 25년에 직접적으로 명시된 제융의 업적은 "선비족을 불러다가 설득하여 귀부시켰다"는 것이다. 바로 뒷 문장에서 고구려가 언급되고 있으나, 그것이 25년의 일이라고 볼 이유도 없고 그렇게 따지면 같이 언급되는 만리(滿離)라는 이민족은 무엇이란 말인가... 25년의 제융의 활약은 對선비족이 핵심이며, 만리나 고구려는 병기된 수준에 불과하다.


결론적으로 《후한서》의 관련 기록을 살펴보자면 25년에 침략했다가 제융에 의해 화친하게 된 이민족은 고구려가 아니라 선비일 가능성도 높다. 비록 〈동이전〉에는 고구려로 명시되어 있지만 말이다....


덧붙이자면, 후대 《후한서》의 주석가들도 해당 기사가 서로 충돌한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맥인(貊人)에 대해 직접 주석으로 예맥국을 가리킨다고 명시하기도 하였으며, 《집해》에는 이런 언급도 있다.

진경운 왈, 太原의 두 글자는 잘못 들어간 것으로 오자이다. 맥인은 동쪽 변방의 제군(諸郡)에서 들어와 노략질하였으니 서쪽으로 태원의 안쪽 땅까지 이를 수 없다.
陳景雲曰, 太原二字, 非衍卽誤 貊人入寇東邊諸郡, 不能西至太原內地也



어느 쪽을 신뢰해야 할지는 솔직히 지금도 미지수이긴 하다. 그러나 해당 기록에 이런 논란거리도 있다는 점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해석하기에 따라서 해당 기록의 주체는 고구려가 아닌 선비족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ps. 언제나 그렇듯이 학계의 연구 동향이나 논문 따위는 별로 찾아보지 않은 채로 펼친 망상이니만큼, 반론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환영하는 바이다. 가르침을 주시옵소서.

덧글

  • 앨런비 2012/03/28 21:39 # 답글

    흠냐.; 이 말이 역밸에 아직 안나왔었다는게 신기한;
    예전부터 이 기록 알던 사람들은 서로 다 말하던 것인디;;
    즉. 뒷북(...)
  • 야스페르츠 2012/03/28 21:40 #

    쳇! 뒷북인 건 알고 있다능.
  • 대공 2012/03/28 21:44 # 답글

    그러니까 다굴 때리는데 일부만 참여하고 끝 이런 이야기죠?
  • 야스페르츠 2012/03/28 23:59 #

    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심더. ㅡㅡ;;
  • 대공 2012/03/29 00:09 #

    오환 등이 중국 나들이 가는데 같이 간 것을 저렇게 표기한게 아닌가 해서 말이죠
  • 야스페르츠 2012/03/29 00:26 #

    뭐... 그렇게 볼 여지가 없는 건 아니지만 저는 솔직히 고구려는 오기고 걍 선비 고고씽입니다. ㅎㅎ
  • 2012/03/28 22:11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야스페르츠 2012/03/28 23:59 #

    맞슴다
  • 굔군 2012/03/28 22:37 # 답글

    <삼국지>가 쓰여질 무렵만 해도 압록강 하류 부근에는 소수맥이란 종족도 있었으니, 당시 "맥인"이라고 불릴 수 있는 집단이 고구려만은 아니었겠죠.

    개인적으로는 선비의 오기라는 쪽에 한 표 던집니다.
  • 야스페르츠 2012/03/29 00:00 #

    아무리 보아도 같은 해에는 선비의 준동 및 제압이 주요 사건입니다요. 고구려는 쩌리... ㅡㅡ;;
  • 海凡申九™ 2012/03/28 22:56 # 답글

    滿離가 막리지와 끼워맞추면 어떨까 싶기도 한다능요
  • 야스페르츠 2012/03/29 00:00 #

    그게 뭐냐능. 난 그런거 모른다능.
  • gdfrr 2012/03/28 23:00 # 삭제 답글

    그건 네가 들고나온 지도들이 죄다 말도 안되는 엉터리니까.
    간단하게 생각하면 되지, 지생각에 안맞는다고 사료를 무시하네.
  • 야스페르츠 2012/03/29 00:01 #

    피식.
  • Warfare Archaeology 2012/03/28 23:35 # 답글

    이 부분은 저도 예전부터 의문을 갖고 있긴 했었는데...관련해서 명쾌하게 밝히려는 논문은 못 본 듯 싶습니다(물론 제가 문헌사쪽 고구려 관련 논문을 다 살펴본 것은 아니지만 말이죠. ^^;;).

    그말은즉슨...현 학계에서도 대부분 우리측 기록인『삼국사기』의 내용을 믿는다는 쪽이라는 소리겠죠(위와 같은 지도책이 나온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을테고요). 더 나아가 김상은『삼한사의 재조명』이라는 책에서 모본왕대의 저러한 기록을 고구려 초기 대무신왕대의 팽창정책과 연결지어 이해하고 있습니다. 즉, 고구려 초기에 이처럼 먼 곳까지 약탈하고, 급격하게 주변 소국들을 점령하면서 팽창정책을 펼치다가(대무신왕대가 절정이겠죠. 북으로 부여, 남으로 낙랑을 깠으니) 태조대왕대에 시들하면서 차대왕 이후 신대왕을 거치면서 내치에 힘쓰는 것으로 보더군요(책성 주변에 대한 개발이 주목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겠죠). 뭐 고구려 초기의 정책 변화는 저도 크게 이처럼 보고 있긴 한데...저 기록 자체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이렇다할 생각을 정리해보질 못 했습니다.

    위에서도 정리하셨다시피...교차분석할만한 기록이 일단 별로 없다는 사실때문에 말이죠. 어느 쪽에는 선비와 같은 북방 제족으로 써 있고, 어디에는 고구려로 써 있고 하는 것들이 말입니다. 어느 시점에 '오기'가 진행되었다면 그 이유가 있을텐데...(예를 들어 당대에는 선비나 오환에 속한 제부족이 태원 등지를 약탈한 것이 맞는데, 후대 사가들이 기록을 남길때에는 그 선비나 오환 제부족에 속한 일파가 어느 정도 고구려에 속하게 되어 고구려로 주체가 바뀌었다든가...하는 식으로요. 물론 정확하게 제가 이를 분석한 바는 아니지만요) 그걸 못 찾겠더군요. 흠. 이건 문헌 공부가 부족한 제 탓이겠지만...

    일단, 오랫동안 기억에서 잊고 있었던 내용이었는데 덕분에 한번 더 생각하게 됐습니다. 감솨 ^^
  • 야스페르츠 2012/03/29 00:04 #

    태조왕 대에 팽창정책이 시들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 합니다. 오히려 사료 상으로는 태조왕 때 더 요동-현도와 미친듯이 싸우고 있었는데...

    그리고 후대의 사가가 잘못 기록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점이... 저거 모두 같은 후한서의 기록이에요. ㅡㅡ;; 사실 모본왕 대까지만 해도 고구려는 오환이나 선비에 비교하자면 그냥 쩌리였죠....
  • Warfare Archaeology 2012/03/29 09:52 #

    아...제가 왕을 1대씩 밀려 썼네요. ^^;;; 차대왕대에 시들하면서 신대왕을 거쳐 고국천왕...이라고 쓴다는 걸 잘못 썼습니다. 대무신왕대와 태조대왕대까지 고구려는 팽창정책을 실시했다고 봐야 적절할 것입니다.

    그나저나 듣고 보니 그렇네요. 당대에 쓰인 같은 책에 왜 다른 식의 내용이...흐음...당시 선비나 오환에 비하면 분명히 고구려는 세력이 약한 집단이었고, 혹시라도 있을 연합작전이 있었다면 오히려 주체는 고구려가 돼기 힘들었을텐데 말이죠...흐음. 다시 고민고민~~
  • 파랑나리 2012/04/01 22:00 #

    야스페르츠 // 어차피 [후한서]는 영가의 난으로 한족이 강수 이북을 오랑캐에게 뭉텅 뺏기고 난 뒤에 쓴 거라 요동 쪽은 직접 살필 수가 없었을테니 정확성이 많이 떨어지지 않을까요?
  • bergi10 2012/03/28 23:48 # 답글

    음... 각 사료들의 저자가 누구인가요?
    저자들을 파악해 보면 뭔가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당시에 북방 유목민들의 힘이 결코 약하지 않은 시기인데,
    당대 학자들이 유목민들을 헷갈렸을리는 없을테고... 뭔가 고구려와의 연합이 있었던건 아닐지
  • 야스페르츠 2012/03/29 00:04 #

    전부 같은 책이 출전입니다. 범엽이 찬술한 후한서... 그러니 더 이상한거죠. ㅡㅡ;;
  • 명림어수 2012/03/29 00:18 # 삭제 답글

    단재선생이 조선상고사중
    "연개소문 벤허설" 을 주장하는 부분에서,

    "태원이 원래 고구려의 침략을 많이 받던 지역이고...."

    라고 쓰셨는데, 아마 저 기사에서 발전한 건가 봅니다.

    고교때 조선상고사를 처음 읽었지만, 그때도 이상하다 생각했습니다.
    어쨌거나 저는 단재선생을 존경합니다.
    조선상고사를 역사로 믿지는 않지만요.
  • 야스페르츠 2012/03/29 00:26 #

    벤허..ㅋㅋㅋㅋㅋ
  • 넞2006 2012/03/29 00:56 # 답글

    그러고보니 백제의 요서공략설 경우도 백제와 고구려의 오기가 빚은 결과라는 이야기도 있었죠. 뭐 당시 한족 애들에게는 그놈이 그놈같이 보였을지도....현재까지도 서양인들이 동아시아인들을 제대로 구분못하는 사례도 있으니까요. 저때야 오죽할까요.
  • 야스페르츠 2012/03/29 09:47 #

    딱히 구분을 못했다기보다는 명칭 같은 것이 헷갈리기 딱 좋게 생겨서겠죠. 현대로 치자면 오스트레일리아와 오스트리아를 헷갈리는 식..
  • 한단인 2012/03/29 03:32 # 답글

    http://cafe.naver.com/historygall/17214

    ->로그인이 걸리면 네이버에서 '모본왕기사 관련 심심해서 써본글' 이라고 치면 아마 나올 겁니다.

    여기서는 침공 주체를 오환으로 보고 맥인을 지칭하는 시대적 차이로 발생한 오기 내지는 와전으로 보고 있더군요. 아무튼 처음에는 야스페르츠님 글을 보고 꼽사리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겠다 싶어서 다른 걸 참조하려고 위의 링크글을 봤는데 저 글 보고서 더 생각해보니 와전일 여지가 더 많겠다 싶더군요.
  • 야스페르츠 2012/03/29 09:48 #

    흠...제 글에서 꼽사리를 떠올리시는 분들이 많에요. 저는 오히려 꼽사리가 아니라 고구려는 오기라는 판단인데... 제가 뭔가 글을 잘 못쓴듯..ㅋㅋ
  • 한단인 2012/03/29 10:12 #

    ㅎㅎ 님하 글에서의 결론은 물론 오기가 결론이지만 그래도 일말의 여지는 있지 않겠나 하고 뒤져봤더니 이건 뭐 '여지' 자체가 끼어들기 어렵다는 것만 알았던 거죠. 님하 글이 잘 못써졌다고 할 순 없지요. 다만 제가 미련이 남았을 뿐인 겁니다.
  • 2012/03/29 03:40 # 삭제 답글

    필자분께서는 선비의 오기로 맥인이라 칭했고 이것이 다시 고구려가 되었다는 의견같은데 좀 의문이 드네요. 일단 삼국사기에 저 기록이 나온 이유는 후한서의 기록을 인용했기 때문이고 김부식 역시 여러사서를 참고하며 허황된 내용이 아니라 판단했기에 고구려본기 모본왕조에 정리하여 넣은 것입니다. 이는 삼국사기의 문제가 아니라 후한서의 신뢰성이 영향 때문이기도 한데 이미 후한서에서 같은 내용의 기록을 두고 광무제기의 기록을 다시 정리해 동이열전 고구려전에 삽입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죠 이런 후한서에서 보여진 편집과정이 없었다면 삼국사기에서 이를 모본왕조에 정리하는 작업이 애초없었다고 봅니다. 더불어 후한서의 작업이 본기의 사료를 다시 동이열전의 사안으로 중복병기하는 수고를 한 이유역시 그 맥인의 주체가 사서에서 전하는 고구려임을 밝히는 정보전달의 과정이기도합니다. 때문에 당대에 이를 접하는 이들 역시 이를 인식하여 사서는 맥인이라는 것이 고구려임을 전달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음으로 의문은 주체가 선비인가 고구려인가가 아니라 고구려가 어찌 그 먼곳까지 올수 있었는가?의 주석을 달고 있는 것이죠. 두개의 사서가 나름의 정리작업을 하며 수고스럽게 전달한 정보를 두고 먼길을 돌아 열전의 문구를 이유로 고구려가 선비의 오기라고 여기는 것 보단 앞서 논의된 것처럼 당시 유목민들의 이동회랑을 따라 약탈이 행하여 졌고 잠시 팽창정책을 취하였던 고구려가 기병을 통해 빠른 기동성으로 당대의 전형(?)적인 약탈 경로를 답습하여 공격했다가 보다 합리적인게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 2012/03/29 03:54 # 삭제 답글

    만약에 선비의 오기로 맥인이 되었고 다시 이것이 고구려가 되었다면 왜? 후한서에서 맥인의 기록을 다시 중복기록하며 해당 고구려전에 정리해 담았는가?를 우선 해명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필자분께서 당시 선비,오환,맥인,구려를 혼동하였다고 하시는데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를 인정하게 되면 해당 기록들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만약 대륙 고구려설 때문이라면 지금 이게 더 무서운게 아닌가 합니다...(크게 봅시다! 선비,오환 다 고구려를 혼동한 오기라능! 짜응~)
  • 야스페르츠 2012/03/29 09:50 #

    사실 이런 반론에 대해서는 저로써는 할 말이 없긴 합니다. 하지만 의외로 전근대 사서는 같은 책안에서도 모순되는 경우가 적지 않아서요... 특히열전의 경우에는 해당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서 편중된 방향의 서술이 나타나는 등 사료로서 반드시 검토해야할 점이 많습니다. 그래서 저도 굳이 뒤져본 것이기도 하죠.
  • 누군가의친구 2012/03/30 01:30 # 답글

    다 이건 후대인들을 골탕먹이고자 하는 고대인들의 삐뚤어진 심리입니다.(어이.)
  • 야스페르츠 2012/04/01 20:47 #

    으허허허
  • 아샨 2012/03/30 23:33 # 삭제 답글

    범엽의 후한서에서 貊은 북방종족에 관한한 예외없이 고구려에 대한 이칭 또는 '예맥'의 '맥'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후한서의 광무제기, 제융전, 고구려전 3종의 기사에는 내용상 서로 모순되는 점은 없고(광무제기=고구려전. 제융전은 그저 이 사건을 직접 언급하지 않았을뿐임) 이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해석이 가능합니다.
    1. 광무제 시기 북쪽 방면에서 흉노, 선비, 오환의 집중적인 침구. 여기에 고구려도 보조적으로 합세한 듯
    2. 건무 25년 맥인(=고구려)의 침구
    3. 북방종족의 침구를 막기위해 건무 25년 제융의 -침구의 주도세력인- 선비족 적극 초유. 아마 이 사건과 관련하여 고구려도 침구 중단한 듯 (제융전에서는 직접 언급은 없으나 바로 이어서 其異種滿離、高句驪之屬, 遂駱驛款塞, 上貂裘好馬, 帝輒倍其賞賜라 기술하여 이 점을 시사하며 광무제기 등과 연결됨)
  • 야스페르츠 2012/04/01 20:48 #

    후한서에서 일반적으로 맥을 고구려나 예맥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본기에서 뜬금없이 고구려나 예맥과 직접적으로 연결하기 어려운 맥인이 등장한다는 점이 문제가 되는 거라고 보고 있습니다.
  • 파랑나리 2012/04/01 22:01 # 답글

    어렵네요. 결국 고구려가 아니라 선비가 한 건가요?
  • 야스페르츠 2012/04/02 18:08 #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 게으른 바다표범 2018/03/05 04:38 # 답글

    한국사에서 맥은 작게는 고구려, 크게는 예맥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중국사에서 맥은 반드시 예맥만 가리키지는 않는다. 의외로 선비나 오환과 같은 흉노 이후의 북방민족들도 맥으로 불리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 몇 건중에 몇 건이... 주장에 부합하는지 궁금합니다.
    이를테면 본기에는 '맥' 으로 표기하고 열전에는 '고구려나 선비'로 표기된 사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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