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3/20 09:10

임둔과 현도 병림픽

부조현과 옥저: 남북한 학설상의 임둔군

임둔군은 영동7현의 전신이라고 하기도 한다. 앞선 링크 사진으로 보면 북한 학설은 평안도의 북쪽에 자리하고 있고 남한을 비롯한 국제학계의 통설은 대체로 평안도의 북쪽에 있다고 한다.


1. 남한은 대체 어느 나라이길래 단단대령의 동쪽(領東)에 있다는 7개의 현들을 평안도의 북쪽에다가 가져다 놓았을까?


※ 하얀색 원이 영동7현, 참 잘도 평안도의 북쪽이겠다


2. 그리고, 영동7현은 임둔군이 아니라 현도군의 잔재이다.

저 잔재에 과연 임둔군의 흔적이 얼마나 포함되어 있느냐가는 엄밀히 말해서 아무도 모른다. 대략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인데, 예를 들어 임둔군의 치소로 알려져 있는 동이현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 등이 있겠다.

《삼국지》의 기록은 영동 7현에 대해서 약간 애매한 출처를 전하고 있다. 옥저 條에 때르면 영동 7현은 옥저로 구성되어 있으며 오로지 현도군의 잔재만인 것 같은데, 반대로 예 條에서는 예도 영동 7현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게다가 본문 상으로는 임둔군의 존재는 아예 없다. 물론 주석 등을 통해서 임둔군의 흔적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후한서》에는 예 條에 임둔군이 언급된다. 하지만 이 역시 임둔과 진번을 낙랑과 현도에 합병시켰다는 의미일 뿐, 영동7현=임둔이라는 의미는 없다.

이상을 통해 고찰해 보자면, 《삼국지》를 비롯하여 기록 어디에도 영동7현=임둔군이라는 주장(!)은 없다. 물론 현재 국사학계의 통설 역시 저런 의미는 아니다. 영동 7현에 임둔군 소속 현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영동 7현이 모조리 다 임둔군은 아니다.



즉, 위 논자의 아래 말씀은 그냥 헛소리라는 결론이 되겠다.

열라 웃기는 것은 지금까지 논의로  "옥저"는 현토군에 이동한 자리에 있었고 나중에는 낙랑군에 소속되었으면서 영동7현(임둔군)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 즉, 낙랑군 근처에 있어야 하면서도 과거에는 현토군에 속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옛날 임둔군 자리에 가까워야 한다는 결론!!!!!!!!!!!!!!!!!!!!! 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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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沃沮在高句麗蓋馬大山之東,濱大海而居。其地形東北狹,西南長,可千里,北與挹婁、夫餘,南與濊貊接。戶五千,無大君王,世世邑落,各有長帥。其言語與句麗大同,時時小異。漢初,燕亡人衛滿王朝鮮,時沃沮皆屬焉。漢武帝元封二年,伐朝鮮,殺滿孫右渠,分其地爲四郡,以沃沮城爲玄菟郡。後爲夷貊所侵,徙郡句麗西北,今所謂玄菟故府是也。沃沮還屬樂浪。漢以土地廣遠,在單單大領之東,分置東部都尉,治不耐城,別主領東七縣,時沃沮亦皆爲縣。漢(光)武六年,省邊郡,都尉由此罷。其後皆以其縣中渠帥爲縣侯,不耐、華麗、沃沮諸縣皆爲侯國。夷狄更相攻伐,唯不耐濊侯至今猶置功曹、主簿諸曹,皆濊民作之。沃沮諸邑落渠帥,皆自稱三老,則故縣國之制也。國小,迫於大國之間,遂臣屬句麗。句麗復置其中大人爲使者,使相主領,又使大加統責其租稅,貊布、魚、鹽、海中食物,千里擔負致之,又送其美女以爲婢妾,遇之如奴僕。


漢武帝元封二年,伐朝鮮,殺滿孫右渠,分其地爲四郡,以沃沮城爲玄菟郡。後爲夷貊所侵,徙郡句麗西北,今所謂玄菟故府是也。이 곳의 내력에는 옥저성(沃沮城)이 한무제(漢武帝)가 한사군을 설치할때의 처음 현토군(玄菟郡)이었는데 이후 토착민의 저항으로 군이 고구려(高句麗)의 서북(西北) 쪽으로 이동하였다고 한다.
分置東部都尉,治不耐城,別主領東七縣,時沃沮亦皆爲縣。이와 동시에 낙랑군에 옥저가 속현으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영동 7현 중의 하나다.


3. 뭐, 예전부터 위 블로거의 한독이 형편 없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도 여실히 그 실력을 보이고 있다.

漢以土地廣遠,在單單大領之東,分置東部都尉,治不耐城,別主領東七縣,時沃沮亦皆爲縣。
한은 그 지역이 넓고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단단대령(單單大領)의 동쪽에 있는 지역을 나누어 동부도위(東部都尉)를 설치하고 불내성(不耐城)에 치소를 두어 별도로 영동 7현을 통치하게 하였다. 이 때에 옥저의 [邑落도] 모두 현이 되었다.


하고 亦皆는 어디다 팔아 드셨소? 이거 정말 바보 아냐? 옥저에 속한 지역들이 모두 현이 되었다는 기사를 가지고 와서 옥저현이 어떻네 저떻네 하는 꼬락서니 하고는... 쯧쯧...


그렇다면 위 논자의 말마따나 옥저성은 어떻게 된 걸까?

漢武帝元封二年,伐朝鮮,殺滿孫右渠,分其地爲四郡,以沃沮城爲玄菟郡。後爲夷貊所侵,徙郡句麗西北,今所謂玄菟故府是也。
한 무제 원봉 2년(B.C.109)에 조선을 정벌하여 위만의 손자 우거를 죽이고, 그 지역을 분할하여 4군을 설치하였는데, 옥저성으로 현도군을 삼았다. 뒤에 이맥(夷貊)의 침략을 받아 군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니 지금의 이른바 玄菟의 故府라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其後皆以其縣中渠帥爲縣侯, 不耐·華麗·沃沮諸縣皆爲侯國.
그 후 현의 우두머리(渠帥)를 모두 현후로 삼으니, 불내(不耐)·화려(華麗)·옥저(沃沮) 등의 여러 현은 전부 후국(侯國)이 되었다.



이상의 기록들을 통해 보자면, 옥저성이 현도군치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적어도 《삼국지》가 편찬되던 당시까지도 현도군의 치소가 유적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옥저현이 뒤에 다시 언급이 되고 있으니 옥저성을 부조현으로 보는 입장 자체는 위 논자의 언급대로이긴 하다만, 애초에 사료를 오독해 놓고서 저런 말을 해봤자 말짱 도루묵이지...



4. 옥저성, 아니 현도군치에 대해서는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玄菟郡의 위치에 관한 說은 크게 셋으로 나누어진다.
① 沃沮說; 沃沮에 玄菟郡의 郡治가 설치되었다는 說이다. 즉, 오늘날의 咸興을 中心으로 한 咸鏡道 일대가 玄菟郡 지역이라고 본 것이다. 『三國志』東沃沮傳의 ‘以沃沮城爲玄菟郡’이라는 기사가 그 주된 전거이다. 이 說은 朝鮮時代의 實學者인 韓鎭書(『海東繹史』「地理考」玄菟郡條)·安鼎福(『東史綱目』「地理考」玄菟條)·丁若鏞(『疆域考』玄菟考)·金正浩(『大東地志』漢四郡條)를 비롯하여, 日本人 池內宏(「漢魏晋の玄菟郡と高句麗」pp.191~206) 등에 의해 주장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대체로 부정되고 있다.
② 沃沮 및 高句麗說; 압록강 중류에서 咸興에 이르는 交通路를 따라 東西로 길게 설치되었다는 說이다. 日本人 和田淸이 이를 주장한 대표적 學者이다. (「玄菟郡考」pp.1~21) 다시 郡治에 대해서는 沃沮縣說과 高句麗縣說로 나누어진다. 한편 淸末의 學者 楊守敬은 玄菟郡이 沃沮에서 遼山(興京·老城일대)에 걸쳐 설치되었고, 郡治는 遼山 高句麗縣이었다는 견해를 내놓기도 하였다. (「汪士鐸漢志釋地駁議」)
③ 高句麗說; 본래 玄菟郡은 鴨綠江 中流一帶에 세워졌고, 郡治는 高句麗이었다는 주장이다. 李丙燾가 이 說의 代表的 學者인데, 玄菟라는 명칭도 高句麗의 수도인 丸都(터=神聖地)에서 유래하였다고 보았다. (「玄菟郡及臨屯郡考」pp.187~190)

《중국정사조선전》의 주석 中


5. 결론적으로 현재 국사학계의 통설은 저 논자의 멍청하기 짝이 없는 의문보다는 훨씬 더 합리적이고 공고하다는 말이 되겠다. 고작해야 본인의 오독, 그리고 완전히 잘못된 망상을 가지고 통설에 의문을 표한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랴.

차라리 맨 밑의 부조현장이나 임둔태수 봉니만 이야기하는 것이 훨씬 나았을 뻔 했다. 적어도 환드모트 같은 아해들에게는 통할 이야기일테니.



덧,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18세기 말 실학의 시대는 정녕 위대하였다. 전근대 학자들만큼도 고찰할 줄 모르는 아해들을 보면 말이지...

불내 화려고(不耐華麗考)
불내(不耐)와 화려(華麗) 2현은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낙랑동부(樂浪東部)에 속하고, 불이현(不二縣)은 도위(都尉)의 소재지였다. 불이(不二)는 또한 불내라고도 칭한다. 이른바 영동(嶺東) 7현(縣)이란 바로 지금의 철령(鐵嶺) 내외의 땅이니, 불내ㆍ화려 2현은 아마 옛날 이추(夷酋)의 호인데, 한 무제(漢武帝)가 강등시켜서 현(縣)으로 만든 것이리라.
한 광무(漢光武) 건무(建武) 6년에 동부도위를 없애고 영동의 땅을 떼어 그들의 괴수를 봉하여 현후(縣侯)로 삼았으므로 이에 예후(濊侯)와 불내후(不耐侯)란 칭호가 생겼다.
신라기에,
“유리왕(儒理王) 17년 건무(建武) 16년 화려와 불내 사람이 북쪽 지경을 침범하자 맥국(貊國)의 괴수가 곡하(曲河) 서쪽에서 맞아 그를 깨뜨렸다.”
하였으니, 그 땅이 신라의 북쪽에 있었던 것이다. 《후한서》에,
“안제(安帝) 원초(元初) 5년 고구려 태조왕 66년 고구려가 현도를 침범하고 화려성(華麗城)을 쳤다.”
하였다. 혹자가 이것을 가지고 화려(華麗)가 요계(遼界)에 있다고 주장한 것은 잘못이다. 화려는 낙랑 동부이고 현도는 요동의 동부에 있으니, 남북이 절연(截然)한데, 어찌 서로 가까울 리가 있겠는가? 《후한서》에서 운운한 것은 현도를 침범하고 또 화려를 쳤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위(魏)의 정시(正始) 연간에 불내후(不耐侯)와 예후(濊侯)가 항복하였으며 위(魏)의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치고, 동천왕(東川王) 20년 숙신(肅愼)의 남쪽 지경에 이르러 돌을 깎아 공(功)을 기록하고, 환도성(丸都城)과 불내성(不耐城)에도 공을 새겼다.
《동사강목》〈지리고〉 中

덧글

  • 에레메스 2012/03/20 09:36 # 답글

    밑의 안정복선생의 통찰력은 완전... 전근대 사학자(?)들 중 정약용 선생과 더불어서 이 분도 머리 꽤나 비상하신 듯 합니다.
  • 야스페르츠 2012/03/20 09:59 #

    다산 선생이 대중에 많이 알려져 있긴 합니다만 순암 선생도 결코 뒤지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ㅎㅎ
  • 리리안 2012/03/20 10:19 # 답글

    18세기 실학자들 글을 보면 정말 멋져요! 예전에 발해사를 팔 때 실학자들 글들을 읽었는데 참 대단했어요...
  • 야스페르츠 2012/03/20 10:27 #

    머쪄요! ㅎㅎ
  • hyjoon 2012/03/20 10:53 # 답글

    한국사학사들을 파고 보면 현대 한국사학의 기본 원류는 실학쪽에 있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죠. (엄밀히는 사실과 약간 다릅니다만)
  • 야스페르츠 2012/03/20 16:48 #

    비바 실학! 매식자의 시초는 매식실학이라능. (응?)
  • 굔군 2012/03/20 13:44 # 답글

    애초에 영동7현이 어디에 붙어있었는지도 모르고 있는 것 같네요. 에휴~ㅡㅡ;;
  • 야스페르츠 2012/03/20 16:49 #

    뭐, 그정도는 아닌 것 같긴 합니다만... 애초에 그런 것보다 더 골때리는 바보라는 점에서...
  • 굔군 2012/03/20 17:26 #

    하여간 저는 지금 저 아이가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건지 당췌 못 알아먹겠음...ㅡㅡ;

    아, 그리고 트랙백 좀 걸겠슴돠(다 된 밥상에 숟가락 얹기)
  • 파랑나리 2012/06/25 01:22 # 답글

    TTG는 환빠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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