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7/03 17:26

담백하게 풀어보는 낙랑군의 역사 (完) 역사

10. 몰락

265년, 사마염이 위의 마지막 황제 조환에게 선양을 받아 진(晉)을 건국하였다. 이미 사마의와 사마사 등에 의해 위의 황제는 유명무실해졌으니, 진이 건국되기 이전부터 사마씨의 천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위 말기의 정책이 진 시기에도 그대로 이어졌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진 시기에는 동방의 제국(諸國)들이 조공한 기록이 아주 많이 남아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기록이 하나 같이 "東夷十二國" 과 같이 뭉뚱그려서 국가의 숫자만 기록하고 있을 뿐, 구체적인 조공 주체나 그 경위를 거의 기록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낙랑군을 비롯한 동방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나마 고구려와 백제의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에 단편적으로나마 상황을 추측해 볼 수는 있다. 고구려의 경우, 앞서 말한 것처럼 300년 경까지 대 중국 관계 자체가 거의 없다. 관구검의 침공으로 타격을 입은 것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백제는 이 시기부터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기 시작한다. 마한의 수장과 같은 위치에서 진 왕조에 조공하기도 했다. 이 백제의 교섭에 대해서 낙랑·대방군을 거치지 않은 독자적인 조공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한편으로 이 시기를 즈음해서 고구려-백제-낙랑·대방군이 한꺼번에 연관되는 기록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고구려 측의 기록에는 남아 있지 않지만, 286년에 고구려가 대방군을 공격하자 백제가 대방군을 지원하여 고구려군을 물리친 사실이 백제 측 기록에 남아 있으며, 대방왕(帶方王)의 딸과 백제 책계왕이 혼인 동맹을 맺었다는 기묘한 기록도 있다. 298년에는 한(漢)과 맥인(貊人)이 함께 백제로 침공해 왔다고 한다. 한은 중국을 말하는 것이며, 맥은 예맥을 말하며 이 당시 맥이라 지칭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존재는 고구려이다. 즉, 낙랑 또는 대방군과 고구려가 동맹을 맺고 백제를 공격한 것이라 볼 수 있는 셈이다.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이 워낙에 엉망진창인지라 여러가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이 시기의 백제본기 기록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3세기 후반부터 백제가 낙랑·대방군에 대해서 공세를 취하고 있는 상황을 볼 수 있다. 304년에는 백제가 낙랑군을 공격하여 서부의 현들을 점령하였는데, 낙랑군은 이 공격에 대해 제대로 군사적 대처를 하지 못하고 자객을 보내 왕을 죽이는 파행적인 대처를 보인다.

300년, 미천왕이 즉위한 고구려는 그 동안의 소극적인 정책에서 벗어나 중국 군현과 정면 대결하기 시작했다. 302년에는 현도군을 공격하여 8,000명의 민을 포로로 사로잡았으며, 311년에는 서안평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서안평 점령이 가지는 의미는 매우 큰데, 낙랑군과 대방군이 서안평을 통해서 요동군 및 중국 본토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즉, 고구려는 낙랑군의 숨구멍을 막아버린 것이다.



한편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위 말기에 요동군에는 동이교위(東夷校尉)라는 새로운 관부가 등장했다. 진 시기의 기록은 매우 부정확하고 포괄적으로 되어 있어 정확한 상황은 알기 어렵지만, 전하는 상황으로 볼 때 동이교위는 동쪽의 여러 이민족들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된 기구인 것으로 보인다. 동이교위의 등장은 낙랑·대방군이 가진 한·예의 관리 기능이 동이교위로 옮겨왔다는 추측을 가능케한다. 이를 역으로 해석하면, 낙랑·대방군의 상황이 여의치 않아 동이교위가 그들을 대신하여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이상의 내용들로 추측해 보건대, 낙랑·대방군은 서진(西晉) 시기부터 급속도로 쇠락해 간 것으로 보인다. 《진서》에 기록된 낙랑군의 인구가 3,700호, 대방군의 인구가 4,900호에 불과하니, 이전 시기에 6만호에 달하던 인구가 거의 소멸된 것이다. 물론 이들이 모조리 다 죽었을리는 없으니, 고구려나 백제의 약취와 자발적인 이탈로 인해 급감했던 것이다.



사실 서진이 국초부터 보인 아스트랄한 막장 행보를 보면, 이런 쇠퇴는 비단 낙랑·대방군 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특히 소위 오호(五胡)라 부르는 이민족들이 화북 일대를 서서히 잠식해 들어가면서 이들과 접하고 있던 북방의 군현들은 하나 같이 급격하게 쇠퇴하고 혼란에 빠져들어 갔다. 가깝게는 선비족의 성장으로 유주 일대가 엉망진창이 되었고, 병주나 양주(凉州)는 완전히 이민족 소굴이 되어 버렸다.

304년, 흉노족 유연에 의해 병주에서 한(漢)이 건국되면서 소위 오호십육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서진 왕조는 완전히 유명무실해졌고, 각지에는 사실상 군벌화된 지방 세력들이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을 뿐이다. 요동-요서 일대에는 선비족 모용부와 단부, 우문부 등이 북쪽으로부터 점차 잠식해 들어오고 있었으며, 사실상 군벌화된 평주자사 최비가 이들과 대립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낙랑·대방군 일대는 요동군 출신의 장통(張統)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나마 최비는 평주자사라는 공식 타이틀이라도 있었지만 장통에게는 그런 것도 없다. 즉, 낙랑군과 대방군은 이미 태수와 같은 관부가 유명무실해졌고, 게다가 자체적으로 군벌화된 것도 아니라 요동 측의 세력에 의해 군벌이 된 것이다.

장통은 고구려의 공격으로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런 상황을 견디다 못한 낙랑인 왕준(王遵)은 장통을 설득하여 장통과 자신을 따르는 주민 1,000여 가(家)를 이끌고 북방으로 탈출하였다. 313년, 낙랑군의 최후였다. 《삼국사기》는 낙랑군의 최후를 다음과 같이 담담하게 적고 있을 뿐이다.

14년 겨울 10월에 낙랑군을 침략하여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十四年冬十月,侵樂浪郡,虜獲男女二千餘口。

이듬해에는 대방군의 잔존 세력도 점령되었다.


이로써 400년이 넘도록 한반도 북부를 지배하였던 동방변군은 완전히 소멸하였다. 낙랑군과 대방군은 이 땅에서 사라졌지만, 그 후로도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책봉명으로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하였다. 고구려는 대체로 낙랑 또는 현도태수로 임명되었으며, 백제는 주로 대방태수, 신라는 종종 낙랑태수로 임명되었다. 이러한 책봉명은 결국 중국의 자위에 불과한 것이지만, 동시에 이 땅에 오랫동안 막강한 상징성을 가진 것이기도 했다.

낙랑과 대방의 소멸로 고구려와 백제는 직접 국경을 마주대게 되었다. 두 나라의 본격적인 대립이 시작된 것도 이때부터이며, 고구려와 백제가 이 땅에서 가장 유력한 세력이 된 것 또한 이 무렵부터이다. 감히 말하건대, 진정한 삼국시대의 시작은 이때부터가 아닐까? 개드립



※ 잔해

북방으로 도망친 1,000여 가의 낙랑 주민들은 장통을 따라 모용외에게 투항하였다. 이 무렵 모용외에게 투항하는 중국인들은 매우 많았는데, 모용외는 이들의 투항을 받아들여 세력을 크게 키우고 있었다. 모용외는 아마도 요서 지역의 자기 세력권에 낙랑 주민들을 정착시켰을 것이다. 모용외가 낙랑군을 설치했다는 기록은 아주 뚜렷하게 남아 있다. 대방군 역시 요서 지역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렇게 요서 일대에 교치된 낙랑군과 대방군은 모용외의 아들 모용황이 세운 전연(前燕)을 거쳐 후연(後燕), 북연(北燕)에 이르기까지 100년이 넘도록 유지되었다. 모용씨의 연나라에서는 낙랑 및 대방이 유력 왕족들의 봉지로 자주 등장하며, 북연 시기에는 낙랑공주도 등장한다. 432년, 북위가 북연을 멸망시키기 직전에 낙랑군과 대방군, 현도군의 민호들은 태무제에 의해 유주 방면, 즉 지금의 북경 인근으로 이주되었다. 이때를 즈음해서 북연의 멸망과 함께 낙랑·대방군 등은 모두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유주 방면으로 이주된 낙랑군의 주민들을 통솔하기 위해 이 일대에는 조선현이 설치되었다. 낙랑군의 수도였던 조선현이 부활(?)한 것이다. 이 시기에 북위의 공식적인 행정구역은 아니었지만 비공식적으로 같은 지역에 낙랑군이 유지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100여 년이 지난 뒤인 정광(正光) 연간(520~525년)에 북위는 영주 지역에 다시 낙랑군을 부활시켰다. 이후 새로 설치된 남영주 지역에 다시 낙랑군이 설치(537년)되었는데, 아마도 영주에서 부활된 낙랑군은 이보다 전에 폐지되었던 것 같다. 이 낙랑군이 설치된 남영주 지역이 바로 위에 교치된 조선현이 위치하고 있던 지역이다.

하필이면 바로 이 낙랑군 및 조선현이 위치하던 지역이 바로 저 유명한(?) 갈석산이 있는 곳이다...... 그 모든 떡밥의 시작....

여하튼, 한반도에서 축출된 뒤에도 낙랑군은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하였다. 북제 시기에 낙랑군은 폐지되었지만 낙랑군과 관련된 이름들은 그 후로도 계속 잔존했으며, 612년 수양제의 고구려 침공 때에도 수군의 진로로 동방변군 및 그 속현들이 나타난다. 참 오래도록 살아 남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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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스페르츠의 墨硯樓 : 2011년 내 이글루 결산 2011-12-31 10:17: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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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DreamersFleet 2011/07/03 17:40 # 답글

    잘 읽었소. "담백함'==> "간략함"인 듯. 근데 왜 "장무이"나 이런 이야기는 안함?
  • 에레메스 2011/07/03 18:22 #

    장무이묘에 대해서는 정인성 선생님이 작년에 '대방태수 장무이묘의 재검토'라는 논문에서 기존의 통설에 전면적으로 반론을 펼쳐 4세기 중엽의 고구려 무덤이라고 하신 바 있는데, 개인적으로 매우 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http://yeohwi.egloos.com/1107454에 논문도 있으니, 혹 못 보셨다면 보시는 것도 괜찮을 듯 합니다.
  • Warfare Archaeology 2011/07/03 18:33 #

    http://yeohwi.egloos.com/1107454

    이거 클릭하시길. 위에 '-에'까지 링크가 걸려서 제대로 안 간 듯. ^^;
  • 야스페르츠 2011/07/03 20:03 #

    DF//그건 댁이 대학 가서 논문이라도 쓰면서 얘기하쇼. 이건 논문이 아니고, 전체적인 흐름과 관계 없는 지엽적인 이야기들은 할 가치를 못느끼겠어서 말이요.

    에레메스 // 장무이묘가 고구려 시기의 무덤이라는 견해도 있군요.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 솔까역사 2011/07/03 18:17 # 답글

    덕분에 낙랑공부 잘 했습니다.
    칡덩굴처럼 낙랑도 뽑아보니 뭔가 주렁주렁 연결되는 게 많군요^^
  • 야스페르츠 2011/07/03 20:03 #

    감사합니다. ^^
  • Warfare Archaeology 2011/07/03 18:32 # 답글

    여기에는 자세히 언급이 안 되어 있는데...

    혹시 낙랑군과 낙랑국, 대방군과 대방국(대방왕의 존재로 인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 그 부분에 대한 언급이 나올까 싶어서 기대했는데 없어서요.

    주말 잘 보내시길~
  • 야스페르츠 2011/07/03 20:06 #

    http://shaw.egloos.com/1894340

    백제본기 초기 기록 자체가 뭔가 혼란스러운 점도 있고, 또 위 링크와 같은 사실들을 생각해 본다면 王이나 國이라 기록된 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낙랑왕 최리에 대해서는 앞선 글에서 간단하게 서술한 적도 있습니다.
  • Warfare Archaeology 2011/07/03 21:09 #

    아~그러셨군요.

    안 그래도 저런 부분에 대해 저도 고민 중이었는데...다소 예상했던 답변이 나왔네요.

    저도 예전에는 양자를 다르게 생각했는데, 요즘에는 좀 생각을 달리하고 있었거든요.

    뭐 고고학적으로 확연하게 구분도 안 가더라고요. 암튼 잘 알았습니다. ^^
  • 리리안 2011/07/03 19:16 # 답글

    마지막이 너무 허망하네요. 차라리 낙랑공주 이야기처럼 찐한 엔딩이 있었으면 더 감동적이었을텐데...


    그런데 낙랑이 감동적이면 뭐하지? ㅡㅡ
  • 야스페르츠 2011/07/03 20:06 #

    원래 끝은 허망한 법입니다. 낙랑공주는 후에 머나먼 몽골 고원으로 시집을 가는데... (응?)
  • 2011/07/03 19:28 # 삭제 답글

    가..갈석산!!
  • 야스페르츠 2011/07/03 20:06 #

    떡밥!
  • 소하 2011/07/03 19:34 # 답글

    교치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
    고기자르는 칼. 사람죽이는 칼. 요리용 칼. 수술용 칼. - 칼은 사람을 죽이게 만드는 것이니, "칼"은 모두 나쁜 것이야! 너 바보니? 왜 이해를 못하니?
  • 야스페르츠 2011/07/03 20:08 #

    무한 떡밥의 재생이지요.... 그리고 사실 교치를 구분하지 못한 것은 일부 옛 사가들 중에도 있는지라... 이성규 교수는 이점을 지적하면서, 수성현 갈석산 문제를 정면으로 가격하기도 했습니다.
  • hyjoon 2011/07/03 19:45 # 답글

    그리고 ㅇㄷㅇ이 노래를 부릅니다.

    '낙랑군은 갈석산 있는데 있었어~'
  • 야스페르츠 2011/07/03 20:08 #

    떡사마 ㄷㄷㄷ
  • 들꽃향기 2011/07/03 20:44 # 답글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감사히 잘 읽었고요 ^^ 낙랑은 그렇게 망했지만 지명은 남아 새로운 헬게이트를 여는데...(먼산)

    덧 : 낙랑과 함께 백제를 공격한 맥인이 고구려로도 해석되는군요. 제가 고대사를 배울때는 역시 민족주의가 강햇던 시점이라 그런지 맥인이 고구려가 아닌 말 그대로 예맥 부족이나 말갈족으로 해석을 하던 기억이 나네요. ㄷㄷ
  • 야스페르츠 2011/07/04 09:49 #

    맥인의 경우야... 좀 애매하긴 합니다. 고구려가 아닐 가능성도 충분히 있겠지요.
  • 백야 2011/07/03 22:17 # 답글

    완결이군요!
    초기 고구려,백제,신라의 발전에 어느정도 기여를 했으면서도 결국은 방해가 되었던 낙랑군이라... 참 애매해요;;
    그래도 축출의 수순을 밟아야 했던 것만큼은 확실하지만요;;
    그동안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덕분에 좋은 공부 했습니다.
  • 야스페르츠 2011/07/04 09:50 #

    발전을 저해하는 굴레이자 선진 문물의 창구가 되었지요.
  • Aydin 2011/07/03 23:13 # 답글

    밸리 인기글로 오르면 종종 봤었는데, 이쪽 방면으로는 아는 게 없어서(…) 그저 말없이 보기만 하다가 완결나서야 덧글로 다네요. 즐겁게 잘 읽었습니다 ^^
  • 야스페르츠 2011/07/04 09:50 #

    즐겁게 보셨다니 다행입니다.
  • 푸른화염 2011/07/04 00:12 # 답글

    수고많으셨습니다. 이글루스 입갤한 이래 고대사는 야스페르츠님을 포함한 다른 제현들께 늘 배우는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 야스페르츠 2011/07/04 09:50 #

    감사합니다. ^^
  • 2011/07/04 09:35 # 답글

    잘 봤습니다. 연재글 시작하면 고생입니다만, 완결하면 무언가 뿌듯함이......(그런 의미로 연재글이 없는 저 --;;)
  • 야스페르츠 2011/07/04 09:50 #

    1년이 넘게 연재했던 오호십육국에 비하면야... ㄷㄷㄷ
  • 명림어수 2011/07/04 11:02 # 삭제 답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낙랑고지"의 향방이 궁금하네요.
    교과서대로라면
    이렇게 미천왕때 무주공산이 되어버린 구 낙랑지구를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눈치보며 노리다가
    고국원왕이 찜을 시도하고 (分兵侵奪民戶)
    .... 그 결과는...
    황해도까지는 백제가 가졌겠지만,
    평남지역은 누구땅이었을까요?
  • 야스페르츠 2011/07/05 13:58 #

    낙랑고지는 고구려가 고스란히 먹었죠. 대방고지는 상당부분 백제가 점유하긴 했는데, 그 덕분에 고구려랑 맞짱을....
  • 부여 2011/07/04 15:57 # 답글

    찰진 연재글 잘 보았습니다. ^^
    사회에 만연한 떡밥을 어떻게 뭉개야 이렇게 찰진 게시글이 나올 수 있을런지...
    이번 기회에 낙랑군에 대해 많이 배워갑니다. 감사합니다.
  • 야스페르츠 2011/07/05 13:58 #

    떡밥을 보고 연구를 하면 됩니다. ㅎㅎ
  • costzero 2011/07/05 02:26 # 답글

    좋은 글이네요.
    한국역사 관련글은 고증문제로 올려도 욕먹기가 일수라 사람들이 기피해서 보기가 힘듭니다.
  • 야스페르츠 2011/07/05 13:59 #

    ㄷㄷㄷ 고증이랄 것 까지야... 아무튼 감사합니다. ^^
  • 누군가의친구 2011/07/05 07:54 # 답글

    결과적으로는 고구려, 백제에 의해 추출되었으니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 한들 부끄러울게 되지 못하지 말입니다.
  • 야스페르츠 2011/07/05 13:59 #

    낙랑군은 한반도에, 하지만 삼국은 대륙에 있었지효. (응?)
  • 2011/07/05 15:09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야스페르츠 2011/07/06 09:37 #

    그런건 여기서 아무리 걱정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인간이 하는 걱정의 99%가 부질없는 것이라지요.
  • 파랑나리 2011/07/06 15:09 #

    "그런건 여기서 아무리 걱정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야스페르츠님도 제가 느끼는 위기의식에 동의하시는군요.
  • 야스페르츠 2011/07/07 15:39 #

    전혀 공감하지 않습니다. 귀하의 걱정이 완전히 부질 없다는 겁니다.
  • 굔군 2011/07/06 22:27 # 답글

    오오, 드디어 연재가 끝났군요. 축하드립니다.

    이제 낙랑을 정복한 찰진 고구려 연재로 가 버렷!!!
  • 야스페르츠 2011/07/07 15:39 #

    노노. 저는 음란찰기를 지양합니다. ㅋㅋ
  • 2011/07/08 18:30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야스페르츠 2011/07/10 22:10 #

    ㅠㅠ 이렇게 실패할 줄이야... ㅠㅠ
  • 모난돌 2011/07/26 09:14 # 삭제 답글

    초록불님의 블로그를 자주 들르다가 댓글을 통해 야스페르츠 님의 블로그에 와서.
    5호 16국 연재부터 낙랑까지 시간이 가는줄 모르고 이틀에 걸쳐 다 봐버렸다능. 덜덜.

    어릴때는 역사에... 정확히는 한국사에 관심이 많아서 사학자가 되는게 꿈이기도 했는데...
    그런 꿈과는 모순되게 10대 후반에는 김진명류의 글에 살짝 넘어가 환빠 비스무리하게 될 뻔도... 쿨럭.

    어찌저찌 흘러흘러 찾아간 초록불님의 블로그에서 정신을 차리고 현실 세계로 넘어왔습니다.

    잡솔이 길었고... 야스페르츠님의 글은 무언지 모르게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네요.
    그만큼 글 솜씨가 출중하다는 의미겠지요.

    무려 6시간을 화장실 한 번 안가고 5호 16국 시리즈의 마지막 부분부터 고조선 거쳐 낙랑까지
    다 읽어버리게 만든 야스페르츠님의 짐승같은 글빨에 경의를. ㅡ_ㅡ

  • 야스페르츠 2011/07/28 13:55 #

    감사합니다... 저도 어릴 때는 김진명에게 혹했었죠. 다 흑역사... ㅡㅡ;;
  • raw 2011/07/29 00:58 # 답글

    정말 파란만장한 삶(?)을 유지했으며 죽어서(?)까지도 이상한 떡밥에 이용될만한 소지를 남긴 낙랑군...;

    여튼 엄청 수고 많으셨습니다.
  • 야스페르츠 2011/08/01 10:02 #

    감사합니다. ^^
  • 2011/07/29 01:01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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