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7/01 20:57

담백하게 풀어보는 낙랑군의 역사 (7) 역사

8. 특별 처방

군웅할거의 혼란이 막 시작되던 189년, 요동군에 공손탁(公孫度, 또는 공손도)이 태수로 부임하였다. 공손탁 자신이 원래 요동군 양평 출신이었던 만큼, 당시의 혼란한 정국에서 일어난 위험한 인사였을 것이다. 당연히 공손탁의 세력 하에서 요동군은 독립적인 군벌 정권을 수립하였다. 요동의 공손탁 정권은 스스로 요동의 왕을 자처할 정도로 독립적이었다. 심지어 중국 조정에서조차 공손탁의 요동군을 해외(海外)라고 칭할 정도였다. 게다가 이 무렵이 되면 오환이나 선비가 요서 일대에서 분란을 일으키는데다 공손찬과 원소 같은 네임드 군벌들이 하북에서 등장하면서 공송탁은 머나먼 요동을 다스리는 군소 군벌로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낙랑군과 현도군은 사실상 요동군의 부속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공손탁의 영향권 아래 편제되었다. 196년에 헌제를 옹립한 조조는 이러한 공손탁을 견제하기 위해 자신의 부하 양무(涼茂)를 낙랑태수로 임명하였는데, 공손탁은 낙랑군으로 부임하기 위해 요동군을 지나가던 양무를 억류하였다. 결국 양무는 공손탁에게 붙잡혀 있다가 다른 곳의 태수로 전출되어 겨우 풀려났다.

그런데 정작 이 시기의 낙랑군에 대해서 공손탁이 특별히 무슨 조치를 취한 것은 없다. 2세기 말엽에 가속화된 낙랑군 주민의 이탈 현상 자체는 공손탁 시기에도 딱히 해결되지 않았다는 의미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공손탁에게 중요했던 곳은 역시 요동군이었고, 더구나 고구려와 공손탁은 발기의 망명으로 대립 관계가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발기의 사건이 산상왕 원년(197년)에 벌어져 같은 때 모두 해결된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지》에는 공손도가 아닌 공손강에 의해 발기 사건이 일어난 것으로 나타나며, 이때의 공격으로 인해 고구려는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러모로 복잡한 이야기가 되겠으나, 공손씨의 요동 정권과 고구려가 대립하였다는 사실은 확실한 것으로 보아도 될 것 같다.



204년에 공손탁의 뒤를 이어 공손강(公孫康)이 요동태수가 된 뒤, 낙랑군 둔유현 이남의 황무지를 분할하여 대방군을 설치하는 특별 처방이 내려졌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건안 연간(196~220)에 일어난 일이라 한다. 공손강의 당면 현안을 생각해 본다면, 조조가 원소의 잔당을 모두 토벌한 뒤로는 조조 쪽의 문제로 정신이 없었을 테니(207년) 그 이전에 일어난 일이었을 것이다.

대방군의 설치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내려지고 있다. 직접 사료 상에 나타난 이유는 한과 예의 강성에 대처하기 위함이다. 대방군의 분할과 함께 측근인 공손모(公孫模)와 장창(張敞)을 파견, 한과 예를 정벌하여 이를 직접 실천에 옮기기도 하였다. 공손모와 장창에 의해서 낙랑 및 대방군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사멸할 지경이었던 낙랑군의 생명이 이로써 연장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또 다른 이유로는 고구려 견제를 들 수 있다. 한말(漢末)이라 기록되어 모호하기는 하지만, 고구려는 이 시기를 즈음해서 예를 복속시켰다. 낙랑군은 당초 옛 영동 7현을 비롯한 예 지역에 대해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며 최소한의 통제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긴 세월 동안 그 통제책이 무너지고 결국 고구려가 이를 모두 접수한 것이다. 이로써 고구려의 세력이 낙랑군의 동쪽 경계를 모두 봉쇄하는 형세에 이르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고구려를 효율적으로 견제할 수단이 필요해졌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 이유로 언급되는 것은, 낙랑군에 대해서 공손씨 정권이 세력 정리를 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낙랑군은 300년에 달하는 역사를 가진 군이다. 공손씨 정권이 요동군을 장악하기는 했지만 낙랑군이 이 정권을 온전히 지지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즉, 낙랑군의 토착(?) 세력의 반발을 무마시키고 낙랑군 지역에 자신의 지지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대방현을 중심으로 새로 군을 설치하였던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미 일전에 조조가 낙랑군에 태수를 파견하여 공손탁을 견제하려 한 적도 있었으니, 공손강으로써도 낙랑군이 온전히 자신을 지지하리라 희망적으로 생각할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인지, 분할된 대방군은 사실상 낙랑군을 대신한다 할 정도로 강력한 모습을 보인다. 한과 예를 직접 정벌하였던 것도 분명 대방군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으며, 그 결과 한과 예가 복속한 것 역시 대방군이었다. 낙랑군은 당초 한반도 전역에 걸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삼한의 기타 소국들이 한나라와 교섭하던 창구의 역할도 하는 등 한반도 일대에서 상당한 권위를 가진 정치체였다. 그러나 대방군의 등장 이후에는 그 역할이 매우 축소되어 사실상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거의 상실한 듯한 모습을 보인다.

이름하여 "대방군 주도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방군 주도기는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공손씨 정권이 오래지 않아 몰락했기 때문이다.

※ 낙랑·대방군 관계 지도 (위키백과 용으로 직접 제작 ^^;;)


9. 부활

220년, 한나라가 멸망하고 삼국시대가 시작되었다. 북방을 장악하고 있던 위(魏)는 사천 지방의 촉한과 오랫동안 대립하였기 때문에 공손씨 정권에 대해서 크게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 덕분에 공손씨 정권은 속편하게 후계자 분쟁을 일으킬 정도로 잠시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234년에 제갈량이 죽고 위나라가 잠시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자, 당장 공손연(公孫淵)이 다스리는 요동이 정벌 대상이 되었다.

237년, 공손연은 연왕(燕王)을 자칭하며 최후의 발악을 하였고, 이듬해 사마의는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요동을 공격하였다. 공손씨 정권이 무너진 것은 당연한 수순인데, 이때 사마의의 정벌군은 별동대를 파견하여 공손연의 배후를 공략하게 하였다. 바다를 건너 낙랑·대방군을 점령하게 한 것이다. 유흔(劉昕)과 선우사(鮮于嗣)가 각각 대방태수·낙랑태수로 임명되어 두 지역을 평정하였는데,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대방태수가 먼저 언급되는 점이다. 이 당시까지도 대방군이 낙랑군보다 주도적이었다는 사소한 증거라고 할 수 있겠다.

유흔과 선우사에게는 두 군의 평정과 함께 그 영향권 하에 있는 한과 예를 통제하는 임무도 함께 부여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두 군을 접수하고 난 뒤 삼한의 여러 신지(臣智)들에게 읍군(邑君)의 인수를 덧붙여주고, 그 다음 등급의 수장들에게는 읍장(邑長)을 더해주었다. 이 때문에 삼한 지역에서는 일종의 관직(?) 인플레 현상이 벌어졌던 것 같다. 위나라의 인수를 받은 자가 천여 명에 달했다고 하니, 삼한 사회를 분열시켜 지배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한편, 공손씨 정권이 몰락하고 난 뒤 유주자사로 임명된 관구검은 거의 점령군 사령관과 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요동과 낙랑-대방군을 관할하였다. 유주의 중심지는 지금의 북경 일대인데, 관구검은 공손씨 정권이 몰락한 이후 요동군의 중심지인 양평에서 계속 머무르며 동방 지역의 문제를 총괄했다. 이러한 관구검의 위세 덕택에 일개 부종사에 불과한 오림이 낙랑군과 대방군의 세력을 분할하기도 했다.

한편, 관구검 치하에서 요동-현도-낙랑-대방군은 동방의 제민족에 대해서 대단히 적극적인 정책을 펼쳤다. 관구검이 고구려를 직접 공격하여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때 낙랑과 대방의 군사력도 함께 동원되었다. 관구검의 본군이 환도성을 함락하고 현도태수 왕기(王頎)를 보내 옥저 지역까지 동천왕을 추격하는 동안, 낙랑태수 유무(劉茂)와 대방태수 궁준(弓遵)은 일전에 고구려에 복속한바 있는 영동의 예를 공격하였다. 이 공격으로 예는 고구려의 영향에서 벗어나 낙랑군의 강력한 영향력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또한 삼한 사회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개입이 있었는데, 앞서 말한 오림의 관할권 분할 당시 통역의 오류로 인해 삼한의 유력 세력 측에서 대방군의 기리영을 공격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기리영 전투(그리고 이와 연관되어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고이왕의 낙랑군 유민 습취 사건)에 대해서는 워낙에 의견이 분분한지라 여기서 자세하게 살펴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내 자신의 이해가 일천하기도 하고... ㅡㅡ;;) 어쨋든 기리영 전투의 결과 《삼국지》는 한을 멸망시켰다고까지 기록하고 있다. 위의 예 복속 기사와 함께 낙랑-대방군이 강력한 세력을 떨쳤다는 의미로 볼 수 있겠다. 《삼국지》는 이 무렵에 한의 나해(那奚) 등 물경 수십개 소국들이 복속해왔다 기록하고 있다.


※ 관구검기공비 : 관구검이 환도성을 점령한 뒤 남겨 놓은 인증샷(?)이다.


한편, 위나라는 공손씨의 영향력이 큰 대방군을 견제하기 위해 낙랑군을 의도적으로 키워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말한 오림은 대방군의 영향권 하에 있던 삼한이 원래 낙랑군의 통제를 받았다는 이유로 진한 8국을 대방군 관할에서 낙랑군 관할로 옮겨 버렸다. 고구려로부터 탈취한 예 역시 낙랑군이 관할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렇다고 대방군을 무조건 약화시키려 한 것만은 아니었다. 대방군은 삼한에 대한 영향력이 약화된 대신 왜와의 교섭 창구가 되었다.

한반도 일대를 넘어서 왜까지 영향력을 발휘하려 한 것이니 낙랑·대방군 자체의 세력은 이전보다 약화되었을지언정 외적인 영향력은 오히려 커졌다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화려하게 부활(?)한 낙랑·대방군은 남은 3세기 동안 동방, 즉 한반도에서 강력하게 군림하였다. 이 시기, 낙랑군은 삼한 및 예의 세력들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특히 예에 대해서는 불내(不耐)의 수장이 직접 조정으로 조공을 갈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조세를 바치고 부역에 동원되는 등 군 내의 백성처럼 취급당할 정도였다. 261년에는 낙랑군을 통해 한과 예의 수장들이 조공을 바쳤는데, 낙랑군은 이들을 가리켜 외이(外夷)라 칭하고 있다.

이 무렵 고구려는 관구검의 공격으로 치명타를 맞은 이후 한동안 성장에 제약을 받았던 것 같다. 259년에 위나라와의 전쟁기사 말고는 300년, 미천왕 즉위까지 확장 전쟁의 기록이 전혀 없다. 오히려 침략을 당한 기록만 남아 있을 뿐이다. 백제 역시 기리영 전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긴 하겠지만, 어쨌든 낙랑·대방군의 영향력 하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낙랑군의 영향력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력했던 시기였다.


결과를 알고 있는 후세 사람의 만용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표현도 나름 재미있는 것 같아 한 번 써 보련다.


낙랑군은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불타 올랐다. 그러나 그것은 곧 꺼지기 직전의 불꽃이었다.


※ 참고자료

박노석, 〈후한, 위, 진 시기 낙랑의 역할〉, 《전주사학》8, 2001
김수태, 〈漢城 百濟의 성장과 樂浪·帶方郡〉, 《백제연구》39, 2004


덧글

  • 리리안 2011/07/01 21:07 # 답글

    화광반조로군요...이제 낙랑도 마무리 단계네요.
  • 야스페르츠 2011/07/01 21:10 #

    화광반조, 아니져~ 회광반조, 맞습니다. ㅎㅎ

    아마 다음편이 마지막이 될 것 같습니다.
  • 리리안 2011/07/01 21:13 #

    아...오타^^;
  • 들꽃향기 2011/07/01 21:08 # 답글

    공손씨 세력과 대방군 설치가 그나마 이땅의 중국 군현에 마지막 스팀팩이 되었군요. ㄷㄷ 확실히 이 시기에 들어와 고구려를 견제하고 예를 굴복시키고, 한에 강력한 타격을 주는 것을 보면, 마지막 전성기라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ㄷㄷ 잘 읽었습니다. ^^

    덧 : 불내의 수장은 지금의 어디로 추정이 되나요?
  • 야스페르츠 2011/07/01 21:14 #

    불내의 위치라... 저도 잘 모르겠심더. ㄷㄷㄷ
  • 한단인 2011/07/01 21:33 # 답글

    하얗게 불태웠어!!


    덧. 임용 공부할 적에 대방군 주도 현상에 대해서는 낙랑군 내 유력자에 대한 공손씨나 위의 견제를 생각해보긴 했었는데 설치 때 고구려 견제 쪽은 생각해보지 못했었군요.
  • 야스페르츠 2011/07/01 21:36 #

    불꽃의 색이 백색이 되려면 대체 얼마나 뜨겁게 타올라야 하는 겁니까? ㄷㄷㄷ
  • 누군가의친구 2011/07/01 21:44 # 답글

    그리고 한낱 소금장수였던 자가 칼을 갈고 있습니다.ㄲㄲ
  • 야스페르츠 2011/07/01 22:23 #

    그리고 김진명은 소설을 쓰죠... 젠장.
  • 솔까역사 2011/07/01 21:47 # 답글

    오호... 일이 그렇게 된 거군요.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여러 가지 면에서 잘 맞지 않나 봅니다.
  • 야스페르츠 2011/07/01 22:23 #

    삼국사기는 좀... 뭔가 어렵죠.
  • 無碍子 2011/07/01 22:21 # 답글

    부여왕 위구태를 사위로 스카웃해서 대방에 백제를 건국했다고도 하는데요. 구태백제와 대방군이 공존했었습니까?
  • 야스페르츠 2011/07/01 22:24 #

    그 공손도 딸 이야기는 부여왕 위구태하고 백제왕 구태인가 하고 헷갈려서 잘못 기록된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더 강합니다....

    근데 구태 백제는 뭡니까? 전 그런 건 취급 안해서 몰라요.
  • hyjoon 2011/07/01 22:54 # 답글

    이제 조만간 짐싸고 요서로 이사가고.....떡밥이 나오고.......(...).....
  • 야스페르츠 2011/07/01 23:03 #

    첨에는 요동으로 이사갔어염. ㅎㅎ
  • hyjoon 2011/07/01 23:07 #

    환드모트의 요동은 그 요동이 아니라능. 『요사』 《지리지》에 기록되어 있는 요동의 위치 모르냐능. (도주)
  • 대공 2011/07/01 23:10 # 답글

    화광반조였군요.
  • 야스페르츠 2011/07/02 09:27 #

    노노... 회광반조에요... 화광반조는 틀린 말... ^^;;
  • Falmehawk 2011/07/01 23:23 # 답글

    저는 요동 공손씨라고 하면
    >공손공은 음경이 위축되는 고자였다.
    가 제일 먼저 떠오르는군요.(…)
    왜 이런 쓸데없는 것만 기억하는가.
  • 들꽃향기 2011/07/02 04:56 #

    아아아......ㅠ
  • 야스페르츠 2011/07/02 09:28 #

    윽... 제 블로그는 음란찰기를 지양하기 때문에 일부러 공손공은 안썼음둥. ㅋㅋㅋ
  • 명림어수 2011/07/01 23:38 # 삭제 답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이제야 삼국지에 나오던 "낙랑본통삼한" 구절이 이해가 되네요.
    (이걸 "낙랑이 원래 삼한을 통일했으므로" 로 번역하는 사학자도 봤습니다만..)
    그런데 거기서 진한사람들이 왜 분노했는지는 아직 의문이네요...
  • 야스페르츠 2011/07/02 09:31 #

    진한이 아닙니다. 전통적인 해석은 신지와 한인들이 분노했다고 해석햇죠. 최근에는 판본 분석을 통해 신분고국이 분노했다고 해석하기도 하고... 대략 추측해 보자면, 진한을 분할한다는 것을 요상하게 통역하는 바람에 마한, 또는 마한 북부에 헤게모니를 가지고 있던 유력한 소국이 꼴받았고, 그래서 전쟁이 일어났다고 보고 있습니다. 여기서 백제의 역할이 어떠한가를 놓고 온갖 카오스가 벌어지는 거죠.
  • raw 2011/07/02 02:01 # 답글

    이번에도 재밌게 잘봤습니다.
    이제 회광반조를 마친 그들은 역사속으로 사라지는거겠군요.
  • 야스페르츠 2011/07/02 09:32 #

    그런데 그들은 사라지지 않고.... 요동과 요서에 살아 숨쉬고 있지효. ㄷㄷㄷ
  • 굔군 2011/07/02 10:03 #

    심지어 요서로 옮겨간 그들은 대륙백제가 되어 아직도 쉬지 않는 떡밥으로 살아 숨쉬고 있어염 ㄷㄷㄷㄷ
  • 백야 2011/07/02 15:13 # 답글

    공손씨 정권이 마지막 촛불의 심지였군요.. ㅎㄷㄷ
    잘 보았습니다.
    이제 낙랑군도 쫓겨날 때가 머지않았군효ㅋㅋ
  • 야스페르츠 2011/07/02 21:37 #

    대망의 결말입니다아아아
  • 굔군 2011/07/02 15:20 # 답글

    度는 인명에 쓰일 때는 "탁"이 아니라 "도"로 읽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이유로, 조선 태조 이성계의 할아버지로서 왕으로 추존된 度祖는 "탁조"가 아닌 "도조"이고, 남송의 度宗 황제도 "탁종"이 아닌 "도종"으로 읽죠.
  • 야스페르츠 2011/07/02 21:37 #

    도가 맞는 것인가요? 흠냐...
  • 파랑나리 2011/07/18 22:27 # 답글

    선우사(鮮于嗣). 선우라는 성은 무슨 뜻이고 어디서 유래되었고 본관이 어디고 가격家格이 어느 정도입니까? 한국에도 태원 선우씨가 있는데 기자의 후손이라 하니, 이거 영 알쏭달쏭하네요.
  • 굔군 2011/07/19 04:50 #

    이런 거야 위키백과 찾아보면 금방 나오죠. 요즘은 세상이 워낙 좋아져서...

    여기 참조.
    http://ko.wikipedia.org/wiki/%EC%84%A0%EC%9A%B0_(%EC%84%B1%EC%94%A8)
    http://zh.wikipedia.org/wiki/%E9%B2%9C%E4%BA%8E%E5%A7%93

    참고로 기자의 후손이라는 것은 후한대에 중국쪽 선우씨들이 먼저 주장한 겁니다.
  • 굔군 2011/07/19 04:52 #

    첫번째 주소는 끝에 )까지 같이 입력해야 링크가 되는군요. :)
  • 파랑나리 2011/07/19 19:14 #

    둘 다 봤는데도 알쏭달쏭하네요. 선우씨의 유래와 본관은 대략 알겠지만 성씨의 뜻이 무엇인지 후한, 서진 시대 가격이 어느 정도인지는 둘 다 없어요.
  • 굔군 2011/07/20 23:03 #

    그런 게 궁금하시면 이런 데다 질문하실 게 아니라, 자료 조사해서 직접 찾아보든가 하시죠. 저나 다른 분들은 그런 거 알고 싶지도 않고, 그다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으니까요.

    그런데 여기 낙랑군 표스팅에 뜬금없이 선우씨에 대한 질문은 왜 올리신 겁니까?
  • 야스페르츠 2011/07/21 14:47 #

    그런 건 직접 찾아보세요. 제가 무슨 족보 연구가도 아니고 그런 것까지 어떻게 압니까... 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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