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6/29 21:30

담백하게 풀어보는 낙랑군의 역사 (6) 역사

7. 쇠락

서기 36년, 광무제의 후한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겨우 혼란이 진정되었다. 후한 초기, 요동에는 제동(祭彤)이 30년 가까이 태수로 재임하며 국경을 진무하였는데, 이때의 요동군은 당대의 도호부와 유사할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된다. 낙랑군 역시 제동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고 보여지며, 제동의 적극적인 이민족 정책에 힘입어 고구려 및 삼한에 대하여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영향력을 보여주는 기록으로는 건무 20년(서기 44) 삼한 염사 지방의 소마시(蘇馬諟)가 내부한 것이나 건무 23년(서기 47, 민중왕 4년) 고구려 잠지락의 대가 대승(戴升)이 1만 명과 함께 내속한 일이 있다. 잠지락의 내속은 주민 전체가 내속한 사건이지만, 소마시의 내부는 염사 지방의 수장이 조공을 바치며 복속을 청한 것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광무제는 소마시를 염사의 읍군으로 봉하였으니, 이는 낙랑군이 군의 외부에 영향력을 미치는 소국이나 국읍을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앞서 영동 7현의 포기를 낙랑군이 영동 7현을 더 이상 유지하지 못하고 방기한 것으로 해석한 바 있다.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 보면, 현을 직접 유지하는데 비용이 많이 들어 직할령을 폐지했을 뿐, 그곳에 행사하던 영향력을 완전히 포기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 기록 상으로도 해당 지역의 거수들을 현후(縣侯)로 봉하여 영향력을 최대한 유지하려고 노력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후 약 100년 동안 낙랑군과 관련된 기록은 거의 전하지 않는다. 111년에 부여가 쳐들어온 기록이 약간 눈에 띌 뿐이다. 또한 낙랑군 수복에 공을 세웠던 왕굉의 아들 왕경(王景)이 중앙 정계에까지 진출하여 활약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것으로 보아 낙랑군이 쇠퇴해가긴 했어도 후한의 행정력이 여전히 미치고 그 문화적 역량 또한 쇠락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낙랑군의 기록이 부족한 이 시기는 고구려의 태조왕 재위기와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태조왕기 고구려는 후한과 자주 대립과 화친을 반복하였고 그때마다 요동·현도군과 치열하게 싸우거나 교류하였다. 상대적으로 낙랑군을 소외되어 있는 셈이다.

후한 시기 대부분에 걸쳐서 요동군은 동북면에서 도호부나 막부를 연상케 할 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가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에 따라 현도군이나 낙랑군은 요동군 밑에 소속된 속군과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고구려 역시 이 지역의 가장 유력한 세력인 요동군과 맞서기에도 벅찼을 것이다.

반대로 고구려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남쪽으로 진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56년에 동옥저를 병합하여 동해안으로 이르는 길을 뚫었으며, 당시 낙랑군과 접경이었던 살수(청천강)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낙랑군과 직접 대립한 기록은 잘 나타나지 않지만, 살수를 경계로 낙랑군과 대치하였던 만큼, 기록 되지 않은 대립 상황을 추측하는 것도 그렇게 무리하지는 않을 것 같다.


이렇게 고구려가 요동군과 맞서 세력을 확대하면서 동북면의 위기가 심화되었다. 태조왕 초창기에는 현도나 요동군의 변경에서 주로 충돌이 일어났는데, 146년에 이르면 고구려군이 서안평현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서안평현은 지금의 압록강 하구 일대로 비정된다. 실질적으로 요동군과 낙랑군을 이어주는 유일한 교통로가 서안평현이었으니, 이곳이 공격을 받았다는 것은 고구려가 상당한 성장을 이룩했다는 의미가 된다.

이 서안평 공격은 또 중요한 점이 있는데, 이 공격 당시 고구려군이 죽이고 사로잡은 인물들이 모두 낙랑군과 관계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대방현령이 죽고 낙랑태수의 처자식이 포로로 잡혀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요동군 소속의 서안평에 낙랑태수의 처자식이 있는 이유도 의문이거니와, 대방현령까지 체류하고 있었으니 이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처자식이 아닌 대방현령만이 기록되어 있었다면, 군사적인 이유로 대방현령이 주둔하고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태수의 처자식까지 사로잡힌 상황을 보면 달리 해석해야 할 것 같다.

부임하는 도중에 습격을 받은 상황을 상정해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한다면 낙랑군 지역의 내정 불안 때문에 부임하지 못하고 체류하고 있다는 상황도 가능하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기록이 조금 뒤에 등장한다.

환제(146~167)·영제(167~189) 말엽에 한과 예가 강성하여 군현이 통제하지 못하였고 많은 주민들이 한국으로 흘러 들어갔다.
桓靈之末韓濊彊盛郡縣不能制民多流入韓國

거의 40년에 달하는 기간, 그것도 2명의 황제를 모두 언급하면서 末이라 쓰는 것을 보면, 환제와 영제가 하나의 시대를 나타내는 관용구처럼 쓰인 것 같다. 그렇다면 최대한으로 시기를 소급한다고 해도 170년대 무렵일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고구려의 강성으로 요동-현도가 수시로 침탈당하고 있던 만큼, 낙랑군도 결코 평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위의 기록에서 주목할 점은 군현의 주민이 이탈하고 있는데도 군현 당국은 물론이고 중앙 정부에서도 이에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는 부분이다. 이미 전한 시기에도 변방 지역의 현은 인구 이탈이 결코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이를 기록으로 지적하고 있지도 않고, 부도위를 설치하여 통제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후한 초기에도 영동7현을 폐지하였으면서도 삼한과 동예 지역에 대해 현후나 읍군을 임명하여 간접적으로 지배·통제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이르면 한과 예의 통제 자체에도 실패하고 있는데다가 주민이 이탈하는데도 이를 막지 못하고 있다.

이 시기 인구의 이탈을 보여주는 흔적은 둔유현 이남을 분할하여 대방군을 설치한 조금 후대의 기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때의 기록에는 둔유현 이남의 황무지를 분할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방현의 인구가 전한 시기에 결코 적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때는 황무지라 기록된 점은 이 무렵의 인구 이탈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후한서》에 기록된 낙랑군의 인구는 6만 호, 25만 명이다. 그렇다면 서기 2년의 인구와 비교해 볼 때 눈에 띄게 인구가 감소한 점을 알 수 있다. 영동 7현의 인구가 이미 기원전 45년에도 매우 적었던 것으로 볼 때 영동 7현이 폐지된 것은 인구 변화에 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진서》에는 인구가 1만 호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어 더욱 격심한 인구 감소를 확인할 수 있다.

후한 시기의 인구가 감소한 점은 분명하지만, 완전히 쇠락한 수준은 아니다. 환영제기 이전의 인구 통계라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반면 서진(西晉) 시기의 인구가 1만 호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른 것은 환영제기의 이탈이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낙랑군의 쇠락이 가시화된 셈인데, 그러나 아직 낙랑군의 명줄은 조금 더 남아 있었다. 낙랑군의 수명을 늘려줄 특별 처방이 때마침 나타났기 때문이다.

덧글

  • 백야 2011/06/29 21:34 # 답글

    잘 읽었습니다'ㅅ'
    그 특별 처방이란 것이 궁금하기 짝이 없어요ㄷㄷ
  • 야스페르츠 2011/06/29 21:57 #

    to be continued...
  • 들꽃향기 2011/06/29 21:40 # 답글

    고구려의 서안평 습격에서 대방군, 낙랑군 관계자들이 포로가 된 것은, 저도 부임 중에 습격을 받거나 아니면 친목파티(....) 같은 것을 하다가 고구려군에게 정보가 유출된 것은 아닐까 하고 망상(?)도 했었습니다만 ㄷㄷ
    말씀을 듣고보니, 이미 낙랑군-대방군 지역에 대한 통치 자체가 불가능해서 부임조차 못한 채, 문전(?)이라 할 수 있는 서안평에서 얼쩡거리다 잡힌 것일수도 있겠군요. ㄷㄷ

    다음의 특별처방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저도 궁금합니다. 설마 서진 본토에서의 마린드랍(!)은 아닐테고....ㄷㄷ 잘 읽고 갑니다. ^^
  • 야스페르츠 2011/06/29 21:58 #

    친목 파뤼라니... Let's dance party!!
  • 명림어수 2011/06/29 23:14 # 삭제 답글

    당시에도 교육목적의 기러기 부부가 있었나 봅니다.
    서안평지역에 좋은 학원이 있었나 보죠.
    대방현령은 출장핑계를 대고 가족을 만나러 갔다가 납치크리....
  • 야스페르츠 2011/06/29 23:29 #

    대방현령은 끔살크리... ㄲㄲ
  • 굔군 2011/06/29 23:20 # 답글

    특별 처방이라... 아마 다음 편은 공손씨의 등장인가요? ㅎㅎ

    그나저나 부여의 낙랑 침공이나, 고구려의 서안평 공격 기사 등은 환빠들이 낙랑군이 한반도에 없었다는 근거로 자주 써먹는 레퍼토리 가운데 하나죠.

    111년의 부여 침공 기사의 경우, '낙랑'을 현도나 요동의 오기로 보는 해석이 중론인 것으로 압니다.
  • 야스페르츠 2011/06/29 23:30 #

    부여는 이해하겠는데 서안평 공격이 왜 그쪽 레퍼토리가 되죠? ㄷㄷㄷ
  • 굔군 2011/06/29 23:49 #

    왜냐하면 서안평을 공격했는데 대방령을 살해하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잡아 왔으니까요...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면 왜 대방현령과 낙랑태수가 서안평에 있냐? 이것은 낙랑이 요동에 있었다는 증거라능...대충 이런 논리죠.

    그런데 이미 대방현령과 낙랑태수의 가족이 포로로 잡힌 그곳 자체가 낙랑군이 아닌 '요동군'이라....;;
  • 리리안 2011/06/29 23:25 # 답글

    특별 처방이라...시대가 시대니 삼국지랑 관련 있나요?
  • 야스페르츠 2011/06/29 23:30 #

    이미 삼국지 시대죠. ㅎㅎ
  • 과객 2011/06/30 00:00 # 삭제 답글

    흥미로운 글이군요.
    그런데 한족이 세운 낙랑군이 400년 정도나 평안도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부분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흔히들 이야기하는 "단군이래 5천년 단일민족"이라는 명제가 매우 부적적하게 들립니다.

    고구려도 한민족만의 단일 공동체가 아니라 말갈족이 큰 부분으로 자리했다고 하고, 신라 지배층이 문무왕비에서 주장했다는 흉노족 후예설과 한반도 남부에서 발견되었다는 일본식 전방후원분 문제도 그렇고...

    어쩌면 오늘날 "한민족"이라 불리는 공동체는 단군시절부터 있던게 아니라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싶거든요..주인장께서는 아마 사학도이신 듯 한데 이런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사학계에서는 솔직히(공식적으로 내놓고 말할 가설은 아닌 듯 하니..) 어떻게들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 야스페르츠 2011/06/30 09:10 #

    단일민족은 이미 사학계에서도 언급되지 않는 프로파간다에 불과합니다. 한민족의 형성 자체가 고려의 성립 이후부터라고 보고 있습니다. 통일신라는 민족이 형성될 만큼 통합적인 정책이나 국가를 유지하지는 못했죠. 후삼국이라는 예를 보아도 그렇고...
  • 솔까역사 2011/06/30 00:32 # 답글

    특별처방이 삼국지에 나오는 그 기록을 말하는게 아닌지 한번 찍어 봅니다.
  • 야스페르츠 2011/06/30 09:10 #

    to be continued... 그래봤자 다들 아는 뻔한 거지만요. ㅎㅎ
  • 2011/06/30 01:16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야스페르츠 2011/06/30 09:12 #

    같은 사람입니다. 권오중 교수는 제동이라고 읽었더라구요. 낙랑군 전체의 역사를 통사로 풀어 놓은 논문이 권오중 교수의 것이 가장 간편한지라 그것을 저본으로 삼다 보니 그쪽의 내용을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 Shaw 2011/06/30 02:04 # 답글

    그런데 초원 4년 호구부에서 영동 7현을 제외한 낙랑군의 인구는 23만 명 남짓입니다. 여기서 영동 7현은 6600여호에 4만 6천명 정도로 집계되는데, 삼국지 동이전에 나오는 예와 동옥저의 호수를 합치면 2만 5천호였던 것과 비교하면 차이가 너무 심합니다. 초원 4년에 오히려 영동 지역의 인구가 과소 평가되었던 것일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
  • 야스페르츠 2011/06/30 09:16 #

    흠...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근데 과소 평가되었다는 것 자체가 주민의 이탈 때문이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삼국지의 예나 동옥저도 영동7현보다는 훨씬 넓은 범위로 추정되고 있으니 영동7현에 해당하는 영역은 전체의 일부라는 점도 생각해야 하겠죠.
  • Shaw 2011/06/30 14:29 #

    예를 들어 담기양 지도 같은 데서는 그냥 예나 옥저 지역 거의 전체가 군현 관할인 것으로 그려 놓았는데, 굳이 그렇게 보지 않는다 해도 군현에 소속된 것보다 3배쯤 많은 인구가 바깥에 있었다고 하기란 좀 이상하지 않을까요.
  • 야스페르츠 2011/06/30 18:53 #

    낙랑군 또는 남부도위가 남한 전체에 달하는 삼한에 대해서 행사한 영향력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이상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영동7현은 대부분 함흥평야를 중심으로 강원도 북부 해얀지대, 함남 일부 해안지대로 그려지는데 비해 동예나 옥저는 그보다 더 넓은 범위로 그려지잖아요. 동예만 해도 강원도 북부 일대를 전부 통괄하고 있으니...
  • Shaw 2011/06/30 19:29 #

    그게 그렇게 확정적인 얘기가 아니라서... 심지어 동이현은 강릉으로 보는 수도 있고 말이지요.

    제가 영동 7현 인구에 대해서 의구심을 품는것이, 임둔군치였다고 생각되고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한때 현령급 장관이 파견되기도 했던 동이현이 초원 4년 호구부에서는 불과 200여호의 작은 현에 불과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태를 비정상적인 것으로 가정하고 어느 시기엔가 정상으로 돌아왔을 것이라고 추측한다면, 한서의 호구 기록은 초원 4년과 비교해 볼 때 '모든 지역이 골고루 비슷한 비율로 성장' 한 것만은 아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원래도 얘기했듯이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에 불과하긴 합니다.
  • 야스페르츠 2011/07/01 12:10 #

    흠... 저는 오히려 반대로 생각합니다. 임둔군 시절에는 현령급이 파견될 정도로 충실했던 동이현이 그 동안의 혼란을 거치면서 초원 4년에는 200여 호로 감소했다고 보는 편이 오히려 합리적이 아닐까 싶네요. 제가 참고한 논문에서도 대체로 비슷하게 보고 있구요. 이런 감소 추세가 있다면, 변방이 완전히 평화로워지지 않는 이상 비슷한 수준으로 안정되기만 해도 다행이겠죠.

    그래서 저는 한서에 기록된 인구의 대부분은 중심부의 인구이고, 영동 7현이나 남부도위는 초원 4년과 비슷한 수준이나 유지했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왕망 시기가 되면 고구려의 침탈이 본격화되고, 겨우 30년 뒤에 영동 7현을 포기하는 일까지 벌어졌으니...

    뭐, 이것도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하긴 하지만요. ^^;;
  • 크핫군 2011/06/30 13:10 # 답글

    바퀴벌레와 같은 생명력 돋네 어휴
  • 야스페르츠 2011/06/30 14:27 #

    ㄷㄷㄷ 오래 가지요.
  • 공손연 2011/06/30 13:40 # 삭제 답글

    쇠퇴라....그래도 공손씨의 지배하에 있던 시절까지는 안정기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둔우현이남에 대방군을 설치한것도 공손강이 한,예를 압박하고 세력을 확대하는
    일환으로 기록되는 것으로 볼때 오히려 지배가 강화되고 강성해지는 시기로 볼수있으며
    고구려가 서안평을 공략한것도 공손씨가 멸망한뒤이고 이전에는 고구려에 대해서도
    공손씨가 우세했었고 그 이후로도 관구검한테 크게 발려서 고구려가 위축된만큼
    상대적으로 낙랑군도 안정을 얻을수 있었다고 봅니다.

    힘들어진것은 서진이 무너진 이후라고 생각됩니다.
  • 야스페르츠 2011/06/30 14:28 #

    공손씨의 지배로 안정을 찾았다고 봐야죠. 그 이전에는 뚜렷한 쇠퇴의 징후가 보이기 때문에..
  • 누군가의친구 2011/07/01 10:08 # 답글

    DND입니다. 내려갈 나라는 내려가는 법입죠.(...) 저럴땐 군이니까 뭐라고 하더라...(...)
  • 야스페르츠 2011/07/01 12:13 #

    아니라능. DOA라능. (응?)
  • 2011/07/04 11:22 # 삭제 답글

    포스팅 관심있게 보고 있는 1人입니다.

    韓國 이라는 말이 고대 중국 사서에 나타난다니 무척 흥미로운데요,
    삼한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만 다른 사서에서도 사용된 바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 야스페르츠 2011/07/05 14:00 #

    많이 나옵니다. 이놈의 한(韓) 때문에 작년에 쓰레기 소설 "천년의 금서"가 나왔다능. ㅠㅠ
  • 2011/07/05 22:11 # 삭제 답글

    그렇군요... 괜찮으시다면 韓에 관한 포스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유사역사학으로 발전하기 전에 미리 정리해 둘 필요도 있을 것 같구요.
  • 야스페르츠 2011/07/06 09:39 #

    ㄷㄷㄷ 그, 그런 건 몰라효. 그리고 이미 유사역사학이 된 물건인지라..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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