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1/15 14:35

담백하게 풀어보는 고조선사 (完) 역사

8. 정복

기원전 109년, 한무제는 삐딱선을 타고 있는 고조선을 회유하기 위해 사신 섭하(涉何)를 파견했다. 당시 고조선은 우거왕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우거는 무제의 회유에 대하여 거부의 뜻을 밝혔다. 섭하는 성과를 이루지 못하고 귀환하게 되었는데, 아마도 그대로 귀환을 했다가는 무제가 분노하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섭하는 국경인 패수에 이르러서 자신을 전송하러 나왔던 고조선의 비장 장(長)을 죽이고 도망쳤다. 이 소식을 들은 무제는 섭하의 공을 치하하면서 요동동부도위(遼東東部都尉)로 삼았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서 조금 의아하게 보는 시각도 있다. 일개 사신이 전송을 나온 장수를 살해하는 것도 놀라운 일인데다가, 이런 "외교 분쟁거리"를 만들었음에도 무제는 그를 벌하기는 커녕 오히려 고조선을 놀리기라도 하는 듯이 고조선과 국경을 접한 지역인 요동의 도위로 삼았던 것이다. 처음부터 도발하여 전쟁을 벌일 계획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어쨌거나 고조선은 이러한 도발(?)에 제대로 낚여버렸다. 고조선 측에서 선제공격을 통해 섭하를 살해해 버린 것이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무제는 전쟁을 벌일 명분을 얻은 셈이다. 즉각 원정군이 편성되었다.


죄인들로 이루어진 원정군은 산동반도에서 출정하는 수군 7천 명과 요동 방면에서 출진한 육군 5만의 규모였다. 지금의 평양 일대에 위치하고 있던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을 공격하기 위해 수륙 양면으로 군사를 푼 것이다. 이는 고구려 시대의 전황과도 흡사하다.

좌장군 순체가 이끄는 육군은 선봉군이 고조선군에게 패하였고, 그 뒤로도 패수 서쪽으로 진출, 혹은 원래부터 배치되어 있던 고조선군을 계속 공격하였으나 전황은 지지부진했다. 한편 양복이 이끄는 수군은 왕검성 수비군의 공격을 받고 완전히 무너졌다. 양복은 산 속에 10여 일 동안 숨어 있어야만 했고, 그뒤에 겨우 흩어진 군사를 수습했을 정도의 대패였다.


한나라의 대군에 맞서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고조선이었지만, 그래도 쉽지 않은 전쟁이었을 것이다. 무제가 교착된 전황을 보고 복속을 권하는 사신을 보내자, 우거는 즉각 항복하였다. 항복의 대가로 말 5천 필, 군량미를 바쳤고, 태자가 1만여 명의 군사를 대동하여 한으로 항복하러 들어가기로 하였다. 그러나, 국경에 이르러서 다시 의견이 갈라졌다.

한 측에서는 1만 명이나 되는 군사를 감당할 수 없어 무장을 해제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고조선 측에서는 무장을 해제하면 적에게 당할 수도 있으니 절대 응할 수 없었다. 이미 섭하가 전송 나온 장수를 살해한 전적이 있으니, 고조선 측도 한나라를 무작정 믿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결국 태자는 왕검성으로 귀환해 버렸고, 교섭에 실패한 사신은 무제에게 참수되었다.


다시 전쟁이 재개되었다. 순체의 육군은 마침내 패수의 고조선군을 무너뜨렸고, 양복의 수군과 합류하여 왕검성을 포위하였다. 포위는 수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포위군의 지휘 체계는 좌장군 순체와 누선장군 양복으로 분산되어 있었는데, 순체는 승리한 기세를 몰아 강공을 계속했고 양복은 일전에 패배한 것도 있기 때문에 고조선과 평화적으로 교섭하려 하였다. 이 때문에 양군의 작전은 서로 아귀가 맞지 않았고, 고조선은 오랜 농성전에도 버틸 수가 있었다. 고조선 측에서도 강경한 입장의 순체보다는 양복과 교섭을 원했고, 이 때문에 순체는 양복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전황이 지지부진해지자 무제는 다시 공손수를 파견하여 상황을 살피도록 하였다. 공손수는 순체와 만나 양복이 의심스럽다는 의견을 듣고, 힘을 합쳐 양복을 체포하였으며, 순체는 비로소 전군의 통솔권을 갖게 되었다. 일을 해결(?)한 공손수는 귀국하여 무제에게 상황을 보고하였고.... 무제는 공손수를 처형했다. ㅡㅡ;;


어쨌든 전군을 지휘하게 된 순체는 더욱 강공을 펼쳤다. 이에 왕검성 내부에서도 절망적인 분위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조선상 노인과 한음, 장군 왕겹 등은 성을 빠져나와 한군에 항복하였으며, 니계상 삼도 이들과 모의하기는 했으나 빠져나가지는 않았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기원전 108년이 되자, 니계상 삼은 우거왕을 살해하고 성을 빠져나와 한군에 항복하였다.

왕이 죽었으나 왕검성은 함락되지 않았고, 고조선의 대신 성기가 다시 농성군을 이끌었다. 그러나 이미 패색이 짙어진 뒤였기 때문에 결국 성기는 우거왕의 아들 장(長)과 노인의 아들 최(最, 노인은 일전에 성을 빠져나와 항복하러 가는 도중 죽었다. 그래서 최가 성내에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 같다.)에게 살해되었다.

이로써 고조선 제2왕조는 멸망하였다.

고조선이 멸망한 자리에는 낙랑, 현도, 진번, 임둔의 4개 군이 설치되어 한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314년에 미천왕이 낙랑군을 몰아낼 때까지, 약 400년 동안 평양 일대는 중국 군현의 지배를 받아야만 했다. 유형으로든 무형으로든, 고조선과, 그 땅에 설치된 낙랑군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동방변군은 이후 우리나라 역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고구려는 고토의 회복을 외치며 중국 군현 세력과 대결하면서 성장하였고, 낙랑군은 한반도에 중국의 선진 문물을 전하는 중요한 창구가 되었다. 낙랑군의 견제로 인해 한반도의 국가 발전이 늦어졌다는 생각도 할 수 있고, 낙랑군에 맞서면서 국가의 발전이 더욱 빨라졌다는 결론도 내릴 수 있겠다.

고조선은 비록 멸망하였지만,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국가로 그 위치를 굳건하게 하고 있다.






덧글

  • hyjoon 2011/01/15 14:41 # 답글

    여기서 또 토성을 전쟁에 못쓴다는 개드립이 등장하죠. (도주)
  • 야스페르츠 2011/01/15 15:46 #

    우리 몽촌토성 무시하셈? ㄲㄲ
  • ㄲㄲㄲ 2011/01/15 18:46 # 삭제

    평양의 현 낙랑토성은 고조선의 도성(都城)이 아닐 가능성이 높지요.

    낙랑토성은 대동강 남안에 위치한 반면, 사기 조선열전의 묘사에 의하면 고조선의 왕험성은 열수(대동강)의 북안에 있었던 것으로 나오니까요.

    그러므로 사실 토성과는 별 상관이 없다능...
  • 프랑켄 2011/01/15 15:06 # 답글

    뭐 시작과 끝이 부족국가의 형식에서 못 벗어난 국가이긴 하다만, 한국사 최초의 국가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죠^^
  • 야스페르츠 2011/01/15 15:48 #

    부족국가의 형식이라는 게 무엇인지요? 제가 국가발달단계에 대해서 무지한지라... 다만 멸망 당시의 모습은 상당히 발전된 국가였다고 생각합니다.
  • DenisK 2011/01/15 15:40 # 답글

    고조선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한번 생각해 보면서 글을 써 봤습니다.

    읽어 봐 주시기 바랍니다.

    http://hanbulgi.egloos.com/20787
  • 리리안 2011/01/15 15:44 #

    Oh, ruff ruff!
  • 야스페르츠 2011/01/15 15:54 #

    참고문헌을 보는 순간 떠오르는 건 한숨 뿐입니다. 세상에나... 정체를 모를 외국 저자의 책과 『사기』을 제외하면 모조리 다 음모론자의 책. 그런 책들 밖에 안읽으시니, 그렇게 음모론에 미쳐 사시는 것이겠지요. 불쌍한 양반. 좀 제대로 된 책을 보시구려.

    저따위 책과 나란히 언급되는 굴욕을 당한 사마천에게 삼가 묵념을 올려야겠소.

    ps. 참고문헌이랍시고 『사기』를 들먹이는데, 귀하의 글에는 『사기』를 인용하거나 참고한 부분이 단 한 글자도 없소. 어디서 같잖은 사기를 치려고 드는 건지 원.
  • ㄲㄲㄲ 2011/01/15 18:49 # 삭제

    저 작자는 지금 무려 '사기'를 가지고 사기를 치고 있군요~(롸임 돋네)
  • 리리안 2011/01/15 15:45 # 답글

    자, 이제 원삼국 시대를 쓰시는 겁니다...^^;
  • 야스페르츠 2011/01/15 15:52 #

    컼ㅋㅋ 낙랑군이나 뒤집어 파 볼까요. ㅋㅋ
  • DenisK 2011/01/15 15:59 # 답글

    뻬레고드치코바는 스키타이 미술사를 전공해서 역사를 해석하신 분

    한국 학계에서도 꽤 많이 인용되시는 분

    아직 거기까지 수업 안 나가셨나 봐요 ㅋㅎ

    존 카터 코벨은 일본과 한국에서 활동하다가 작고하신 분

    일본 사학계에서도 꽤 유명하신 분으로 미술을 전공하신 분

    일본의 뿌리가 부여족이라고 설명하신 분입니다.

    정형진은 스키타이 문화의 이동을 해석하신 분

    음모론은 아닐 듯 합니다.

    자 그럼 그 책 읽어 보세요

    책의 내용 중 틀린 부분 있으시면 제가 배우도록

    하지요.

    그리고 지금 쓰신 내용 어디서 본듯한 것인데요

    ㅋㅋㅋ 교수님 것인가요?
  • hyjoon 2011/01/15 16:01 #

    ㅈㅎㅈ 들먹인 순간 qt인증 ㅇㅇ
  • 야스페르츠 2011/01/15 16:15 #

    1. 일본이 부여족이라는 주장은 현재 학계에서 거의 일고의 가치도 없이 폐기된 학설. 애초에 신석기시대 레벨에서 분리된 일본인데 수천년 뒤에 나타난 부여가 무슨 일본의 조상? 그야말로 완벽한 음모론.

    2. 스키타이 문화의 이동 운운하면서 "한민족은 북방민족의 후예"라 하는 것도 학계에서는 별로 신경도 안쓰는 음모론. 소위 북방민족과 한민족도 이미 신석기시대 레벨에서 분리되었음이 유전자 분포 조사에서 밝혀진지 오래.

    3. 대학 졸업한지 3년 되었음. 그리고 역사학과에 가보시면 아시겠지만, 저따위 음모론은 안배움. 저딴 음모론 파고들기 전에 국사교과서라도 정독하시길 바람.
  • 궁상각치우 2011/01/15 16:19 #

    아니 그 인용되는 논문리스트를 좀 불러보라고
  • 야스페르츠 2011/01/15 16:23 #

    그러고보니...

    뻬레고드치코바, 미술사 전공. 근데 역사를 끄적끄적
    존 카터 코벨, 역시 미술 전공. 근데 일본의 뿌리는 부여족이라고 주장.
    정형진, 철학과 졸업. 근데 스키타이?

    이거, 역사와는 눈꼽만큼도 관련이 없는 전형적인 음모론자들이잖아?
  • nighthammer 2011/01/15 16:39 # 답글

    군대를 만단위로 동원할 수 있는 것만 해도 고대의 어지간한 국가들이 하기 힘든 거죠. 과장해서 띄울 필요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만 봐도 대단한 국가이건만.
  • 야스페르츠 2011/01/16 02:14 #

    어느 정도 국가 체제를 갖춘 이상, 평안도 일대의 생산력이란 참으로 대단했을 겁니다. 충분히 강대한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지요.
  • 히꼬바리 2011/01/15 16:47 # 삭제 답글

    전혀 안담백한데 지혼자만 담백하다고 난리네 ㅋㅋㅋㅋㅋㅋㅋ
  • raw 2011/01/15 16:56 #

    진지하게 궁금한거있다.
    너 마광팔인거 다들 아는데 왜 굳이 이렇게 비로긴으로 설치는거냐?
  • bergi10 2011/01/15 17:28 #

    익명이란 가면으로 악플다는 찌질이
  • 야스페르츠 2011/01/16 02:14 #

    전혀 안짠데 지혼자 짜다고 난리네.
  • DenisK 2011/01/15 17:26 # 답글

    왕검성이 평양 일대에 위치???

    이건 어디에 근거하는 이야기죠?


    어디서 본듯한 이 글은 일단 SKY는 아닌 듯...
  • ㄲㄲㄲ 2011/01/15 18:52 # 삭제

    SKY가 아니긴 개뿔..ㅉㅉㅉ
    닥치고 일단 논문이라도 읽고 나서 떠드시죠?
  • 야스페르츠 2011/01/16 02:15 #

    SKY에서 쓴 논문은 읽어 보시기나 하셨나몰라. 송호정 교수 책 아직 안읽었죠? 그분도 서울대 출신인데말야.
  • 솔까역사 2011/01/15 17:26 # 답글

    개인적으로 낙랑의 역사가 무척 궁금합니다.
    또 조선 다음에는 낙랑의 역사가 와야 하는 게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바칠 재물이 없어요.-_-
  • 야스페르츠 2011/01/16 02:15 #

    제물을 바치신다면 낙랑의 역사를....(퍽!)
  • DenisK 2011/01/15 17:28 # 답글

    뻬레... 는 스키타이 부조 양식 연구나 인용하면 많이 나옵니다. 그냥 찾아 보세요.

    귀찮습니다. 저도 논문 보다가 찾아서 산 책이에요. 어렵게 구했네요

    존 카터 코벨은 나이 지긋한 교수님께 물어 보시면 상당히 잘 아실 듯 합니다.

    신문에 연재 기사로 꽤 유명하신 분..

    그리고 일본의 북부 기마 민족 설은 상당히 탄력 받고 있는데 왠 폐기???

    여기 완전 딴 세상
  • ㄲㄲㄲ 2011/01/15 18:54 # 삭제

    아놔 기마민족설이 상당히 탄력 받고 있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댓글 보고 진짜 개뿜없다 ㅋㅋ
    이분은 이미 답이 없는 듯 ㅡㅡ;;
  • 야스페르츠 2011/01/16 02:16 #

    기마민족설은 그나마 검토라도 되고 있지, 부여족 설은 누가 거들떠나 보려나... 스스로가 한 주장이 뭔지도 모르나봅니다.
  • DenisK 2011/01/15 17:29 # 답글

    그리고 고려가 대륙에 있었다느니

    환국이 세계를 지배했다는 이야기

    귀 안 기울임

    단지 여기서 스키타이 형태의 요하문명과

    연관된 고조선에 대해 생각해 보는 중이랍니다.

    야쓰님은 대학원을 들어가시지 그랬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 ㄲㄲㄲ 2011/01/15 19:05 # 삭제

    자기가 상상하는 그 고조선이 환단고기에 나오는 고조선이라는 걸 이 인간은 죽었다 깨 나도 모르겠지...낄낄

    http://orumi.egloos.com/3988921
    http://orumi.egloos.com/3989293
    http://orumi.egloos.com/3989940

    그저 삼가 묵념할 뿐...ㅉㅉㅉ
  • Jes 2011/01/15 19:58 #

    스토커임?
  • 야스페르츠 2011/01/16 02:17 #

    댁은 학부라도 좀 들어가보시지 그러십니까. 쯧쯧
  • 들꽃향기 2011/01/16 02:43 #

    대학원 들어간 사람으로서, 그리고 스스로 민족사학을 하신다는 분들의 지도를 받고 있지만 우리 데니스님이 말씀하신 맥락은 들은 적도, 배운적도 없군요. ^^

    혹시 어느 대학원을 가셨기에 "스키타이 형태의 요하문명과 연관된 고조선에 대해 생각해 보는 중"인 대학원을 가신겁니까? ^^
  • 2011/01/15 19:16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야스페르츠 2011/01/16 02:18 #

    차라리 마광팔은 자기 주장이 소수설이라는 걸 아니까 딴놈들은 다 병신이라고 우기기라도 하는데, 저 데니스 씨는 아예 자기 주장이 역사학계에서 씨알도 안먹힌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으니 참으로 불쌍합니다. SKY 운운할 때는 진짜 뿜었음. ㄷㄷㄷ
  • Jes 2011/01/15 19:59 # 답글

    데니스 님은 야스페르츠 님께 굉장히 관심이 많으신가 봅니다.

    네이버 모 카페에서 한성 백제사를 연재하는 블로거는 3~4세기까지 마한과 교착 상태에 있던 백제에 대한 코멘트에서 "그런 면에서 고조선은 엄청난 선진국이었다"고 했지요.
  • 야스페르츠 2011/01/16 02:19 #

    고조선의 국가발전단계가 어느정도인지는 저로써는 판단이 어렵습니다. 그래도 초기 백제보다 뛰어났다고 보긴 어려울 것 같긴 해요.
  • Allenait 2011/01/15 20:58 # 답글

    ...오늘도 역시나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군요
  • 야스페르츠 2011/01/16 02:20 #

    아니... 마광팔의 분탕질은 그나마 재미있기라도 하는데, 뉴비인 데니스 씨의 헛소리는 그야말로 탈력을 유발한다는 점에서 아주 위력적입니다. ㅡㅡ;;;
  • 들꽃향기 2011/01/16 02:42 # 답글

    "고조선은 비록 멸망하였지만,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국가로 그 위치를 굳건하게 하고 있다."라고 까지 써도, 분탕질을 치는 자들은 과연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진실로 식민사학을 공박하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미운사람을 무조건 공격하고 싶은 것인지 말이죠. 그런 점에서 연재를 종결하신 것에 대한 단순한 축하만을 드리기 어려운 상황이 된 것 같습니다. (씁쓸)

    사실 섭하의 전송 장수 살해사건은 하나의 국가로서 단호한 입장을 보일 일이었겠습니다만, 그 해결을 외교적 루트와 다른 방법을 통하지 않고 요동에 파견된 섭하를 살해하는 방식으로 보복한 것은, 역시나 한나라의 낚시에 낚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아니면 서술의 한계로 그런 외교적 노력이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말이죠.

    각설하고, 길고 논란 많은 연재를 마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여러모로 잘 보고 갑니다. ^^

  • 파랑나리 2011/01/16 22:30 # 답글

    헌데 약 400년 동안 한반도에 있어서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동방변군이 심각한 골칫거리로 여겨지는 건 왜일까요? 지금 2ch의 혐한들이 저걸 근거로 평양일대가 중국에게 지배당했다고 한국은 옛날부터 중국의 부용국이라고(근거요? 걔네는 거짓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족속입니다.) 모욕하려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중국에서 저걸 갖고 평양일대는 우리땅. 이러면 어떡하죠?
  • .... 2011/01/17 16:15 # 삭제

    중국은 고구려를 자기네 왕조라고 생각하는데 그런걸 지어낼 필요가 어디 있답니까.
  • 파랑나리 2011/01/18 00:01 #

    이거 원. 중국인들이 이걸 철두철미하게 믿고 우리 역사를 훔쳐서 세계에 공인받아 성공하면.... 대박이죠. 이미 중국은 주변의 여러 민족들을 성공적으로 말살하고 있거늘. 억압받는 모든 소수민족의 독립을 바라면 마칩니다.
  • 파랑나리 2011/01/18 21:44 # 답글

    濟南太守 公孫遂는 장수들의 지휘체계를 바루었건만 왜 劉徹(世宗 武皇帝)는 그를 죽였습니까?
  • ㄲㄲㄲ 2011/01/19 00:11 # 삭제

    당시는 한 무제가 철권 통치를 휘두르던 시기라서, 공을 세우고도 처형당하는 신하들이 많았습니다.
  • 파랑나리 2011/01/19 16:52 #

    그러니까 철권통치를 위해서 공을 세운 자도 그냥 죽였다는 거군요. 좀 못된 심보네요. 다른 얘기인데 전한시대에는 귀족제도가 세워졌습니까? 중국의 (중앙집권 이후) 관료귀족이 전한 때 세워졌는지 후한 때 세워졌는지 좀 헷갈립니다.
  • 야스페르츠 2011/01/19 19:47 #

    1. 지휘체계를 바루었다고 보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두 지휘관 중 다른 한쪽을 아예 유폐시켜 버린 것을 지휘체계를 바로했다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아마도 무제가 지시한 사항, 예를 들어 "두 사람의 지휘권을 조절하고 작전을 유기적으로 협조해서 수행하게 하라"는 등의 지시 사항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기에 명령불복종(괘씸죄)로 처형당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2. 귀족제 같은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대체로 귀족제의 형성은 남북조 시대에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파랑나리 2011/01/19 21:04 #

    후한이 아니라요? 박한제 교수의 역사기행문에 처음 빠진 뒤 삼국지연의와 실제 사실을 찾아보니까 이미 이때 본관과 가격家格이 세워진 듯 한데요?
  • 경언o 2011/12/24 16:55 # 답글

    "좌장군 순체가 이끄는 육군은 선봉군이 고조선군에게 패하였고, 그 뒤로도 패수 서쪽으로 진출, 혹은 원래부터 배치되어 있던 고조선군을 계속 공격하였으나 전황은 지지부진했다"
    에서의 패수는 현재의 패수와 압록강중에서 어떤걸로 보는것이 타당할까요..?
  • 굔군 2011/12/24 17:14 #

    "현재의 패수와 압록강중에서 어떤걸로 보는것이 타당할까요..?"

    ->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잘 안 되는데, "현재의 패수" = 압록강입니다만...?

  • 굔군 2011/12/24 17:21 #

    한가지 첨언하자면, 현재 학계의 정설은 "패수"라는 이름으로 지칭되는 강이 시대와 국가에 따라 각기 달랐다는 것입니다. 특정한 강의 고정된 명칭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 경언o 2011/12/24 17:36 #

    헐,,,, 그러면 고조선 건국 ~ 멸망사시에도 "패수"에대해서 위치가 변환됫나요???
  • 굔군 2011/12/24 18:57 #

    고조선 건국시의 상황이야 당연히 알 길이 없고요.

    <한서> 지리지에 나오는 패수, 그러니까 낙랑군 시대의 패수는 청천강이라는 것이 현재의 통설이므로, <사기> 조선열전의 패수, 즉 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이었던 패수를 압록강으로 본다면, 고조선 멸망 이후 패수의 위치는 변한 것이 됩니다.

    그리고 고구려가 낙랑을 접수한 이후에는 대동강이 패수로 불리게 되어, 패수의 위치는 또 한번 바뀌게 되고요. 이밖에도 남쪽의 백제와 신라는 주로 예성강을 패수라고 불렀던 것이 확인됩니다.

    그러니까 결론은, 시대와 사료에 따라 언급되는 "패수"가 항상 같은 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 야스페르츠 2011/12/26 01:08 #

    굔군 님께서 잘 설명해 주셨네요.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일단 고조선 시기의 패수에 대한 학계의 주류학설은 청천강 설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초록불 님의 해석이 타당하다고 여겨서 압록강이라고 생각합니다만...
  • 고구려in 2012/01/03 14:02 # 삭제 답글

    야스페르츠님 환빠나 별 이상한 놈들하고 싸우느라 많이 힘드시겠습니다..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



유사역사학 방지

얼마블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