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2/25 01:54

오호망양(五胡望洋) 40 - 도미노 게임 역사

428년, 서진왕 걸복치반이 세상을 떠났다. 호하에게 농서 일대를 침략당하면서 전장을 전전하던 어려운 시기였다. 다행히 북위가 호하를 공략함으로써 절체절명의 위기는 어렵사리 벗어날 수 있었다. 줄을 잘 선 셈이다. 간신히 수도였던 부한(枹罕)은 유지하고 있었지만 호하의 압박과 패배로 인해 서진 영내에서는 모반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걸복치반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서진 정권은 극도의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걸복치반의 뒤를 이은 걸복모말(乞伏暮末)은 즉위하자마자 북량의 침입을 받았다. 계속되는 북량의 침략으로 서진 정권은 영토를 야금야금 빼앗겼고, 옛 남량의 영토인 청해성 지역은 북량이 차지하고 말았다. 옛날, 동네 노는 형 수준의 국가로 되돌아간 셈이다. 계속된 북량의 공격을 견디다 못한 걸복모말은 430년에 마침내 위 정권에 사신을 보냈다. 칭번(稱蕃)하겠다는 것이다.

탁발도는 이들의 복속을 받아들여 평량과 안정 등에 그를 책봉했다. 평량과 안정은 당시 호하의 영토였으니, 실제 영토를 주었다기 보다는 영직으로 수여한 것이리라. 어쨌든 허락을 받은 걸복모말은 백성들과 신료들을 이끌고 대장정을 시작했다. 목표는 엉뚱하게도 당시 호하의 영토였던 상규(上邽)였다.

당시 서진과 위는 호하의 영토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그러니 걸복모말이 위에 복속하기 위해 이동하려면 필연적으로 호하의 영토를 통과할 수 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상규로 향하는 것이 완전히 엉뚱하다 할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상규라면 하 정권 최후의 보루와 같은 곳이었다. 북위의 공격으로 두 번이나 멸망 직전까지 몰렸을 때, 호하 정권은 항상 상규로 피신했다. 위 정권과 지리적으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고 또한 그 중에서도 가장 중심지이니 그곳으로 갈 수밖에 없다.

이런 상규로 향하는 걸복모말을 하의 황제 혁련정이 그냥 놓아둘리가 없다. 당연히 걸복모말의 진로는 가로막혔고, 농서의 남안(南安) 일대에서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걸복모말이 떠난 부한 일대의 영토는 고스란히 토욕혼이 접수했다.


한편, 걸복모말이 남안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있을 무렵, 하 정권은 북위와 유송의 전쟁에 끼어들었다가 관중을 홀랑 잃어버리고 말았다. 혁련정은 상규로 도주했으니 사실상 호하 정권도 상규에서 걸복모말과 같은 신세가 되었다. 애초에 유목정권의 속성을 가지고 있던 정권이니, 상규 일대는 그저 보급 기지 정도였을 뿐 정주할 영토는 되지 못한다. 걸복모말이나 혁련정이나 이미 국가라고 부를 수도 없는, 부락 수준으로 전락한 것이다.

431년 초,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서 몰락한 두 국가, 아니 두 부락이 서로 신경을 곤두세우기 시작했다. 혁련정은 걸복모말을 공격하였고, 걸복모말은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4명의 군주가 49년 동안 어렵사리 이어왔던 서진 정권의 멸망이었다.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지만, 혁련정의 움직임으로 보건대 위 정권은 혁련정을 잡기 위해 추격대를 보냈던 것 같다. 전쟁에서 대패하여 사실상 멸망 직전이었던 혁련정이 서진 정권과 전쟁을 벌이는 것, 그것도 서진 정권을 선제공격하는 행동은 비정상적이다. 아무래도 위 정권의 압박이 있었기에 압박에서 벗어나 멀리 떨어지기 위해 무리해서 서쪽으로 진격했을 것이다.

이는 서진을 멸망시킨 이후의 행보에서도 드러난다. 상규에서 농서로 도망친 혁련정은 다시 황하를 건너서 하서, 즉 양주를 탈취하려고 했던 것이다. 양주를 탈취할 수만 있다면 재기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농서에서 양주로 가는 길목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토욕혼이 접수한 상태였다. 혁련정은 이를 무시하고 먼 길을 횡단하여 마침내 부한 근방에서 황하를 건너려고 하였다. 당연히 토욕혼의 군주 모용모귀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결국 황하를 건너던 도중 기습을 받은 혁련정은 토욕혼 군대에 사로잡혔고, 이로써 호하 정권은 와해되었다. 3명의 군주가 26년간 다스렸던 호하가 멸망한 것이다.


이로써 중국 대륙은 양강 체제가 성립되었다. 북방의 위 정권, 남방의 송 정권. 그리고 변방에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북연과 북량, 기타 잡다한 약소 부족들. 새로운 시대가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덧글

  • 른밸 2010/02/25 02:09 # 답글

    오호십육국이 끝나고 남북조로 접어드는군요- 개인적으로 저 토욕혼이라던지 토번같이 지금의 청해성-티벳쪽에 있던 국가들을 좀 알고 싶습니다. 토번 중갑기병대가 그렇게 무시무시했다던데...
  • 야스페르츠 2010/02/25 14:13 #

    그, 그런 건 몰라효.
  • 세계사는내친구 2010/02/25 10:15 # 삭제 답글

    기원 431년, 서진과 호하가 잇따라 멸망하고 이제 북위에 의한 북조 통일까지 8년이 남았군요. 정말 얼마 안남았습니다. 다음 회부터는 기울어가는 북연과 북량의 역사가 소개되겠지요? 실로 엄청난 대역사였습니다. 끝까지 집필해주신 야스페르츠님의 수고에 미리 감사 드립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참, 가능하다면 송, 제, 양, 진으로 이어지는 남북조시대의 역사도 계속 부탁 드리고 싶은데, 글쎄 과욕인가요?^^
  • 야스페르츠 2010/02/25 14:13 #

    남북조는 자신이 없네요. 오호십육국만 해도 장난 아니었습니다. ^^
  • 지키미 2010/02/25 10:28 # 삭제 답글

    연재 잘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이 난세에 화북의 백성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이민족 지배자들에게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이런 이야기도 해주실수 있을까요?
  • 야스페르츠 2010/02/25 14:15 #

    민초들의 삶이란... 참 고달팠겠죠. 노력 해볼께요. ^^
  • Allenait 2010/02/25 11:34 # 답글

    이제 복잡했던 한 시대가 마무리되는군요
  • 야스페르츠 2010/02/25 14:15 #

    大尾~
  • 들꽃향기 2010/02/25 11:44 # 답글

    어찌어찌 버텨가던 호하정권은 정작 북위가 아닌 토욕혼의 손에 종말을 맞이했군요. ㄷㄷ 잘 읽고 갑니다.
  • 야스페르츠 2010/02/25 14:16 #

    이 시대에는 때린 놈 따로 죽인 놈 따로인 경우가 좀 있네요. ㅎㅎ
  • 我幸行 2010/02/25 15:42 # 답글

    잘 읽고 글값하고 갑니다.
  • 야스페르츠 2010/02/26 10:52 #

    감사합니다.
  • 지나가던 손경수 2010/02/25 16:11 # 삭제 답글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군요. 한때는 후진을 위협하던 호하의 최후가 저렇게 안습하다니…. (사실 전성기에 비해 쇠퇴기가 당연히 안습해보일겁니다마는….) 그나저나 본편이 다 끝나도 번외편이 남아있겠죠?
  • 야스페르츠 2010/02/26 10:53 #

    헉... 그, 그런 거 모른다능!
  • 마무리불패신화 2010/02/26 14:06 # 답글

    ㅎㅎ 저도 글 값하고 갑니다.
  • 야스페르츠 2010/02/26 22:51 #

    ㅎㅎ 감샤합니다
  • hyjoon 2010/02/26 17:30 # 답글

    끝이 보이는 군요....다음 글이나 후속작이 있는지도 계속 기대하겠습니다. ㅎㅎㅎ
  • 야스페르츠 2010/02/26 22:52 #

    흑... 그런 거 몰라효.ㅋㅋ
  • paro1923 2010/02/26 22:49 # 삭제 답글

    메뚜기 뒤에 개구리, 개구리 뒤에 비암(뱀), 뱀 뒤에 독수리...
    먹고 먹히고, 뒷통수 까다 딴 녀석한테 쌍코피 터지는 아수라장도 슬슬 정리 단계로 들어가는군요.
  • 야스페르츠 2010/02/26 22:52 #

    이제 진짜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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