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1/27 01:34

오호망양(五胡望洋) 36 - 어부지리 역사

"요홍은 유유의 적수가 아니다. 또한 그의 형제가 안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니 어찌 사람들을 막을 수 있겠는가! 유유가 관중을 취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유유는 오래 머무를 수가 없으니 반드시 장차 남으로 돌아갈 것이고 자제와 제장들을 남겨 그곳을 지키게 할 것이니, 내가 그것을 취하는 것은 검불을 줍는 것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姚泓非裕敵也。且其兄弟內叛,安能拒人!裕取關中必矣。然裕不能久留,必將南歸,留子弟及諸將守之,吾取之如拾芥耳。

416년 말, 유유가 후진을 공략하기  시작하자 하왕 혁련발발이 했다는 말이다. 아주 날카로운 상황분석이었다. 이런 분석을 토대로 혁련발발은 유유의 귀환을 기다리며 차근차근히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후진과 북벌군이 피터지게 싸우는 동안 비어버린 안정을 접수해 주시고, 덤으로 영북의 여러 군현을 꿀꺽하면서 유유의 똥줄을 타게 만들었던 것이다. 유유도 이런 혁련발발 때문에 건강으로 돌아가지 않고 전쟁을 준비했는데, 때마침 강남의 조정에 남겨둔 대리인 유목지가 급사하면서 장안은 아웃오브안중이 되어 버렸다.

그리하여 417년 12월 경자일(3일), 유유가 장안을 떠나 선양을 향한 마지막 길을 떠난다. 유유가 떠난 빈자리는 이름뿐인 총사령관 유의진(劉義眞)이 대신 남았다. 유유의 둘째 아들이던 유의진은 당시 나이 12세. 당연히 유의진을 대신해 사령관직을 맡을 대리인들이 함께 남았다. 그러나 유유는 이들이 딴 마음을 품을까 두려워 서로가 견제하도록 만들어 놓고 떠났다. 당연히, 남겨진 이들은 분열하고 반목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총사령관의 타이틀을 가진 어린애를 비롯해서 남겨진 이들은 하나같이 탐욕스럽기 그지 없는 사람들이었다. 장안과 관중은 이들의 수탈에 신음하게 된다.


한편, 유유가 돌아가길 오매불망 기다리던 혁련발발은 즉각 행동을 개시했다. 장안을 감싸는 거대한 포위망을 구성하며 진격을 개시한 것이다. 이에 맞서는 유의진군(?)은 갈팡질팡, 우왕좌왕이었다. 수뇌부는 서로를 믿지 못해 죽고 죽이는 참극을 연출했고, 12살짜리 어린애가 남은 부하 장군을 처형하는 것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수뇌부가 이모양이니 하군은 파죽지세, 또한 유의진 무리의 수탈에 시달리던 관중의 백성들도 혁련발발을 환영하니 순식간에 관중의 패권은 하 정권의 손에 들어갔다.

장안은 완전히 포위가 되어 버리고, 유유는 깜짝 놀라 얼른 주령석을 구원군을 파견하였다.

"경은 도착하면 유의진에게 칙령을 내려 가벼운 복장으로 빨리 출발하게 하고 그리하여 관중을 벗어난 연후에 천천히 가도 좋다고 하시오. 만약 관우(關右 : 관중)를 반드시 막을 수 없거든 유의진과 함께 돌아와도 좋소."
卿至,可敕義眞輕裝速發,既出關,然後可徐行。若關右必不可守,可與義眞俱歸。

418년 11월, 장안에 도착해 포위를 뚫은 주령석은 즉각 유의진을 대피시켰다. 그러나 유의진은 칙령에 따르지 않고 장안의 재물을 약탈하여 수레에 가득 싣고 피난(?)을 떠난다. 이 소식은 즉각 혁련발발에게 전해졌다. 혁련발발은 혁련귀를 보내 추격하게 하였으나 유의진은 치중(?)을 끌고 가느라 하루에 10리 밖에 가지 못하고 있었다. 혁련귀의 군대가 파상 공세를 계속하자, 결국 유의진의 군대는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이미 내분으로 초토화되어 있던 수뇌부는 완전히 전멸. 유의진은 부하의 등에 업힌 채로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다. 또한, 장안을 수비하고 있던 주령석은 유의진 일당의 약탈 때문에 백성들의 저항에 쫓겨 성을 버리고 떠나야만 했다. 어렵사리 되찾았던 관중을 다시 오랑캐의 손에 내주는 순간이었다. 제위를 선양받기 전, 송공(宋公)에 책봉되어 있던 유유는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



418년 11월, 장안에 입성한 혁련발발은 참혹한 피의 향연을 벌였다. 사로잡은 북벌군의 수뇌부를 참살하고, 참수한 머리를 쌓아 경관(京觀)을 만들고 이름하기를 촉루대(髑髏臺)라 하였다. 혁련발발의 잔혹함은 석호나 부생과도 맞먹을 정도였다. 항상 활과 검을 옆에 두고서, 의심이 가거나 화가 나면 직접 사람을 죽였다고 한다. 신하들 중에서도 눈이 거스르면 눈을 뚫고, 웃으면 입술을 도려내고, 간언을 하는 사람은 혀를 자르고 목을 베었다고 하니....

그러나, 이렇게 잔인하기 이를데 없는 혁련발발도 군사적·정치적 재능만은 아주 뛰어났던 것 같다. 혁련발발은 신하들이 장안을 수도로 삼을 것을 권하자 이렇게 답했다.

"위(魏)는 우리와 풍속이 대략 같고 국토가 인접해 있어 통만으로부터 위의 변경까지의 거리가 100여리 정도이니 짐이 장안에 있게 되면 통만이 반드시 위태로울 것이고 만약 통만에 있다면 위는 반드시 감히 제하(濟河 : 황하)를 건너 서쪽으로 오지 못할 것이요. 여러 경들은 바로 이것을 보지 못하였을 뿐이오."
魏與我風俗略同,土壤鄰接,自統萬距魏境裁百餘里,朕在長安,統萬必危;若在統萬,魏必不敢濟河而西。諸卿適未見此耳。

거의 예언이라 해도 무방할 선견지명이었다. 또한 유목민족의 야성을 유지하고 있는 호하 정권의 특성을 잘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혁련발발의 판단에 따라, 장안에는 혁련귀가 남아 다스리게 하고, 혁련발발은 수도인 통만성으로 귀환하였다.

※ 420년 경 중국의 판도

이후, 호하 정권은 역사 속에서 몇 년 동안 단 하나의 기록도 전해지지 않는다. 424년, 혁련발발이 죽음을 앞두고 벌인 삽질 이전까지 약 5년 동안은 호하 정권의 활동이 전혀 전하지 않는다. 화북의 정세는 아직 불투명, 관중을 장악하여 화북을 양분하고 있는 호하 정권과 하북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는 위 정권은 오랜 대립을 계속하고 있었다.

베일에 싸인 5년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정말 아무런 기록을 남기지 못할 정도로 평화로웠는지, 아니면 좌충우돌을 거듭했건만 어떤 이유로 기록이 하나도 남지 않았는지. 여하튼 5년의 공백을 지난 뒤, 호하 정권에는 먹구름이 드리운다.




덧글

  • 라라 2010/01/27 09:25 # 답글

    간언한다고 죽이는데 수도를 옮기자고 했는데 그냥 두다니..모순이네요
  • paro1923 2010/01/27 09:29 # 삭제

    위에서 말한 간언은, 자신의 혹정을 말리려는 시도에 대해 말하는 겁니다.
  • 야스페르츠 2010/01/27 15:13 #

    간언도 기분 봐 가면서 해야 한다능. ㅎㅎ
  • paro1923 2010/01/27 09:28 # 삭제 답글

    12살짜리가 벌써부터 잿밥에 집착하다니... 유송의 미래가 괜히 암울했던 게 아니군요.
  • 야스페르츠 2010/01/27 15:14 #

    나라에 운이란 것이 있다면, 그 운은 유유가 전부 써버리고 하나도 안남긴 것 같아요. ㅡㅡ;;
  • hyjoon 2010/01/27 10:34 # 답글

    '천재적 두뇌+잔혹함'이면 정말 '괴물'이 따로 없죠.....ㅎㄷㄷ
  • 야스페르츠 2010/01/27 15:14 #

    히, 힛옹? ㄷㄷㄷ
  • dunkbear 2010/01/27 11:33 # 답글

    12살의 나이에 재물에 탐닉하는 꼬맹이나 두뇌는 좋으면서 잔혹한 군주나 참... ㅡ.ㅡ;;;
  • 야스페르츠 2010/01/27 15:15 #

    극과 극이려나요. ㅎㅎ
  • Allenait 2010/01/27 12:44 # 답글

    12세에 벌써부터 재물에 탐닉이라...(...) 거참 뭐하군요
  • 야스페르츠 2010/01/27 15:16 #

    세상의 법칙을 일찍부터 통달한 것입니다. (응?)
  • 세계사는내친구 2010/01/27 17:09 # 삭제 답글

    저 사건은 유유가 미처 송나라를 세우기도 전(아직 동진왕조가 명목상으로나마 존재할 때)인데, 유유가 나라의 운을 다 써버리고 하나도 남겨놓지 않았다는 건 좀 의아하군요. 유유의 짧은 재위 후에도 문제(유의륭)의 30년 가까운 원가의 치를 비롯해서 70여년이나 존속하지 않았습니까?
  • 야스페르츠 2010/01/27 20:42 #

    건국하기 전에 다 썼다는.... 그냥 농담이라능... ^^;;
  • 세계사는내친구 2010/01/27 17:22 # 삭제 답글

    아! 오타입니다. 70여년이 아니라 50여년이라고 해야겠지요?^^
  • 흑접시 2010/01/27 19:51 # 삭제 답글

    혁련발발 정권의 기록이 남겨져 있지 않다는것은 저 폭군 혁련발발이
    다 없애버렸다고 추측해볼수 있겠네요
    저 무지막지한 군주가 사관직필에 불만을 품고 사초를 불태웠을 가능성.,..
  • 야스페르츠 2010/01/27 20:43 #

    그랬을지도 모르겠네요.
  • 지나가던 손경수 2010/01/27 21:05 # 삭제 답글

    유유의 의심병이 저런 큰 참사를 만들다니… 사실 유의진 휘하의 장수들이 잘 협력만 했어도 상황이 바뀔 수도 있었을텐데… 저 유의진은 나중에 형 유의부랑 같이 죽임을 당하죠?
  • 야스페르츠 2010/01/28 09:55 #

    유유가 장안을 떠난 시점부터 이미 판세는 결정된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도 유유가 뒷처리는 확실하게 했지요.
  • 흑접시 2010/01/28 19:53 # 삭제

    유의부는 유송 2대황제로 제위에 올랐던 인물 아닌지..위인이 워낙 폭군이라 보다못한 신하들이 훗날 의륭(송문제)으로 갈아치우지만...
  • ㅠㅠ 2010/01/28 00:11 # 삭제 답글

    오~! 연재가 막바지라구요.
    저도 옛날엔 이거 팬이었는데 요즘 바빠서 통 못보구 있었는데 어느덧... 아쉽군요.
    그 때가 무어지 맹아무개란 재상이 나왔을 때 부턴데 오랜 옛날처럼 느껴지는 군요.
    아무튼, 끝까지 유종의 미를 거두시길. ㅋ.
  • 야스페르츠 2010/01/28 09:55 #

    감사합니다. ^^
  • 세계사는내친구 2010/01/28 10:18 # 삭제 답글

    야스페르츠님, 뭐 쓸데없는 질문같지만 한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유유가 동진을 쓰러뜨리고 송무제가 되었을때의 나이가 거의 60이 다 되었던 걸루 아는데, 그의 아들들은 거의다 스무살도 안된 어린아이들이었습니다. 당시의 상황에서는 거의 손자뻘 밖에 안되는데 유유는 왜 이렇게 늦게 자식을 본 것입니까?
  • 지나가던 손경수 2010/01/28 17:34 # 삭제

    제가 알기로 유유 저 친구가 천민으로 어렵게 살다가 군대 들어가서 승승장구한 인물로 알고 있는데, 아마 젊을 때 힘들게 살아서 결혼을 할 여유도 없었던 건 아닐까요… 아 물론 추측성 발언입니다만.
  • 야스페르츠 2010/01/29 09:17 #

    저도 동진 쪽 기록은 대부분 스킵하면서 읽었는지라 정확하게는 모르겠네요. 나중에 다시 자치통감을 살펴보고 알려드릴께요. ^^
  • 들꽃향기 2010/01/29 05:05 # 답글

    후세의 사학자들이 12살의 유의진을 관중에 남기고 철수한 것을 두고, 유유를 평할때, '그가 바란 것은 찬역을 시행할 정당성을 얻을 공적이었지, 구토의 회복은 아니었다.'라고 평하는데, 올려주신 글을 보면 꼭 그렇게만 볼수 있는 것도 아니고, 유유 역시 나름의 노력을 시행한 면이 있군요.

    역시나 원사료를 직접 보아야지, 권위적인 사평이라도 그대로 믿는 것은 자제되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번 곰씹고 갑니다. 잘 읽고 갑니다. ^^
  • 야스페르츠 2010/01/29 09:18 #

    장안을 점령한 의도 자체는 그게 맞지만, 그렇다고 장안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할 수도 없는 것 같습니다. 낙양을 끝까지 유지한 측면도 그렇구요.
  • 똥필 2010/02/10 23:32 # 삭제 답글

    혁련발발이 양광이랑 비슷하네요. 양광도 잔인하긴 했지만 진나라를 멸망 시켰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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