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2/27 21:02

오호망양(五胡望洋) 31 - 부활 역사

중조(重祚) 또는 재조(再祚)라는 말이 있다. 왕위에 2번 즉위한 케이스를 말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충렬왕과 충선왕이 중조라는 희한한 정치쇼(?)를 벌인 일이 있다. 중국사에서도 둘째 가라면 서러울 혼란기인 오호십육국시대에는 이 중조가 국가 단위로 벌어진 일이 있다. 나라가 멸망했다가 다시 부활했던 사건.


농서 일대에서 할거하던 마이너 국가 걸복부의 서진(西秦) 정권은 서쪽의 후량 정권, 동쪽의 후진 정권의 사이에서 참으로 다사다난한 여정을 걸었다. 나름 세력을 떨쳤을 때는 멀리 청해성의 토욕혼을 공격하여 멸망 직전까지 밀어 붙이기도 했지만, 397년에 후량에 의해 수도였던 금성을 점령당한 이후 크게 쇠퇴해서 근근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당시 한창 성장세를 타고 있던 후진 정권은 400년에 이르러 서정을 개시한다. 요석덕이 이끄는 5천의 군사가 농서로 향한 것이다. 걸복건귀는 요석덕에 맞서 군세를 펼쳤다. 짧은 대치가 있은 후 걸복건귀는 요석덕군의 보급로를 끊어 그를 궁지에 몰아 넣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요흥의 구원군이 금세 뒤쫓아왔고, 걸복건귀는 이에 맞서 화려한(?) 전술 기동을 선보인다.

자치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중군 2만 명에 외군(外軍) 4만 명이 포진했고, 걸복건귀는 직접 수천 명의 기병으로 요흥의 구원군에 대해서 정찰을 시도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에 등장하는 걸복부 부민의 수를 따져본다면 이 숫자는 도저히 믿기 어렵게 과장되어 있다. 게다가 6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걸복부를 치기 위해 나선 요석덕의 병력이 고작 5천 명일 수가 있겠는가. 정확한 병력이야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걸복건귀의 정찰 활동은 뜻밖의 결과를 가져왔다.

마침 안개가 짙게 깔리고 거친 바람이 불어와 걸복건귀는 중군과의 연락이 끊기고 길을 잃어버렸다. 여기에 요흥의 기병이 추격해 왔다. 걸복건귀는 결국 외군으로 쫓겨가고 말았다. 중군과 외군의 연락이 끊긴 상태에서 요흥의 군대가 들이쳤고, 결국 걸복건귀는 크게 패하고 본거지인 원천(苑川)으로 도주하고 말았다. 이 전투로 서진 정권은 사실상 주력군을 거의 상실했고, 걸복부의 부민 3만6천 명이 투항했다. 요흥은 진격을 거듭해 부한(枹罕)에 진주한다.

걸복건귀는 원천에서 다시 도망쳐 금성에 이르렀다. 금성 지역은 옛 수도였지만 지금은 독발부의 남량 정권의 영향권 아래 있는 지역이다. 걸복건귀는 이곳까지 자신을 뒤쫓아 온 제장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내가 재능이 없으면서도 외람되게 주군의 이름과 칭호를 훔친 지 이미 일기(一紀)가 지났다. 지금 이렇게 패하고 흩어져 적을 상대할 수 없으니 나는 서쪽으로 도망치려고 한다. 만약 내가 온 나라를 들어 간다면 (독발이녹고에게) 죽음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니, 경들은 여기에 남아 각각 무리를 가지고 진(秦)에 항복하여 종족을 온존하게 하고 나를 따르지 말아라."

"죽고 살던 간에 바라건대 폐하를 따르겠습니다."

"나는 지금 장차 다른 사람에게 기대서 얻어먹으려 한다. 만약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지 않는다면 혹시 훗날 옛 대업을 회복하여 다시 경들과 만날 것이다. 그러니 지금 나를 따라와 죽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걸복건귀의 각오는 비장했다. 그리고 그 계획은 원대했다. 나라가 망하더라도 세력을 보존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라고나 할까. 걸복건귀의 계획을 따라 제장들은 눈물을 삼키며 헤어져 요흥에게 항복했다. 서진 정권이 일단 멸망한 것이다.

걸복건귀는 아들 걸복치반(乞伏熾磐)과 함께 수백의 기병을 거느리고 독발부에 항복했다. 독발이녹고는 그들을 받아들여 진흥(晉興)에 주둔하도록 하였다. 독발부 내부에서는 걸복건귀를 멀리 청해성 지역으로 이주시켜 불안의 싹을 잘라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으나 독발이녹고는 이를 거부한다.

얼마 후 후진의 군대가 물러났다. 주력군이 물러가자 즉각 농서 일대에서 불온한 기운이 일어났다. 그 가운데 일부 세력이 걸복건귀를 불러들이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걸복건귀도 이에 호응해서 남량의 영내에서 거병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는 즉각 독발이녹고에게 탐지되어 3천의 기병이 파견되어 왔다. 걸복건귀는 거사가 실패한 것을 알고 다시 망명을 계획한다.

"우리 부자가 이곳에 있으면 반드시 독발이녹고에게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요씨가 바야흐로 강성하니 나는 장차 그에게 귀순할 것인데 만약 온 집안이 모두 간다면 반드시 추격하는 기병에게 잡힐 것이다. 내가 너의 형제와 너의 어머니를 인질로 두면 독발이녹고는 반드시 의심하지 않아 내가 장안에 있어도 감히 너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

걸복건귀는 그럴듯한 핑계를 남기고 혈혈단신으로 후진 정권에 항복한다. 아들 걸복치반과 일족 대부분은 남량의 수도 서평(西平)으로 끌려갔다. 걸복치반도 얼마 후 탈출을 꾀했으나 실패하였고, 독발이녹고는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동생 독발녹단이 만류하여 걸복치반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걸복치반은 몇 년 후에 결국 탈출에 성공하였는데, 이때도 독발녹단은 걸복치반의 처자를 모두 돌려보내 주는 친절을 베푼다.

한편 걸복건귀는 장안에 도착하여 귀의후(歸義侯)에 책봉되었다. 의(義)로 돌아왔다는 뜻이니 참으로 기가 막힌 책봉명이다. 어찌본다면 조롱이라고 볼 수도 있는 명칭이었다. 걸복건귀의 원대한 계획은 물건너 간 것 같았다.



해를 넘겨 401년 초, 요흥은 귀의후 걸복건귀를 원천으로 보내 진수하도록 하였다. 자신의 옛 봉국을 그대로 다스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걸복건귀는 몇 달 전에 눈물로 이별했던 옛 부하들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물론, 그의 신분은 후진 정권의 책봉을 받은 지방관에 불과했다. 그는 요석덕이 이끄는 서정군에 종군하여 곳곳에서 힘겨운 싸움을 거듭해야 했다. 양주, 진주 각지에서 벌어진 전역에서 걸복건귀는 자기 부족의 세력을 이끌고 많은 전공을 세웠다.

405년 이후 후진 정권이 점차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걸복건귀는 조금씩 독자적인 행보를 보인다. 이에 위협을 느낀 요흥은 걸복건귀를 불러들여 주객상서(主客尙書)로 삼고 아들 걸복치반에게 걸복부를 대신 다스리게 한다. 너무 섣부른 독자 행보가 가져온 비참한 결과였다. 양주의 여러 세력들이나 구지, 유발발 등이 독립해 나가는 동안에도 걸복부는 사실상 인질로 잡혀 있는 걸복건귀 때문에 후진 정권에 충실하게 복무해야 했다.

408년이 되자 후진 정권의 몰락은 더욱 가시화되었다. 걸복건귀가 인질로 잡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걸복부는 사실상 독자 행보를 보일 정도였다. 요흥은 또 요흥대로 걸복부의 이탈을 두려워하여 유발발과의 전쟁터에도 꼭 걸복건귀를 끌고 다녔다. 그러나 이는 요흥의 실책이었다.

409년, 요흥이 유발발과의 전쟁에 정신이 없는 사이 걸복치반은 반란세력 팽해념이 점거하고 있던 부한을 차지하였다. 이 소식은 곧 걸복건귀에게도 전해졌는데, 마침 걸복건귀는 요흥을 따라 걸복부에 인접한 평량(平凉)에 있었다. 걸복건귀는 군영에서 탈출하여 걸복치반에게 돌아갔고, 요흥은 사실상 마지막 남은 소속 세력인 걸복부까지 상실하고 만다.

409년 7월, 걸복건귀는 진왕(秦王)에 즉위한다. 8년 만에 서진 정권이 부활한 것이다.





핑백

덧글

  • 라라 2009/12/28 00:59 # 답글

    걸복치반은 전에 시집간 부씨 딸 아들인가요?

    독발녹단은 왜 그런 호의를 베푼지?
  • 야스페르츠 2009/12/28 12:01 #

    걸복치반의 어머니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냥 독발녹단이 대인배였던 듯... ㅡㅡ;;
  • 2009/12/28 01:14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야스페르츠 2009/12/28 12:02 #

    호적에서 팠다능. 이제 엄마 아님. ㅋㅋㅋ
  • Allenait 2009/12/28 02:10 # 답글

    파란만장한 이야기로군요. 진짜 독발이녹고가 그때의 진언을 들었다면 실패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야스페르츠 2009/12/28 12:03 #

    여기에는 더욱 엄청난 반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ㅎㅎ
  • dunkbear 2009/12/28 09:18 # 답글

    혼란의 시대에 가능했던 일이네요. 나라들이 툭하면 흥하고 망하는 시기였으니... ^^;;
  • 야스페르츠 2009/12/28 12:05 #

    이 시대는 정말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일이 가능했던 시대인 것 같습니다.
  • 세계사는내친구 2009/12/28 09:53 # 삭제 답글

    重祚라! 당나라 중종, 예종이나 명나라 영종 정통제도 같은 케이스인가요? 참, 명 영종은 복위한 후의 연호는 正統이 아니라 다른 것을 사용했다고 들었는데 무엇입니까/
  • 네비아찌 2009/12/28 11:53 #

    제가 대신 답변드려 죄송합니다. 천순제(天順帝)입니다.
  • 야스페르츠 2009/12/28 12:07 #

    연호의 변화가 참 그렇죠? 정통에서 천순이라... ㅎㅎ

    네비아찌 님// 빠른 답변 감사합니다. (응?)
  • 들꽃향기 2009/12/29 13:18 # 답글

    오늘도 잘 읽고 갑니다. ^^ 다루신 걸복씨를 보면 저런 재생(?)이 가능했던 사적 유대가 참으로 두드러지네요. 흔히 배신의 시대로 일컬어지는 그 시대에서 재미있는 사례인 것 같습니다.

    사실 종래의 연구사에서는 남북조시대 당시의 임협-사적유대 집단을 대체로 조적, 치감 등의 남조의 사례를 들어 설명하는데, 북조의 경우는 걸복씨 집단도 그런 류로 설명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동시에 저 시기에 '배신'이 흔하디 흔했던 것은, 오히려 국가가 요구하는 '공적 충성' 아래에 수많은 저런 '사적 유대'가 튼튼했기에 발생하는 역설이었던 것 같습니다
  • 야스페르츠 2009/12/29 17:27 #

    전형적인 중세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군주와 직접 연결되는 신하가 아니라 가신과 주군, 군주의 단계를 거치게 되면서 나타나는 특징이라고 할까요.... 이는 심지어 저 동진 정권에서도 자주 일어나는 일이었지요.
  • 흑접시 2009/12/31 20:50 # 삭제 답글

    중국인을 말할때 흔히 한족이라 하는데 오호16국때 여러 종족들이 뒤섞여 혈통도 잡탕짬뽕이 된듯 싶군요. 성씨도 하도 히한한게 많아서 외우기는 커녕 읽기조차도 버겁다능..^^
  • 야스페르츠 2010/01/01 09:44 #

    세상에 단일 민족이 어디 있겠습니까? 진짜 단일민족은 유전병으로 이미 오래 전에 멸망했을 겁니다. ㅎㅎㅎ
  • paro1923 2010/01/01 09:50 # 삭제 답글

    그래서 세상살이란 게 오묘하죠. 전설보다도 더 전설같은 일들이 간간히 일어나니...
  • 야스페르츠 2010/01/01 14:44 #

    왜 저한테는 전설이 안 일어날까요... ㅠㅠ
  • 말코비치 2010/01/01 14:47 # 답글

    유전병으로 죽은 단일 민족 하니까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떠오르네요..;; 아무리 보수적으로 잡아도 흑사병보다 훨씬 높은 치사율로 거의 멸망했다능... ㅠㅠ
  • 에드워디안 2010/03/10 20:52 # 답글

    환온이 성한을 멸망시켰을 때 그 마지막 황제인 이세는 건강으로 압송되었는데, 동진조정이 그에게 하사한 작위명도 '귀의후(歸義侯)'였다는군요. 이세는 경치 좋은 남경 땅에서 잘 먹고 잘 살다 그 곳에서 생을 마쳤다는...
  • 에드워디안 2010/03/10 20:56 # 답글

    참고로 성한멸망 당시 유비의 후손 중 하나가 현지에 살고 있었다는데,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네요.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



유사역사학 방지

얼마블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