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2/07 23:35

오호망양(五胡望洋) 27 - 모용씨 상봉기 역사

난세에 가족들이 뿔뿔히 흩어져 서로를 찾아 헤메는 비극이 어디 하나 둘이겠냐마는, 이 시대에 특히 눈에 띄는 이산가족(?)들이 있었다. 바로 모용씨 일족들.

부견의 인물됨이 관대하 공장장 뺨을 칠 정도였다고는 해도, 한때 천하를 셋으로 나눠 차지하고 있던 적수 가운데 하나인 모용 선비도 한없이 관대하게 대하기는 어렵다. 부견 자신의 이상주의도 한몫을 하기는 했지만, 모용 선비를 관중으로 대거 이주시켰던 배후에는 관동에 연고를 가지고 있던 모용씨를 견제하려는 목적도 강했을 것이다. 어쨌든, 이런 저런 이유로 모용씨 일족은 대거 관중으로 이주되어 각지에 분산 배치되었다.

모용충, 모용홍 형제가 관중 곳곳에서 복무하던 도중 모반을 일으켜 서연(西燕) 정권을 건설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모용수는 비수대전에 참전하면서 일족들을 대거 이끌고 갔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이산가족이 적었지만, 그래도 장안에 억류되어 있던 가족이 일부 있었다. 바로 모용보의 아들 모용성이다. 겨우 10대 초반의 모용성은 부견이 홧김에 모용위를 죽이고 장안의 선비족을 학살할 때 간신히 성을 빠져나와 모용충을 의지하였고, 서연의 무리가 병주로 이동할 때 함께 이주하였다가 탈출하여 모용수에게 귀환하였다.

그리고, 400년에 남연 정권의 황제로 즉위한 모용덕에게도 머나먼 타향에 두고 온 가족들의 비극이 있었다.


모용덕은 연 정권의 초대 황제 모용황의 막내아들이었다. 모용수가 죽고 난 뒤에는 모용씨 일족 가운데 최고 연장자였던 그다. 하지만 그에게는 변변한 가족 하나 없었다. 황후 단씨(段氏)가 있었지만 슬하에는 아들이 없었다. 60대 후반에 접어들도록 자식이 없었을리는 없다. 그의 아들들은 384년에 모용수가 거병하던 그 때 모두 죽었다.

전연 정권이 멸망하고 난 뒤, 모용덕은 전진 정권에서 복무하면서 장액(張掖)의 태수가 되었다. 모용덕의 가족들, 어머니 공손씨(公孫氏)와 동모형 모용납(慕容納), 모용납의 부인 단씨(段氏), 모용덕의 아들들이 모두 장액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그러나 부견이 대대적인 남정을 개시하면서 이들 가족들은 이별을 하게 되었다. 모용덕은 어머니 공손씨에게 금으로 만든 칼을 증표로 남겨주고 모용수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간다.

비수에서의 패전 이후, 모용수가 거병하여 후연 정권을 세우자, 장액의 태수 부창(苻昌)은 모용덕의 일족을 모조리 잡아서 처형해 버렸다. 공손씨는 늙었기 때문에 참살을 면했고, 모용납의 부인 단씨는 아이를 가졌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하지 못해 당장의 처형은 면한다.

그리고 어느날 밤, 감옥을 관리하던 관리 호연평(呼延平)이 공손씨와 단씨를 데리고 강족 부락으로 도망친다. 호연평은 예전에 모용덕의 부하였기 때문에 그 은혜를 갚으려고 한 것이다. 호연평의 보호 아래에 단씨는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용초(慕容超)라고 지었다. 모용초가 10살이 되던 해, 공손씨가 세상을 떠나면서 모용초에게 금칼을 주고 숙부 모용덕을 찾아가라 일렀다. 얼마 후 호연평은 이들을 데리고 후량 정권의 고장으로 이주하였는데, 후량 정권이 후진 정권에 나라를 넘기자 이들을 따라 장안까지 다시 이주하였다. 호연평은 장안에서 죽었는데, 모용초는 호연평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은혜를 갚는다.

모용덕은 황제가 된지 얼마 후 장안에서 찾아온 옛 부하에게 가족들이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 듣게 되었다. 머나먼 타향에서 온갖 고생을 하다 죽은 어머니와 형을 떠올리며 모용덕은 피를 토하며 통곡을 하였다고 한다. 이때 얻은 병으로 인해 모용덕은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고 남연은 여러 차례 혼란에 빠진 동진을 공격하려다가 그만두어야만 했다.

405년, 모용덕은 사람을 시켜 장안에 살고 있던 모용납의 유복자를 찾는다. 이 소식을 들은 모용초는 어머니와 아내에게도 채 알리지 못하고 장안에서 도망쳐 모용덕에게 찾아간다. 자신이 20년도 더 전에 주었던 금칼을 들고 찾아온 늠름한 청년을 마주한 모용덕의 마음이 과연 어떠했을까. 이미 쇠약해져 있던 모용덕은 모용초를 태자로 세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리고 남연 정권에서는 신참자였던 모용초가 남연의 황제에 즉위한다. 어찌보면 이변이라 할 것이다. 모용초는 남연 정권에 아무런 연고도 없었고, 심지어는 남연의 여러 중신들과 안좋은 감정까지 가지고 있었다. 중신들로서는 신참 주제에 자신들의 상전에 서려 하는 모용초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고, 모용초 역시 자신을 의심하고 경계하는 그들을 좋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모용초는 자신의 친우인 공손오루(工孫五樓)를 측근으로 삼아 측근 정치를 펼쳤고, 불만을 품은 중신들은 청주와 서주에서 모반을 일으켰다가 패퇴, 모두 위 정권이나 후진 정권으로 망명해야만 했다. 모용초의 독재 체제가 수립된 셈이다.


모용덕이 가족 하나 없이 머나먼 타향에서 황제 노릇을 해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모용초도 가족들을 두고 홀로 도망쳐온 처지였다. 그가 가족들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이야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그 방법이 좀 상상을 초월했다.

모용초는 후진 정권에 사신을 보내 어머니와 부인을 송환(?)해 달라고 정식으로 요청한다. 부견과 같은 이상주의자였다면 효심에 감동해 바로 보내주었을지도 모를테지만, 후진의 군주 요흥은 그렇게 성인군자는 아니었다.

"옛날 부씨가 패했을 때, 태악(太樂)의 여러 기예들이 모두 연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연이 지금 번국이라 칭하고 그 기예를 보내거나 오(吳) 출신의 기예 1천 명을 보낸다면 청한 대로 들어 주겠다."

장안의 궁정에서 울려 퍼지던 태악이 남연까지 흘러들어가게 된 사연도 참으로 기구하다. 서연에서 후연으로, 다시 후연에서 남연으로 이어진 기구한 태악을 탐하는 것은 태악 자체를 원한다기 보다는 남연의 신속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모용초는 여러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요흥에게 고개를 숙였고, 마침내 어머니와 부인을 맞이할 수 있었다. 비록 많은 이들이 죽고 다시는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20년이 넘는 세월을 거쳐 마침내 모든 가족이 상봉을 한 것이다.


물론, 역사라는 얄궂은 놈은 이렇게 행복한 상봉을 그냥 놓아두지 않는다.





덧글

  • 2009/12/08 00:14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야스페르츠 2009/12/08 12:38 #

    그래. 너도 굳 잠 하려무나. ㅋㅋㅋ
  • 들꽃향기 2009/12/08 09:15 # 답글

    오늘도 잘 읽고 갑니다.^^ 확실히 후진의 요흥이 태악의 기녀들을 요구한 것은 신속을 요구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씀은 탁견이라고 봅니다. 태악과 그에 관련된 각종 제례는 천자만이 행할 수 있는 것이니, 자신을 천자로 인정하라는 사실상의 요구나 다름없으니깐요.
  • 야스페르츠 2009/12/08 12:38 #

    ^^ 감사합니다.
  • Allenait 2009/12/08 12:10 # 답글

    마지막 한줄이 가슴을 아프게 하는군요(....)
  • 야스페르츠 2009/12/08 12:39 #

    역사 속에 진정한 해피엔딩이 과연 몇이나 있었겠습니까.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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