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1/25 00:32

오호망양(五胡望洋) 24 - 요동 전쟁 역사

398년, 26세의 젊은 나이로 후연 정권의 최고 통치자가 된 장락왕 모용성. 그의 치세를 살펴보자면, 1000여 년 뒤 조선에서 군림하였던 광해군의 치세와 흡사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잔혹한 숙청과 친국, 처형이 끝도 없이 이어졌던 광해군을 연상케하는 것이 모용성의 짧은 치세였다.

모용성은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사주로 모반을 일으켰던 모용기를 처형하는 것으로 치세를 시작한다. 기록에 따르자면, "열흘에 한 번 씩 직접 옥사를 판결하였는데, 고문을 하지 않고도 대부분 그 실정을 알아냈다"고 한다. 고문을 하지 않고도 범죄 사실을 밝혀냈다는 기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그만큼 총명했다는 의미일지, 아니면 고문이나 복잡한 심문을 거치지 않고 무조건 판결해 버렸다는 의미일지 알 수는 없는 일이다.

여하튼 모용성은 수많은 옥사를 일으켜 나라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으니, 종친이나 공이 높은 신하들도 칼날을 빗겨가지는 못했다고 한다. 공포 분위기에 질려서 모반 사건도 자주 벌어졌지만, 모용성은 그 철저한 음모가답게 철저한 기만으로 농락해 가면서 모반자들 스스로가 무너지게 만들었다. 부정적인 방향으로의 재능은 그야말로 천부적이라고 할 정도다.

차가운 칼부림이 난무했지만 그 대가로 후연 정권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산발적으로 이어진던 위 정권과의 국경 충돌에서도 우위에 섰다. 그리고 이러한 안정을 기반으로 모용성은 동방 원정을 감행한다.


400년 2월, 모용성은 3만의 병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친정한다. 사료 상으로도 襲이라 적고 있을 정도이며, 고구려 측의 기록에 따르면 그로부터 한 달 전에 고구려의 조공 사절까지 멀쩡하게 받을 만큼 기만적이었으니, 완벽하다 할 만한 "습격"이었을 것이다. 과연 모용성답다는 생각도 든다. 고구려는 당시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한 상태였기 때문에 기습에 속수무책이었다. 정월에 굳이 후연에 조공 사절을 보낸 점도 신라로 구원군을 파견하기 위해 후방을 안정시키려는 노력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뒤통수를 제대로 얻어맞은 셈이다.

신성(新城)과 남소(南蘇)의 두 성을 점령하고 700여 리를 개척했다고 하니 고구려에게는 뼈아픈 타격이었을 것이다. 모용성은 점령한 땅에 5천여 호를 이주시키고 귀환하였다. 고구려는 이때의 타격으로 상당기간 대외 원정에 제약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백제 방면은 최소 407년까지 수세에 몰렸던 것 같다. 404년에 대방으로 왜군이 쳐들어온 사건도 그렇고, 광개토왕릉비의 407년 원정 기록이 만약 후연을 향한 것이었다면 장수왕 즉위 때까지 남정이 아예 이루어지지 않은 셈이 된다.


고구려 원정 이후에도 모용성은 후연 정국에 끊임없는 피보라를 일으켜댔다. 궁지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무는 법. 401년 8월, 마침내 용성 내부에서 모반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처음 일어난 모반 사건은 금방 들통나서 500여 명이 연루되어 죽었는데, 주도자들이 처형되자 그들의 일족이 연좌될 것을 두려워하여 다시 모반을 일으켰다. 궁성에까지 잠입한 반군은 모용성이 직접 측근들을 이끌고 격파해 버렸다. 역시 모용성은 비범한 인재였다.

그러나, 아무리 치밀한 음모가라도 음모가 아닌 무계획한 공격은 예상할 수 없는 법이다. 모용성이 격파한 반군은 궁성 곳곳으로 흩어졌는데, 일개 졸병이 어둠 속에 숨어 있다가 뛰쳐나와 모용성을 공격했던 것이다. 큰 부상을 입은 모용성은 급히 궁 안으로 모셔졌지만, 난이 평정되고 나자 곧 죽고 만다. 음험한 음모가에게 어울리지 않는 허무한 최후였다.

모용성이 죽고 나자 대권의 행방은 태후 정씨(丁氏)의 손에 쥐어졌다. 태후는 평소 모용희를 총애했기 때문에 태자였던 모용정을 폐하고 모용희(慕容熙)를 왕으로 세운다. 모용희는 모용수의 서자 가운데 하나로, 당시 17세의 어린 나이였다. 모용성보다 나이는 어렸지만 항렬 상으로는 숙부에 해당한다.

결과적으로 볼 때, 모용희를 등극시킨 정씨의 선택은 최악이었다고 할 수 있다. 모용희가 즉위했을 무렵, 그 동안 절치부심하였던 고구려의 역습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온 국력을 기울여서 고구려에 맞서도 부족했을 테지만, 모용희는 사치와 방종을 일삼으며 국력을 갉아먹었을 뿐이다. 기록을 따르자면 402년에 시작된 고구려의 반격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성공했다.

워낙에 기록이 단촐하게 남아있을 뿐이라 상황이 어떠했는지는 짐작 밖에 할 수 없다. 402년 5월에 최초로 등장하는 고구려의 반격은 모용성에게 빼앗겼던 신성과 남소성을 수복한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서쪽으로 수백km나 떨어진, 그리고 자연국경이라 할 수 있는 요하마저 건넌 곳에 위치한 숙군성(宿軍城)을 공격한 것이다. 얼핏 이해하기에 참 난감한 기록이다. 404년에도 고구려의 후연 공격이 있었다. 어디를 공격했는지, 전황이 어떠했는지도 전혀 알 수 없다. <진서> 재기에는 연군(燕郡)까지 약탈했다고 하니 대고구려 전선에서 보자면 후방에 해당하는 지역이 털린 셈이다. 연군은 이 무렵에 대릉하 인근으로 이치된 것으로 본다고 한다. 그러므로 후방이 털렸다는 이 내용은 틀렸음.

이를 정리해 보자면, 이 두 차례의 공격으로 후연은 최소한 요하 이동을 모두 상실하였으며, 수도 바로 근처의 숙군성이나 후방의 연군까지 공격당할 정도로 막대한 타격을 입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모용희는 사치를 일삼으며 국력을 차근차근히 소모시켜 나갔다. 405년에는 요동성을 공격하여 함락 직전까지 몰아붙이기도 했으나 허영심에 빠져 공격을 늦추다가 함락에 실패하기까지 한다. 성을 점령하는 영광을 직접 차지하겠다는 치졸한 행위였다. 게다가 왕후까지 함께 가마를 타고 입성하겠다고 할 정도이니 이 얼마나 무모한 허영심인가. 이런 된장남.

405년 말에는 더 웃기는 삽질을 한다. 12월에 거란 정벌을 목표로 출정하였는데, 이듬해 정월에 이르러 거란군과 마주치자 이를 두려워하여 회군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왕후 부씨(苻氏)가 이를 허락해주지 않자 치중까지 버려두고 고구려로 진로를 돌린다. 용성에서 요동으로 직진했다면 약 300km, 1000리 남짓 행군하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다. 그런데 모용희는 거란의 영역까지 먼 길을 돌아 요동성마저 우회하여 3000여 리를 행군한 끝에 목저성(木底城)을 공격하는 희대의 삽질을 벌인다.

자료를 검색하는 와중에 보니 이 모용희의 목저성 공격을 두고 "거란 정벌이 실패하자 보급로가 끊길 것을 우려하여 목저성을 공격한 것"이라 설명하는 것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공격 루트를 직접 보면, 저런 말은 도저히 성립이 안된다. 그야말로 그냥 삽질인 것이다. 그나마 치중을 버리고 경무장을 하여 요동성을 무사히(?) 우회할 수 있었다는 것이 유일하게 평가해줄 대목이라고 할까? 물론 목저성까지 가는 길에 지쳐서 죽고 얼어죽은 인원은 제외하고 말이다.

※ 대충 발로 그린 요동 전쟁 상황도 (400~406)


406년에 벌인 희대의 삽질을 끝으로 모용희의 고구려 공격은 일단락된다. 이로써 요동이라는 금싸라기 땅을 완전히 상실한 셈. 상황이 이러한데도 모용희의 사치는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 원흉은 바로 부왕후였다. 전쟁터에까지 따라올 정도로 적극적(?)인 부왕후의 입김은 모용희를 그야말로 쥐고 흔들었던 것 같다. 어떻게 보자면 목저성을 공격한 삽질도 부왕후가 원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부왕후의 사치는 상상을 초월했다. 화려한 전각을 짓는 것은 기본, 여름에 언 생선을 먹고 싶다 하고 한겨울에 생 지황을 내놓으라 하는 괴짜였다. 계절에도 맞지 않는 음식을 내놓으라니 애꿎은 조달 담당자만 목이 달아난다.

이런 부왕후가 407년 4월, 세상을 떠난다. 모용희는 그야말로 세상을 다 잃어버린 양 통곡을 하다 혼절할 지경이었다. 그토록 사랑하던(?) 여인이 죽었으니 그 예우가 얼마나 극진했을까. 심지어 신료들 가운데 제대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을 처벌할 정도였다. 능묘를 짓는데 나라가 휘청할 지경에 대소신료들을 순장까지 하려 하였으니 나라 꼴이 말이 아니다. 마침내 7월에 이르러 왕후의 능인 휘평릉(徽平陵)이 완성되고, 모용희는 장례를 위해 상여를 끌고 성을 나섰다.

모용희가 성을 비운 사이 드디어 성 안에서 모반이 일어난다.

후연의 장수 풍발은 죄를 짓고 도망쳐 숨어 지냈는데, 장례로 나라가 어수선한 틈을 타서 용성 내부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모용희가 상여와 함께 성 밖으로 나서자 무리를 모아 모반을 일으킨 것이다. 풍발은 모용보의 양자였던 모용운(慕容雲)을 추대하여 모용운이 천왕(天王)으로 즉위하였다. 모용희는 모반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상여를 멈춰둔 채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온다.

용성을 공격한 모용희는 끝내 이기지 못하고 일단 물러났다. 이때 성 안의 병사들 중 일부가 모용희에게 호응하겠다는 뜻을 알려왔다. 모용희가 이를 적절하게 이용했다면 용성을 되찾는데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유를 알 수 없게도, 모용희는 이들의 말을 듣고 공포에 질려 어디론가 숨어버린다. 병사들이 의아해하는 가운데 모용희를 수행한 친위대장 모용발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기에 모용희의 명을 사칭하면서 용성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작전은 성공하여 성문이 열리고 모반을 일으킨 병사들이 무기를 놓고 항복하였다. 그러나, 정작 그 현장에 모용희는 없었다.

모반을 주도한 자, 모반에 호응한 자, 모반을 번복한 자, 그저 끌려다닌 자, 모용희를 따른 자 등등. 승리(?)한 병사들이긴 해도 모두들 상황은 다르다. 그런데 정작 그런 그들의 구심점, 아니 정통성을 부여해줄 모용희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이들의 마음에 의심이 싹트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결국 병사들은 모용희를 찾다가 슬그머니 흩어져 버렸고, 모용발은 모반자들에게 잡혀 처형되었다.

모용희도 얼마 지나지 않아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후연 정권의 몰락이다.




덧글

  • Allenait 2009/11/25 00:37 # 답글

    허. 모용희가 모용성의 반만 닮았어도 후연은 좀더 오래 버틸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 야스페르츠 2009/11/25 09:55 #

    그럼 우리 광개토왕 님하가 후연을 못발르잖음? 그러니까 안돼요.
  • 초록불 2009/11/25 00:37 # 답글

    자, 요서에 있던 백제는 뭘했는지 규명해 줘야... (먼산)
  • 야스페르츠 2009/11/25 09:56 #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백제가 있을 곳이 없다능. (먼산)
  • asianote 2009/11/25 00:40 # 답글

    광개토대왕 만세! 저 간악한 무리들에게 본떼를 보여 주었으니 그 이름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의 칭호가 아깝지 않습니다.
  • 야스페르츠 2009/11/25 09:57 #

    요동을 집어삼킨 것만으로도 광개토경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습지요.
  • 消爪耗牙 2009/11/25 00:41 # 답글

    사실 고구려에는 워프항법기술이 있었음. 후한대에 태원 일대를 습격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음.
  • 야스페르츠 2009/11/25 09:57 #

    엔터프라이즈 베타?? (퍽!)
  • 2009/11/25 00:53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야스페르츠 2009/11/25 09:58 #

    수정하였습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
  • 을파소 2009/11/25 01:09 # 답글

    X맨이었군요.
  • 야스페르츠 2009/11/25 09:58 #

    나라를 아예 멸망시켰으니 진정한 X맨...
  • 카구츠치 2009/11/25 01:14 # 답글

    연군은 전선과 어마어마하게 먼 지역이네요. 저기까지 쳐들어간 상세한 상황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게 아쉽군요.
  • 야스페르츠 2009/11/25 10:02 #

    연군이 저 위치가 아니라고 합니다. 수정하였으니 다시 보아 주세요. ㅠㅠ
  • 功名誰復論 2009/11/25 04:42 # 답글

    고구려에게 깨질 때 후연이 저런 상태였군요. 재밌게 읽었습니다.
  • 야스페르츠 2009/11/25 10:02 #

    ^^
  • 베리타스 2009/11/25 09:04 # 답글

    연군은 오늘날의 만리장성 안쪽의 북경 인근이라기 보다는 요서 지역으로 이치된-그러나 숙군성과 마찬가지로 그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는-상태였다고 하더군요.

    http://cafe.naver.com/booheong/37637

    네이버 쪽에서 'thwmunba' 아이디로 활동하시는 Shaw님이 쓰신 글입니다. 이미 보셨을 듯 하지만, 지도에는 그렇게 되어 있지 않길래 혹시나 참고하시라는 마음에(Shaw님 이글루스에 들어가보니 이 내용은 올리지 않으신 것도 같네요)^^;

    참,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야스페르츠 2009/11/25 10:03 #

    넵. 저도 확인하고 수정하였습니다.
  • 들꽃향기 2009/11/25 09:10 # 답글

    오늘도 잘 읽고 갑니다. ^^

    모용희의 심정은 '훗 나는 전장의 차가운 군주. 하지만 내 아내에겐 따뜻하겠지.' 드립이라도 있었던 건지..-_-;;

    역시 모용보도 그렇고 병사들 데리고 엉뚱한 루트를 취하거나 우왕좌왕하며 똥개훈련(?) 시키는 것은 모용가의 전통비전인 것 같습니다. ㄷㄷ
  • 야스페르츠 2009/11/25 10:04 #

    진짜 똥개훈련 제대로입죠.
  • dunkbear 2009/11/25 09:47 # 답글

    어떤 마인드를 가지고 있어야 저런 삽질을 할 수 있는지... 완전 세계 7대 불가사의감입니다...
  • 야스페르츠 2009/11/25 10:04 #

    악희 님 블로그에 가보시면 저것보다 더한 삽질들도 보실 수 있습니다. ^^
  • 윙후사르 2009/11/25 15:55 # 삭제 답글

    삽질 한번 거하게 하다 최후의 본거지마저 털리다니 ㅉㅉㅉ 근데 신성과 남소성을 탈환하고 숙군성까지 공격때릴 정도로 반격을 했다느니 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402년의 복수전 당시에 이미 요동일대는 고구려에게 털렸다고 봐야 되지 않을까요? 요동성 공략은 그 털린 요동을 찾으려는 걸로 봐야될테고요.
  • 야스페르츠 2009/11/26 11:22 #

    네. 맞습니다. 다만 요동을 털린 정확한 연도를 확정짓기 어렵다는 말이 되겠지요.
  • paro1923 2009/11/27 10:16 # 삭제 답글

    ...어이가 아리마셍~
    역시 인사(人事)가 만사(萬事)군요. 군주정 치하에선 더더욱...
    (뭐어, 덕분에 고구려만 설욕 잘 했지만서도...)
  • 야스페르츠 2009/11/27 13:13 #

    고구려를 위하여 다행한 일입니다. 후후
  • 마법의활 2009/12/05 00:39 # 답글

    모용성이 더 오래 살아남아서 각 잡고 달려온 광개토 대왕의 고구려와 붙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요? 역사에 이프는 없다지만 괜히 궁금해집니다.
  • 모용성 2009/12/05 01:00 # 삭제

    출생설화와 좋은 평가를 가지고 있는 백제의 아신왕도 광개토왕에게 발린 것으로 보아, 모용성이라고 해서 크게 다른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을것 같습니다(...) 후연은 어느 지도자를 얻건 쇠퇴기였고 고구려의 광개토왕또한 만만한 인물이 아니였기에...
  • 야스페르츠 2009/12/05 11:55 #

    모용성은 워낙에 음험하고 모략에 능한 인물인지라 저 암살을 피했더라도 언젠가는 비명에 갔을 듯 합니다.
  • f 2010/05/07 13:25 # 삭제 답글

    404년 고구려가 공격한 연군이 하북에서 요서 대릉하로 이치되었다고 주장하시는데 진서 지리지 유주조 연군내용을 보면 연군이 요서로 이치되었다는 내용은 없을 정도로 연군이 요서로 이치되었다는 근거기록은 없습니다
  • 야스페르츠 2010/05/07 14:51 #

    399년에 후연의 연군태수가 북위에 항복함으로써 연군은 후연 판도에서 사라졌습니다. 당시 정황상 이치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e 2010/05/07 20:28 # 삭제 답글

    연군이 북위에게 넘어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404년 고구려가 공격한 연군이 요서에 이치되었다고 주장하는건 너무 비약 아닙니까 399년 북위에게 넘어간 연군이 404년 고구려의 수중에 넘어갈때까지의 그 기간동안에 후연이 재탈환 하거나 연군내부의 친후연세력들이 북위가 후진과의 전쟁으로 지친틈을 타서 반기를 들어 고구려의 공격대까지 자체적으로 통치할 가능성도 있는데 단순히 북위의 점령 하나만으로 고구려가 공격한 연군이 요서로 이치되었다고 주장하는건 여러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한가지 가능성에 의존한 주장인것 같군요
  • 야스페르츠 2010/05/07 20:49 #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귀하의 주장은 "그럴 가능성도 있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제 주장(?) 또한 마찬가지죠. 하지만 제 서술은 귀하의 "이럴 수도 있다."는 주장과 달리 충분한 근거와 사례를 가지고 있습니다.

    http://cafe.naver.com/booheong/37637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해당 내용은 기본적으로 현재 국사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며, 저는 제 주체적인 의견이나 특별한 반례가 없는 이상 일반적인 국사학계의 견해를 수용합니다. 그리고 저의 일천한 생각으로도 귀하와 같은 사고보다는 국사학계의 견해가 더 타당성있습니다.

    귀하의 말씀, "여러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한가지 가능성에 의존한 주장"이라는 말씀에 대한 대답은 간단합니다. 귀하나 잘 하십시오.
  • e 2010/05/07 20:49 # 삭제 답글

    야스페르츠님의 말씀대로 북위는 연군을 치열한 전투로 얻었던게 아니고 연군의 수장인 연군태수의 자발적인 투항으로 얻어진만큼 북위의 연군에 대한 지배력은 대개 투항한 연군태수등 연군토착세력에게 일임하는 간접지배형태였을 걸로 추정되어 그리 강력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고 있고요 연군세력은 북위를 섬기고 있지만 402년 북위가 후진과의 전쟁으로 서쪽에 전력 집중하면서 연군등 동쪽지역에 대한 경계망이 소홀해지니까 연군토착세력들이 볼때 후진과의 전쟁에 여념이 없는 북위가 자신들을 보호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되어 후연쪽으로 돌아선게 아닌지 그럴 가능성도 있고요
  • 2010/05/07 21:01 # 삭제 답글

    귀하의 연군의 요서이치주장도 가능성에 의존한 주장 아닌가요 구체적 증거없는데 단순히 북위의 점령사실이라는 한가지 정황적 심증에 의존추론하여 부풀려서 해석하여 고구려가 공격한 연군이 하북에 위치한게 아니라고 부정하는게 그거야 말로 확대추론적인 주장 아닙니까 연군의 요서 이치주장은 한쪽의 주장일뿐 국사학계 전체의 의견으로 호도하다니 북위의 점령으로 연군이 요서로 옮겨졌다면 북위의 역사를 기록한 위서 지형지 영주조와 평주조에 연군이 실려야 하는데 실려 있지 않으니 이치주장은 증거없이 가능성에 추론한 희박한 주장이죠 자신도 가능성에 의존추론해서 주장하면서 이를 반박하는 상대방 주장을 가능성에 추론하여 근거없는 것이라고 몰아부치는게 옳은 일입니까 님은 토론의 기본 자세가 덜되어 있군요
  • 2010/05/07 21:08 # 삭제 답글

    그리고 연군의 이치같은 주군지명의 이동은 반드시 지리지에 크게 실리기 마련인데 남북조시대와 수나라시대를 기록한 위서지형지 수서지리지의 영주 평주조에 연군관련 내용은 실려있지 않았습니다 이치주장은 가능성이 희박한 주장이죠 그런데 뭐가 연군이 요서로 이치되었다고 우기시는지 충분한 근거와 사례에 입각했다고요 구체적으로 대고서 그런 말씀 하십시오 잘해야 할쪽은 님이십니다
  • e 2010/05/07 21:18 # 삭제 답글

    위서 지형지 유주조에 연군이 하북에 속해있다고 서술될 정도로 요서로 이치되었다는 증거는 없지요 지리지에 그런 이를 의미할만한 기록은 나오지 않으니 연군이치주장은 특정학자들의 주장일뿐 전체학계의 주장이 아닙니다
  • 야스페르츠 2010/05/07 23:41 #

    한서 및 후한서 지리지에도 현도군의 이치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요. 그럼 현도군의 이치도 단순한 우기기?? 진서 지리지에는 기주나 병주 같은 주의 이치도 기록되어 있지 않지요. 그럼 동진 시기에 교주군현들도 단순한 우기기??

    연군의 이치 가능성을 방증하는 증거는 많습니다. 비슷하게 이치된 사례를 수도 없이 찾을 수 있고, 군 자체도 399년에 실함했다는 기록이 명백하게 보이며, 후연이 기주 및 병주를 교주로 설치한 예도 분명하게 찾아볼 수 있으니까요. 더불어, 광개토왕이 적국의 수도를 코 앞에 두고도 멀리 우회해서 머나먼 북경까지 쳐들어가는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았으리라는 "상식"도 있지요.

    귀하의 "친 후연 세력(그게 누군데?)이 반란을 일으켜서(언제? 어떻게?) 다시 후연에 붙었을(왜?) 가능성"보다 훨씬 높아 보입니다만.
  • d 2010/05/08 20:30 # 삭제 답글

    야스페르츠님의 한가지 정황가능성에만 의존하여 구체적 증거없이 단정짓는건 여전하시군요 님이 제시하는 연군의 이치가능성을 방증하는 증거가 고작 북위의 점령 사실뿐이라는것뿐이라는거 학계에서 역사적 가설을 주장할때 그런 불확실하고 애매한 정황증거를 확대해석하여 주장했다가는 비웃음 사기 쉽상입니다 북위의 점령한 사실이 되었든간에 연군의 이치를 입증할만한 증거가 있나요 나중에 북위가 점령한 연군이 후연과 고구려가 도로 빼앗을 가능성도 있는데 야스 페르츠님은 애매한 한가지 정황가능성을 자의적으로 확대해석하여 그게 확실한 근거마냥 주장하고 있군요 진서 위서 등 5호16국시대와 남북조시대를 기록한 역사서의 지리지에 연군의 요서이치에 관한 내용은 없습니다 좀더 확실한 증거가지고 주장하십시오 애매하고 불확실한 정황증거를 부풀려서 주장하시지 마시고
  • 야스페르츠 2010/05/08 20:44 #

    아놔. 귀하나 "확실한 증거"를 가져오시오. 백번 양보해서 내가 뻘소리를 한다고 쳐도, 귀하는 나보다 100배는 더 뻘소리하고 있다는 거나 알아 두시고.
  • 2010/05/08 21:17 # 삭제 답글

    현도군의 이치와 연군의 이치주장을 비교하시는데 현도군의 이치는 사료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이에 반해 연군의 이치는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료근거가 확실한 현도군의 이치와 사료근거가 불확실한 연군의 이치를 같은선상에서 비교하려는 것인지 그리고 339년에 연군이 북위의 수중에 넘어갔다고는 하나 그 획득과정이 북위의 군사적 노력으로 얻어진게 아니고 연군지배세력의 자발적인 귀순으로 인한 것이어서 북위의 연군지배성격은 대개 연군토착세력에게 일임하는 간접지배로 유력시되어 별로 강력하지는 않았지요 전쟁으로 국경선과 영토 승자와 패자가 자주바뀌고 배신이 난무한 당시 5호16대의 시대적 배경상 후진과의 전쟁으로 서쪽전선에 주력하여 동쪽방면에 전력공백을 노출시킨 북위에 연군지배세력이 장기적으로 복종을 유지했는지 의문이고요 당시에 강자와 약자가 수차례나 바뀌고 강한편에 붙기 위해 배신이 난무하는 당시 정황상 연군세력이 후진과의 전쟁으로 지친 북위를 배신하고 후연에 붙었을 가능성이 크고요
  • 2010/05/08 21:30 # 삭제 답글

    야스페르츠님이나 확실한 증거나 대십시오 5호16국시대를 기록한 진서와 수나라대 역사를 기록한 수서지리지에 연군이 하북에 위치하여 수나라대까지 지속되어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진서와 수서등 역사서등을 수록한 사료방인 http://history.thoth.kr/ 이 사이트에 한번 가보셔서 진서와 수서지리지의 연군내용을 보십시오 그리고 군사공격이 무슨 직선으로 이루어집니까 우회하여 후방을 쳐서 장악해 고립시키는게 효과적인 군사작전입니다 야스페르츠님은 고작 얕은 군사적 상식으로 생각하는군요
  • d 2010/05/08 21:38 # 삭제 답글

    100배 뻘소리는 확실한 증거도 대지 못하고 연군이치 주장하는 야스페르츠님이 하시는게 아닙니까 님이나 잘하십시오 광개토대왕의 북경인근의 연군공략은 가능성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광개토왕의 연군공략을 군사적으로 보면 연군은 후연의 수도권 남쪽후방에 있어 인접한 곳이라 광개토왕에게 공격받을 후연의 수도를 지원할 세력이어서 광개토왕은 미리 싹을 잘라두기 위해 연군공략을 취한 것이지요
  • 야스페르츠 2010/05/09 00:14 #

    어차피 귀하도 "확실한 증거"는 대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귀하도 확실한 증거를 가져와 보세요. 무조건 틀렸다고 하지 말고. 이치되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 만큼이나, 연군이 다시 되돌아왔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반면, 북연 시기 북위의 북연 공략전이나 황제의 순시로를 통해 살펴보면 북위는 상곡, 어양, 탁록 등을 소유하고 있으며, 당시 북연은 하북성 천안현에 위치한 요서군(물론 북연측에서 이치한 곳)이 최전선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연군은 상곡의 바로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연의 최전선인 요서군에서도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죠.

    또한 진서 지리지 평주조에는 후연이 하북을 북위에게 빼앗기고 난 뒤에 유주, 청주, 병주, 영주, 기주를 요서 지방에 교치하였다는 기록이 있지요. 귀하의 주장대로 연군이 후연의 영토였다면, 다른 주는 둘째치고 유주를 영지(하북성 천안현)에 이치할리가 없습니다. 연군은 유주의 치소 근방이니까요.

    뭐, 귀하의 주장대로라면 399년에 잠깐 얻었다가, 언젠지는 모르지만 빼앗겨서 404년에 고구려한테 한 방 먹었다가, 다시 언젠지는 모르지만 북위가 소유하게 된 모양입니다. 광개토왕께서도 적의 영토를 돌파해가면서까지 어차피 북위와의 대치 때문에 섣불리 빼지도 않을 병력을 굳이 후려 갈기고 오셨던 모양입니다.

    어 느 설명이 더 명쾌하고 분명한지는 누군가는 아시겠지요.
  • e 2010/05/09 10:12 # 삭제 답글

    정황가능성을 자의적으로 추론하는건 여전하시는군요 자신의 설명이 명쾌하다는 그런 독선적 사고방식에 빠져 있으니 그리고 북연시기 북위의 북위공략과 광개토대왕의 연군공략을 억지로 연계시키다니 그게 연군의 이치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자꾸 갔다가 억지로 붙여 놓는지 왜 님은 아직도 고구려의 영토와 활동무대가 만주일대라는 기존학설에 집착하여 고구려의 북경인근까지 진출한 사실을 인정못하여서 그런 별의별 억지논리를 붙이는게 아닙니까

    북위의 수중에 넘어갔던 연군이 탈환한 기록이 없다해서 이치되었다는것이 핵심적 논리인데 그런 논리로 얘기하자면 광개토왕과 전쟁한 후연 모용희가 공격한 요동성을 이전에 고구려가 쟁취한 기록이 없다고 해서 다른곳에 이치되었다고 주장하실 건가요

    그리고 연군은 후연의 수도권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제가 말하는건 후연의 수도권이지 후연의 동쪽 국경선이라고 했습니까 글좀 제대로좀 읽으십시오 그리고 고구려군은 육로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해로로 하북에 직선으로 갈수 있고 유주의 북쪽 관문이자 만리장성 입구인 고북구는 거란족 지역으로 가는 통로와 직결되어 있어 거란정벌로 거란을 수중에 넣은 고구려가 이 통로를 통해 연군으로 진격해 나갈수도 있고요
  • 2010/05/09 10:37 # 삭제 답글

    야스페르츠님은 유주 병주 청주 기주 영주등의 교치기록을 잘못 해석하시는데 이들지역의 교치를 기록한 진서 지리지 평주조에 이들의 진서이들지역을 교치시키다는게 아니라 이들 5개 주의 자사들을 이주시켰다고 나와 있을뿐 광역행정명인 이들주의 명칭을 교치시켰다고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습니다 진서 지리지 평주조의 5개 주 자사들의 이동기록을 교치라고 확대해석한 모양이네요

    진서 지리지에 모용희가 유주자사의 진을 영지에 기주자사진을 비여에 청주자사진을 신성에 영주자사진을 숙군에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을뿐 주의 명칭을 이 지역에 옮겨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자사의 이동과 주의 명칭이동은 다른 것입니다 게다가 이동시켜다고 나온 5개 자사의 진은 자사의 진영 즉 자하의 휘하군대를 말하는 것으로 이들 자사들의 군대를 이동시킨 것이지 광역행정중심지를 옮긴게 아니지요 그이후의 위서 수서지리지의 영주 평주내용에 모용희가 교치시킨 지명이 나오지 않는 정황을 고려하면 단순히 군대이동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고구려와 전쟁하는 모용희 당시 사정을 감안하면 말이지요
  • 야스페르츠 2010/05/09 12:10 #

    쯧쯧. 가능성, 그놈의 가능성. 대체 본인이 말하는 가능성과 귀하가 말하는 가능성에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이럴 가능성도 있다. 이럴 가능성이 높다. 귀하도 명확한 근거라고는 눈꼽만큼도 못 가져오시고 있지 않습니까? 얼어죽을 놈의 가능성.

    귀하는 귀하의 가능성만 오로지 옳고 다른 이의 가능성은 어떤 증거를 가져다 대도 깔아뭉개시겠지요. 귀하께서는 저도 그렇다 하시니 어차피 서로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는 꼴이겠군요.

    그럼 그렇게 혼자 귀를 막고 소리나 지르십시오.

    ps. 귀하가 말한 그 뻘소리는 제가 일전에 제시한 링크 속에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제시되고 있습니다. 아마 그 소리를 한 분이신가 봅니다. 아니면 그런 주장에 혹하신 어떤 분이시거나.
  • 야스페르츠 2010/05/09 12:16 #

    귀하와 같이 역사를 해석하는 방법을 혹자는 이렇게 표현하더군요. "라면 역사학"이라고. 대체 귀하의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만약 그렇다면", "~라면", "가능성"이 필요한 것인지 참으로 궁금하군요.

    http://orumi.egloos.com/4364576
  • 2010/05/09 12:33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야스페르츠 2010/05/09 12:37 #

    그래야 할 듯... ㅡㅡ;;;
  • g 2010/10/03 19:41 # 삭제 답글

    역사학에서느 충분한 근거없이는 단정결론은 금물인데 야스 페르츠님은 확실하고 많은양의 증거없이 애매한 근거를 확대해석하여 연군이치를 단정하고 있습니다 학계에서 볼때 님의 주장은 왜곡적인 주장으로 취급될수 있습니다
  • 푸하하 2011/01/08 03:14 # 삭제

    이 사람 진짜 웃기네..
    국어사전 펴시고 "가능성"과 "개연성"의 차이가 뭔지 좀 살펴보시죠
    그냥 "~~라면" 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말인줄 아슈?
    댁은 주인장님에게 역사를 논하기 전에 국어부터 좀 배우구 와야겠소이다
  • 4 2011/03/22 20:07 # 삭제 답글

    푸하하 당신이야말로 웃기는 인간이구만 남 꼬투리 잡기에 안달이 난걸 보면 수준 떨어지는 인간이구만
    가설과 정설의 차이에 대한 학문의 기본인식부터 배우고 나대기 바란다
  • 마에스트로 2011/10/28 00:40 # 답글

    이 비전공자 허접이 모용희의 요동 원정 부분을 지적하겠습니다. <삼국사기> 13년 11월 후연 침공 기록과 <자치통감>의 404년 12월 기록의 후연 침공 기록, <진서>의 연군 공격 기록을 종합해보면 ,대략 고구려의 연군 공격은 11~12월에 이뤄진 듯 합니다. 이치된 연군을 보통 대릉하 서쪽, 즉 조양과 금주 사이로 보고 있는데 이 지역을 치려면 상식적으로 요하-연군 중간 지대에서 엄청난 전투가 벌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자치통감>의 후연 404년 11월 말의 기록을 보면 모용희가 부씨와 함께 사냥하면서 북쪽으로 백록산, 동쪽으로 청령, 남쪽으로 창해까지 갔다가 돌아오니까, 병사 중에서 호랑이와 이리에게 물려 죽거나 얼어죽은 자가 5000명이 되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백록산이 용성 북쪽, 청령이 용성 동남쪽 400리 지점, 창해는 발해만인 것을 볼 때, 이들 지역은 수도 용성을 방어하기 위한 방어선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모용부의 군대가 호랑이와 이리에게 당할 정도로 그렇게 만만한 군대가 아닙니다. 비록 모용수 이래로 후연이 쇠약해졌다고 하지만, 한 때 화북을 상대로 북위와 다툰 군사적 역량이 어디로 가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모용희가 막장이었다고 해도 한 때 그도 신성과 남소성을 침공하여 고구려를 수세로 몰아넣은 장본인입니다. (물론 16살 짜리가 혼자 지휘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리고 휘하 장교들은 전쟁에 관해선 엘리트들입니다. 이들이 사냥 중 호랑이와 이리 떼에게 물려 5000명이나 죽도록 군사들을 놔두었을까요? 게다가 적군이 코 앞까지 쳐들어 왔는데 사냥을 즐길 군주는 없다고 봅니다. (물론 시비는 아닙니다.^^)

    그리고 <진서>를 보면 요동성 전투 이후 후연군이 후퇴하다가 눈, 비를 만나 왕창 죽어서 돌아왔단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1차 고수전쟁의 수나라가 패배하여 부회한 기록을 보는 듯 합니다.

    게다가 이후의 목저성 공격도 조금 어색한 감이 있습니다. 후연이 애당초 거란을 공격하려 했다면 공성무기를 가져가지는 않았을 겁니다. 오히려 전황이 <말무사>처럼 기병 대 기병으로 흘러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부분은 저의 단순 추측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어쩌면 후연이 애초에 목저성을 겨냥하여 고구려를 공격한 것은 아닐 가능성이 있단 것입니다. 실제로 공성 병기도 없이 성을 공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3000리나 행군하면서 군사들이 얼어 죽는데 회군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말 비이성적인 태도일 것입니다. 아무리 모용희가 막장이라도 이러지 않았으리라 봅니다.

    목저성 공격 정황을 다시 재구성해보면 거란 원정 실패 후에 후연군이 인근의 고구려 수비군을 쳤다가, 오히려 목저성까지 유인 당하여 궤멸당한 상황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그림대로 서요하에서 목저성까지는 거의 평지입니다. 후연의 군대가 서요하에서 목저성까지 다이렉트로 유인되는 것은 그렇게 무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 때의 전황을 좀 과도하게 말하자면 살수대첩과 같은 정황이겠지요.

    결론적으로 저는 요동 전쟁에 관련된 기록들이 후연에 의해 부회되어 기록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단순한 추측으로만 돌리기에는 그럴 만한 개연성이 너무 큽니다.



    p.s. 추측을 워낙 좋아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라 엄청나게 비판들을 각오하고 씁니다.^^
  • 마에스트로 2011/10/28 00:57 # 답글

    참고로 위의 댓글의 내용은 다른 분의 추측을 바탕으로 불초한 소생이 가지치기 한 것일 뿐입니다.
  • 부여 2012/01/04 23:47 # 답글

    정씨가 모용희를 지지한 것이 사실 서로 그렇고 그런 부적절한 관계였다는.(...) 참고로 즉위할 때 모용희가 17세. 죽을 때 22세. 이 중요한 질풍노도의 시기에 형사취수+자매덮밥+네크로필리아(...)의 실현자.

    저기, 동쪽 나라 임금님과 너무 비교되는 거 있죠.
  • 4 2012/02/24 23:07 # 삭제 답글

    연군공략을 할 당시 404년에 모용희가 남쪽 창해(발해만)까지 사냥하러 갔다가 모용희의 군사 오천명이 맹수에게 물려 죽었다는 기록은 황당한 비약왜곡이고 실제로 무언가를 숨기기 위해 이런 황당한 기록을 서술했을 것이지요 아무리 맹수의 힘이 세다 해도 사냥 도구들인 창칼 활등 무장한 오천명의 군사들을 물어 죽인다는건 말도 안되지요 후연의 군대가 맹수 하나에 허약하게 무너지는 존재들입니까? 무슨 정글판 삼국지도 아니고 요서 이치론자들의 주장대로 연군이 용성동쪽에 위치하였다면 용성 최대의 방어선으로서 모용희가 정신나가게 고구려가 수도최대의 방어선을 공략하는 국가적 위급상황에서 한가롭게 먼 남쪽바닷가로 사냥나갈수가 있습니까? 그런 모용희였다면 고구려는 후연과의 전쟁을 404년에 일찍 끝내었을 것이지요 고구려가 공략한 연군이 요서였다면 후연의 수도안위와 직결된 최대의 방어선이라 후연군 수뇌부의 많은 대응이 사료에 크게 기록되고도 남음이 있는데 이에 관한 기록이 없는 걸 보면 연군은 후연의 수도와 가까운 근방지역이 아니고 먼 지역에 위치해 있음을 알수 있지요 연군공략을 할 당시 모용희가 사냥하러 갔다는건 은폐폄하 왜곡이고 모용희는 사냥하러 간게 아니라 고구려군을 막기 위해 나간 것이지요 남쪽 발해만에서 맹수에게 죽었다는 모용희의 오천명의 군사는 실제로 연군을 구원하러 가다가 연군을 침략한 고구려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군대이지요 그럼으로 연군공략 당시 죽은 모용희 5천군사들의 전사장소인 남쪽 발해만을 본다면 고구려가 공략한 연군은 요서가 남쪽 하북의 북경인근에 위치했을 것이지요
  • 3 2012/02/24 23:30 # 삭제 답글

    연군이 요서에 위치하였다면 후연의 수도 보호하는 최대의 방어선이라 모용희가 사냥갈틈이 없었지요 적군이 수도 문턱아래까지 쳐들어 왔는데 모용희가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한가롭게 먼 남쪽 바닷가로 사냥하러 갈 틈이 있습니까? 그랬다가는 용성의 수비가 취약해져 고구려가 이때를 노려서 연군을 공략한 다음에 용성으로 진군했을 것이지요 마에스트로님의 말대로 사냥하러 갔다가 맹수에게 죽은 모용희 오천군사들은 실제로 고구려군과의 전투에서 죽은 것이지요 게다가 사냥장소가 남쪽 바닷가 창햬(발해만)부근이라는 것도 의심스러운 대목이지요 적군이 수도근방을 공격하는데 모용희가 군사들을 데리고 데리고 이런 먼 지역까지 사냥오는 것도 석연치 않습니까? 분명 연군은 요서에 위치하지 않았기에 모용희가 군사들을 데리고 창해까지 온것이지요 요서에 위치하였다면 창해까지 올 틈이 없었지요 가까운 동쪽으로 향하면 될일이지 뭐하러 위치와 거리가 먼 남쪽까지 올 필요가 있습니까? 고구려가 공격한 연군이 남쪽 하북지역 유주에 위치하였기에 모용희가 이런 이유로 군사들을 데리고 연군을 구원하려고 창해까지 온것이지요
  • 32 2012/02/24 23:51 # 삭제 답글

    연군공략 이전의 숙군성 전투기사에서 연군보다 변방끝자락에 위치한 숙군성 전투를 지휘한 후연군 장수의 관등성명이 기재할 정도로 구체성이 담겨져 있는데 연군공략에서는 이런 후연군의 장수성명이 기재되지 않는 구체성이 왜 이리 약한 것일까요 요서에 위치하였다면 후연군 장수들이 대거 많이 투입되어 그들의 관등성명이 사료에 많이 기재되고도 남음이 있는데 어찌하여 숙군성전투에 그렇게 했으면서 연군공략에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인지 분명 연군이 요서에 위치하지 않았기에 후연의 중앙군이 신속하게 투입될 동쪽 전장이 아니고 신속하게 투입되기 어려운 먼 유주에 위치한 전장인 연군이었기에 이렇게 사료에 안남는 것이지요
  • 이자나기 2012/12/21 12:32 # 삭제 답글

    안녕하세요? 야스페르츠님, 본문에서 사용하신 '대충 발로 그린 요동 전쟁 상황도 (400~406)'를 제가 쓴 글에 사용하고자 이렇게 댓글을 남깁니다.^^ 출처 남겼습니다. 감사합니다.

    야스페르츠님의 지도를 사용한 게시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http://cafe.naver.com/booheong/68087
    http://cafe.naver.com/historygall/31143
    http://cafe.daum.net/alhc/51q2/6109
    http://cafe.daum.net/shogun/1Db/5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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