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1/19 00:06

오호망양(五胡望洋) 22 - 남연과 북연 역사

398년 초, 황하 남동쪽의 활대(滑臺)는 새로운 시작에 대한 흥분으로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업에서 빠져나와 활대로 들어온 모용덕이 나라를 정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용덕을 뒤쫓아 온 모용린은 모용덕에게 황제의 칭호를 올렸으나, 모용덕은 이를 거부하고 형인 모용수가 했던 전례를 따라 연왕(燕王)을 자칭했고, 연호도 고쳐서 "원년"을 칭했다. 황제를 칭하지는 않았지만 개원을 한 것도 그렇고, 여러 제도와 관직을 설치한 것도 모두 새롭게 나라를 건국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남연(南燕)으로 칭해지는 국가의 성립이다. 모용덕의 나이 63세. 모용수의 동생으로 당시 모용씨 일족에서 최고 연장자였으니 그의 즉위가 그렇게 뜻 밖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북방의 모용보는 얼마 되지도 않는 유주·평주의 영토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고 있었고, 그나마 교통도 사실상 끊겨서 활대 인근은 고립무원이었으니 모용덕이 자립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사실 모용덕이 이제 막 수립한 남연 정권은 당시로서는 멀리 양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과 비교해도 크게 다를 바 없는 수준의 건국이었다. 남연 정권의 영역은 고작해야 황하 남동쪽의 일부 지역, 지금의 하남성과 산동성의 경계 지역에 불과했다. 그 외에는 여전히 후연 정권의 지방관, 혹은 반 독립적인 군벌 세력들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그나마도 이들 영역은 아주 평탄한 지역이어서 북서쪽의 자연국경 황하를 제외하면 지리적으로도 대단히 불리했다. 남연 정권의 미래는 아직 불투명했던 것이다.


모용덕이 막 나라를 세워 꾸려나가던 바로 그 시기, 황하를 지키던 모용종(慕容鍾)에게서 사신이 찾아왔다. 그가 알려온 소식은 놀라운 것이었다. 북방에서 쫒겨난 황제 모용보가 암행을 거듭하여 적진을 뚫고 황하 서쪽에까지 도착하여 사신을 파견해왔다는 것이다. 모용보의 사신이 전한 말은 이러했다.

"황상이 2월에 승상(丞相 : 모용덕을 말함)의 표문을 받고 곧바로 남쪽으로 정벌을 가시다가 을련(乙連)에 이르러서 난리를 만나게 되어 근거지를 잃고 여기에 왔습니다. 왕(王 : 모용종을 말함. 모용종은 북지왕에 책봉되어 있었다.)께서는 빨리 승상에게 말씀을 드리고 받들어 마중하십시오."

모용보는 아직 모용덕이 나라를 건국한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모용덕을 승상이라 말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모용종은 모용덕에게 황제를 칭하라 권하였던 사람 중 하나였기에, 모용보의 사신이 달가울리가 없다. 그래서 사신을 도망치지 못하게 유폐해 놓고 즉시 모용덕에게 사신을 보낸 것이다. 성 안에서는 즉시 긴급 회의가 소집되었다.

"짐은 경들이 권고하기도 했고, 짐 또한 지금의 황제를 떠돌아 다니도록 내버려 둔 책임이 있어 나라를 보존하기 위해 황제를 대신하여 이 지위에 올랐다. 이제 하늘이 도우셨는지 황제께서 돌아오셨으니, 나는 장차 그를 받들고 감히 참칭한 죄에 대해 용서를 빌고자 한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모용덕의 조심스러운 발언에 즉각 신료들의 만류가 쏟아졌다.

"지금 천하는 혼란스러워 뛰어난 인재가 아니면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줄 수 없습니다. 선황의 뒤를 이은 황제는 어리석고 약하여 사직을 보존할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 만일 보통 사람의 절개를 따르면서 하늘이 내려준 일을 버린다면 사직을 어떻게 보존하겠습니까?"

"지금의 황제는 국도를 버리고 도망쳤으며, 어려가지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패망하였습니다. 나라를 망친 군주는 설사 어버이라 해도 맞이하지 않을 수 있음은 <춘추>에도 올바르다 하였습니다. 하물며 아버지가 자식을 거절하는 경우(모용덕은 모용보의 숙부이다.)가 다르겠습니까?"



아차피 짜고치는 고스톱이었을 것이 분명하지만, 어쨌든 방침은 사실상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모용덕은 모여호를 파견해서 사신과 함께 모용보를 맞아들이라 명하였지만, 실제로는 모용보를 붙잡으려 하는 것이었다. 모여호는 수백 명의 장사를 이끌고 사신과 함께 황하를 건너 모용보를 찾았다.

그러나, 모용보의 명줄(?)은 아직 남아있었다. 모용보가 사신을 보내 놓고나서 우연히 나무꾼과 만났는데, 이 나무꾼을 통해서 모용덕이 칭제(稱制 : 황제의 권한을 대행함. 섭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모용보는 사신을 버려둔 채 다시 북쪽으로 줄행랑을 놓았고, 모여호는 허탕을 치고 말았다. 애꿎은 사신만 모용덕에게 처형당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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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덕의 손아귀에서 도망쳐 나온 모용보는 결국 다시 북쪽으로 향했다. 물론, 그냥 돌아갔다가는 개죽음만 당할 것이 분명하니 아직 후연의 영향력이 남아 있는 기주 일대에서 은밀하게 군대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용성의 동태를 예의주시하였다.

한편, 용성에서는 쿠데타를 일으킨 세력들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나 한바탕 피바람이 몰아쳤다. 쿠데타를 직접 일으켰던 이는 금군이었던 단속골 일파였다. 이들에 동조했던 것이 난한(蘭汗)이었는데, 난한은 은밀하게 단속골을 지원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태연스럽게 근황군인 척 했다. 용성이 함락된 직후, 단속골 일파는 꼭두각시 황제를 누구로 하는가를 놓고 내분을 일으켜 서로 죽고 죽이는 촌극을 연출했다. 이 과정에서 모용농이 피살되기도 했다. 어쨌든 내분으로 약화된 반군은 결국 뒤에서 팔짱을 끼고 이를 지켜보던 난한에 의해 모두 참살당했고, 난한은 용성을 장악하고 태자 모용책을 받들었다.

모용책은 어차피 꼭두각시, 그러나 난한 자신은 대단히 신중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모용보는 난한을 어느 정도 신뢰하고 있었다. 반명 모용보의 아들 모용성은 난한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난한이 모용보를 받들겠다고 하자 이를 거부하도록 종용하였다. 그래서 모용보는 남쪽으로 모용덕에게 갔다가 봉변(?)을 당한 것이다.

이제 다시 난한을 주시하게 된 모용보는 일단 난한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어쨌든 모용보 자신이 책봉한 태자를 받들고 있고, 종묘에도 제사를 지내는 등 여러 면에서 믿을 만 했던 것이다. 일단 신중을 기하느라 난한을 만나보도록 사신을 파견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난한이 파견한 사신이 찾아오자 모용보는 아예 마음을 놓아버리고 용성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모용성이 눈물까지 흘리면서 만류해도 통하지 않았다. 결국 모용성은 모용보를 떠나 숨어버렸고, 모용보는 398년 4월, 용성으로 유유히 입성하였다.

당연히,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난한의 암살자였다. 향년 44세, 너무나도 뛰어난 아버지를 두었던 평범하고 소심했던 한 남자의 최후였다.


모용보를 죽인 난한은 스스로 창려왕(昌黎王)을 자칭하며 유·평주를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난한은 그 성격이 모질지는 못했던 것 같다. 정통성에서 위협이 될 수 있는 태자 모용책을 제외한 모용씨 일족들 대부분을 죽이지 않고 살려두었던 것이다. 모용성 또한 이런 난한의 약점을 꿰뚫고 있었던 것 같다. 모용성은 난한의 딸과 결혼했었기 때문에, 모용성이 난한에게 항복하자 딸과 부인이 만류하는 바람에 죽이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시중(侍中)으로 삼아 가까이 두기까지 했다.

난한의 형이었던 난제와 동생인 난가난 등이 모용성을 살해하자고 청했지만, 난한은 끝내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모용성이 난제와 난가난을 참소하여서 형제들의 사이는 점점 멀어지기만 했다. 그리고 모용성의 음모는 차근차근히 진행되어 나갔다.


모용성의 사주로 모용기가 지방에서 거병하였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난제·난가난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모용성이 이들을 믿을 수 없다고 참소하자 난한은 사령관을 교체하였고, 당연히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난제 등은 끝내 반란을 일으키고 만다. 난한의 아들 난목이 출정하여 반란을 진압하였고, 귀환한 난목은 암살, 난한도 곧이어 살해당했다. 그야말로 물흐르듯이 이어진 완벽한 음모였다. 지방의 요지를 수비하고 있던 난한의 일족들도 전광석화처럼 해치워버린 모용성은 마침내 후연의 왕위를 되찾는데 성공하였다.

398년 7월 신해일(21일), 황실이 끊긴지 3개월 여 만에 모용성이 뒤를 이어 후연의 수장이 된다. 모용성은 아직 스스로 황제라 칭할만한 상황이 아니라 여겼던 모양이다. 특별히 칭호를 세우지는 않은 채, 자신의 책봉명인 장락왕(長樂王)으로 황제의 직책을 대행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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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한창 나라를 일궈 나가고 있던 남연 정권은 399년에 이르러 위기에 직면한다. 3월 경에 반란이 일어나 모용덕이 직접 출정하여 반란을 진압하였는데, 모용덕이 활대를 비운 틈을 타서 모반이 일어나 활대를 위 정권에 넘겨버린 것이다. 근거지를 사실상 잃어버린 셈이다.

모용덕의 무리는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놓고 격론을 벌였다. 활대를 다시 되찾자는 주장, 남쪽으로 내려가 팽성(彭城)을 점거하자는 주장, 동쪽으로 가서 청주(靑州)를 차지하자는 주장 등, 의견은 하나로 모아지지 못했다. 결국 모용덕은 승려 축랑(竺郞)에게 자문을 구했다.

"삼가 세 가지 책략을 살펴보니 반총의 의견(청주로 가자는 주장)이 나라를 흥하게 하는 말입니다. 의당 먼저 남쪽으로 내려가 연주(兗州)를 빼앗아 안무하고, 북쪽으로 나아가 제(齊) 지역을 순행해야 할 것입니다."

축랑의 의견은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절충안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남쪽의 팽성은 동진의 영토였고, 동진의 본거지와도 가까워서 위험했다. 또한 청주로 직행하기에는 청주 일대의 군벌 벽려혼(壁閭渾)의 세력이 막강했다. 그렇다면 일단 군대를 정비할 근거지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축랑은 바로 그 지역으로 태산과 황하 사이, 옛날 적위(翟魏)가 할거했던 지역을 추천한 것이다.

모용덕은 축랑의 의견에 따라 남하하여 연주 북부를 장악했다. 그리고 군대를 정비하여 8월에 이르러 벽려혼을 정벌하기 시작했다.

벽려혼은 원래 전진 정권의 인물이었다. 비수대전 이후의 혼란기 동안 청주 지역을 점거하고 동진에 투항하였는데, 뒤에 모용농의 공격을 받자 다시 후연에게 투항하였다. 강자에게 머리를 숙이는 전형적인 난세의 군벌이었던 셈인데, 당연히 후연이 몰락한 후부터는 사실상 자립해 있었다.

모용덕의 벽려혼 정벌은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어, 순식간에 산동성 대부분을 평정하는데 성공하였다. 399년 8월, 모용덕은 마침내 광고(廣固)에 수도를 정하였다. 남연 정권의 실질적인 출범이다.


이로써 과거에는 하나의 나라였던 후연 정권이 각기 남북으로 분리되었다. 중국의 사서는 군주의 혈통을 중심으로 국가를 나누는 경향이 커서 이 북방의 연나라는 후연 정권으로 분류되어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북방의 후연 정권은 영토 면에서 보아 과거의 연 정권과는 다른 국가이다. 그러므로 북연(北燕)의 건국은 사실상 모용성이 북방에서 나라를 추스른 시점부터라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래서, 감히 이번 편의 제목을 남연과 북연으로 잡아 보았다. 물론 이후의 연재에서 후연을 굳이 북연이라 칭해서 사람들을 헷갈리게 할 생각은 없다. 역사 속의 북연 정권은 아직 출범하려면 멀었으니까.


덧, 반골 기질로 한 획을 그은 모용린. 모용덕에게 황제가 되라고 부추긴 주제에 다시 반란을 일으키려다 주살당함.

덧2, 모용성의 사주를 받아 난한에 대해서 최초로 반기를 든 모용기. 자기를 부추긴 모용성에게 주살.


이래서 반골들은 안돼. (응?)





덧글

  • 들꽃향기 2009/11/19 00:33 # 답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어...아니 모반 테크입니다...ㄷㄷ

    그러나 남연도 해피앤딩은 결코 아니었으니 엉엉
  • 야스페르츠 2009/11/19 09:46 #

    꼬리에 꼬리를 무는 모반 테크 덕분에 이제 곧 참혹한 피바람이 몰아칠 겁니다. ㄷㄷㄷ
  • Caffeine 2009/11/19 00:44 # 삭제 답글

    매번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확실히 저 시기의 후연은 북연이라 불려도 무방하겠네요. 역사상 북연의 출연도 얼마 남지 않은 듯 하고...
    그렇다면 이제는 고구려의 압박도 등장하겠군요. 정말 기대됩니다ㅎㅎ
  • 야스페르츠 2009/11/19 09:48 #

    탁발규한테 멀티 뺏기고 고구려한테 본진이 털리는 후연... ㄷㄷㄷ
  • Allenait 2009/11/19 00:51 # 답글

    아주 대단한 시대군요
  • 야스페르츠 2009/11/19 09:48 #

    막장 인증입지요.
  • 함부르거 2009/11/19 02:45 # 답글

    모용씨들은 잘난 인물은 많았던 것 같은데 항상 내분으로 말아먹는군요.
    역시 만사는 화합이 최우선인 것 같습니다.
  • 야스페르츠 2009/11/19 09:48 #

    가화만사성이라 하였습니다. ㅎㅎ
  • paro1923 2009/11/19 10:36 # 삭제 답글

    그래도 못난 아비에 잘난 아들이군요, 모용성...
    모용린은 모용성에 비하면 음모가라 하기도 민망한, 말씀하신 대로 반골일 뿐이군요.
  • 야스페르츠 2009/11/19 14:31 #

    모용성도 좀 ㅎㄷㄷ한 놈이라는... ㅡㅡ;;
  • 남연아~~ 2009/11/19 12:16 # 삭제 답글

    ㅎㅎ 대학생 시절 남연과 후연(뒤의 북연)에 대한 강의를 수강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주제는 두 나라에 대한 고구려 대빵(!)님의 영향력에 대한 고찰이었지만요.

    다시 이 내용을 보니 한큐에 정리되네요. 기대됩니다. 앞으로도 건필하시길~~ㅋㅋ

    덧. 자치통감인지 어딘지는 모르지만, 모용덕은 이마에 일골과 월문이 뛰어나왔다면서

    제왕의 징조를 가졌다고 미화했는데, 참 별의별 관상을 가지고 미화하다니.

    덧2. 모용린도 반란을 일으키는데, 그 이유가 자기 이름과도 닮은 기린이 나타났다는

    소문이라니...
  • 야스페르츠 2009/11/19 14:32 #

    학부생이 그런 수업도 듣습니까? ㅎㄷㄷ....
  • 남연아~ 2009/11/20 18:48 # 삭제 답글

    ㅎㅎㅎ 사학과 수업이었거든요. 제 전공은 다른 거지만.
  • g 2010/10/03 19:13 # 삭제 답글

    fgf
  • e 2010/10/03 19:29 # 삭제 답글

    솔직히 난한의 찬탈 사건에 의혹이 많습니다 난한이 찬탈할 맘으로 모용보를 몰아낼 계획이었다면 사위 모용성과의 공조아래에서 모용보를 몰아내고 모용책을 보위하지 않았을 것이고
    모용성을 옹립하였을 것인데
    어찌해서 찬탈할 맘을 품은 자가 사위의 정적인 태자를 보위하고 그랬을까요?

    난한을 숙청하고 집권한 모용성이 난한의 역심을 과대포장하기 위해 이런 말도 안되는
    왜곡을 늘어놓는 건 아닌지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패자에게 가혹하게
    기록되고도 많지요
    난한의 역모사실들도 실제로는 모용성이 그 배후에서 장인을 사주했을 가능성도 큽니다
    난한의 역모는 승자인 모용성 정권에 의해 부풀려졌을수도 있지요
  • 2010/10/03 19:34 # 삭제 답글

    게다가 난한의 찬탈의혹중에 납득이 안가는게 집권후 유독 황제라 칭하지 않고 창려왕이라 칭하는등 신하수준의 지위명칭만
    취한 것이지요 찬탈할 겨우 황제에 오르지 않고 창려왕에 오르다니 당시 왕작은 왕족이나
    공을 큰 일반 신하에게 내리는 작위이므로 난한이 그 호칭을 취했다 하여 이를 찬탈로 기록하는건
    견강부회하는 주장이지요 난한은 공식적으로 황제에 오르지 않고 자신의 사위 모용성을
    옹립하고서 창려왕에 봉해졌을 것인데 모용성이 난한 숙청의 정당성을 위해 과대적으로
    부풀렸을 가능성이 많지요
  • g 2010/10/03 20:04 # 삭제 답글

    모용보살해의 실제 주역은 난한이 아닌 모용성이었을 거고 모용성은 부왕을 몰락시킨 용성반란과 부왕암살을 난한에게 떠넘겼을 걸로 역사를 왜곡했을 것이지요 모용성이 모용보에게 난한을 의심했다는 기록은 난한 몰락후 모용성의 난한 연관성을 부정하기 위해 왜곡 조작되었을 것이며 모용성은 왕권 강화를 위해 수많은 공신들과 종친들을 학살하죠 난한은 모용성의 왕권 강화의 첫번째 희생양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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