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1/15 16:14

오호망양(五胡望洋) 21 - 사분오열 역사

397년 5월, 이제 후연의 구도(舊都)가 되어버린 중산으로 한 무리의 군대가 입성했다. 용성으로 도망쳐 가던 모용보가 마지막 양심(?)으로 파견한 원군이었다. 고녹관기(庫傉官驥)가 이끄는 원군은 고립무원으로 농성전을 벌이던 중산으로 어렵사리 입성하였다. 그러나 성 안에서 벌어진 일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연의 고녹관기가 중산으로 들어가 개봉공 모용상과 더불어 서로 공격하였다.
燕庫傉官驥入中山,與開封公詳相攻。


당시 성 안에서 지도자로 추대되어 있던 것은 모용상(慕容詳). 자세한 것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군대의 통솔권을 놓고 모용상과 고녹관기가 서로 대립하였던 것으로 추측해본다. 어쨌든 싸움의 결과 고녹관기를 비롯한 고녹관씨 일족은 모용상의 손에 모조리 참살당했고, 다시금 모용상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여 결사 항전을 결의하였다.

5월 갑진일(7일), 탁발규는 중산의 포위를 풀고 군량을 구하기 위해 하북 각지를 전전하였다. 전쟁을 개시한지 10개월 가까이 지났으니 위의 군대도 상당히 피로해졌을 것이다. 그런데, 중산의 포위가 풀리자 모용상은 자신의 능력으로 포위가 풀렸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기고만장한 모용상은 중산에서 황제를 자칭하는 뜻밖의 선택을 한다. 연 정권이 드디어 분열을 시작한 것이다.

충분한 능력도, 배경도 없이 다짜고짜 황제나 사칭하는 사람에게 무슨 능력이 있을까. 모용상은 술독에 빠져 폭정을 일삼기 시작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이유도 없이 처형되고, 성 안에는 기근이 들었다. 포위가 풀렸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성 밖으로 나가 야생벼를 채취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성의 주민들이 굶어 죽는 와중에도 모용상은 군대를 성 밖으로 보내 조세를 거두게 하는 등, 폭정이 계속 이어졌다.

한편, 모반을 일으켰다가 도망쳤던 모용린은 상산 일대의 정령 부락으로 숨어들어가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 해 7월 경, 모용상이 보낸 군대가 상산 근처에서 조세를 거두자 모용린은 은밀하게 군대 안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군대와 함께 귀환한 뒤, 모용상을 붙잡아 죽이고 권력을 탈취한다. 음모가 다운 거사(?)였다.

모용린은 중산을 장악하고 황제를 자칭한다. 오랜 숙원을 푼 셈이다. 중산의 주민들은 그제서야 겨우 기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랜 기근, 그리고 내부 분란까지 겹치면서 중산의 군사는 급격하게 감소해 있었다. 여기에 탁발규의 공격이 거세지면서 상황은 악화일로를 달렸다. 탁발규의 군대는 두 번이나 중산의 외성을 돌파하여 모용린을 궁지에 몰아넣었고,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중산은 다시 기근에 시달리게 되었다.

9월이 되자 기근을 견디다 못한 모용린은 2만 명의 무리를 이끌고 성을 탈출하였다. 탁발규는 즉각 모용린을 공격하기 시작하여 10월 갑술일(10일)에 모용린군을 완전히 격파해 버린다. 마침내, 중산이 탁발규의 손에 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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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업의 상황을 살펴보자. 업의 방어를 책임진 것은 모용덕(慕容德)이었다. 모용덕은 모용수의 동생으로, 당시 모용씨 가문에서 최고의 큰 어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업 역시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처절한 농성전을 펼쳤던 것은 다른 지역과 같았다. 그러나 아무래도 주력군은 중산에 몰려 있었기에 업의 포위는 허술한 편이었다.

모용상이 중산에서 황제를 칭할 무렵, 모용덕 역시 같은 유혹(?)을 받았다. 딱히 잘못된 유혹은 아니었다. 모용보가 무슨 변을 당했을지 모르는 상황이니, 가문의 큰어른이었던 모용덕이 국가대사를 책임진다고 해도 크게 무리는 없다. 그러나 다행히 용성에서 모용보가 건재하다는 사실이 전해지면서 모용덕은 황제 즉위를 포기하고 모용보에게 다시 남쪽으로 돌아와 고토(?)를 회복하라는 표문을 올린다.


그런데, 바로 이 무렵에 기묘한 일이 일어난다.

첫째, 모용상이 황제를 자칭한 것은 일단 탁발규의 군대가 약화되면서 생긴 힘의 공백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탁발규의 군대가 약해졌다는 소식이 용성의 모용보에게 전해진 때는 중산이 함락된 다음의 일이다. 즉, 다시 탁발규의 군대가 강성해지기 시작하던 시기였던 것이다.

둘째, 위의 소식과 함께 모용덕의 표문도 도착했다. 탁발규의 군대는 약화되었고, 중산도 아직 건재하며, 업도 모용덕이 굳건하게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 전달된 셈이니 모용보가 상황을 잘못 판단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가 더 꼬여버렸다.

일전에 탁발규에게 격파당한 모용린은 또 산 속으로 숨어들었다가 11월 을해일(12일)에 업으로 도망쳐 들어오는데 성공한다. 적어도 모용린이 가진 정보는 그 당시로서는 가장 확실한 것이다. 모용덕으로서는 중산이 함락되었으니 업에 대한 탁발규의 공세가 강화될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당연하다. 결국, 모용덕은 398년 정월에 업을 버리고 남쪽으로 황하를 건너 활대(滑臺)로 옮겨가 버린다.

즉, 모용보에게 전해진 정보 가운데 그 시점에서 진실인 정보는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을 알 턱이 없던 모용보는 고토를 회복하기 위한 대대적인 군대를 발동하고 만다. 최악의 상황이 찾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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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7년 12월에 대대적으로 군대를 모은 모용보는 출정에 앞서 간자를 파견해 남쪽의 상황을 알아보게 한다. 이듬해 봄에 돌아온 간자는 중산이 함락된 사실을 알려왔고, 앞의 정보들이 모두 무용지물이 된 사실을 알게 된 모용보는 기왕에 모은 군대를 그냥 해산해버리기에는 아까웠는지 북쪽으로 진로를 돌려 북방의 유목 부족 고막해(庫莫奚)를 습격하게 한다. 그런데, 북진하던 도중 다시 모용덕이 파견한 사신이 찾아와 탁발규의 본군이 북쪽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고한다.

모용덕이 업을 버리고 도망침으로써 황하 이북 대부분의 지역에서 탁발부에 반항하는 세력은 거의 사라졌다. 정복이 마무리된 것이다. 탁발규는 중산에 행대(行臺)를 설치하여 화북을 통치하도록 하고 자신은 본군을 이끌고 평성으로 귀환하였다. 이 사실이 마침 모용보의 귀에 들어간 것이다.

모용보는 북진하던 군대를 돌렸다. 모용농, 모용성(慕容盛) 등은 용성으로 귀환할 것을 주청하고, 모여등이나 다른 장수들은 또 중원으로 진격할 것을 권하니 모용보는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던 것 같다. 북방에서 기수를 돌린 군대는 모용보가 갈팡질팡하는 대로 용성으로 향하다가 다시 중원으로 진로를 바꾸는 등, 그야말로 똥개훈련을 당하는 꼴이었다.

※ 똥개훈련 하면 역시 "이 산이 아닌게벼." 시리즈...


2월에 이르러서야 겨우 마음을 굳힌 모용보는 전군을 이끌고 다시 중원으로 진격할 것을 명한다. 약 한 달 동안 똥개훈련을 당한 군대가 그 명령을 그대로 따라 줄 리가 없다. 결국 예정된 파국이 찾아왔다.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그것도 금군에서.

금군의 장상(長上)이었던 단속골, 송적미 등이 일으킨 반란으로 여러 종실왕들이 살해당하였고 모용보는 10여 기의 기병에게 호위를 받으며 간신히 탈출, 모용농의 진영으로 피신한다. 모용농의 진영에서도 모용보를 받아들이지 말자는 의견이 나올 정도로 후연 군의 기강은 엉망진창이었다. 이런 군대였으니, 모용농이 다른 제장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킨 본영을 공격하자 오히려 공격하는 군대가 흩어져 도망쳐버리는 것도 당연한 이치. 결국 모용농과 모용보는 용성으로 도망쳐들어가는 수 밖에 없었다.

용성은 모용성이 지키고 있었지만, 그 군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군대가 원정에 동원되었고, 그 군대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니 용성은 풍전등화나 마찬가지였다. 반란군은 난한(蘭汗)을 지도자로 하여 용성을 포위하였다. 모용성이 전력을 다해 농성을 벌여 포위군은 많은 피해를 입고 일단 물러섰는데, 다음으로 이어진 공격은 정녕 충격적인 것이었다.






모용농이 반란군과 함께 나타난 것이다!


그 동안 모용보를 충심으로 보좌하면서 연의 국정을 총괄하다시피 했던 충신 모용농이다. 그러나 상황이 절망적으로 변하자 모용농도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다. 일단 살아남고 보자는 심산이었던 것 같다. 난한이 모용농을 유혹하자 모용농은 밤을 틈타 성을 빠져나간 것이다. 연에서 가장 명망 높던 모용농이 반란군과 함께 나타나자 농성하는 한줌의 군대는 완전히 의욕을 잃고 말았다.

용성은 맥없이 함락되고, 모용보와 모용성은 소수의 부하들과 함께 성을 탈출하여 남쪽으로 향했다. 한때 화북의 한쪽을 장악하고 있던 후연 제국이 산산조각으로 찢겨진 것이다.
 





덧글

  • 카구츠치 2009/11/15 16:41 # 답글

    정보통신기술이 요즘 같지 않던 고대에 늘 있을 거라 생각했던 희극이 "그러나 그것이 실제로 벌어졌"네요. ㅎㅎ
  • 야스페르츠 2009/11/16 11:11 #

    웃지 못할 촌극이지요.
  • 들꽃향기 2009/11/15 21:54 # 답글

    상한 떡밥을 물고 가는 모용보와, 반면에 상한떡밥을 던져놓고 업에서 후퇴한 모용덕의 엇박자는 역시나 후세의 제 3자 입장으로는 블랙 코미디가 되는 듯 하군요 ㄷㄷ
  • 야스페르츠 2009/11/16 11:12 #

    그래서 언제나 떡밥은 싱싱한 것으로 물어야 하는 겁니다. 떡밥춘추 같은. (도주)
  • 功名誰復論 2009/11/15 22:06 # 답글

    지배자들 내분 일어나면서 더욱 개판으로 치닫는 게 나라들의 패턴이긴 한데, 이 시절 나라들의 막판은 정말 어처구니가 화려할 지경입니다.
  • 야스페르츠 2009/11/16 11:31 #

    너무 화려해서 쓰는 사람은 죽어납니다. ㅡㅡ;;
  • 뚱필 2009/11/30 21:40 # 삭제 답글

    대륙의 한에서는 모용농 훈남으로 봤었는데 ㅋ
  • 야스페르츠 2009/11/30 22:59 #

    훈남 맞는데 끝이 안좋았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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