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1/12 00:56

오호망양(五胡望洋) 20 - 인종 전시장 역사

387년 말, 장대예와 왕목의 반란을 진압함으로써 여광의 양주(凉州) 평정은 간신히 마무리되었다. 여광은 양주를 평정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389년 2월에 삼하왕(三河王)을 자칭하였고 396년에는 천왕(天王)에 즉위하고 국호를 대량(大凉)이라 정하였다. 그러나, 여광의 희망대로 양주가 평정되었던 것은 아니다.

양주 일대는 원래부터 이민족들이 많이 살던 변방 중의 변방 지역이었다. 전량의 장씨 정권은 이러한 양주 지방을 나름대로 효과적으로 통치했지만, 여광 정권은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장대예가 장씨 가문의 네임 벨류로 반란을 일으켜 2년 가까이 항쟁했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장대예의 반란에는 선비족 독발부, 흉노족, 강족, 한족 등등 수많은 이민족들이 개입했고, 엄밀하게 말해 여광이 진압한 것은 장대예와 그의 후견인 왕목의 세력 뿐이었다. 미약한 세력이었지만, 선비, 흉노, 강, 저, 한족 등 여러 종족들은 모두 제각기 독립적인 세력을 갖추고 있었다. 대체로 여광 정권의 힘을 인정하고 머리를 숙이고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여광이 이들 부족들을 마음대로 흔들 수 있는 권력을 갖춘 것도 아니다.

이들 이민족 가운데 가장 유력한 종족을 꼽으라면 역시 선비족 독발부였다. 장대예의 반란을 직접 지원했던 독발부의 수장은 독발사복건(禿髮思復鞬)이었다.  독발부의 주요 세력권은 지금의 청해성 북동부 지역이었다. 독발사복건이 죽자 아들 독발오고(禿髮烏孤)가 뒤를 이었는데, 여광이 내린 벼슬을 받고 양 정권에 명목상의 복종을 하였다. 395년에는 염천보(廉川堡)를 쌓고 근거지로 삼았다.

어쨌든 양주를 명목상 평정하였던 여광은 세력의 확대를 꾀했는데 공격 목표는 당연히 바로 국경을 맞대고 있던 걸복부 정권이었다. 그러나 걸복부의 수장이었던 걸복건귀는 여광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면서 버티고 있었다. 때로는 머리를 숙이고 복속하기도 했지만, 진왕을 자칭한 이후부터는 여광과 정면으로 맞서고 있었다.

397년 정월, 여광은 대대적으로 걸복부를 공격하기 위해 직접 출정하였다. 아들 여찬(呂纂)을 보내 금성을 함락시키고 동생 여연(呂延)을 보내 부한 일대를 장악하였다. 이에 걸복건귀는 여연의 군대를 속여서 격파하였는데, 금성이나 부한을 회복하지는 못한다. 여광은 걸복부 정벌을 이 정도로 마무리짓고 고장으로 귀환하였는데, 뜻밖의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독발오고가 서평왕(西平王)을 자칭하면서 걸복부로부터 빼앗은 금성을 차지해 버린 것이다. 독발오고는 여광이 천왕에 즉위한 뒤부터 독자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었는데, 여광이 걸복부와 싸우느라 힘의 공백이 생긴 틈을 타서 거병한 것이다. 독발부 정권의 탄생이다. 이 독발부 정권은 흔히 남량(南凉)이라고 불리는데, 사실 양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게 된 것은 이로부터 수 년 뒤의 일이다.

어쨌든 독발오고가 자립하면서 균열이 가기 시작한 양 정권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붕괴되기 시작한다. 다음 순서는 흉노족이었다.

양주 장액(張掖) 일대의 흉노족은 노수호(盧水胡)라고 불렸는데, 그 수장은 저거라구(沮渠羅仇)였다. 저거라구는 여광에게 복속하여 걸복부 정벌에 동원되었는데 여연이 패배하여 죽게 되자 참소를 받아 여광에게 참수되었다. 저거라구의 시신을 운구하여 장액으로 돌아온 저거라구의 조카 저거몽손(沮渠夢遜)은 장례식에 모인 부족들을 선동하여 4월에 반란을 일으킨다. 저거몽손의 반란은 여찬의 진압군에 의해 곧 격파되었는데, 저거몽손의 사촌형 저거남성(沮渠男成)이 뒤이어 주천(酒泉) 일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저거남성의 반란군은 건강(建康)을 포위하였는데, 건강의 태수 단업(段業)에게 사신을 보내 유세를 한다. 여광에 맞서서 함께 반란을 일으키자는 제의였다. 단업은 천상 서생이었던 남자였다. 반란을 일으킬 재목은 아니었지만, 저거남성의 포위가 20일을 넘어가도 구원군이 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 저거남성에 호응하여 성문을 연다. 저거남성은 단업을 건강공(建康公)으로 추대하여 지도자로 삼았고, 저거몽손도 잔존 세력을 이끌고 단업에게 합류한다. 이로써, 또 하나의 정권이 탄생하였다. 이 한족, 흉노족의 연합 정권(?)은 흔히 북량이라 불린다.

다음으로 이어진 반란은 아주 치명적인 타격이 되었다. 왜냐하면, 양 정권의 수도 고장(姑臧)에서 일어난 반란이기 때문이다.

당시 고장에는 곽논(郭黁)이라는 술사가 있었다. 곽논은 천문을 잘 보고 술수(術數)에 뛰어나서 고장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는데, 이 무렵에 왕상(王詳)이라는 사람을 선동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고장에는 동원과 서원이라는 2개의 성곽이 있었는데, 반란군은 이 가운데 동원을 점거하는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왕상은 죽었지만 고장의 시민들이 곽논을 존경했기 때문에 이 반란에 호응하는 사람이 많아서 세력이 급격하게 커졌다.

당시 여광은 여찬을 단업 토벌을 위해 북쪽으로 파견해 놓은 상태였는데, 수도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니 단업 토벌이 문제가 아니었다. 여광에게 소환된 여찬은 즉시 귀환하였는데, 곽논의 명성은 여찬의 부장들에게까지 미쳐서 일부 군대가 곽논에 호응할 정도였다. 여러가지로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여광이 전쟁을 전적으로 믿고 맡길 정도로 여찬은 뛰어난 인재였다. 여찬은 고장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곽논을 격파하고 고장 내부로 진입하여 곽논과 대치를 시작한다.

수도에서까지 반란이 일어날 지경이니 지방이 동요하는 것은 당연하다. 서평(西平)에서는 곽논에 호응하는 반란이 일어나 저족 양궤(楊軌)가 맹주로 추대되었고, 곽논을 돕기 위해 독발오고도 원군을 파견하였다. 8월에 시작된 한 도시 두 성채 사이의 대치는 수 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398년 2월에는 양궤가 고장 북부를 장악하고 곽논을 지원하는 한편 독발오고의 원군도 추가로 가세하였다.

한편, 여찬의 압박에서 벗어난 단업은 곧 저거몽손을 파견하여 주천 서쪽의 서역 방면을 경략하였고, 뒤이어 장액의 여홍(呂弘)을 공격하였다. 여홍은 장액을 버리고 고장으로 향했고 여광은 여찬을 파견해서 여홍을 맞이하게 하였다. 여홍의 군세는 약 1만. 여찬과 여홍의 군세가 합쳐지면 여광군의 세력이 더욱 강해지는 것이므로 양궤·곽논 등에게 좋을 것이 없었다. 이에 양궤와 독발이녹고(禿髮利鹿孤)가 여찬의 진로를 막고 전투를 벌였는데, 여찬은 이들을 격파해 버렸다. 그 동안은 성채를 중심으로 대치할 수 있었지만, 결전을 치르려 하다가 격파를 당해 버렸으니 더 이상 성채에서 버틸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양궤는 패잔병을 이끌고 염천(廉川)의 왕걸기(王乞基)에게 도주하였고, 곽논도 도망쳐서 서진의 걸복건귀에게 항복한다. 이로써 고장의 여광은 간신히 한숨을 돌리게 되었다. 물론, 그의 나라는 이미 산산조각이 난 상태였지만.



※ 398년 초 양주의 상황





덧글

  • asianote 2009/11/12 01:09 # 답글

    그나저나 이 시대에는 어떻게 행정조직을 운영할 지 궁금하군요. 몇 년 지나면 나라가 망하는 시대에. 거기다가 백성들의 목숨은 어찌 보존되며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는지 또한 궁금할 따름입니다.
  • 야스페르츠 2009/11/12 01:13 #

    저도 그게 궁금합니다. ^^;;

    사실 이 시기는 중앙 행정은 큰 의미가 없던, 지방 자치 시대(?)였죠. 어차피 지방민들은 농사나 열심히 지으면 되고, 전쟁터에 끌려가서 죽지 않는 이상은 중앙 행정은 일반 백성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었을 겁니다.
  • 옛날이야기 2009/11/12 23:08 # 삭제

    지방실력자들이 알아서 '塢' 같은 걸 지어서 방위와 생산을 함께하는 일이 흔했다더군요. 지방실력자가 작은 성을 하나 쌓으면 인근의 주민들이 그 안에 모여살면서 군사, 경제 공동체를 이루고 살곤 했단 말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오벽 따위에 모인 주민이 지방실력자의 예속민인 부곡이 되었고, 중앙 정부에서는 제어가 어려운 오주들에게 아예 행정 장관직을 맡기고 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 asianote 2009/11/12 23:11 #

    작은 곳은 어지간하면 건들지 않았군요.
  • 을파소 2009/11/12 01:10 # 답글

    그러고보니까 이문열이 요서백제를 소재로 쓴 소설 대륙의 한에서 주인공 이름이 여광이었죠. 계왕의 숨겨진 아들로 계왕 측근 세력의 추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 하지만 근초고왕에게 용서받은 뒤 요서로 건너가 기반을 마련한다는 내용이었죠. 시기가 얼추 맞아 떨어지는데, 이문열이 이 여광을 보고 썼을까요?(참고로 백제 왕족이니 부여씨지만, 중국식으로 표기해서 '부여'가 아니라 '여'래요.)
  • 야스페르츠 2009/11/12 01:14 #

    한자가 다르다능. ㅋㅋ 후연 초기에는 전연 시기에 잡혀온 부여의 왕족이 활약하기도 합니다. 물론 여씨(餘氏)죠. ㅎㅎ
  • 소하 2009/11/12 01:52 #

    여광이라고 되어 있어서 저도 혼동했습니다.
  • 카구츠치 2009/11/12 03:14 # 답글

    완전 변방지역에서 량량량 그러고 투닥대고 있는 모양새군요. ㅎㅎ
  • 야스페르츠 2009/11/12 10:02 #

    제목을 량.량.량이라고 달려다가 말았습니다. 다음 관련 편에는 좋은 량, 나쁜 량, 이상한 량이라고 제목을 지어 볼까요? ㅎㅎ
  • windxellos 2009/11/12 03:50 # 답글

    그런데 저 지역의 대부분은 하서'회랑' 이라고 불릴 만큼 실질적으로 쓸 수 있는 땅이 좁은 지대라 면(영토)이라기보다는 점(도시)과 선으로 보아야 하므로 차지한 '면'이 넓어도 실질적으로는 점재한 도시거점 중심 얼마 정도만 실질적 영토라고 알고 있었는데, 그런 좁은 데서 저렇게 '나라'들이 고만고만하게 여럿씩 난립했던 것도 생각해 보면 참 기이한 일입니다. 나름의 요인이 있었던 걸까요. 서역 교역의 이익이 그만큼 대단했다거나...(므음)
  • 야스페르츠 2009/11/12 10:03 #

    사회 경제적인 문제는 제가 잘 몰라서... 패스입니다. ^^
  • 들꽃향기 2009/11/12 04:07 # 답글

    그러고보니 한때 하서를 차지했던 장씨정권은 비교적 풍요로운 편에 속했는데, 저 시기, 지역에 저렇게 국가가 난립할 수 있었던 것이 흥미롭군요. 오늘도 잘 보고 갑니다. ^^
  • 야스페르츠 2009/11/12 10:23 #

    워낙에 소수 민족들이 많았던 지역이라서 분열이 시작되면 걷잡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 paro1923 2009/11/12 09:15 # 삭제 답글

    중원 일대가 한창 쓰레기 매립장(...)이 되어가는 과정이라 눈돌아가더군요.
    서양 중세 초기 암흑시대도 아니고, 전문 학자들도 어지러워서 구역질낼 것 같은 아수라장...
  • 야스페르츠 2009/11/12 10:24 #

    자치통감을 읽어보면, 이 무렵에는 워낙에 혼란스러워서 1권이 1년으로 구성될 정도로 방대합니다. 진짜 어지럽죠.
  • Allenait 2009/11/12 11:14 # 답글

    ..정말 혼돈의 시대였군요
  • 야스페르츠 2009/11/12 15:18 #

    전반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대혼란기입지요. 심지어는 동진조차도 개판을 치고 있을 때이니까... ㅡㅡ;;
  • 함부르거 2009/11/12 16:30 # 답글

    난세라는 것은 공부하는 사람들의 머리를 어지럽게 하기 때문에 난세인 것입니다...
  • 야스페르츠 2009/11/12 18:13 #

    그렇다면......... 세상은 지금까지 쭉 난세였군요. (응?)
  • 하늘나늬 2009/11/13 06:55 # 삭제 답글

    딱히 노른자위의 땅도 아니고, 폭정에 시달린 것도 아니고, 그냥 군대가 있으면 독립이고 건국이군요.
  • 야스페르츠 2009/11/13 12:46 #

    난세 중의 난세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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