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1/03 00:02

오호망양(五胡望洋) 18 - 虎父犬子 역사

참합피의 패배는 한창 사방으로 힘을 뻗어 나가고 있던 연나라에게 뼈아픈 타격이었다. 그러나 치명적인 타격은 아니다. 홀로 말을 달려 패주한 모용보가 귀환하자마자 복수전을 요구할 수 있을 정도로 연의 국력은 충실했다. 모용수 역시 북방의 위협을 좌시할 군주는 아니었다. 모용보가 주장한 즉각적인 반격은 기각했지만, 오히려 그보다 더 치밀하게 반격을 준비하기 시작하는 모용수였다.

모용보의 아들 모용회를 연의 배후지라고 할 수 있는 유주 및 평주로 보내고, 유주·평주의 정예병을 이끌고 있던 모용륭, 모용성 등을 불러들이는 한편, 396년이 되자 기주 지역에서도 병사를 모으기 시작한다. 그러나 참합피의 패전은 그 여파가 남아 있었던 것 같다. 기주에서 병사를 징발하는 일을 담당했던 평규(平規)가 열심히 모은 병력을 이끌고 모반을 일으켰던 것이다. 평규의 반란은 모용수가 직접 출정하여 분쇄하긴 했지만, 평규는 황하를 건너 산동 지역에서 힘을 모으며 재기를 기약했다.

모용수는 이렇게 후방이 불안한 와중에도 목표였던 탁발규에 대한 공격을 무리하게 개시한다. 역시, 배후의 위협보다는 탁발규에 의한 북방의 위협이 더 두려웠던 것이리라. 또한, 모용수는 배후의 위협이 가시화되기 전에 북방을 평정하고 돌아올 심산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계획은 충분히 현실성이 있었다. 모용수의 능력이 범상치 않았던 것은 수십 년 전부터 인구에 회자되던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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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수는 탁발부를 기습할 심산이었던 것 같다. 용성(龍城)의 정예병을 불러 올 정도로 요란하게 원정을 준비한 것이니 기습이라 말하기 애매하긴 하지만, 정작 모용수의 진로는 기습의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출정 시점이 3월, 음력 3월이니 한창 농번기였을 시점인데다가 배후에 평규의 반란을 놓아두고 출정할리가 없으리라 판단해도 큰 무리는 없다. 그러니 출정 자체도 허를 찌른 것이었고, 당연히 비밀리에 출발하여 진로도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잡았다.

<자치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모용수는 중산을 떠나 북쪽으로 올라간 후 청령(靑嶺)을 넘어 천문(川文)을 지나면서 산을 뚫고 길을 내서 운중(雲中)으로 향했다고 한다. 운중은 내몽고에 위치한 곳으로 예로부터 북방 민족의 중요 거점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운중으로 향했다는 기록을 따르자니 운중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평성(平城 : 산서성 대동시)이 걸린다. 목표는 운중이었다고 하는데 이후 탁발규의 행보나 모용수의 진로 등을 살펴보자면 목표는 운중이 아니라 평성인 것 같기도 하다. 운중은 당나라 시기에 평성 지역을 일컫는 지명이었던 만큼 두 지명이 같은 지역을 가리키는데 혼동된 것이거나, 아니면 운중으로 향하는 도중에 평성을 맞닥뜨렸다고 보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아무튼, 모용수의 기습은 성공적이어서 평성을 수비하고 있던 탁발건이 전사하였다. 탁발건의 전사 소식과 모용수군의 등장이 알려지면서 북방의 여러 부락들이 이반하는 등 북방은 상당히 혼란해졌다고 한다. 탁발규도 음산 북쪽으로 다시 피했다고 할 만큼 모용수의 위력은 대단했다.

그러나, 운명은 모용수의 편이 아니었다.

모용수가 평성을 점령하고 군사를 풀어 주변을 평정하고 있을 무렵, 참합피로 향하여 앞서 학살당한 병사들의 유골을 마주치게 되었다. "해골이 산처럼 쌓여 있다. 積骸如山"라고 할 정도였으니, 전날의 패배를 떠올리며 얼마나 비통한 심정이었을까. 유골을 모아 제사를 지내는데 병사들이 통곡하는 소리가 산과 계곡을 놀라게 할 정도였다고 한다. 모용수 역시 비통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피를 토하면서 쓰러지고 말았다.

모용수, 당시 나이 71세. 친정을 감행하기에는 너무 많은 나이였다. 이미 전 해부터 병으로 몸이 약해진 터에, 게다가 기습을 위해 힘겨운 산길을 달려 왔으니 탈이 나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결국 모용수는 수레에 누워 평성에 주둔하고, 각지에 흩어져 있던 연군들도 퇴각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퇴각하던 도중인 396년 여름, 4월 계미일(10일)에 의리의 영웅 모용수가 세상을 떠난다. 허망한 최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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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수의 사후 뒤를 이은 것은 태자 모용보였다. 모용보는 태자로 책봉되었을 때부터 후계자의 자질을 의심받았던 불운한 사람이었다. 모용보의 능력이 부족했다기보다는, 모용보의 경쟁자들이 너무나도 대단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모용보를 대신하여 태자감으로 회자되던 이는 모용보의 배다른 동생들인 모용농과 모용륭이었다. 모용농은 비수대전 이후 모용수가 거병했을 때부터 맹활약을 펼쳐 후연 건국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준재였고, 모용륭 역시 각지의 전선에서 혁혁한 전과를 세웠던 인재였다. 대권주자(?) 중에는 모용린도 있었는데, 모용린의 경우 능력은 인정받았으나 음흉한 면이 있다고 평가받았다.

이러한 세간의 평가가 당사자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리가 없다. 모용보와 모용린 두 사람 모두 이러한 평가를 듣고 나서 삐딱선을 탄 감이 없지않아 있다. 특히 모용린의 경우 타고난 성정도 음모가의 기질이 있었던 듯, 참합피 패전의 원인 중 하나를 제공했던 점도 의심스럽고 여러모로 반골 기질이 다분했다. 모용보 역시 세간의 평가에 앙심을 품고, 황제에 즉위한 뒤에 앙갚음을 하기도 했다.

태자 모용보에 대한 평가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승평의 시대를 만나면 족히 수성의 주군이 될 것 太子遭承平之世,足為守成之主"이라는 부분이다. 이는 모용보가 무인 보다는 문인의 기질이 강했다는 반증이 될 법도 한데, 모용보가 즉위하자마자 착수했던 일이 바로 이러한 "꼰대"가 저지를 만한 것이었다.

연의 주군 모용보가 사족(士族)의 옛 호적을 정하는데, 깨끗한지 혼탁한지를 구분하고, 호구를 교열하였으며, 군영의 음덕으로 받은 호구를 파하여 모두 군현에 소속시켰다.
燕主寶定士族舊籍,分辨清濁,校閱戶口,罷軍營封廕之戶,悉屬郡縣。

<진서> 재기에는 모용수가 유언으로 남긴 것을 따랐다고 나타나지만, 아무리 유언이었다고 해도 새로 즉위한 왕이 즉위하자마자 추진할 만한 일은 아니다. 게다가 북방의 위협, 황하 너머에 반란군마저 남아 있는 상황에서 이런 정책을 추진한다는 것은 참 이해하기 어렵다. 민심이 어지러워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고, 더불어 사족, 즉 기득권층의 반발까지 나타나면서 연의 정세는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상황에 이른다.

기득권층의 반발을 짐작케하는 기록은 곳곳에서 나타난다. 모용보는 종실왕들이 소유한 부곡(部曲)에까지 손을 댔던 모양인데, 당연히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종실들이 이러한 개혁(?)을 순순히 따를리 만무하다. 심지어 모용보의 아들 모용회(慕容會)도 반발을 할 정도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연나라를 떠받치는 기둥 가운데 하나였던 모용농 역시 이러한 정책의 희생양이 되었다. 자신 소유의 부곡 수만 명을 이끌고 모용보의 명에 따라 부임지인 병주 진양으로 향했는데, 마침 흉년이 드는 바람에 오히려 민심을 잃고 만다.


게다가, 모용보는 꼰대답지 않게 후계자 문제로 엄청난 분쟁의 씨앗을 만들고 만다. 모용보의 아들 모용회는 24세의 어린 나이였지만 능력을 인정받아 유주·평주 일대를 수비하는 중책을 맡기도 하는 청년이었다. 당연히 모용수는 모용회를 총애하면서 모용보에게 태자로 삼을 것을 종용했는데, 모용보는 11세의 꼬꼬마 모용책(慕容策)을 총애하였고, 마침 다른 아들들의 부추김도 있고 해서 황제에 즉위한 후 모용책을 태자로 삼는다. 당연히 대권에서 밀려난 모용회는 공공연하게 모용보에게 반감을 표시할 정도로 원한을 품는다.

한마디로 나라 꼴이 엉망진창이었던 게다.




그리고, 이렇게 잘 익은 떡을 가만히 놓아둘 탁발규가 아니었다.


모용수가 죽은지 채 반 년도 지나지 않아 그가 수십 년 동안 온갖 고생을 하면서 이룩해 놓은 제국에 먹구름이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덧글

  • asianote 2009/11/03 00:04 # 답글

    이 시대는 쉽게 국가를 세우고 쉽게 망하는 게 특징이더군요.
  • 야스페르츠 2009/11/03 09:29 #

    혼란기 크리... 이래뵈도 아직 후연의 명줄은 10년 넘게 남았다능.
  • Allenait 2009/11/03 00:12 # 답글

    진짜 이 시대는 국가가 참 쉽게 생겨나고 참 쉽게 망하더군요
  • 야스페르츠 2009/11/03 09:29 #

    혼란기 크리... (2)
  • 카구츠치 2009/11/03 00:20 # 답글

    수나라까지도 쉽게 세우고 쉽게 망한 축에 드니...
    당나라는 그 이전과 무엇이 달랐던 걸까요. 율령체계의 완비나 그런 측면인가?
  • 야스페르츠 2009/11/03 09:30 #

    하지만 북위처럼 오래 버틴 나라도 있지요. 남조 국가들도 나름 버틴 편이구요. 그거슨 다 운명... (응?)
  • 自重自愛 2009/11/03 08:44 # 답글

    모용수의 진격로가 가까운 길 놔두고 멀리 돌아간다는 느낌이..... -_-a;;;;
  • 야스페르츠 2009/11/03 09:31 #

    원래 기습은 아무도 예상 못하는 곳으로 가는 거라능. 돌아서 가도 몰래만 가면 장땡입니다.
  • 들꽃향기 2009/11/03 10:45 # 답글

    알고보니 감수성이 예민하신 모용수님이었군요.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각혈이라니 ㄷㄷ 부견과의 일도 그렇고 말이죠.....ㄷㄷ

    역시 쉬크하신 선비 남자. 하지만 내 부하들에겐 따뜻하겠지....였으려나요....ㄷㄷ


    사실 모용보가 하는 일은 후대의 북위도 하는 드립이긴 하지만, 역시나 다수의 경쟁자와 반란자가 암약하는 현실에서 너무나도 이른 드립이 아닐까 싶습니다. ㄷㄷ
  • 야스페르츠 2009/11/03 11:20 #

    모용수는 그저 나이가 많았을 뿐... ㄷㄷㄷ

    모용보는 현실을 생각하지 않고 너무 이른 개혁(?)을 실시한 죄라고 봐야 겠지요.
  • 我幸行 2009/11/03 10:47 # 답글

    후한시대에 운중과 평성은 다른 지역으로 기록됩니다. 둘다 병주(幷州)의 속현이나 운중(雲中)은 운중군(雲中郡)의 속현이고, 평성(平城)은 안문군(雁門郡)의 속현입니다.
    다른지역이 분명합니다.
  • 야스페르츠 2009/11/03 11:24 #

    당시에 운중과 평성이 별개의 지역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저 기록들은 모두 당나라 이후에 기록된 <진서>와 <자치통감>의 내용인지라 약간 의심스럽습니다. 운중이 목표였다고 하는 모용수가 평성에서 멈춘 것도 그렇고, 탁발규의 움직임도 약간 모호해서... ㅡㅡ;;
  • paro1923 2009/11/03 19:46 # 삭제 답글

    호부견자... 어쩐지 모용보 하는 짓을 보면
    그저 "난 아버지완 달라. 삐짐!"하는 것 같습니다. 철딱서니없달까...
  • 야스페르츠 2009/11/04 11:58 #

    나이 마흔이 넘어서 철딱서니 없으면... 차라리 호부견자가 나을지도 모릅니다. ㅎ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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