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0/31 01:11

오호망양(五胡望洋) 17 - 참합피의 비극 역사

황하의 누런 물이 도도하게 흐른다. 때는 초가을, 적군의 곡식을 거둬들인 것도 넉넉하다. 전황은 그 어느때보다 좋았다. 3만에 달하는 민호를 잡아들였을 정도였고, 적은 도망치기에 바쁘다.

"강을 건널 배를 만들어라."

모용보(慕容寶)는 간단하게 명령을 내리고 다시 황하의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드문드문 적의 척후가 눈에 띈다. 어차피 강을 격하고 있으니 저들도 굳이 숨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2년 전에는 적교의 위를 멸망시키고, 작년에는 모용영의 서연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단숨에 태산을 넘어 바다까지 무인지경으로 달렸다. 그의 나라, 연은 사방을 평정하고 그 어느때보다 강력했다. 남방의 유약한 적들은 정예한 연의 병사들 앞에서 무력했다. 어디에도 적수가 없을 듯 하던 그의 나라에 저 북방 오랑캐 따위가 싸움을 걸어온 것이다. 싸움이라고 해봤자 날랜 기병 몇으로 노략질을 한 것이 다지만, 그 동안 우리가 그들에게 베풀어준 은혜가 얼마인데 감히 싸움을 걸어왔단 말인가.

진노한 부황은 직접 출정하려고 했다. 하지만 역시 나이가 나이인지라... 태자인 그가 나선 것이다. 본군이 보기 8만, 후군으로 모용덕과 모용소가 이끄는 1만 8천의 병력이 뒤따랐다. 도합 10만에 육박하는 대군이 나선 것이다.

탁발부 놈들은 한 번 싸워볼 베짱도 없었는지 곧바로 남쪽으로 내뺐다. 어찌나 바삐 내뺐는지 오원(五原)의 부락 3만 호가 미처 도망치지도 못했고, 거두지도 못한 곡식이 100만 곡이나 되었다. 야만족들이 잘하는 청야(淸野) 작전도 제대로 못한 게다. 불쌍한 야만인들.

척후와 간자들의 보고를 들어보니 탁발규는 멀리 초원에서 웅크리고 있다 한다. 급하게 도망치느라 식량이나 마초도 부족했는지 병사들이 하나 같이 야위고 매가리가 빠졌단다. 하긴, 척후라는 것들이 강 건너편에서 맥이 빠져 돌아다니는 몰골을 보니 알만 하다. 북방에서 최고의 늑대라고 하더니, 탁발규라는 놈도 별게 아닌 모양이다.


위(魏 : 탁발부)의 장곤(張袞)은 연의 군사가 장차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위왕 탁발규에게 말하였다.
"연이 활대(滑臺 : 적위)와 장자(長子 : 서연)에서 승리하였던 것을 탐내어 국가의 물자와 군대를 다 긁어모았으니 우리를 가볍게 여기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의당 야윈 모습을 하여 그들을 교만하게 한다면 마침내 이길 수 있습니다."
탁발규가 그것을 따라서 부락의 가축들을 모두 옮겨서 서쪽으로 황하를 건너 1천여 리를 가서 그들을 피하게 하였다.

=============================
배를 만드는 일이 생각보다 수월하지 않다. 목재도 부족하고 중산과 소식이 끊긴지도 한참이다. 탁발규 놈이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게 틀림없다. 며칠 전부터는 강 남쪽의 평원에서 기병들이 몰려와 종횡으로 내닫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냥이라도 하나 싶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훈련을 하고 있다. 아니, 훈련이라기보다는 우리들 보라고 시위를 하는게다. 탁발규, 어린애인 줄 알았더니 만만한 놈이 아니다.

이대로 당할 성 싶으냐. 지금껏 만든 배 정도면 조금 시간이 걸려도 황하 쯤은 문제 없이 건널 수 있다. 내일 우리가 황하를 건너가면 네놈들 엉덩이를 후려갈겨주마.


모용보가 중산을 출발할 때, 연의 주군 모용수는 이미 병에 걸려 있었는데, 오원에 도착하자 탁발규가 사람을 시켜 중산으로 가는 길에서 기다려서 그 사자들을 찾아 모두 붙잡았고 보용보 등이 수개월 동안 모용수의 소식을 듣지 못하였다.

=============================
병사들이 무사히 돌아왔다. 어제 황하를 건너려고 병사들을 정렬시키고 배를 띄웠는데, 때마침 바람이 몰아쳐 배가 다 떠내려가 버렸다. 이런 낭패가 있나. 건너편에서는 오랑캐 놈들이 "뭔일이 있나?" 하고 고개를 쳐들고 있었는데, 배가 떠내려가는 꼴을 보고 박장대소하며 조롱해댔다. 배에는 갑사 300명이 타고 있었는데, 멍청한 놈들이 떠내려가는 배를 어쩌지도 못하고 그대로 남쪽으로 흘러가 버린 게다.

그놈들이 오랑캐 놈들에게 모조리 포획된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오랑캐 놈들이 웬일인지 병사들을 모두 석방해 주었다. 돌아온 놈들을 만나러 나서니 이유를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모용보의 모습이 보이자 황하 건너편에서 오랑캐 놈들이 모두 외쳐댄 것이다.

"네 아비가 이미 죽었으니 어찌 일찍 돌아가지 않는가?"

그 동안 중산과 연락이 닿지 않았는데, 탁발규 놈이 중간에서 사신들을 나포했던 모양이다. 풀려난 병사들은 오랑캐의 진중에서 포로로 있으면서 중산에서 온 사자들과도 만났는데 그들이 말하길 부황께서 병이 위중하다는 것이었다. 부황이 세상을 떠났다는 저놈들의 말이야 믿지 못하겠지만, 병이 위중하다는 사자들의 말은 신경 쓰인다.

게다가, 저 흉악한 놈들이 병사들이 모두 들을 수 있게 외쳐댔으니 큰일이다. 모용보 자신이라도 마음을 가다듬어서 병사들을 동요하지 못하게 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벌써 병사들이 술렁대고 있으니....


탁발규는 진류공 탁발건을 시켜서 5만의 기병을 거느리고 황하 동쪽에 주둔하게 하고, 동평왕 탁발의는 10만의 기병을 거느리고 황하의 북쪽에 주둔하게 하며, 약양공 탁발준은 7만 기병을 거느리고 연 군사의 남쪽을 막도록 하였다.

=====================
"하늘의 때가 불리하여 연이 반드시 크게 패할 것이니, 빨리 가서 재앙을 면하는 것이 좋습니다."

술사라는 놈이 점을 보고 나서 하는 말이다. 좋은 점괘를 내놓아도 부족할 마당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인지. 터무니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내쳤는데, 이것도 실수였다. 저 근안(靳安)이라는 놈이 병사들에게 점괘를 모조리 말해버린 게다. 게다가 저놈이 정신이 나갔는지 점괘를 더 괴악하게 풀어서 퍼트렸다.

"우리는 모두 들판에 버려질 시체가 될 것이며,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당장 쳐죽여도 시원찮을테지만, 저놈을 죽였다가는 병사들이 더 의심할테니 그만두는 편이 낫겠다.


====================
진중에 모반 사건이 일어났다. 모용보의 동생인 조왕(趙王) 모용린(慕容麟)의 부장 모여숭(慕輿嵩)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이자가 부황이 죽었다는 소문을 그대로 믿고, 자신의 주군인 모용린을 황제에 옹립하려고 모의를 꾸민 것이다. 다행히 일이 일찌감치 누설되어서 모여숭은 처형되었다. 하지만 부하가 저런 생각을 할 정도니, 모용린의 속마음은 어떤지 알 수 없는 것 아닌가? 저 음험한 놈이 무슨 꿍꿍이인지...

내부에도 적이 도사리고 있으니 더 이상 싸울 수 없다. 어차피 싸우지도 않았지만. 다행히 아직 초겨울이라 황하가 채 얼지 않았다. 얼음 덩어리들이 저렇게 떠 있는데 배를 타고 건너올 수도 없을테니, 퇴각을 하더라도 추격해오지는 못할 것이다. 오늘 밤 배를 불태우고 중산으로 돌아가야겠다.


11월 기묘일에 폭풍이 불어서 얼음이 합쳐지자 위왕 탁발규가 군사를 이끌고 황하를 건넜다. 치중은 남겨두고 정예의 기병 2만여 명을 선발하여 급히 그들을 추격하였다.

====================
참합피(參合陂)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큰 바람이 뒤에서 불어와서 검은 먼지구름이 군대를 덮쳤다.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강한 바람이라 더 이상 진군이 힘들다. 마침 해도 저물때가 다 됐으니 야영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사문(沙門 : 종군 승려) 지담맹(支曇猛)이

"바람의 기세가 사납고 빠르니 탁발규의 군사가 장차 도착한다는 징후입니다. 마땅히 군사를 보내어 그들을 막아야 합니다."

라고 하는게 아닌가. 오랑캐 놈들이라면 황하도 건너지 못해서 끙끙대고 있을 텐데 무슨 걱정이 있다고 난리를 피우는 것인지 모르겠다. 황하를 용케 건넜어도 아직 예까지 오려면 멀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거늘. 모용보가 웃으면서 말해도 지담맹은 막무가내였다. 지담맹의 주장이 좀 지나쳤는지 모용린이 나서서 지담맹을 꾸짖는다.

"전하의 귀신 같은 무력과 군사들의 강성함은 족히 사막도 가로질러 갈만도 한데, 색로(索虜 : 오랑캐) 따위가 어찌 감히 멀리 오겠는가? 네놈이 망언을 하여 많은 사람을 놀라게 하니 마땅히 목을 베어 돌려 보내야겠다."

"부씨가 백만의 군사를 가지고도 회남에서 패한 것은 바로 무리가 많음을 믿고 적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이며, 천도를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담맹이 눈물까지 흘리면서 간곡하게 간언을 하니 조금 불쌍하기도 하다. 게다가 저 의뭉스러운 모용린 놈이 지담맹을 꾸짖는 모양새를 보니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사도 모용덕(慕容德)이 지담맹을 거드니 모용보도 마음이 동했다. 기왕 이렇게 된거 속이 시커먼 모용린 녀석이나 굴리면 좋을 듯 싶다.

모용린에게 기병 3만 명을 주고 후방을 지키면서 비상시에 대비하도록 하고, 따로 척후를 풀어서 탁발규의 군사를 찾아보도록 시켰다.


모용린이 지담맹을 망령스럽다고 생각하여, 기병들을 풀어놓고 돌아다니며 사냥이나 하도록 하여 대비하려 하지 않았다. 모용보는 기병을 파견하여 돌아가서 위의 군사를 염탐하도록 하였으나, 기병들이 10여 리를 간 다음에 바로 안장을 풀고 잠들었다.
위의 군사가 새벽부터 밤까지 두 배로 빨리 행군하여 을유일의 해질 무렵에는 참합피의 서쪽에 도착하였다. 당시 연의 군사는 참합피의 동쪽에 있었는데, 반양산 남쪽에 있는 강변에 군영을 설치하였다. 위왕 탁발규가 밤에 제장들을 나누어서 각각 연의 군사를 습격하려고 사졸들이 입에 나무를 물고 말의 입을 묶어 몰래 나아갔다.


=========================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산 위에 오랑캐 병사들이 하나 가득이다! 저 놈들이 어느새 여기까지 쫓아왔단 말이냐. 아니, 그보다 저 놈들이 산 위에 가득 포진할 때까지 어떻게 아무도 못 알아챌 수가 있는 것이냐. 이런 낭패가 있나.

병사들이 겁에 질려서 우왕좌왕한다. 모용보 자신도 넋이 나가 있으니 병사들은 말할 것도 없다. 겨우 정신을 차린 몇몇 부장들이 불호령을 내려도 소용이 없는 듯 하다. 멀리서 나팔 소리가 울린다. 나팔 소리에 이어 진군의 북소리가 들려오니 병사들이 공황에 빠져 도망치지도 못한다.

산이라고 해도 북막의 민둥산이다. 기병들이 산 위에서 달음박질쳐 내려오는데 거칠 것이라고는 발굽에 치이는 돌멩이 말고는 없다. 오랑캐 기병이 밀고 내려오니 소리도 모양새도 영락없이 산이 무너지는 듯 하다. 병사들은 겁에 질려서 도망도 치지 못하고 있었다. 모용보는 재빨리 말에 올라 내빼기 시작했다.

모용보가 내빼는 모습을 보자 병사들도 앞뒤 가리지 않고 도주하기 시작한다. 사방에서 오랑캐 기병들이 달려드는 것 같다. 모용보는 정신없이 말을 달려 달아났다.

탁발규가 병사들을 풀어놓아 그들을 공격하니, 연의 병사들이 달아나서 물로 들어가는데, 사람과 말이 서로 밟고 오르고 하여 눌리거나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1만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약양공 탁발준이 병사들을 데리고 그 전면에서 맞이하자 연의 병사 4~5만 명이 일시에 무기를 놓고 손을 거두고서 나아가 잡히니, 그 나머지 살아 도망친 사람은 불과 수천 명이고, 태자 모용보 등은 모두 홀로 말을 타고 달아나서 겨우 죽음은 모면하였다. ........(중략)....... 그들을 모두 구덩이에 묻어서 죽였다.






덧글

  • Allenait 2009/10/31 01:23 # 답글

    역시 전장에서의 점괘는 믿어야 하는 것이군요(?)
  • 야스페르츠 2009/10/31 12:38 #

    점쟁이 무시하면 큰코 다침매.
  • 들꽃향기 2009/10/31 01:41 # 답글

    후연의 참패이자, 북위의 도약의 전기가 된 참합피의 전투를 모용보의 시점에서 잘 써주셨군요. ^^

    그런데 개인적인 촌평을 덧붙이자면, 항복한 4~5만의 군대가 모두 갱살을 당했으니, 그들이 그저 불쌍할 따름입니다. ㄷㄷ

    항자를 참살한 백기의 최후가 그러하였듯이, 북위의 후손들이 모두 망루에서 장난감처럼 던져진 것은 하늘의 도가 무심치 않다는 반증인 것 같습니다. 냠냠

  • 야스페르츠 2009/10/31 12:39 #

    하늘의 도까지야... ^^ 나중에 탁발규는 참합피의 학살 때문에 제대로 고생합니다. 역시 학살 같은 것은 안하는 게 좋아요.
  • organizer™ 2009/10/31 01:53 # 답글

    4, 5 만이라.

    왠지 대륙의 기상이 그대로 전해지는군요.... 그것 참. <-- 일단 점괘는 믿고 봐야??
  • 야스페르츠 2009/10/31 12:40 #

    점쟁이 무시하면 큰코 다침매. (2)
  • 른밸 2009/10/31 10:33 # 답글

    참합피의 비극이군요. 모용수 최대의 실수 중 하나가 이 때 주장으로 모용보를 내세웠다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제가 알기로는 모용린이 모용보에게 상당한 신임을 얻었다가 모용보가 제위에 오른 뒤 맘이 돌아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로써 후연은 서서히 저물기 시작하는거군요. 이 때 요동에서는 고구려라는 오랑캐(...)가 등장하는데...
  • 야스페르츠 2009/10/31 12:40 #

    모용린이 언제부터 반골이었는지는 좀 모호합니다만, 저는 참합피 시절부터 시작이라고 봅니다. 그게 재미있거든요. ^^
  • 我幸行 2009/10/31 16:34 # 답글

    탁발건 5만, 탁발의 10만, 탁발준은 7만이라면 20만이 넘는 대군입니다.
    탁발부의 동원력도 만만찮군요.
  • 야스페르츠 2009/11/02 16:15 #

    사료를 그대로 믿을 수야 없겠지요. 아무래도 북위 초창기 관련 기사는 워낙에 왜곡이 심해서... ㅡㅡ;;
  • BigTrain 2009/11/02 23:23 # 답글

    갱살의 폐습은 백기 이후 천년 가까이 흘러도 사라질 줄을 모르는군요...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



유사역사학 방지

얼마블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