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0/23 00:24

오호망양(五胡望洋) 15 - 악연의 끝, 잉여의 끝 역사

요장이 장안으로 가다가 신지보(新支堡)에 이르렀는데 병이 위독해져 수레를 타고 빨리 나아갔다. 꿈에 부견이 천관(天官)의 사자를 이끌고 귀신 병사 수백으로 군영에 돌입하니 요장이 두려워하여 궁 안으로 달아났다. 궁인이 요장을 모시고 귀병을 베려 하였는데 실수하여 요장의 음부를 찔렀다. 귀병이 서로 이르기를 "한 가운데가 죽을 곳이다." 라고 하였다. 창을 빼니 피가 한 석(石)이나 나왔다. 꿈에서 깨어나니 놀라 가슴이 두근거렸고 근심을 따라 음부에 종기가 났다. 의원이 그것을 째자 피가 나오는 것이 꿈과 같았다. 요장은 마침내 미친 소리를 하니, 혹은 "신(臣) 요장은..."이라 칭하면서 "폐하를 죽인 것은 형인 요양이고 신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원하옵건대 신을 굽어살펴 주소서." 라고 하였다.
萇如長安,至於新支堡,疾篤,輿疾而進。夢苻堅將天官使者、鬼兵數百突入營中,萇懼,走入宮,宮人迎萇刺鬼,誤中萇陰,鬼相謂曰:「正中死處。」拔矛,出血石餘。寤而驚悸,遂患陰腫,醫刺之,出血如夢。萇遂狂言,或稱「臣萇,殺陛下者兄襄,非臣之罪,願不枉臣。」


393년 말, 64세의 요장은 병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게다가 심약해진 탓인지 부견이 찾아오는 악몽까지 꾸었던 모양이다. 악몽의 내용이 참으로 요상하기도 하다. 악몽과 병이 걸린 부위를 생각하면 웃음이 나기도 하지만, 어쨌든 요장의 병은 깊을대로 깊어져 가망이 없었다. 그리고 그해 12월, 요장은 태자 요흥(姚興)에게 후사를 맡기고 세상을 떠난다. 27세의 젊은 군주 요흥은 요장의 죽음을 비밀에 붙이고 각지의 지배권을 공고히하는데 총력을 기울인다.


394년 봄, 부등은 요장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많은 면에서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던 부등에게는 정말 하늘이라도 얻은 기분이었으리라. 부등이 얼마나 기뻐했는지는 그의 호언장담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요흥은 어린아이에 불과하니 나는 장차 나뭇가지를 꺾어서 그의 볼기를 칠 것이다."
姚興小兒,吾將折杖以笞之。


부등은 마지막 남은 병력을 모두 긁어모아 총 공격을 시작했다. 옹(雍)으로부터 진격을 시작한 부등은 후진 측의 흉노족 부락이 지키는 보루를 함락시키고 기세등등하게 폐교(廢僑)를 향해 진격한다. 후진의 장수 요상(姚詳)이 폐교로 가는 길목의 마외보에서 부등을 막고 있는 사이, 요흥도 행동에 나섰다. 요흥은 직접 정예 기병을 이끌고 부등을 압박하면서 윤위(尹緯)에게 보병을 이끌고 요상을 지원하게 하였다. 윤위는 폐교를 점거하고 부등과 맞선다.



폐교를 놓고 벌어진 이 전투에 대한 기록은 <진서> 재기의 요흥과 부등 양측의 기록이 미묘하게 다르다. <자치통감>에서는 이들 기록을 합쳐서 하나로 만들어 놓았지만, 두 기록의 미묘한 차이는 반영되지 않은 것 같다. 기록의 미묘한 차이에 주목하면서 전투의 진행 상황을 한 번 살펴보자.

일단, 윤위는 폐교를 점거한 후 근방의 수원을 끊거나 독을 풀었던 것 같다. 부등의 군대가 물 부족으로 고통받았다는 기록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그렇다. <자치통감>과 부등 측 기록에 따르면 부등은 물을 얻으려고 하였으나 윤위가 폐교를 지키고 있어서 물을 얻지 못했고 이로 인해 죽은 자가 열에 두셋이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부등은 급하게 윤위와 전투를 벌였고 결국 전투에서 패배한다.

그런데, 요흥 측 기록에 따르면 부등의 군대는 물 부족 때문이 아니라, 폐교를 막고 있는 윤위를 격파하기 위해서 급박하게 공격해온다. 윤위가 출진하려고 하자 요흥은 윤위에게 사람을 보내서 궁지에 몰린 부등과 싸우지 말고 지킬 것을 명하는데, 윤위는 "선제가 승하하시어 사람들의 마음이 어지럽고 두려워하니 지금 떨쳐 일어날 생각을 하는 힘으로 역수(逆竪)를 섬멸하지 않으면 큰일을 잃게 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고 전투에 나선다. 그리고 부등을 격파하였다. 물 부족으로 열에 두셋이 죽는 것은 패배한 이후의 일이다.

목이 말라서 군대의 20~30%가 죽었다는 말은, 과장된 수사라고 해도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이 전투가 며칠에 걸쳐서 벌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내용상으로 볼 때 폐교에서 대치했던 것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아니다. 부등의 군대가 물 부족으로 고통을 받았던 것은 분명하지만, 열에 두셋이 죽을 정도로 상황이 심각해진 뒤에야 결전에 나서는 것도 이치에 맞는 일은 아니다. 게다가 이렇게 상황이 심각해진 이후에 결전에서 패배하였다면, 그 즉시로 패주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기록으로 보건대 전투에서 패배한 후에도 바로 패주하지 않았던 것 같다.

상황을 정리해본다면, 일단 물 부족으로 위기에 몰린 부등이 폐교를 급하게 공격한 것이 먼저인 것으로 보인다. 부등이 공격에 나서자 윤위는 일단 폐교를 지키면서 버텼을 것이다. 최소한 요흥이 나서지 말 것을 명하는 사자가 오갔을 정도의 시간 동안은 버텼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부등의 군대가 충분히 약화되자 윤위가 결전에 나선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리고 부등의 군대가 크게 패배한 이후에 비로소 열에 두셋이 목말라 죽는 사태가 벌어졌을 것이다. 전쟁에 져 부상자가 많았을 것이고, 패배로 인해 심신이 모두 지쳐있었을테니 20~30%씩 갈증으로 죽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 하다.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해주는 기록이 양측 모두에서 이어진다.

그날 밤에 무리가 무너졌다.
其夜眾潰

즉, 전투에 패한데다가 물까지 부족하여 군대가 더 이상 대오를 유지할 수 없었고, 밤이 되자 탈영병이 속출하면서 군대가 궤멸된 것이다.

※ 폐교 전투 상황도



폐교에서 부등이 대패하고, 그 소식이 부등의 근거지 옹에 전해지자, 옹을 수비하던 태자 부숭(苻崇)은 성을 버리고 도망친다. 밤이 되서 부대가 와해된 후에 비로소 옹으로 도망쳐온 부등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재기를 위한 발판마저 무너져 버렸으니. 돌아갈 근거지마저 잃은 부등은 남은 무리를 모아 서쪽의 마모산(馬毛山)으로 숨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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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같은 시기 후연의 모용수도 묵은 병환을 도려내기 위해 몸을 일으킨다. 393년 말, 7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세 방향으로 서연을 공격해 들어가자, 모용영도 5만의 병력으로 이에 맞선다. 12월, 모용수는 업에 도착하여 각지로 병력을 파견하여 모용영을 압박한다. 모용영은 대벽(臺壁)에 치중을 두고 후연군의 압박에 맞서 태행산맥의 여러 길목을 수비하였다.

해를 넘기고 여름이 될 때까지 모용수는 업 인근에 주력군을 집결시킨 채 진격하지 않고 있었다. 모용영은 모용수의 수를 읽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었는데, 그 결과 도출된 결론은 모용수가 속임수로 진격로를 확보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태행(太行)의 길이 넓었기 때문에 병력이 분산된 틈을 타서 태행을 돌파할 것이라고 추측한 것이다. 이에 따라 각지에 분산된 군대를 모아 태행의 입구를 막고, 치중을 두고 있는 대벽에는 고작 한 개 부대만 남겨 놓았다.

4얼 갑술일(20일), 모용수가 드디어 무거운 엉덩이를 들었다. 대군을 이끌고 단숨에 대벽으로 들이친 것이다. 모용영은 완전히 낚인 셈이다. 치중을 잃을 위기에 몰린 모용영은 급하게 병력을 돌렸다. 그러나 너무 급하게 움직이다보니 군대는 축차투입이 되게 되었고, 당연히 차례로 격파되어 모용수는 대벽을 포위하는데 성공한다. 떡밥에 낚인섣불리 수를 읽힌 모용영의 패착이었다.

※ 대벽 전투 상황도



모용영은 다시 부대를 모아 5만의 병력으로 모용수를 막기 위해 진격하였다. 이에 모용수는 대벽의 남쪽에 진을 치고 계곡 아래에 천 명의 기병을 매복시켰다. 모용영의 대군과 맞붙은 모용수는 작전대로 거짓으로 퇴각하였고, 열심히 추격하던 모용영의 군대는 곧 매복병에 의해 허리를 잘리고 포위당했다. 참수된 것이 8천여 급에 이를 정도의 대패였다.

모용영은 수도인 장자(長子)로 달아나 농성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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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등을 물리친 요흥은 비로소 요장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고 뒤를 이어 황제에 즉위한다. 황제에 즉위한 후에도 요흥은 쉬지 않고 부등에 대한 추격에 나선다. 그리고 이것은 참으로 현명한 선택이었다. 부등은 산중에 숨어서도 재기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등의 세력은 사실상 독립적인 세력들이 어설프게 모여 있던 상태였다는 것은 일전에 이야기한 바 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강력하고, 또한 가장 독립적이었던 것은 금성(金城)의 걸복부 정권이었다. 당시 걸복부의 수장은 걸복건귀(乞伏乾歸). 부등은 그 동안 자신의 막하에서 이름만 올린 채 거의 도움을 주지 않던 걸복건귀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아들을 인질로 보내고 누이동생을 왕후로 보낼 정도로 저자세를 취하면서 도움을 청한 끝에 걸복건귀는 1만의 기병을 보내주기로 결정한다.

요흥이 황제 놀음이나 하면서 추격을 소홀히 했다면 부등은 재기에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흥은 악연의 뿌리를 뽑아버리려고 하였는지 추격을 늦추지 않았고, 부등은 기회를 놓치고 만다. 7월, 걸복건귀의 원병을 맞이하기 위해 산에서 내려온 부등의 앞을 요흥의 대군이 막아선 것이다. 결국 원군이 채 도착하기도 전에 부등은 사로잡혀 처형되었고, 걸복건귀의 원군은 이 소식을 듣고 미련없이 돌아선다.

전진 정권의 사실상의 최후였다. 부등의 태자 부숭이 황중(湟中)에서 황제에 즉위하였지만, 이미 요흥에게는 대항할 수 없는 상태였다. 오랜 악연이 마침내 끝을 맺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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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영의 최후도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장자에서 농성하기를 2개월여. 모용영은 마지막 희망을 걸고 동진과 탁발부에 구원을 청한다. 동진과 탁발부의 원군이 출발하기는 했지만, 운명은 모용영의 편이 아니었다. 성 안에서 배반이 일어나 성문을 열었던 것이다. 394년 8월의 일이다.

이로써 관중과 관동이 각기 평정되었다. 비수대전이 벌어진 뒤 10년 여 만에 다시 천하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것이다. 그러나 시대는 변하고 있었다. 일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위협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성장을 마친 북방의 늑대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덧글

  • 라라 2009/10/23 01:01 # 답글

    결국 전진은 멸망하는군요.. 부흥운동이 실패하고.. 대인배 부견이 참...
  • 야스페르츠 2009/10/23 09:38 #

    그래도 부견정도 되니까 망하고도 10년을 버텼던 거라능... ㅡㅡ;;
  • 我幸行 2009/10/23 12:34 # 답글

    요장의 거시기가 거시기하게 거시기해부렀구먼요.
  • 야스페르츠 2009/10/23 20:18 #

    참 거시기하지요...
  • 들꽃향기 2009/10/23 17:02 # 답글

    엉엉 나의 부견세력이~안돼~ 멸망이라 이말인가...?
  • 야스페르츠 2009/10/23 20:19 #

    부견... 좆 to the 망...
  • 른밸 2009/10/23 19:12 # 답글

    탁발부가 본격적으로 중원에 등작하기 시작하는 거군요. 흥미진진합니다 ㅎㅎ 이 무렵이면 고구려는 고국양왕 치세이겠네요? 곧 있음 담덕의 전면등장 ㄷㄷ
  • 야스페르츠 2009/10/23 20:19 #

    광개토왕이 과연 어떻게 등장할런지... 저도 아직 모릅니다. ㅎㄷㄷ
  • 2009/10/25 01:45 # 답글

    내가 고자라니.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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