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6/17 23:07

오호망양(五胡望洋) 11 - 풍운의 정령(丁零) 역사

오호십육국 시대 전반부에서 요양이 이끄는 강족이 강호를 떠도는 풍운의 종족이었다면, 후반부에서 돋보이는 종족은 정령족이다. 정령족은 원래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살던 유목민족으로, 혹자는 투르크족으로 보기도 한다. 실제 종족이 어떤 존재였건 간에 저 멀리 중앙아시아에서부터 이주해와 중원 한복판에서 분탕질을 하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풍운의 종족이다.

지금까지 있었던 여정을 간단하게 정리해보자. 383년, 낙양 인근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다시 모용수와 힘을 합쳐 업을 공격하다가 뒤통수를 치고 중산에 자리를 잡았다. 중산을 놓고 모용농, 모용온 등과 치열하게 다투었던 적진(翟眞)은 385년에 부하의 배신으로 최후를 맞았다. 뒤를 이었던 적성(翟成)도 곧 무너져 하북 지역에서 정령 부락은 일소되었는데, 뜻밖의 장소에서 다시 정령족이 등장한다.

적진이 죽고 정령 부락이 분열되자 적진의 사촌형이었던 적요(翟遼)는 일부를 이끌고 남쪽으로 달아나 여양(黎陽)태수 등념지(藤恬之)에게 항복한다. 당시 동진은 북방으로 진출하여 황하 이남의 거의 모든 지역을 수복했고, 등념지는 동진의 여양태수였다. 적요는 등념지의 총애를 받았지만, 곧 모반을 꾸며서 386년 정월에 등념지를 죽이고 여양을 점거한다. 뒤이어 태산(泰山)태수 장원(張願)이 적요에게 항복하여 적요는 태산과 황하 사이에서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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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요가 황하 이남에서 분란을 일으키는 동안 모용수는 하북 일대를 거의 평정하고 안정을 구가하고 있었다. 부비는 서연에게 멸망당했고, 서연과 후연 사이에는 뚜렷한 적대 관계는 없었으므로 서쪽 국경은 안정적이었다. 또한 북방에서는 탁발규의 북위와 유현이 서로 싸우느라 모용수를 위협할 여력이 없었다. 게다가 모용수는 탁발규의 북위에 지속적으로 원군을 파견해 주는 등 우호 관계를 맺고 있었다. 용성에서는 모용농이 안정적으로 정치를 하고 있었다. 고구려의 위협 역시 없다고 보아도 무방한 상태. 남쪽을 제외한 모든 국경을 안정시켰으니 이제 남은 것은 남쪽으로 진출하는 것이었다.

387년 정월, 모용수는 황하를 건너 제(齊) 땅에 발을 내딛었다. 첫 공격 목표는 동진이었고, 적요의 정령은 모용수의 작전 구역의 바로 서쪽에 위치해 있었다. 모용수의 첫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황하 이남에 거점을 구축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황하 이북의 신책(新柵)에서 제섭(濟涉)이 반란을 일으켜 적요·장원에게 호응하면서 모용수의 정벌군은 보급로가 끊길 위험에 처한다. 장원은 1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정벌군을 위협하였고, 적요의 원군도 동원하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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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덕, 모용소, 모용융 등이 이끄는 2만의 대군은 장원의 병력을 향해 진격 중이었다. 20여 리를 남겨두고 잠시 휴식을 취하던 때, 장원이 연군을 기습해 들어왔다. 모용덕은 기습에 놀라 패주하였으나 모용융은 굳게 버티면서 싸워 간신히 적을 물러가게 하는데 성공하였다. 간신히 부대를 수습하여 돌아온 모용덕은 모용융에게 진격을 늦출 것을 건의하으나 모용융은 이에 반대하였다.

"장원이 기습을 하였으니 당연히 승리를 거둬야 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사졸들은 모두 황하를 건너 멀리까지 들어왔기 때문에 퇴각할 길이 없어 결사적으로 싸우려 하였고, 그 결과 그들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적은 이기지 못하여 기세가 약해졌고, 우리처럼 일치단결하지 못하고 제각기 딴 마음을 품고 있으니 마땅히 빨리 그들을 쳐야 합니다."

마침내 장원을 공격하러 나선 연군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다. 장원은 제 몸만 겨우 보전하여 달아났고, 곧 청주, 연주, 서주 지역에 걸친 여러 성들이 연에 항복하였다. 제섭 역시 부하의 배신으로 인해 무너지고, 후연은 마침내 산동성 지역도 아우르게 된다.

이제 다음 타겟은 적요였다. 5월, 적요 토벌을 위해 모용수는 모용해를 선봉으로 삼았는데, 이것이 기묘한 일을 불러 일으킨다. 모용해는 전연의 명재상 모용각의 아들이었는데, 적요가 통치하던 지역의 백성들은 과거 전연의 백성들이었고 모용각의 아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자 동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태원왕(모용각)의 아드님은 나의 부모이시다."

20년 전의 인연이 이렇게 기묘한 결실을 맺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백성들이 앞다투어 모용해에게 달려가자 적요도 어쩔 수 없이 모용수에게 항복한다. 물론 직접 정복당한 것은 아니었기에 적요는 노(魯) 지역의 세력권은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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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흘러 10월에 이르자 적요는 다시 후연을 배반하고 자립하였는데, 뒤이어 388년 2월에는 나라를 세워 위(魏)라고 국호를 정하였다. 오호십육국 시대의 마이너 국가 중 하나인 적위(翟魏)의 등장이다.

적요는 황하와 태산 사이의 세력을 근거로 하여 후연, 동진을 지속적으로 노략질하는 등 많은 분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기묘하게도 후연도 동진도 모두 적요를 처리하기에는 다른 일을 하느라 바빴다. 동진의 경우 서쪽에서는 서연이 낙양을, 동쪽에서는 후연과 산동 반도를 놓고 지속적으로 대립하였기 때문에 적요를 정벌할 여력이 없었고, 후연은 동진과 전쟁을 벌이고 북방에서 벌어지는 탁발부의 내전에 개입하느라 바빴다. 이 기묘한 균형상태 덕분에 적요는 391년까지 무사히(?) 천왕 노릇을 하다가 죽었고, 아들 적교(翟釗)가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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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2년의 새해가 밝자 모용수는 오래 묵은 골치거리인 정령을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적교는 이에 대항하여 관도를 선제공격하는 등 적극적으로 대응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결국 멀리 서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는데, 서연의 모용영은 이 요청을 거절하였다. 마침내 모용수는 황하를 눈앞에 두고 도하 포인트를 찾기 위해 적교와 눈치싸움을 벌이기 시작한다.

모용수가 여양에서 도하할 준비를 하자 적교가 이에 맞서서 도하를 저지하기 위해 병력을 배치한다. 이에 모용수는 서쪽으로 40리 떨어진 서진으로 군영을 옮기고 소가죽으로 배 100여 척을 만들어 도하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적교도 재빨리 모용수를 뒤따라 서진으로 이동하였으나, 사실 이는 모용수의 속임수였다. 적교가 여양진을 비운 사이 숨겨두었던 모용진의 별동대가 황하를 건너 군영을 설치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적교는 이 소식을 듣고 다시 여양진으로 돌아가 적의 군영을 공격하였으나 곧 서진에서 건너온 모용농의 군대에게 협공을 받아 패주하고 만다. 결국 적위 왕조는 4년에 걸친 짧은 역사를 마감하고 적교는 단신으로 서연으로 도주한다.

서연에서 모용영의 환대를 받은 적교는 1년 후 다시 모반을 획책하다가 목이 베이고 만다. 파란만장한 정령 부락의 모험도 이렇게 끝났다.

덧글

  • 解明 2009/06/18 00:07 # 답글

    제목이 '풍후'의 정령인 줄 알았습니다. =ㅅ=;
  • 야스페르츠 2009/06/18 09:13 #

    쿨럭... 하필 이런 때 이런 제목을 정했군요. ㅎㅎ
  • 我行行 2009/06/18 10:15 # 답글

    丁零은 북방계가 아닙니까?
    조조가 원소를 치러갈 때 공융인가 누군가가 가는길에 정령족도 손봐주라고 궁시렁거렸다는 말이 있습니다.
  • 야스페르츠 2009/06/19 00:56 #

    뭐, 정령의 출자는 애매모호해서요. 투르크 계라는 사람도 있고 몽골고원 출신이라는 데도 있고. ㅡㅡ;
  • 유동닉 2009/06/18 22:44 # 삭제 답글

    '釗'는 한국 고유어 인명을 이두식으로 읽을 때만 '쇠'로 읽습니다. '돌쇠'는 乭釗로 쓰지요. 기타 경우에는 모두 '교'로 읽습니다. 중국 공산당의 창시자 이대교(李大釗)도 있지요.
  • 야스페르츠 2009/06/19 00:57 #

    아... 그럼 적쇠가 아니라 적교로군요. 제가 참고로 한 자치통감에서는 적소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소는 될 수 없을 것 같아서 쇠라고 적었는데 틀렸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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