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6/07 00:04

오호망양(五胡望洋) 8 - 귀향 역사

"여광이 중원의 혼란을 알게 되면 반드시 다른 마음을 품을 것입니다. 게다가 여광의 군사는 서역을 평정한 기세를 타고 있으니 이곳 양주(凉州)에 들어서게 되면 막을 수 없습니다. 절대 사막을 벗어나지 못하게 막아야 합니다. 이곳 고창(高昌)으로 병력을 지원해 주십시오. 고오곡구(高梧谷口)성은 험한 요새이니 이곳을 지키면서 물을 통제하면 가만히 앉아서도 저들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 만약 고오곡구가 너무 멀다면 이오관(伊吾關)을 지키면 됩니다. 이 두 험로를 여광이 건너게 내버려 두면 제 아무리 장자방의 계책을 가졌다고 해도 계책을 시행할 곳이 남지 않을 것입니다."

서찰을 모두 읽은 여광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참모 두진(杜進)이 맞은 편에서 말을 기다리고 있다.

"흠... 이것이 양한의 계책인가?"

"예. 첩자를 보내 어렵게 알아낸 것입니다."

"이 계책대로 한다면 그야말로 이 여광은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겠군."

"계책이 그대로 실현만 된다면 그렇겠지요."

"자네 생각은 어떤가?"

"양주자사 양희는 문장 실력은 있을지 몰라도 기회를 살피는데는 부족한 인물입니다. 양한의 계책을 이용할 사람이 아니니 걱정하실 거리가 못됩니다."

"그렇겠지?"

"우리가 군대를 움직이면 양한도 즉시 항복할 것입니다."

"좋다. 그렇다면 진격을 개시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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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광의 대군이 고창에 도착하자, 고창태수 양한이 백기를 내걸었다. 양주로 진입하는 첫 관문을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접수한 것이다. 이후의 진격도 일사천리였다. 돈황, 진창도 차례로 항복하자, 양주자사 양희는 뒤늦게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여광을 비난하는 격문을 든 파발이 날듯이 달려가고, 주천(酒泉)에 5만의 병력이 모여들었다. 주천이 떨어지게 되면 양주의 중심지 고장으로 향하는 하서회랑이 활짝 열리게 된다.

양희의 서한을 받아든 여광은 그 내용에 실소했다. 제멋대로 명령하여 군대를 돌린 것을 책망하는 격문이라니. 군 사령관이 군대를 진격시키고 물리는 것은 고유의 권한이건만 이 무슨 유치한 비난이란 말인가. 여광은 즉시 회답하는 격문을 써 날렸다.

"양희 너는 편안한 곳에서 배를 두드리며 쉴 줄만 알지 적지에서 힘들게 싸운 우리들의 노고를 아느냐? 서역을 평정하고 금의환향하는 우리를 환영하지는 못할 망정 군대를 보내 막으려 하다니, 참으로 불충한 무리로다."

뒤이어 여광의 정예 군사와 양희의 급조된 군사가 주천 인근에서 맞붙었다. 당연히 여광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여광의 승리가 알려지면서 양주 각지가 여광의 휘하로 들어오고, 곧 양희도 체포되어 끌려왔다.

여광은 마침내 고장에 입성하여, 스스로 양주자사의 업무를 관장하였다. 구마라습의 조언대로 양주 지역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아직 양주에는 멀리 동쪽의 상황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 여광은 부견에게 사신을 띄우는 한편으로 양주 지역을 통치하기 위한 작업은 별도로 착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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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광이 양주를 장악해서 세력을 키우고 있을 무렵, 과거 전량의 군주였던 장천석의 아들 장대예(張大豫)가 모반을 일으켰다. 장대예는 장천석이 동진으로 망명할 때 뒤쫓아가지 못하고 서쪽으로 도망쳐 독발사복건(禿髮思復鞬)에게 의지하고 있었는데, 여광이 양주를 장악하자 장대예가 옛 전량의 세력을 되찾고자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장대예의 반군은 순식간에 크게 세력을 떨쳐 여광의 토벌군도 격파하고 고장을 압박하였다. 역시 옛 양주의 지배자 장씨 일가의 입김 덕분이었을 것이다. 하서회랑 일대가 장대예에 의해 점령되면서 서역과의 교통도 끊기게 되었다. 장대예의 참모였던 왕목은 돈황과 주천 등 서역 일대를 먼저 장악하고 난 후에 여광과 결전을 벌이자고 제안하였으나 장대예는 이를 따르지 않고 고장을 압박하는데 주력한다.

386년 초에 시작된 장대예의 반란은 2년 동안이나 여광을 괴롭혔다. 게다가 흉노, 선비족 독발부 등도 이 반란에 호응하여 끊임없이 모반하였기 때문에 여광의 양주 경영은 시작부터 고난의 연속이었다. 387년 12월에 이르러 간신히 모든 반란을 진압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상황은 좋지 못했다.

386년 10월 무렵에 이르러서야 여광은 부견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표면적으로는 군대에 상복을 입히고 부견에게 문소황제(文昭皇帝)라고 시호도 올렸지만, 어디까지나 여광의 애도는 속마음과 달랐던 것 같다. 애도를 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독자적으로 태안(太安)이라 연호를 제정하고 뒤이어 주천공(酒泉公)을 자칭하였기 때문이다. 사실상 독자 정권을 구축한 것이다. 물론 이때에도 장대예의 반란은 여광의 후장을 신나게 털고 있었다. 약간 허세를 부린 것일까...

어쨌거나 여광이 주천공을 자칭하면서 비수대전으로 혼란에 빠진 화북에 후연, 서연, 후진에 이어 4번째 정권이 성립되었다.

※ 385년 말의 관중 및 양주의 상황 : 세력 분포가 워낙에 개판이라 국경이고 뭐고 그릴 수가 없다. 대충 알아보시길... ㅡㅡ;

덧글

  • 초록불 2009/06/07 00:16 # 답글

    지도를 보니 안습...
  • 야스페르츠 2009/06/07 09:06 #

    세력 분포가 너무 개판으로 겹치는지라... ㅡㅡ;
  • 한단인 2009/06/07 00:23 # 답글

    지도를 보고있자니 뭔가 누덕누덕 기워진 걸레를 보는 기분이군요.
  • 야스페르츠 2009/06/07 09:06 #

    엉망진창이지요.
  • 海凡申九™ 2009/06/07 00:34 # 답글

    지도가 "이태백"스럽다....
  • 야스페르츠 2009/06/07 09:06 #

    이태백이 뭘 어쨌다고....??
  • 사불상 2009/06/07 07:49 # 삭제 답글

    정말 군웅할거의 난세. 오랜만에 삼국지를 해볼까...
  • 야스페르츠 2009/06/07 09:07 #

    이런 세력 분포는 웬만한 삼국지 게임에서는 아예 구현할 수도 없다는...
  • 소시민 2009/06/07 08:44 # 답글

    장대예 때문에 여광의 행보가 지체되었군요...
  • 야스페르츠 2009/06/07 09:08 #

    이제부터 안습 여광의 불쌍한 인생이 시작입니다. 나아쁜 구마라습.
  • 윙후사르 2009/06/07 09:12 # 삭제 답글

    걸레조각이 따로 없군요.
  • 야스페르츠 2009/06/07 20:02 #

    개판 오분전...
  • 自重自愛 2009/06/07 09:32 # 답글

    구마라습이 이런 사람이라..... 그러고 보면 삼국통일전쟁 당시 신라 승려도.....?
  • 야스페르츠 2009/06/07 20:03 #

    컥. 구마라습에게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그거슨 저의 망상... (도주)
  • 2009/06/07 13:11 # 답글

    연호는 정해놓고 공을 칭하는건 뭐하는 플레이인가열 ㅋㅋ
  • 야스페르츠 2009/06/07 20:03 #

    부견이 죽었으니 그 핑계로 연호를 바꾼 것 같습니다. 부견의 후계자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을지도... ㅡㅡ;
  • paro1923 2009/06/07 22:14 # 삭제 답글

    지못미 화북... (?)
  • 야스페르츠 2009/06/07 22:58 #

    그래도 관동 지역은 좀 양호하다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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