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호(五胡)는 다섯 개의 오랑캐 종족을 말한다. 304년 흉노족의 전조와 저족의 성한이 일어선 이래 80년 동안 다섯 이민족이 수많은 국가를 세우고 명멸했다. 이 가운데 아직까지 "국가"를 세우지 못했던 비운(?)의 종족이 있다. 다섯 번째 오랑캐 강족(羌族). 그들이 마침내 일어섰다.
===========
요장은 요익중의 24번째 아들이다. 위계만 놓고 보자면 절대 요익중의 후계자가 될 수 없을 아들이었지만 형 요양이 비명에 간 덕분에 강족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요장은 부견의 휘하에서 많은 전공을 세운다. 비수대전이 벌어지던 시기에는 촉 방면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아 산산히 부서진 다른 군대와 달리 무사히(?) 장안으로 돌아올 수 있기도 했다.
비수대전 직전, 부견은 요장을 용양장군에 임명한다. 이때 부견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옛날에 짐은 용양장군으로서 대업을 세웠고, 일찍이 남에게 경솔하게 하사한 적이 없는 직위이니 경은 이에 힘쓰시오."
부견이 왕맹을 만나 반정을 일으키게 되었을 때 부견의 직책이 용양장군이었던 것이다. 분명 농담으로 한 말이었겠지만, 참으로 기묘한 농담이었다. 말이 씨가 되었다고나 할까.
384년, 모용홍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한 요장이 관대함을 잃은 부견에게 뒤통수(?)를 맞고 결국 모반을 일으키게 된 경위는 앞서서 이야기한 바 있다. 요장의 반란에는 관중 북부의 강족들이 크게 호응하여 군세는 순식간에 10만에 육박하게 되었으며, 한때 부견의 공격을 받아 격파될 위기도 있었으나 하늘의 도움이 있었는지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그리고 부견과 모용홍이 장안을 놓고 치열하게 싸우는 동안 관중 북부를 확고히 장악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 첫 번째 목표로 삼았던 것은 신평(新平)이었다.
신평은 과거 불명예스러운 일에 연루되어 성벽이 일부 헐렸던 일이 있다. 이때부터 신평의 주민들은 불명예를 씻을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마침 반역자 요장이 신평을 노리게 되었던 것이다. 신평태수 구보는 항복하려 하였지만, 주민들과 유력자들이 결사항전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마음을 돌려 군민이 일치단결, 농성을 결의한다.
요장은 흙으로 산을 쌓고 땅굴을 파면서 가열차게 공격하였는데, 구보를 중심으로 뭉친 신평의 농성군도 치열하게 맞서 산과 땅굴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불리한 것은 요장이다. 요장의 후진군은 사상자만 만여 명에 달하게 되었다. 게다가 구보의 거짓 항복 작전에 속은 요장은 매복에 걸려 하마터면 포로로 사로잡힐 뻔 하기도 했다. 반년에 가까운 농성 끝에 구보는 요장에게 성을 내어주면 무사히 돌려보내주겠다는 제안을 받았고, 그 말을 믿고 성을 내주고 난 뒤 뒤통수를 맞아 몰살당하고 만다.
결말은 비극으로 끝났지만, 신평에서의 처절한 항전 덕분에 요장의 세력 확대는 대단히 늦어졌다. 신평 함락 직후에 부견도 장안에서 탈출하였다가 요장에게 사로잡히긴 했지만, 진주(秦州 : 감숙성 남부) 지역의 전진 세력들은 온전히 힘을 보존하고 있었다. 신평의 항전이 없었다면 상황은 어찌되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신평을 함락하고 부견까지 처형한 요장은 이후 특별한 활동을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장안을 점령하고 있던 모용충의 동태를 예의주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장안은 관중의 중심이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386년 3월, 장안에서 정변이 일어나 모용충이 죽고 단수(段隨)가 서연의 황제로 즉위한다. 그리고 장안을 버리고 떠남으로써 마침내 장안이 비었다.
선비족이 떠나고 텅 빈 장안에서는 흉노와 동진을 등에 업은 조곡이라는 자가 승상을 자처하면서 세력을 잡았는데, 뒤이어 여러 세력들이 장안을 두고 각축을 벌이게 되었다. 안정(安定)에서 이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요장은 고만고만한 세력들이 아귀다툼을 벌이는 틈을 노려 장안을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386년 4월, 요장은 장안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대진(大秦)이라 국호를 정했다. 요익중이 관중을 떠난 이래 그토록 염원하던 강족의 소망이 실현된 것이다. 또한 다섯 번째 오랑캐, 오호의 마지막 주인공이 마침내 나라를 세운 것이기도 했다.
===========
요장은 요익중의 24번째 아들이다. 위계만 놓고 보자면 절대 요익중의 후계자가 될 수 없을 아들이었지만 형 요양이 비명에 간 덕분에 강족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요장은 부견의 휘하에서 많은 전공을 세운다. 비수대전이 벌어지던 시기에는 촉 방면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아 산산히 부서진 다른 군대와 달리 무사히(?) 장안으로 돌아올 수 있기도 했다.
비수대전 직전, 부견은 요장을 용양장군에 임명한다. 이때 부견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옛날에 짐은 용양장군으로서 대업을 세웠고, 일찍이 남에게 경솔하게 하사한 적이 없는 직위이니 경은 이에 힘쓰시오."
부견이 왕맹을 만나 반정을 일으키게 되었을 때 부견의 직책이 용양장군이었던 것이다. 분명 농담으로 한 말이었겠지만, 참으로 기묘한 농담이었다. 말이 씨가 되었다고나 할까.
384년, 모용홍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한 요장이 관대함을 잃은 부견에게 뒤통수(?)를 맞고 결국 모반을 일으키게 된 경위는 앞서서 이야기한 바 있다. 요장의 반란에는 관중 북부의 강족들이 크게 호응하여 군세는 순식간에 10만에 육박하게 되었으며, 한때 부견의 공격을 받아 격파될 위기도 있었으나 하늘의 도움이 있었는지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그리고 부견과 모용홍이 장안을 놓고 치열하게 싸우는 동안 관중 북부를 확고히 장악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 첫 번째 목표로 삼았던 것은 신평(新平)이었다.
신평은 과거 불명예스러운 일에 연루되어 성벽이 일부 헐렸던 일이 있다. 이때부터 신평의 주민들은 불명예를 씻을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마침 반역자 요장이 신평을 노리게 되었던 것이다. 신평태수 구보는 항복하려 하였지만, 주민들과 유력자들이 결사항전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마음을 돌려 군민이 일치단결, 농성을 결의한다.
요장은 흙으로 산을 쌓고 땅굴을 파면서 가열차게 공격하였는데, 구보를 중심으로 뭉친 신평의 농성군도 치열하게 맞서 산과 땅굴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불리한 것은 요장이다. 요장의 후진군은 사상자만 만여 명에 달하게 되었다. 게다가 구보의 거짓 항복 작전에 속은 요장은 매복에 걸려 하마터면 포로로 사로잡힐 뻔 하기도 했다. 반년에 가까운 농성 끝에 구보는 요장에게 성을 내어주면 무사히 돌려보내주겠다는 제안을 받았고, 그 말을 믿고 성을 내주고 난 뒤 뒤통수를 맞아 몰살당하고 만다.
결말은 비극으로 끝났지만, 신평에서의 처절한 항전 덕분에 요장의 세력 확대는 대단히 늦어졌다. 신평 함락 직후에 부견도 장안에서 탈출하였다가 요장에게 사로잡히긴 했지만, 진주(秦州 : 감숙성 남부) 지역의 전진 세력들은 온전히 힘을 보존하고 있었다. 신평의 항전이 없었다면 상황은 어찌되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신평을 함락하고 부견까지 처형한 요장은 이후 특별한 활동을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장안을 점령하고 있던 모용충의 동태를 예의주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장안은 관중의 중심이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386년 3월, 장안에서 정변이 일어나 모용충이 죽고 단수(段隨)가 서연의 황제로 즉위한다. 그리고 장안을 버리고 떠남으로써 마침내 장안이 비었다.
선비족이 떠나고 텅 빈 장안에서는 흉노와 동진을 등에 업은 조곡이라는 자가 승상을 자처하면서 세력을 잡았는데, 뒤이어 여러 세력들이 장안을 두고 각축을 벌이게 되었다. 안정(安定)에서 이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요장은 고만고만한 세력들이 아귀다툼을 벌이는 틈을 노려 장안을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386년 4월, 요장은 장안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대진(大秦)이라 국호를 정했다. 요익중이 관중을 떠난 이래 그토록 염원하던 강족의 소망이 실현된 것이다. 또한 다섯 번째 오랑캐, 오호의 마지막 주인공이 마침내 나라를 세운 것이기도 했다.




덧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