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5/31 03:50

오호망양(五胡望洋) 5 - 실크로드 오딧세이 역사

"신 미전(彌窴)과 휴밀타(休密馱)가 향도(嚮導)가 되겠습니다. 서역에 천조(天朝)의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때는 비수대전이 시작되기 1년 전, 382년 9월의 일이다. 차사전부(車師前部)왕 미전과 선선(鄯善)왕 휴밀타가 장안으로 입조하였다. 그리고 서역으로 향하는 길을 안내하겠다는 솔깃한 제안을 건넨 것이다. 엄친아 부견에게는 아주 매혹적인 제안이었다.

"서역은 거칠고 멀어서 그 백성을 얻는다 하여도 부릴 수 없으며, 그 땅을 얻는다 하여도 먹고 살 수 없으니, 한무제가 그곳을 정벌하였으나 얻은 것으로 잃은 것을 보충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만 리 밖에서 군사들을 수고롭게 하여 한나라의 과실을 뒤쫓으려 하시는 것입니까?"

부융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부견은 서역 정벌을 계획한다. 즉흥적으로 결정한 듯한 느낌은 있지만, 어차피 천하를 통일하고 나면 서역도 정벌할 것이니 지금 향도가 있을 때 정복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아직 부견은 동진 정벌에 대한 구체적인 단안이 서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서역 정벌을 몸풀기 삼아 해보자는 생각도 있지 않았을까. 어쨌든 부견은 서역을 정벌하고 한나라의 법도대로 도호(都護)를 세워 서역을 경영하기로 결정하였다.

서역 정벌의 총 책임자로 낙점된 것은 여광(呂光)이었다. 과거 부견에게 왕맹을 소개시켜준 여파루의 아들이다. 부견의 아래에서 많은 전공을 세우기도 했던 맹장이었다. 여광은 사지절·도독서역정토제군사(使持節、都督西域征討諸軍事 : <진서>에는 도독서토제군사都督西討諸軍事로 되어 있다.)에 임명되었으며, 군사 10만(<진서>에는 7만), 철기 5천을 붙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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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3년 정월, 여광은 장안을 떠나 머나먼 서역으로의 대장정을 시작했다. 미전과 휴밀타의 안내를 받으며 양주(亮州) 하서회랑을 통과한 여광은 고창에 도착하였다. 고창까지는 진의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이었으므로 수월하게 행군할 수 있었지만, 고창을 지나게 되면 말 그대로 서역에 이르게 된다.

고창을 떠나 사막으로 들어선 여광은 300리 길을 지나도록 물이 없어 고통을 겪는 등 어렵사리 행군하여 12월, 마침내 언기(焉耆)에 이르렀다. 여광의 대군이 도착한 것을 본 언기왕 니류(泥流)는 이웃 국가들과 함께 여광에게 항복하였다. 유일하게 항거하였던 것은 구자(玆)였다.

구자는 서역에서 가장 유력한 국가였던 만큼, 구자만 무너뜨릴 수 있다면 서역은 사실상 평정된다고 볼 수 있었다. 여광은 구자를 포위하고 공격을 시작한다. <진서> 재기에는 구자성을 공격하는 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이라는 것이 흑룡이 나타나기도 하고, 기린이 뿔로 받고 다니는 등 도저히 믿기 어려운 내용인지라 소개할만한 가치는 없어 보인다. <자치통감> 역시 구자 공략의 초반 과정은 과감하게(?) 생략한 채 6개월 여의 시간을 뛰어넘고 있다.

384년 7월, 오랜 농성전에 지친 구자왕 백순(帛純)은 서쪽의 회호(獪胡)에게 뇌물을 바치고 구원군을 보내줄 것을 청한다. 회호왕은 20여 만의 기병과 서역 여러 나라들의 병력 70여 만을 구원군으로 파견했다고 한다. 회호 구원군의 무장과 전술에 대하여 <진서>에는 상당히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궁기병으로 구성되어 있고, 창과 사슬갑옷으로 무장하여 화살을 맞아도 죽지 않았다고 하며 가죽으로 만든 올가미를 이용하여 사람을 잡았다고 한다. 왠지 서부극에 등장하는 밧줄 던지기가 연상된다. 구원군의 숫자는 엄청난 과장이 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어쨌거나 여광에게는 위협적인 병력이었을 것이다.

구원군의 병력도 위협적인데다가 무장도 만만치 않았다. 적의 전술도 생전 처음보는 것이었으니 군대가 겁에 질린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여광은 포위전을 펼치느라 진영이 성 주위에 분산되어 있었기 때문에 올가미에 끌려가는 병사가 속출했다. 각 진지의 장수들은 미봉책으로 병사들이 끌려가지 않도록 단단히 뭉치는 것 밖에는 수가 없었다.

여광은 재빨리 병력을 추스려 성의 서쪽으로 진영을 옮겼다. 또한 적의 요상한 공격에 맞서기 위해 구쇄(勾鎖 : 쇄사슬에 갈고리를 단 것??)를 만들고 정예 기병으로 유격활동을 시켰다고 한다. 아마도 활에 대한 저항력이 강한 적에 맞서기 위해 갈고리를 던져 끌어내리는 작전을 구사한 것 같다. 어쩌면 밧줄 던지기에서 착안한 것일지도.

이렇게, 적의 무장과 이에 대한 여광의 대응은 상당히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정작 성의 서쪽에서 벌어진 회전의 과정은 단 하나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성의 서쪽에서 싸워 적은 크게 패하였고 만여 급을 베었다.戰於城西,大敗之,斬萬餘級。" 라고 하는 것이 전부다. 위협적인 이국의 군대와 싸웠지만 결국은 그냥 이긴거다....

백순은 성에서 탈출하여 달아나고, 구자의 속국으로 항복한 것이 30여개 국에 이르렀다. 마침내 서역이 평정된 것이다. 장안에서 출정한지 1년 7개월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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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명망높은 스님께서 나를 찾아오시다니 영광입니다. 어서 앉으시지요."

"감사합니다."

구마라습(什)이 의자에 앉자 여광도 탁자의 맞은편에 앉았다. 중원에서도 이름이 널리 알려진 구마라습이다. 부견도 구마라습의 명성을 듣고 여광에게 신병을 확보할 것을 명하기도 했을 만큼. 여광이 구자와 서역의 실질적인 지배자이긴 했지만, 그래도 구마라습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어떤 일로 여기까지 찾아오셨습니까?"

"장군께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제게 할 말씀이 있으시다고요?"

"장군께서 서역을 평정하신지 벌써 1년이 다 되어 갑니다. 서역 만 리의 여러 나라들이 장군의 위엄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지요."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이 모두 장안에 계신 폐하의 은덕이지요."

여광은 구마라습의 노골적인 칭찬에 무안한 기분이 되어 얼른 부견에게 칭찬을 돌렸다. 이 능구렁이 같은 중놈이 무슨 꿍꿍이 속이 있는 걸까? 구마라습은 잔잔한 미소를 띈 표정을 조금도 바꾸지 않으면서 말을 이었다.

"네. 그러합니다. 그런데 장안에서는 여태 소식이 없지 않습니까."

정곡을 찔렸다. 서역을 평정하고 사절을 보냈건만 동쪽에서는 1년이 다 되가도록 기별이 없다. 한편으로 걱정도 되지만, 여광으로서는 서역에서 왕노릇 하는 재미에 장안의 소식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그리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여광은 멋적게 웃었다.

"하하하. 폐하께서 남쪽의 일이 바빠 이 여광을 잊으신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이제 겨우 서른을 살짝 넘긴 주제에 속은 너구리보다 교활하다. 의뭉스럽게 말을 흐리는 구마라습을 보면서 여광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 잘못하면 된통 당하겠구나.

"스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장군께서는 이 흉망한 서역 땅에서 만족하실 생각이십니까?"

거두절미하고 단숨에 찔러오는 말에 여광은 다시 정신이 아찔해졌다. 속셈을 들킨 것은 둘째치고 무엇을 믿고 이리 위험한 말을 하는 것인가? 구마라습의 말이 이어졌다.

"서역은 장군이 머무르기에 부족합니다. 장군께서 동쪽으로 돌아가시면 도중에 자연스럽게 복스러운 땅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말씀드린 그대롭니다."

"동쪽은 폐하의 성스러운 땅이거늘......"

"주인을 잃은 땅일 뿐입니다."

"무엄하오! 폐하께 어찌 그런 말을......"

"장군도 이미 머리로는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1년이 가까워오도록 소식이 없는 것이 어떤 이유인지 짐작이 가지 않으실리는 없을텐데요."

"........."

"서역에서 왕노릇 하는 것으로 만족하시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하지만 장군의 고향은 동쪽에 있지 않습니까. 고향 땅이 주인을 잃고 장군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간지러운 곳을 긁어주는 것인지, 아니면 간지럼을 느끼지 못하도록 칼로 난자를 하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여광은 구자가 풍요하고 안락하기 때문에 그곳에서 머물러 살려고 하였다. 천축에서 온 승력 구마라습이 여광에게 말하였다.
"여기는 흉망할 땅이니 머무르기에 부족합니다. 장군께서는 다만 동쪽으로 돌아가면 도중에 자연스럽게 복스런 땅을 갖게 될 것이니 거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치통감> 진기28 효무제 태원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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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5년 3월, 여광의 군대가 귀향을 시작한다.


덧글

  • 海凡申九™ 2009/05/31 03:52 # 답글

    듣보잡 여광 등장!
  • 야스페르츠 2009/05/31 20:23 #

    떼끼. 여광도 나름 인재라능.
  • 소시민 2009/05/31 08:46 # 답글

    과연 여광의 운명은...
  • 야스페르츠 2009/05/31 20:24 #

    그것은........ 비밀입니다. ^_-
  • 사불상 2009/05/31 09:11 # 삭제 답글

    신성 여광!

    근데 저 스님은 모사인가 중인가. 서역의 화를 동쪽으로 옮기는구나.
  • 야스페르츠 2009/05/31 20:24 #

    이 에피소드는 전적으로 저의 망상입니다. 구마라습이 저런 무서운 사람이었는지는 며느리도 모릅니다.
  • dunkbear 2009/05/31 09:14 # 답글

    무서운 중이군요. 헐헐....
  • 야스페르츠 2009/05/31 20:25 #

    이 에피소드는 전적으로 저의 망상입니다. (2)
  • 한단인 2009/05/31 10:44 # 답글

    오호.. 구마라습과 여광사이에 그런 비사가..
  • 야스페르츠 2009/05/31 20:25 #

    이 에피소드는 전적으로 저의 망상입니다. (3)
  • 한단인 2009/05/31 20:43 #

    응? 이럴수가.. OTL
  • 야스페르츠 2009/05/31 20:44 #

    자치통감에는 이렇게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는 흉망할 땅이니 머무르기에 부족합니다. 장군께서는 다만 동쪽으로 돌아가면 도중에 자연스럽게 복스런 땅을 갖게 될 것이니 거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내용은 조금 더 부풀려서 꾸며낸 에피소드라능...
  • 한단인 2009/05/31 20:51 #

    아하..
  • 2009/05/31 11:00 # 답글

    꼭 이런 사건에는 옆에서 부추기는 놈들이 등장하고 난의 주체는 고심하다 그말을 따르게되는(한신제외) 전형적인 수순을 밟는건지 원ㅋ 자기내면의 갈등을 형상화하여 더러운 부분을 전가시키려는 맘이었을까요ㅇ-ㅇ
  • 야스페르츠 2009/05/31 20:25 #

    이 에피소드는 전적으로 저의 망상입니다.(4)
  • 들꽃향기 2009/05/31 13:59 # 답글

    당시 '회호'로 표기된 나라는 지금은 무엇으로 불리는 어느나라였을까요...? 병력의 동원 규모나 무장으로 봤을때 결코 만만한 나라는 아닌것 같은데...ㄷㄷ
  • 야스페르츠 2009/05/31 20:26 #

    정체 불명이라는군요. 정확한 위치도 알 수 없어서...
  • paro1923 2009/05/31 19:01 # 삭제 답글

    어허, 구마라습 하면 보통 '구역경'의 한역자 정도로 알려져 있었는데,
    알고 보니 남북국 시대의 불씨 중 하나를 제공한 인물이기도 했군요.
    생각보다 로지컬한 인물이란 걸 알게 되니, 전율스럽습니다.
  • 야스페르츠 2009/05/31 20:26 #

    이 에피소드는 전적으로 저의 망상입니다. (5)
  • 한단인 2009/05/31 20:45 # 답글

    야스페르츠님의 망상(응?)에 낚이신 분이 꽤 많으셨군요. 오해가 없으시도록 '망상'이라는 표시를 해두는 것이...

    근데 통감에서 구마라습과 여광이 만난 적은 있다고 나오는 건가요? 아님 그조차도 허구인지?
  • 야스페르츠 2009/05/31 20:52 #

    아... 둘이 만나서 한 이야기는 대체로 위의 맥락과 같습니다. 다만 저는 거기에다가 구마라습을 조금 더 악랄해 보이게 부풀렸을 뿐이지요. ^^
  • 한단인 2009/05/31 21:03 #

    행여 보시는 분들이 햇갈리는 소지도 있으니 악희님처럼 원문을 병기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싶군요.
  • 야스페르츠 2009/05/31 21:09 #

    넵. 병기했습니다. 이렇게나 모두들 낚이실 줄이야... 구마라습 대덕께서 졸지에 악한으로 알려질뻔... (퍽!)
  • 2009/05/31 21:03 # 답글

    저 또 낚인 거임까ㅜㅜㅋ
  • 야스페르츠 2009/05/31 21:09 #

    어잌후. 월척. ㅋㅋ
  • 다복솔군 2010/01/28 01:38 # 답글

    원문을 병기해도 구마라습 대덕 떡밥은 이미 저에게 씻을 수 없는 충격을 주었기 때문에... 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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