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3년 12월, 부견이 패잔병 10만 명을 수습하여 장안으로 귀환하였을 무렵까지도 화북의 정세는 상당히 안정적이었다. 곳곳에서 위험 요소가 점차 불거져 나오고 있기는 했지만, 표면적으로는 각지의 세력들 모두 자중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사실상 유일한 분란거리는 농서의 걸복국인(乞伏國仁)이 일으킨 반란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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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복국인은 선비족 걸복부(乞伏部)의 수장이다. 걸복부는 주로 농서 지역에서 활동하던 종족으로 오호십육국 시대 초반에도 가끔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마이너한 종족이었다. 관중에서 강력한 세력이 등장하면 알아서 머리를 숙이고 복속하는 것이 이들의 삶이었다. 걸복부가 부견의 휘하에 복속된 것은 371년 걸복사번(乞伏司繁) 때의 일이다. 걸복사번은 376년에 죽었고, 뒤를 이어 사번의 아들인 걸복국인이 걸복부를 이끌었다.
383년에 비수대전이 벌어지기 직전, 걸복국인은 선봉장의 하나로 참전하도록 명을 받았다. 그러나 출정 직전 걸복국인의 숙부인 걸복보퇴가 걸복부의 본거지인 농서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부견은 걸복국인에게 이 반란을 진정시키도록 명하고 출정하였다. 이로 인해 걸복국인은 본의 아니게 본거지로 돌아갈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걸복보퇴는 걸복국인을 맞아들여 힘을 합쳤다. 그리고 부견이 비수대전에서 패배한 것이 알려지자 즉각 반란을 일으켜 농서 일대를 장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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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뒤이어 터져 나온 반란 사건은 정령족 적빈의 반란.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했던 모용수가 384년 정월, 마침내 모반의 기치를 내걸면서 화북의 혼란은 시작되었다. 하북 각지의 세력들이 모용수의 후연에 투항하면서 모용수의 세력은 순식간에 20여 만으로 불어났다. 결단을 내린 모용수는 망설임 없이 부비가 지키는 업을 향해 말을 달렸다.
한편 업 인근의 열인(列人)에서는 모용농을 필두로 모용수의 일족들이 병력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업의 부비는 모용수가 도착하기 전에 열인의 반군을 먼저 격파할 요량으로 1만의 병력을 파견하였으나 모용농에게 완패하였다. 이 패배로 인해 부비는 하북의 통제권을 상실하였고, 26일에 모용수가 업에 도착, 포위함으로써 결정타를 먹였다.
모용수가 업을 포위하고 하북 각지를 장악해 나갈 무렵, 장안 북방의 북지(北地)를 지키고 있던 모용홍(慕容泓)이 이 소식을 들었다. 3월, 모용홍은 관동의 선비족을 포섭하고 화음(華陰)에서 모반을 일으켜 제북왕(濟北王)을 자칭하였다. 또한 병주의 평양(平陽)에 주둔하고 있던 모용충(慕容沖)도 자립하여 포판을 공격하였다.
부견은 부예에게 요장을 사마(司馬)로 붙여주고 모용홍을 토벌하게 하였는데, 부예는 섣불리 공격하다가 모용홍에게 크게 패하고 목숨을 잃고 말았다. 뒤를 수습한 요장은 부견에게 사신을 보내 사죄하게 하였는데, 부견은 평소의 관대한 성격마저 잃고 크게 분노해서 요장의 사신들을 죽여버린다. 요장으로서는 뜻밖의 일이었을 것이다.
결국 요장은 위북(渭北)으로 몸을 피했으며, 뒤이어 천수(天水), 남안(南安) 등을 장악하고 자립하여 만년진왕(萬年秦王)을 자칭했다. 후진(後秦)의 성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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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엄친아 부견을 물어뜯으려는 시랑의 무리들이 모두 모습을 드러냈다. 장안을 포위하는 형세로 포진한 걸복국인, 요장, 모용홍, 모용충과 관동을 집어삼키려는 모용수, 이에 더하여 북방의 혼란을 기회로 북진해오는 동진의 군세까지. 한때 천하통일을 꿈꾸었던 엄친아 부견의 비참한 몰락이었다.





덧글
그 시대에는 오바마 취급받았다능
상황이 안 좋으려면 아무리 능력있어도 뜻대로 해결되지 않고 더 꼬이니...
(과거 제갈 승상의 북벌 좌절기만 봐도... 엉엉.)
...이거 바보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