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5/16 01:06

오호망양(五胡望洋) 1 - 야망과 의리 역사

"천하를 취할 기회가 이제야 아버님께 왔습니다. 이 기회를 놓치시면 안됩니다. 사소한 의리 때문에 사직을 다시 일으킬 기회를 잊지 마십시오."

"너의 말이 옳다. 그러나 그는 나를 믿고 목숨을 맏기고 있는데 어떻게 그를 해칠 수 있겠느냐. 하늘이 그를 버린 것은 분명하니, 혹시나 망하지 않을까 근심할 필요는 없다."

"진(秦)이 강하여 우리 연(燕)을 병합했던 원한을 잊지 마십시오. 이제 진이 약해졌으니 이를 도모하는 것은 원수를 갚고 수치를 씻는 일이지 결코 의리를 져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형님은 이렇게 좋은 기회를 차버리실 속셈이십니까?"

"내가 예전에 연에서 쫒겨났을 때 나를 받아들여 극진히 예우해준 것이 그분이다. 왕맹이 나를 모함하였을 때도 나를 믿어주었던 사람이니 이 은혜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느냐."

"그러나……."

"듣기 싫다. 그를 도와 은혜를 갚고 틈이 생기는 것을 기다려도 늦지는 않다. 의리를 지키면서 천하를 얻을 수 있는 길이니 걱정할 필요 없다. 관동(關東)은 선조들의 대업이 있는 땅이니 취하겠지만 관서(關西)는 우리의 소유가 아니다."


383년 10월의 어느 날 밤, 진중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수십 만의 대군을 모조리 잃고 단기 필마로 모용수의 진중으로 찾아온 부견을 맞아들였기 때문이었다. 모용수가 이끄는 3만의 정병도 패배하여 퇴각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산산히 흩어져버린 다른 군대와 달리 모용수의 군단은 형체를 유지한 채 질서정연하게 퇴각하고 있었다. 이에 부견도 모용수에게 몸을 의탁한 것이다.

일단 부견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모용수의 측근들은 모두 부견을 죽이고 자립할 것을 권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용수는 그들의 권고를 모두 물리쳤다. 심지어 전병력의 통수권을 부견에게 돌려주기까지 한다.

==================
부견과 모용수.

두 사람의 관계는 참으로 기묘했다. 부견의 관대함이야 워낙에 유명한 것이니 그렇다 치지만, 부견의 관대함에 의리로 답한 적수는 모용수 하나 뿐이었다. 주서, 요장 등은 모두 부견의 관대함으로 구한 목숨을 복수의 칼날을 가는데 썼던 것과 대조적이다. 대체 두 사람의 사이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모용수가 부견에게 특별한 존재였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가장 총애하던 명재상 왕맹의 권고와 음모마저 무시하고 모용수를 감싸줄 정도였으니, 특별대우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게다가, 모용수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부견의 은혜는 그야말로 백골난망이었을 것이다. 조국으로부터 버림받고 도망쳐온 그를 받아주었고, 모함을 받아 목숨을 잃을 뻔 했던 것도 밝혀주었던 부견이었다. 또한 모용수에게는 딱히 부견에게 원한을 가질 이유가 없기도 했다. 조국을 멸망시킨 사람이기는 하지만, 정작 모용수 자신도 조국에게 버림받았던 사람이다. 게다가 조국이 멸망하던 때에 자신은 부견의 수하에 있지 않았던가. 원한에 사무쳐 복수의 칼날을 갈아야 했던 다른 적수들과 모용수의 차이점은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유야 어찌됐던 간에 모용수는 부견에게 끝까지 의리를 지킨다. 그리고 부견 역시 이러한 모용수의 의리에 의리로 답한다. 패잔병을 수습해서 낙양에 다다랐을 때, 모용수가 북방의 소요를 진정시키러 떠나겠다고 자청하자 이를 허락한 것이다.

==================
"원정군이 패배하여 국가가 위태로운 이 때에 모용수처럼 위험한 자를 풀어주면 안됩니다. 그가 북방으로 가면 자립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경의 말이 옳다. 그러나 짐이 이미 허락했으니 어쩔 수 없다. 만약 하늘의 뜻이 그러하다면 결국 바꿀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폐하께서는 사직을 가볍게 여기시고 사소한 의리를 중히 여기시는 것입니까? 그가 가게 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
모용수는 3천의 병력을 받아 업으로 향했고, 부견은 12월에야 장안에 도착한다. 업에 도착한 모용수는 업을 지키고 있던 부견의 서장자 부비(苻丕)의 환영을 받았다. 물론 속으로는 서로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지만.

이 무렵, 정령족(丁零族)의 우두머리 적빈(翟斌)이 낙양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정령족은 원래 막북에서 살던 부족이었는데, 오호십육국의 혼란 속에서 점차 남하하다가 부견에게 항복했다. 부견은 정령족을 중원 한가운데로 이주시켜 낙양 인근에 살게 했다. 이 때문에 어이없게도 막북의 오랑캐가 중국대륙 한복판에서 모반하게 된 것이다.

부견은 편지를 보내 모용수에게 적빈의 반란을 진압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부비는 모용수를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용수가 업을 떠나가는 것을 기꺼워했다. 그러나 너무 많은 군사를 주면 성을 나선 모용수의 군대가 칼날을 바꿔잡을 수도 있다. 이에 부비는 최대한의 안전장치를 더해서 모용수에게 병력을 나누어 주었다.

나약한 병사 2천에 낡아빠진 무기를 주고, 이것으로도 모자라 부비룡(苻飛龍)에게 저족의 정예 기병 1천을 주어 모용수의 부장으로 삼았다. 낙양성을 포위하고 있는 강력한 정령족 군대에 맞서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병력이었다. 게다가 부장인 부비룡에게 상황에 따라 모용수를 도모할 수도 있도록 밀명을 내렸으니, 모용수에게는 말 그대로 나가서 죽으라는 명령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사료에 기록된 내용대로라면, 모용수는 처음부터 부견을 배신하려 마음먹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적어도 모용수는 부견을 완전히 배신할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부견에게 직접 해코지하는 것이야 은혜를 입은 것이 있어 어렵다고 할 수 있지만, 고토인 업에까지 이르러서도 부비의 밑에서 얌전히 명령을 수행하던 모습은 배신자의 행동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모용수를 의심하고 핍박했던 것은 부비였던 것 같다.

업은 과거 연의 수도였고, 모용수의 조상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모용수가 부견의 곁을 떠나 북방으로 향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도 업에 있는 조상들의 사당을 참배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부비는 모용수가 사당에 배알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여기에 더해서 적빈을 토벌하러 나서는 길에 자살행위나 다름 없을 정도로 형편없는 병력을 붙여 주었으니, 핍박도 이런 핍박이 어디에 있을까.

여기에 더해서 업을 떠나 진격하고 있던 모용수에게 업으로부터 도망쳐온 심복의 보고가 이어졌다. 부비룡이 부비의 명령으로 모용수를 도모하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의리로 무장한 모용수의 참을성도 한계에 다다랐을 것이다. 마침내 모용수는 격노하여 측근들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격노한 모용수가 내뱉은 말은 그야말로 진심이었을 것이다.

"나는 부씨에게 충성을 다하였는데, 저들은 오로지 우리 부자를 도모하려고만 하니 내가 비록 그치고자 해도 할 수 있겠는가!"

부견에게는 원한이 없지만, 이렇게까지 자신을 핍박하는 부비에게는 더 이상 지킬 의리가 없었다. 모용수는 병사가 적다는 것을 핑계로 하내(河內)에서 병사를 모집하여 열흘만에 8천 명을 끌어모았다. 모용수는 부비룡을 속여 저족의 정예 기병 1천 명과 함께 죽이고 군대를 장악했다.

그러나 이 모반(?)도 부견에게 이빨을 들이댄 것은 아니였다. 저족 출신의 막료들을 모두 고이 돌려보내고 부견에게 부비룡을 죽인 이유까지 소상하게 편지로 알렸을 정도이니, 자립하거나 반란을 일으켰다기 보다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행동이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하다. 이 추측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모용수는 그대로 적빈의 반군을 향해 진격하여 황하를 건넜으며, 다리를 불태워 북방으로 되돌아갈 뜻이 없음을 분명하게 했다.

물론 한편으로는 하내에 부하를 남겨두고 병사를 계속 모집하게 하였으며, 업에 인질로 남아 있던 일족들에게도 탈출할 것을 은밀하게 지시했다. 어쨌거나 모반을 일으킨 셈이니 자기 변호와 함께 스스로를 지킬 힘을 길러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업을 탈출한 일족들도 병력을 끌어모으고, 토벌하러 온 적빈의 군세가 오히려 모용수를 맹주로 삼아 투항해오자 상황은 기묘하게 변했다. 처음에는 적빈의 투항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으나, 낙양에서 농성하던 부휘가 모용수의 군대를 받아들이지 않게 되자 결국 적빈의 군세를 흡수하였던 것이다.

더욱 세를 불린 모용수는 낙양을 떠나 형양으로 향했다. 형양에 이르자 각지의 세력들이 모용수에게 항복해왔다. 말 그대로 빼도박도 못하게 된 것이다. 결국 384년 정월, 모용수는 형양에서 연왕(燕王)을 자칭하였다. 후연(後燕)의 시작이다.


핑백

  • 야스페르츠의 墨硯樓 : 다락방 연말결산 - 12대 포스팅 2009-12-30 12:13:33 #

    ... 넘었군요. 후후후후후후후후4월 - [펌] 삼국지 인물들의 영어 이름퍼온 글이었지만 나름 재미있었던 개그였습니다. 저는 아직도 채양의 충격을 잊을 수 없습죠.5월 - 오호망양(五胡望洋) 1 - 야망과 의리오호십육국 연재 제 2부의 시작입니다. 그래도 이 블로그에서 가장 야심찬 기획이었던 만큼 당당하게 1위를 차지하는군요. ㅎㅎㅎ6월 - 혹시 모르니 증거를 수집 ... more

덧글

  • 海凡申九™ 2009/05/16 01:09 # 답글

    이미 초반에 모용수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하악...

    근데 내려갈수록 한우의 백양 구운 것을 먹듯 쫄깃쫄깃~ 하악하악


    맛있게 먹었다~
  • 야스페르츠 2009/05/16 08:15 #

    그렇게 드시면 체합니다.
  • 한단인 2009/05/16 02:40 # 답글

    우와.. 모용수에 대해서 제가 일종의 오해를 하고 있었던 거임?
  • 야스페르츠 2009/05/16 08:16 #

    이거쓴 오로지 저 만의 추측(망상)이므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실 것까지는... ^^
  • azusa 2009/05/16 02:47 # 답글

    뭔가 그나마 유명해서 배신자의 주도자적 위치로 강제된 모용수인 듯?

    다른 듣보잡은 아에 모르니 ㅎㅎㅎ;
  • 야스페르츠 2009/05/16 08:16 #

    이거쓴 오로지 저만의 추측(망상)이므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실 것까지는... (2)
  • 어릿광대 2009/05/16 07:43 # 답글

    의리의 모용수인듯
  • 야스페르츠 2009/05/16 08:17 #

    귀축 석호, 까칠 왕맹, 엄친아 부견, 용자 요익중을 잇는 새로운 캐릭터, 의리의 모용수입지요.
  • asianote 2009/05/16 09:02 # 삭제 답글

    의리의 모용수는 푸른 늑대에게 무너지니 당도고가 북방의 주인 되었도다!
  • 야스페르츠 2009/05/17 20:04 #

    그거쓴 아직 먼 훗날의 이야기.
  • paro1923 2009/05/16 09:06 # 삭제 답글

    배신할 마음을 먹었든 안 그렇든, 머저리 하나가 중간에 불장난을 한 건 확실하군요.
    부비란 작자... 상황이 급한데 돕지는 못할 망정 아군끼리 견제질하고 X랄해대니...
  • 야스페르츠 2009/05/17 20:05 #

    부비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죠. ^^;;
  • 耿君 2009/05/16 09:43 # 답글

    귀축 석호, 까칠 왕맹, 엄친아 부견, 용자 요익중, 의리의 모용수, 그리고 부비 부비 (응?)
  • 야스페르츠 2009/05/17 20:05 #

    오! 부비 부비! ㅋㅋ
  • Silverfang 2009/05/16 09:49 # 답글

    모용수로써는 명분도 지키고, 의도 지키는...
    적절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잘 읽었습니다. :)
  • 야스페르츠 2009/05/17 20:07 #

    사실은 조금 더 철저했다면 달라졌을지도 모르지요. ^^
  • 사불상 2009/05/16 10:05 # 삭제 답글

    이제 부견은 어찌 나올려나?!
  • 海凡申九™ 2009/05/16 12:27 #

    걍 보내주었지 않나요?
    갈려지죠...(맞나?)
  • 야스페르츠 2009/05/17 20:07 #

    부견이야 장안에 짱박혀 있으니 뭐....
  • 애독자 2009/05/16 10:08 # 삭제 답글

    정말 오래 기다렸습니다.
    항상 궁금해하던 5호16국사였는데
    정말 재미있게 애독하고 있습니다.
    5호16국사는 민중의 입장에서는 혼란과 고통의 시간이었지만
    진짜 영웅들의 시대였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 야스페르츠 2009/05/17 20:07 #

    감사합니다. ^^
  • 른밸 2009/05/16 11:55 # 답글

    대륙의 한에서 묘사한 모습과 흡사하네요. 그런데 부비의 입장에서 보면 예사인물이 아니지, 병사들도 따르지,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한가락씩 하지...쉽게 마음 놓을 수 없었을 것 같아요. 다만 대응책이 문제...꽤나 오랫동안 업을 수성했던걸 보면 부비도 꽤 쓸만한 인물이었던 것 같아요.
  • 야스페르츠 2009/05/17 20:08 #

    그래도 엄친아의 아들이니까요. (응?)
  • 2009/05/17 20:09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야스페르츠 2009/05/17 20:10 #

    저.. 저기... 사겠다고 댓글 달면 비밀글로 알려줄 것임. 공개적으로 계좌번호 올렸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 일 있겠읍니까? ㅎㅎ
  • 2009/05/17 20:10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부단뽀이 2009/05/18 10:53 # 답글

    링크추가합니다.
  • 야스페르츠 2009/05/18 17:28 #

    ^^ 감사합니다. ㅎ
  • 잔디맨 2010/01/28 10:15 # 삭제 답글

    항상 재밌게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아아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



유사역사학 방지

얼마블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