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4/16 01:00

오호(五胡) 외전 2 - 막돼먹은 익중씨 역사

"내가 겨우 이까짓 밥이나 먹자고 여기까지 온 줄 아느냐! 나는 주상(主上)을 만나러 왔단 말이다!"

드넓은 궁실이 쩌렁쩌렁하도록 호통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밥상을 들고 온 궁인은 하얗게 질려서 얼어 붙었다. 그릇이 달그닥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내전에서 나온 내시는 어쩔줄 몰라하며 더듬더듬 말을 옮겼다.

"폐하께서는 환후로 몸이 편치 않으십……."

"도적들이 침구하여 사직이 위태로운데 한 나라의 지존이 그까짓 병 때문에 이 요익중을 만나지 않겠다는 것이냐!"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호통부터 치고 보는 요익중이었다. 일흔 살이나 먹은 늙은이가 힘도 좋군. 내시는 속으로 궁시렁대면서 대답했다.

"폐하께서 장군의 노정을 위로하기 위해 내리신 음식입니다. 일단 드시지요."

"주상이 나를 불러 도적을 치라고 했으니 마땅히 직접 만나서 방략을 말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 내가 고작 밥을 먹으러 온 것이냐?"

"장군의 용맹이면 충분할터인데 폐하의 방략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시끄럽다! 주상이 나를 보지 않고 이렇게 네놈이 대신 말하는 것을 보니 주상이 죽기라도 했느냐?"

그릇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요익중의 험악한 말에 놀란 궁인이 밥상을 떨어트린 탓이다. 고요한 궁실에 용캐 깨지지 않은 그릇 굴러가는 소리만 들렸다.

"말씀이 과하십니다."

"아무튼 나는 주상을 보기 전까지는 출정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한 말이 도를 넘어섰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연신 헛기침을 하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요익중이었다. 드세기 이를 데 없는 그도 나이를 먹으니 그나마 말을 조심하는 것 같았다. 과거 석호가 석홍을 폐위하고 정권을 잡았을 때에 비하면 이 정도 폭언이야 새발의 피다. 석호의 즉위식에 재촉을 받아 뒤늦게 참석한 요익중은 석호의 면전에다 대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 요익중은 항상 대왕이 일세의 영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찬탈하는 꼴을 보니 내 생각이 틀린 것 같군."

좌중이 경악하고 심약한 자들 가운데 몇몇은 쓰러지기도 했다. 석호도 어이가 없었지만 요익중의 원래 성격을 알았기에 특별히 죄를 묻지 않고 넘어갔다.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를 떠올린 내시는 속으로 피식 웃으며 알겠노라고 대답하고 내전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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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호는 내전으로 들어오는 요익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이는 일흔 살이나 되었지만 하얗게 센 머리와 수염을 제외하면 육신 어디에서도 나이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제 겨우 50대 중반이었던 석호보다도 건장하고 젊어 보이는 몸이다. 드세다는 표현 보다는 사납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요익중의 성격은 그 몸에서도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석호가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요익중의 목소리가 침상을 울렸다.

"그깟 어린애 하나 죽었다고 그리 근심을 하는가? 겨우 그런 것으로 너는 병이 들었는가? 자식이 어렸을 때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서 반역한 것이니 너 말고 누구를 원망할텐가? 또 이미 반역을 저질러 그를 죽인 것인데 또 왜 근심하는가?"

목소리에 압도되고 거침없는 말이 석호의 머리 속을 헤집어 놓았다.


아들 석선이 모반을 꾸미다가 발각되어 처형된 것이 6개월 전의 일이다. 분을 참지 못하고 석선과 그의 처자식, 즉 석호 자신의 손자들까지 모조리 죽여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화가 나면 앞뒤 가리지 않고 모조리 죽여버리는 그의 성격이 일을 그르쳤다. 모조리 처형하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정작 처형을 집행할 때가 되니 평소에 재롱을 떨며 그를 즐겁게 했던 다섯 살바기 손자가 눈에 밟힌 것이다. 석호는 눈물까지 흘리면서 손자를 품에 안고 형리들이 데려가지 못하도록 하였지만, 형리들은 가차없이 품 안에서 손자 녀석을 빼앗았다. 아이가 울어제치며 옷깃을 잡고 늘어지는 통에 석호의 곤룡포 소매가 떨어져 나갈 정도였다.

"이 아이는 용서해 주게. 내가 말을 잘못했네. 이리 돌려주게나."

석호로서도 형리들을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 일시적인 분노에 의한 명령이었지만,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추상 같은 명령을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처참하게 죽은 부하들이 얼마나 많은지 셀 수도 없다. 차라리 그때 이성을 찾고 다시 명령을 내렸어야 했다. 하지만 분노와 슬픔에 넋이 나간 그는 어떻게 할 바를 모르고 눈물만 흘리면서 형리들에게 나약한 부탁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네가 병 들어 있는 것이 벌써 오래되었는데, 태자는 아직 어린아이니 네가 어서 쾌차하지 않으면 안된다. 지금 네가 걱정해야 할 것은 어린 태자 때문에 천하가 혼란해지는 것이지 이까짓 도적을 걱정할 일이 아니야. 이까짓 도적들은 이 늙은 강족(羌族)이 너를 위해서 한 번에 해결하겠네."

요익중의 천둥 같은 목소리가 석호의 정신을 다시 현실로 돌려놓았다. 숙부 석륵이 죽고 난 후에는 듣기 어려운 말이었다. 한 나라의 황제에게 '너'라니.

요익중이기에 가능한 말투였다. 일흔 살. 나이로도 조정 어느 누구도 넘보지 못할 정도로 연장자이고, 막강한 서강군단을 이끄는 장군이었다. 성격 자체가 귀천을 따지지 않고 거침없었던 그였기에 누구에게나 거리낌없이 '너'라 말했다. 젊을 때는 그래도 조심성이 남아 있어서 '대왕'이라든가 '황제'라고 호칭하기도 했지만, 반대로 젊은 혈기에 할 말 못할 말을 가리지 않고 툭툭 내뱉기도 했다. 이제는 나이도 지긋하게 들어 혈기로 내뱉던 폭언은 줄어들었지만, 반대로 거리낄 것이 없어져 아무에게나 '너'라고 부른다. 심지어 석호에게까지. 어떻게 보자면 하극상이라고 할 수도 있는 말투였지만, 석호는 호방하게 그런 요익중을 받아들였었다. 요익중과 석호, 그리고 다른 부하가 함께 대화를 하면 참 재미있는 상황이 벌어졌다.

지금은 요익중보다도 더 늙고 병들어 보이는 석호는 옛 추억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아니,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런데 추억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어린 시절부터 잔혹한 성정으로 이름을 날린 그에게 나약하다고 호통을 치는 사람이 있었을 리가 없다. 석륵조차도 석호의 잔혹함 때문에 고민했을 뿐이다. 숙부 석륵의 추억과, 나약함을 꾸짖는 새로운 경험은 묘한 느낌이었다.

석호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쇠약해지기는 했지만 그도 요익중 못지 않게 거침없던 남자다. 웃음 소리의 기세는 예전만 못했지만 그래도 주군으로 부하에게 명을 내리는 기세는 다시 되살아난 듯 했다.

"경을 사지절(使持節)·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에 임명하겠소. 지금 즉시 도적들을 소탕하시오."

"네가 보기에는 이 늙은 강족이 도적을 격파하는 일을 감당할 것 같은가?"

석호가 즉석에서 갑옷과 말을 내리자 요익중은 그 자리에서 갑옷을 입고 말에 올라 인사도 없이 채찍질하여 달려 나갔다. 요익중의 승전보가 전해진 것은 채 며칠이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더욱 쇠약해진 석호였지만 그 소식을 듣자마자 기침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에 이 석호를 진동시켰으니 앞으로 대전에 오를 때에는 칼을 차고 마음껏 걸어 올라오도록 예우해주는 것도 괜찮겠지. 어차피 전부터 그러던 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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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독이 드디어 동쪽으로 가서 형양과 진류의 여러 군을 노략질하니, 석호가 크게 두려워하여서 연왕 석빈을 대도독·독중외제군사에 임명하고, 관군대장군 요익중과 거기장군 포홍 등을 통솔하여 이를 토벌하게 하였다. 요익중이 그의 무리 8천여 명을 인솔하고 업에 도착하여 석호를 뵙자 청하였다. 석호가 병이 나서 그를 보지 않고 영군성으로 들어오게 하여 자기가 먹는 음식을 하사하였다. 요익중이 화가나서 먹지 않고 말하였다.
"주상이 나를 불러서 도적을 치라고 하였으니, 마땅히 만나보고 방략을 주어야 할 것인데 내가 어찌 밥을 먹으러 왔단 말인가? 또한 주상이 나를 보지 않으면 내가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를 알 것인가?"
석호가 힘써서 아프지만 그를 만나보았는데, 요익중이 석호를 나무라며 말하였다.
"어린애가 죽어서 근심하는가? 왜 병이 들었는가? 자식이 어렸을 때 좋은 사람을 택하여 이를 가르치지 아니하고 반역하기에 이르게 하였으며, 이미 반역하여 그를 죽였는데 또 어찌하여 근심하는가? 또한 너는 오랫동안 병이 들어 있는데, 세워놓은 사람이 어린아이니 네가 만약에 쾌유하지 않으면 천하는 반드시 혼란에 빠질 것이므로 마땅히 이것을 먼저 걱정하고 도적을 걱정하지 말아라. 양독 등은 궁색하고 고단하며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다가 서로 모여서 도적이 된 것이며, 지나가는 곳에서 잔폭한 짓을 하니 어느 곳에 이를 수 있겠는가? 이 늙은 강족이 너를 위하여 한 번에 해결하겠다."
요익중의 성격은 사납고 곧아서 사람들에게 귀천의 구별을 두지 않고 누구에게나 '너'라고 하였지만 석호도 그를 책망하지 않았다. 앉은 자리에서 사지절·정서대장군을 내려주고 갑옷과 말을 하사하였다. 요익중이 말하였다.
"네가 보기에는 이 늙은 강족이 도적을 격파하는 일을 감당할 것 같은가?"
마침내 정원에서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 말에 채찍질을 하고 말을 달려 남쪽으로 가는데 인사도 하지 않고 나가버렸다.
드디어 석빈 등과 함께 양독을 형양에서 쳐서 그들을 대파하고 양독의 머리를 베어서 돌아오고, 그 나머지 무리들도 토벌하여 그들을 다 죽였다. 석호는 요익중에게 칼을 차고 신을 신고 전각에 오르도록 명령을 내리고 입조할 때 종종걸음을 걷지 않게 하고 작위를 올려서 서평군공에 책봉하였으며...(후략)

<자치통감> 진기20 목제 영화 5년(349년)


덧글

  • 海凡申九™ 2009/04/16 00:14 # 답글

    용자왕 익중가이거!
  • 야스페르츠 2009/04/16 00:21 #

    대인배
  • 2009/04/16 00:19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야스페르츠 2009/04/16 00:20 #

    헐... 실수 ^^
  • 을파소 2009/04/16 00:20 # 답글

    주군이나 신하나 대인배의 기질이 물씬 풍기는군요.
  • 야스페르츠 2009/04/16 00:21 #

    ㅎㅎ 진짜배기 남자들이라고나 할까요.
  • 海凡申九™ 2009/04/16 00:23 # 답글

    익중가이거...
    말빨로 헬 앤드 헤븐을 만들어 석호필드를 뭉개고는 당당히 전쟁가서
    적들을 캐벌호우 만들고 궁궐에 진흙발로 임하시다.


    두둥!
    용자왕 익중가이거!
  • 한단인 2009/04/16 01:06 # 답글

    어후.. 정말 막되먹었군요. 하지만 뭔가 멋진 듯..(응?)

    자치통감 원 내용 자체가 유려한 문체이지만 소설체로 바꾸어놓은 야스페르츠님의 글 솜씨도 대단합니다. 나중에 역사소설 한편 정말 내셔야겠다능..
  • 야스페르츠 2009/04/16 09:13 #

    ㅠㅠ 글빨이 지속이 안된다능. 멋부리는 것은 조금 되는데...
  • paro1923 2009/04/16 03:14 # 삭제 답글

    인간말종 석호도 믿을맨(?)은 하나 있었군요.
    하지만, 결국 자기 대에 저질러놓은 짓들이 왕조 기둥뿌리를 뽑았으니... (끌끌)
  • 야스페르츠 2009/04/16 09:14 #

    저런 명령을 내렸는데 요익중이 전쟁터에서 돌아오기도 전에 석호가 죽었지요. ㅎㄷㄷ
  • 사불상 2009/04/16 07:20 # 삭제 답글

    멋지게 쓰셨군요. 줄거리가 있어도 저렇게는 못쓴다능...ㅠㅠ

    난세가 아니었다면 개떼로 탄핵당했을 요익중 장군. 대인배군요
  • 야스페르츠 2009/04/16 09:15 #

    진짜 용자지요. 왠지 피마새의 레콘이 생각나는 할배. ^^
  • 윙후사르 2009/04/16 20:26 # 삭제 답글

    용자다. 저 잔인왕 석호보고 너라니...
  • 야스페르츠 2009/04/16 23:34 #

    그걸 넘어간 석호도 용자...
  • 나도사랑을했으면 2009/04/18 09:26 # 답글

    야스페르츠님 뭣좀 여쭤봐도 될련지요?

    전(지금의 곤명 지방이던가?), 야랑, 맹획등... 지금의 귀주, 운남지역의 비한족들의 역사적 세력들을 시대별로.... 표현해주실수 있나요?

  • 야스페르츠 2009/04/18 09:33 #

    그쪽으로는 제가 잘 알지 못합니다. 죄송합니다.
  • 나도사랑을했으면 2009/04/18 12:01 # 답글

    아... 아닙니다. 제가 질문을 잘못한것 같습니다. 다음엔 좀더 신중히 생각한다음 질문토록 하겠습니다. 예... 저도 예전에 중국 5호나 남죽조시대등에 관심 많았었는데... 근데 이상하게 (잘은 알진 못하지만) 5호 16국 시대는 또 관심이 덜가게 되더라구요...(고구려등과 연관이 많아서 그 역사를 좀 무미건조하게 접해서 그런진 몰라도...) 네... 오히려 전 명청사등에 관심이....^^

    그치만 님의 글등은 잘 보고 있습니다. 아... 제가 위에서 질문을 잘 하겠다고 했는데, 이 말이 잘못전해질것 같습니다. 나쁜뜻은 아닙니다. 전 님이 아주 풍부한 역사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보거든요.. 근데, 제가 질문을 너무 포괄적이고 애매하게 하는것 같아 그렇다는 것입니다.

    예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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