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4/10 23:31

오호(五胡)의 쟁패 25 - 화북 통일 역사

370년, 연이 멸망하면서 부견의 진(秦)은 화북 최강의 세력이 되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연의 멸망과 함께 진으로 편입된 땅은 6주(州)의 군(郡) 157개, 호구수가 246만, 인구로 따지면 999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진서> 지리지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해당 지역(유, 기, 병, 청, 사, 예주)의 호구수는 약 100만 호 정도로, 전체 250만여 호와 비교해 보아도 절반에 가까운 엄청난 인구이다. 여기에 원래 진의 영역까지 합치면 가히 막강한 세력이라 할 수 있었다.

동진(東晉)의 영역에 해당하는 지역의 인구를 <진서>에서 추산해보면 약 100만 호 정도가 나온다. <진서>를 기준으로 보아도 화북은 동진에 비해 1.5배 정도의 인구를 보유하고 있었다. <진서> 지리지의 인구와 <자치통감>에서 기록하고 있는 인구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적인 추산 기준으로 삼을 수는 있을 것이다. 격심한 혼란기가 아닌 이상, 인구는 곧 국력이었다. 진이 화북을 사실상 통일하면서 솥발처럼 늘어선 천하가 균형을 잃은 것이다.

부견에게 복속하지 않은 화북의 세력이라고 해봤자 하서(河西)의 양 정권, 탁발부의 대(代) 정권, 농서의 구지(仇池) 정권 정도 뿐이었다. 그나마 구지와 같은 정권은 국가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부족 수준에 불과했고, 대 정권 역시 부족 집단과 국가 사이의 미묘한 경계에 서 있었다. 실질적으로 국가라고 할만한 세력은 양 정권 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잠시 양 정권의 흥망을 한 번 살펴보자.

장궤가 301년에 하서에서 반독립적인 정권을 수립한 이래, 양 정권은 장식과 장무를 거치면서 진 왕조에 복속되어 있음을 분명하게 표방했다. 그러나 장무가 전조의 유요에게 항복하면서 양 정권은 전조의 번국이 되었고 말았다. 장무의 뒤를 이었던 것은 장식의 아들 장준(張駿)이었는데, 장준의 치세에서 양 정권은 최대의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전조가 멸망하는 틈을 타서 장준은 황하를 건너 진주(秦州 : 감숙성 동남부) 지역을 점령하였으며, 이후 서역의 여러 나라를 복속시켰던 것이다. 서역을 경영하면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던 양 정권에 처음으로 시련이 닥친 것은 마왕 석호의 도전 때문이었다.

장준의 뒤를 이은 장중화(張重華)는 석호의 도전을 맞아 사애(謝艾)라는 명장을 등용하여 맞섰다. 사애는 열세한 상황에서도 석호의 공격을 모두 막아내는데 성공하였고, 비록 진주 지역은 상실하였지만 양 정권의 근거지였던 양주(凉州)는 지켜내는데 성공하였다. 후조가 멸망하자 장중화는 다시 진주로 진출하는 가운데, 관중에서 부건의 진이 일어나자 양대 세력은 맞붙어 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역시 양 정권의 힘은 진에 비해서 밀렸기 때문에, 결국 양 정권은 356년에 진에 복속하였다.

장중화는 353년에 죽었는데 뒤를 이은 것은 10세의 어린 아들 장요령(張曜靈)이었다. 장요령이 어렸기 때문에 장중화의 서형이었던 장조(張祚)가 정치를 좌지우지했다. 그리고 결국 장요령을 폐위하고 스스로 즉위하였다. 그 동안 양 정권을 지키는 일등공신이었던 사애도 장조에 의해서 살해당하고 말았다. 장조는 354년에 양왕(凉王)을 자칭하고 독자적인 연호까지 사용한다. 그러나 장조의 치세는 폭압으로 얼룩졌고 끝내 355년에 폐위되었다. 뒤를 이은 것은 장현정(張玄靚)이었는데, 실질적으로는 반정을 일으킨 공신들에 의해 조종되는 꼭두각시 신세였다. 세도를 부리는 공신들도 정권다툼 끝에 계속 교체되는 가운데 363년에 이르러서 최종적으로 장천석(張天錫)이 장현정을 폐위하고 즉위하였다.

장천석은 366년에 부견이 다스리는 진으로부터 독립하였다. 한때 왕맹과 일전을 하기도 하였던 장천석이지만, 대체로 양 정권은 독립을 선포한 후에도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도 바빴던 것 같다. 수 년 동안 정권다툼에 시달렸을테니 그럴법도 하다. 그러나 부견이 연을 멸망시키고 화북의 패권을 장악하면서 양 정권의 독립도 위태로워졌다. 371년, 왕맹이 장천석에게 편지 한 장을 보내니, 장천석은 결국 부견에게 복속하였다.



양 정권을 비롯해서 화북의 여러 정권들은 하나 둘 씩 부견에게 복속되어 갔다. 저항하였던 구지, 걸복부 등의 정권은 순식간에 정복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부견은 복속되거나 정복된 여러 세력들을 대부분 온전하게 남겨두고, 그 수장들을 장안 인근으로 이주시켜 높은 직위에 임명하는 등 관용을 보인다. 심지어 연을 멸망으로 몰아넣었던 소인배 모용평까지 멀쩡하게 살려둘 정도였다. 왕맹을 비롯하여 여러 신료들이 선비족이나 강족과 같은 무리들은 위험하니 중앙에서 배제시킬 것을 계속 권하였지만, 이상주의자 부견은 모든 이적들이 혼합되어 하나가 되는 덕치(德治)를 내세우며 관용적인 정책을 계속 밀고나갔다.

372년, 사실상 화북의 모든 세력들을 복속시킨 부견은 왕맹을 승상에 임명하였다. 이미 이전부터 사실상 재상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이제는 진짜 날개를 달게 된 것이다. 승상 왕맹이 진의 정사를 본격적으로 살피기 시작하면서 진의 세력은 더욱 일취월장해 간다.

373년에는 양주(梁州 : 섬서성 남부)와 익주(益州)를 점령함으로써 동진의 세력에게 치명타를 가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사통팔달의 원정에 동원된 것은 부견이 관용을 보이면서 복속시켰던 여러 이민족 세력들이었다. 요장, 모용수를 비롯하여 양 정권 출신의 왕통, 부견의 동생 부융 등이 각지에서 활약하였다.

376년, 부견은 양의 장천석을 공격할 것을 천명하였다. 13만의 대군을 준비하는 가운데 사신을 파견하여 완전히 복속할 것을 요구하였다. 장천석은 주변의 항복 권유를 물리치고 사신을 처형하고 항전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압도적인 적에 비해 오랜 정권 다툼과 사치향락으로 인해 약화된 양은 초라하기만 했다. 순식간에 모든 전투에서 패배하는 가운데 장천석은 수도에까지 육박한 진군 앞에 스스로 포박을 하고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다.

양이 무너지자, 다음 타자는 북방의 대 정권이었다. 탁발십익건(拓跋什翼犍)이 40년 가까이 다스리고 있던 대 정권은 당시 막북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세력이었다. 그러나 이 시대는 기후의 영향이었는지는 몰라도 막북의 세력이 아주 미약했다. 탁발십익건의 대 역시 북방의 패권을 모두 장악하고 있을 정도로 거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중원을 침탈하지 못했을 만큼 세력이 약했다. 그렇기에, 부견의 30만에 육박하는 대군을 동원하여 세 방향에서 압박해 들어가자 대 정권 역시 순식간에 무너졌다. 그 과정에서 탁발십익건은 내분에 의해 시해되었으며, 부견은 탁발십익건의 손자 탁발규(拓跋珪)를 사로잡고 탁발부를 모두 복속시켰다. 막북의 세력을 둘로 나누어 황하 동쪽은 탁발규의 후견인 유고인(劉庫仁)이 다스리게 하고, 서쪽은 흉노 철불부(鐵弗部)의 유위진(劉衛辰)에게 다스리게 하였다.

※화북 통일 : 청색 글씨는 당시 중국의 18개 주의 대략적인 위치를 표시한 것이다.

이로써 부견은 화북의 모든 세력들을 완전히 평정하고 화북 통일을 이룩하였다. 304년, 오호의 쟁패가 시작된 이래 70여 년 만에 이룩된 최초의 통일이었다. 그러나, 통일을 축하하는 부견의 곁에는 패업의 동반자 왕맹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한 해 전인 375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왕맹이 세상을 떠났을 때, 부견은 세 번이나 통곡을 하면서 부르짖었다.

하늘은 나에게 육합(천지사방)을 하나로 평정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란 말이냐! 어찌하여 나의 경략(景略 : 왕맹의 자)을 (이렇게) 일찍 빼앗아 가느냐!
天不欲使吾平壹六合耶!何奪吾景略之速也!

덧글

  • 海凡申九™ 2009/04/11 00:00 # 답글

    왕맹의 죽음이 전진의 멸망을 불러온 듯
  • 야스페르츠 2009/04/11 12:09 #

    뭐, 결과적으로는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 TSUNAMI 2009/04/11 00:03 # 삭제 답글

    왕맹의 조언이 없었던 결과 오히려 비수에서 무리한 전투를 실행했다, 뭐 이런 관점도 성립될 수 있는 걸까효?
  • 야스페르츠 2009/04/11 12:10 #

    결과만 놓고 보자면 그렇지요. 그러나 그보다는 부견의 실책이 컸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 카구츠치 2009/04/11 00:13 # 답글

    미묘한 느낌이네요. 당시 엄청난 세력을 자랑했을 왕맹을 전적으로 믿고 대사를 맡긴 것도 부견이 후덕한 때문이고, 결과적으로 온갖 적을 다 끌어안아서 화근이 된 것도 부견이 후덕한 때문이니....

    왕맹이 일찍 죽은 것은 대단히 아쉬운 일이네요.
  • 야스페르츠 2009/04/11 12:10 #

    아까운 인재지요. ^^
  • 自重自愛 2009/04/11 00:15 # 답글

    "나의 경략" "나의 경략" "나의 경략" "나의 경략" "나의 경략" "나의 경략" "나의 경략" "나의 경략" "나의 경략" "나의 경략" "나의 경략" "나의 경략" "나의 경략" "나의 경략" "나의 경략" "나의 경략" "나의 경략" "나의 경략" "나의 경략" -o-;;;;
  • 야스페르츠 2009/04/11 12:13 #

    -_-;;
  • paro1923 2009/04/11 00:16 # 삭제 답글

    이제 부견의 '버밀리온 전투'가 벌어지는 일만 남았군요.
    다른 점이라면, 부견은 '뒷치기'를 감행한 부하가 없어 그대로 쓸렸다는 것이지만...
  • 야스페르츠 2009/04/11 12:13 #

    버밀리온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엄청난 삽질이지요. ㅡㅡ;
  • 한단인 2009/04/11 00:46 # 답글

    개인적으로 자치통감에 수록된 후연 vs 고구려 전투가 아주 기대되는 1인(응?)
  • 야스페르츠 2009/04/11 12:14 #

    그, 그런거 몰라효
  • ♡영혼의새♡ 2009/04/11 04:56 # 답글

    어제-오늘 굉장히 즐겁게 읽었습니다. 통일왕조나 하다 못해 3국까지는 어떻게 정리가 되는데 이놈저놈 어중이떠중이가 다 달려든 5호16국은 제대로 정리 안되서 거시기 했는데 덕분에 많은 도움이 된 듯...
  • 야스페르츠 2009/04/11 12:15 #

    즐거우셨다니 다행이네요 ^^
  • 解鳥語 2009/04/11 06:19 # 답글

    이글루스 오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님 연재 올라왔나 확인하는 거랍니다.
  • 야스페르츠 2009/04/11 12:15 #

    헉. 몸둘바를... 감사감사
  • 사불상 2009/04/11 10:52 # 삭제 답글

    흐흠... 저정도면 그냥 밀고 내려가도 다 먹을 듯하니까 들이댔군요.
    지금 봐도 그럴만도 합니다. 18주중 12개를 먹었으니까요.

    삼국지의 위가 촉을 먹고 오를 남겼을때와 비슷하군요.
  • 야스페르츠 2009/04/11 12:15 #

    그렇지요. 비수의 전투는 삽질만 아니었어도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싸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 子聞之曰是禮也 2009/04/11 11:29 # 답글

    1인에게 권력이 집중되었다가 집권자가 사라진 공백을 메우지 못하면 큰일이지요.
    왕맹이 훌륭한 정치가요 군인이었다 하더라도 후계자를 양성하지 않았다면 그걸로도 비판 거리가 되겠습니다.
  • 야스페르츠 2009/04/11 12:16 #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그래도 왕맹이 너무 일찍 급사해버린 감이 있어서...^^
  • 맹꽁이서당 2009/04/11 11:45 # 답글

    5호 16국 시대가 일찍 마무리 될 수 있었던 기회였군요.
    (옆나라 입장에서는 중원의 분열 상태가 오래 가는 것이 더 좋겠지만.. ㅎㅎ)
  • 야스페르츠 2009/04/11 12:17 #

    엄친아가 통일하면 옆집 아들은 큰일이라능.
  • asianote 2009/04/11 15:36 # 삭제 답글

    와룡은 하늘로 가버리고, 늑대가 부견을 유혹하네!
  • 야스페르츠 2009/04/11 20:59 #

    엄친아는 늑대 같은 거 우걱우걱이라능 ㅎㅎ
  • 제길공명 2010/06/22 15:00 # 삭제 답글

    오늘 검색으로 지대로 득템했군요
    오호16국 공부하려는데 앞이 캄캄했거든요.
    재미난 글 읽으면서 '감'좀 잡아보렵니다. 감사합니다.
  • 야스페르츠 2010/06/22 15:18 #

    감사합니다. 즐겁게 읽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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