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4/09 00:05

오호(五胡)의 쟁패 24 - 하늘이 불타던 날 역사

호뢰관 서쪽 땅 내놓으라능.

엄친아 부견이 빚을 청구하자, 모용평과 모용위에게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달랜다고 그대로 줄 수도 없는 노릇. 결론은 어떻게든 무마시켜야 한다. 그러나 모용평이 한 대답은 세련되지도 못했고 현실적이지도 않았다. 물론 아무리 세련되고 현실적이라도 부견은 받아들이지 않았겠지만.

지난번에 땅을 잘라준다는 것은 사신이 잘못 말한 거라능.
頃者割地,行人失辭。


부견은 빚을 갚지 못하는 연에 대해서 강제압류를 시작했다. 일단 원금에 해당하는 것부터 수거하는 것은 당연한 순서. 왕맹을 대장으로 3만의 군사를 이끌고 낙양 침공을 개시한 것이다. 왕맹은 순식간에 호뢰관 서쪽 지역을 휩쓸었다. 낙양에서 외롭게 농성 중이던 모용축도 왕맹의 편지 한 장에 항복하고, 형양(滎陽)까지 정복하여 원금 회수를 완료하였다.

개선해서 돌아온 왕맹에게는 사도(司徒)의 관직과 평양군후(平陽郡侯)의 작위가 내려졌다. 이 관직을 사양하는 까칠남 왕맹의 답변도 걸작이다.

지금 연과 오(吳 : 동진)가 평정되지 않았고 전차는 바야흐로 멍에를 멨는데, 처음 한 개의 성을 얻었다고 바로 삼사(三事)의 상을 받으니, 만약 두 도적을 없애면 장차 무엇을 덧붙여 주시겠습니까
今燕、吳未平,戎車方駕,而始得一城,即受三事之賞,若克殄二寇,將何以加之!


왕맹은 낙양 방면으로 작전에 나설 때 한 가지 음모를 꾸민다. 왕맹은 모용수의 아들 모용령을 종군하도록 하였는데, 출정 직전에는 직접 모용수를 찾아가 모용령이 아버지를 그리워할지도 모르니 애장품(?) 하나를 달라고 청한다. 이에 모용수의 패도(佩刀)를 얻은 왕맹은 낙양을 함락한 후에 모용수의 부하를 매수·모용수의 사자로 위장하게 하여 모용령에게 말을 전한다. 연나라로 돌아가자는 전언. 함정에 빠진 모용령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가 결국 연나라로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왕맹의 음모로 졸지에 아들이 반역(?)을 저지르게 되었으니, 모용수도 가만히 있었다가는 목이 달아날지도 몰랐다. 그러나 모용수는 달아났다가 곧 잡혀서 부견 앞으로 끌려간다. 그러나, 부견은 여기서 앞으로 그의 인생을 망치게 될 작업(?)을 시작한다.

용서. 땅땅땅.


한편, 왕맹은 돌아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밀린 이자를 챙기러 다시 출정한다. 6월 12일에 6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출정한 왕맹은 병주 지역으로 진격하였다. 병주에서 업으로 향하는 길을 방어하는 가장 중요한 거점은 호관(壺關). 왕맹은 호관을 직접 공격하는 한편 배후의 위협이 되는 진양(晉陽)에도 병력을 보내 공격하였다.

이에 대응하는 모용평은 30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이에 맞섰는데, 압도적인 대군을 가지고도 모용평은 전면전에 나서지 않았다. 모용평은 대군을 이끌고 나서면 진군이 위력에 놀라 퇴각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애초에 작정하고 쳐들어온 적이 그렇게 쉽게 물러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두뇌구조는 어디서 나온 걸까. ㅡㅡ;

호관을 함락한 왕맹은 다음 목표인 진양 공격에 합류한다. 9월 10일, 진양마저 함락되었는데, 모용평은 적극적인 대응은 커녕 진격조차 하지 못하고 노천(潞川)에서 발만 동동 구를뿐이었다. 10월 10일, 왕맹은 노천으로 진격하여 모용평의 대군과 대치하였다. 모용평은 왕맹의 보급선이 긴 것을 노리고 대치 상태를 계속하면서 지구전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구전이라는 것도 적절한 유격 활동이 이어져야 수월한 법인데, 모용평은 유격 활동은 커녕 본진에 앉아서 돈놀이나 하고 있었다. 땔감과 물을 독점하여 팔고 있었던 것이다. 병사들의 불만은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치솟았다.

모용평이 적극적으로 펼쳐야 할 유격활동은 오히려 왕맹이 하고 있었다. 왕맹의 유격군은 밤을 틈타 모용평의 군영 배후로 숨어 들어가 치중(輜重 : 보급물자)을 불태워버렸다. 보급물자가 불타는 불빛이 어찌나 컸던지 업에서도 보일 정도였다고 한다. 업에서 오매불망 모용평의 승전보를 기다리던 모용위에게 하늘이 불타는 광경은 가슴이 철렁해지는 모습이었으리라. 모용위는 당장 사신을 보내 모용평을 채근한다.

주군의 채근을 받고서야 겨우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킨 모용평은 23일에 왕맹과 전면전을 시작한다. 치중도 소실된데다가 병사들의 불만도 쌓인 연군이 왕맹을 이길 수 있을리가 없다. 아침에 시작된 전투는 해가 중천에 떠오를 무렵에 벌써 결판이 났다. 5만 명이 전투 중에 사망하였고, 패주 과정에서 죽거나 항복한 자가 10만에 이르렀다. 모용평은 혼자서 업으로 귀환하였다.

사실상 전쟁은 끝이 난 셈이었다. 26일, 연의 수도 업은 포위되었으며, 왕맹은 부견에게 서신을 보내 수도를 함락하는 영광을 돌렸다. 부견이 행차하고 11월 7일, 성은 함락되었으며 도망치던 모용위도 곧 잡혀왔다. 이로써 연은 34년의 짧은 역사를 마감한다.

패자(覇者)로 군림하게 된 부견은 패자(敗者)인 모용위를 용서하는 관용을 보인다. 고구려로 도망쳤다가 송환된 모용평도 용서를 받았다. 부견은 이상주의자였던 것 같다. 5호16국 최강의 엄친아 답게, 바야흐로 왕도 정치를 구현하려는 부견은 한없이 관대했다. 물론, 그 관대함의 끝이 어디일지는 전혀 알지 못했겠지만.

관대한 부견과 달리, 왕맹은 냉정했다. 이 시기에 <자치통감>에서 볼 수 있는 왕맹의 행적들은 전국시대 법가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마키아벨리스트라고나 할까. 국가에 위협이 될 것 같은 세력은 모두 숙청하려고 하고, 적국의 배신은 적극 권장한다. 적국의 충신은 오히려 위협적인 존재로 파악하기까지 하니 철저한 마키아벨리스트다. 왕맹의 이러한 일면을 잘 보여주는 일화를 한 번 살펴보자.

왕맹과 다른 신료들이 한가롭게 잡담을 나누다가 연의 사신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사자로 장안에 온 양침은 연의 조정이 아름답다는 말만 하였고, 악숭은 다만 적군인 환온군이 강하다는 말만 하였으며, 학구는 연의 폐단을 조금 말하였다."

"지금은 세 사람 다 우리 신하인데 왕공은 셋 가운데 누구를 가장 먼저 뽑겠습니까?"

"학구가 기미(幾微)를 아는 자이니 먼저 뽑을 것이다."

"그렇다면 밝으신 공께서는 정공(丁公) 같은 사람에게 상을 주고, 계포(季布) 같은 사람을 주살하시겠군요."

왕맹은 크게 웃었다고 한다. 정공은 유방이 항우와 싸울 때 유방을 놓아준 일이 있었던 인물이다. 유방은 천하를 통일한 후에 자신을 끝까지 괴롭힌 계포는 사면하고 자신을 풀어준 정공은 주군에게 불충한 자라고 하여 참수하였다. 그런데 왕맹은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왕맹이었지만, 부견에게는 하늘이 내린 명재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부견은 왕맹을 새로 얻은 영토 전체를 다스리는 사지절·도독관동육주제군사(使持節、都督關東六州諸軍事)에 임명한다. 본국보다도 더 거대한 영토 전체를 관리하는 엄청난 직위였다. 그야말로 파격적인 인사였다.

덧글

  • 을파소 2009/04/08 23:14 # 답글

    관대한 제왕 밑에 냉정한 참모는 저런 시대라면 필수적인 거 같군요.
  • 야스페르츠 2009/04/08 23:35 #

    확실히 견제가 되었겠지요. 그러나 참모가 죽고 나면... ㅎㄷㄷ
  • 악희惡戱 2009/04/08 23:23 # 답글

    개인적으로 저런 냉혈한이 더 좋다능ㅎㅎㅎ
  • 야스페르츠 2009/04/08 23:36 #

    냉혈한이 좋으신 겁니까, 아니면 귀축이 좋으신 겁니까? (도주)
  • 악희惡戱 2009/04/08 23:39 #

    아무려면 어떻습니까(응?).
  • 子聞之曰是禮也 2009/04/08 23:26 # 답글

    관용이야말로 내부의 적이군요.
  • 야스페르츠 2009/04/08 23:36 #

    인생 망치는 지름길이죠. ^^
  • 한단인 2009/04/08 23:28 # 답글

    어허.. 그러고보니 부견은 하는 짓이 유비와 똑같군요. 유비도 서주로 도망온 여포를 제 사람으로 만들려다가 제대로 뒤통수 맞았지 않았습니까?


    덧. 그나저나 자기 병사들한테 식량을 팔아먹는 놈은 살다살다 처음보는군요.
  • 야스페르츠 2009/04/08 23:37 #

    흠... 그런가요. 그래도 유비는 알게모르게 냉혹한 면이 있지요. 근데 대책없이 관대한 부견은... ㅎㄷㄷ
  • 카구츠치 2009/04/08 23:29 # 답글

    이상적인 구도라고 봅니다. 덕치를 내세운 주군 밑에 피도 눈물도 없는 명재상.
  • 야스페르츠 2009/04/08 23:37 #

    그렇지요. 견제와 집중. (먼소리야 퍽!)
  • 윙후사르 2009/04/08 23:32 # 삭제 답글

    어째 부견과 왕맹은 성향이 정반대 같습니다. 말그대로 유비 재림 부견에 비해 냉혹하고 음모가인 조조같은 왕맹의 조합이라니
  • 야스페르츠 2009/04/08 23:37 #

    아니라능. 라인하르트와 오벨슈타인이라능. (응?)
  • paro1923 2009/04/09 04:44 # 삭제

    유비는 저렇게 안 물렀다능. 모가지 칠 놈은 확실하게 모가지 쳤다능. (쿨럭)
  • 自重自愛 2009/04/08 23:38 # 답글

    저렇게 되고 보니 오히려 궁금한 게, 왕맹은 도대체 뭘 보고 부견에게 충성을 다 바쳤던 건지..... -_-?
  • 야스페르츠 2009/04/08 23:39 #

    헐... 라인하르트를 알아본 오벨슈타인이라고나 할까요... ㅡㅡ;
  • azusa 2009/04/08 23:40 # 답글

    정녕 23에서 25로 넘어온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입니가?! ㅋ
  • 야스페르츠 2009/04/08 23:42 #

    헉... 이런 실수를... ㅠㅠ
  • azusa 2009/04/08 23:48 # 답글

    빠른 수정 두렵군요 ㅋㅋ;

    우리 모용수가 나중에 바람잡이 크리를 ㅋㅋㅋ
  • 사불상 2009/04/09 00:44 # 삭제 답글

    난세에서 관용은 부하를 모이게 하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배반당하게 하는 암초이기도 하죠. 카이사르도 그렇게 침몰했기도 하고...

    적당한 관용과 냉혈의 처형도 패자의 업무라고 생각합니다.


    키르히아이스가 안나오는군요(응?!)
  • 야스페르츠 2009/04/09 10:13 #

    키르히아이스는... 죽었잖습니까. (응?)
  • paro1923 2009/04/09 00:45 # 삭제 답글

    어쩐지 왕맹이 모용수를 가만 놔둔 게 이상하다 싶었는데, 부견이 문제였군요.
    관용도 지나치면 교만이요 우유부단이거늘... (손발도 안 맞고...)
  • 야스페르츠 2009/04/09 10:14 #

    조금 웃기는 상황이죠. 왕맹은 다 죽여버리라고 하는데 부견은 왕도정치는 그럼 안된다고 하니...
  • 耿君 2009/04/09 01:47 # 답글

    아아 사지절도독에까지 이르는군요...
  • 야스페르츠 2009/04/09 10:15 #

    로이엔탈?? (퍽!)
  • asianote 2009/04/09 08:17 # 삭제 답글

    우리 제갈량이 반란 일으켜서 부견 따위 없애버렸다면 중원 통일을 이뤘을지도... (역주행신공)
  • 야스페르츠 2009/04/09 10:15 #

    왕맹님하는 명줄이 짧아서 안된다능.
  • 맹꽁이서당 2009/04/09 13:48 # 답글

    처음 인사드립니다. 링크타고 우연히 발견했다가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특히 이 시리즈는 그동안 전혀 모르던 부분이라 큰 도움이 되네요.
    앞으로도 기대하겠습니다. ^^
  • 야스페르츠 2009/04/09 14:14 #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 들꽃향기 2009/04/09 14:45 # 답글

    일전에 사료를 봤을때, 모용평이 채무불이행(?)을 선언하면서 전진에 보낸 답신의 '頃者割地,行人失辭' 앞에는 "이웃집이 환난을 당하면 구휼하는 것이 당연하고, 국가가 위급을 당하면 서로 도우는 것이 이치이다."라는 구절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대략 이런 편지를 보낸 모용평은 인물됨이 겨우 그 정도밖에...ㄷㄷ
  • 야스페르츠 2009/04/09 16:02 #

    네. 그 구절은 그냥 뺐어요. ^^ 그래야 모용평이 더 찌질해진다능...(역사왜곡 중 퍽!)
  • 소하 2009/04/13 13:46 # 답글

    16국사는 너무 어지러워서 아찔합니다. 탕구의 대표적 집일서인 <16국춘추 집본>을 보고 약간 실망했던 기억이 납니다.
  • 야스페르츠 2009/04/13 16:07 #

    저도 정리가 잘 안됐는데 이번 기회에 조금 자세하게 알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 다복솔군 2010/01/28 01:13 # 답글

    연의의 유비, 공명, 위연의 원형이 여기 있었군요 ㄷㄷ
  • blue 2010/03/29 04:35 # 답글

    관대함으로 겉모습을 치장하는 것보다는 후환을 없애서 잠자리를 편안하게 하는 것이 합리적인 것일지도 모르죠. 곰발바닥을 먹고 죽고 싶다는 아버지 초 성왕의 마지막 소원도 거절해버린 초 목왕 웅상신의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적당히 보고 끝내려고 했는데, 단편적으로 알고 있던 오호16국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서술한 글들을 보니 재미있어서 끝을 못 내겠네요.
  • 부여 2011/03/27 21:46 # 삭제 답글

    울휘 모용평 님하는 고구려로 도망쳤다가 걍 압송 ㄷㄷ
  • 웅웅 2019/03/17 01:19 # 삭제 답글

    일화좀 퍼가겠습니다 ^^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



유사역사학 방지

얼마블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