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3/20 00:02

오호(五胡)의 쟁패 16 - 북벌 No. 1 역사

347년, 환온이 성한을 멸망시키고 촉을 평정하자 동진 조정에서는 논공행상을 두고 심각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환온의 공로야 엄청난 것이었지만, 이제 30대 중반의 창창한 환온에게 너무 큰 은상을 내렸다가는 다음번 논공행상이 난감했다.

"환온이 만약에 다시 황하와 낙양 지역을 평정한다면 장차 무엇으로 그에게 상을 주려고 하십니까"

김칫국부터 마신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이도 젊고 강력한 군사력도 보유하고 있는 환온에게는 결코 과장된 평가는 아니었다. 환온이 사령관으로 있던 서부군(西部軍)은 단순한 군단의 수준을 넘어서는 강력한 집단이었다. 무창(武昌)을 중심으로 한 서부군은 형주를 비롯한 강서 지역을 사실상 지배하는 군벌이었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논공행상이 문제가 아니라 호랑이 새끼를 집안에서 키우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결국 환온에게 내려진 포상은 정서대장군·개부의동삼사를 덧붙이고 임하군공으로 책봉하는 수준에서 마무리 되었다. (이게 어느 정도의 포상인지는 나도 모름. ㅡㅡ;)

동진 조정의 실력자 사마욱(司馬昱)은 위협적인 세력으로 성장한 환온을 견제하기 위해 양주(揚州)자사인 은호(殷浩)를 적극적으로 밀어주었다. 그 결과 양주 지역을 통괄하는 북부군(北部軍)이 급성장하여 환온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349년, 석호가 죽고 후조가 혼란에 빠지자 동진 조정에서는 북벌을 통해 고토를 회복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꿈에 부풀었다. 환온도 북방 진출에 대비해서 임전태세를 갖추는 가운데 양주 북부군의 정북대장군 저부는 서주(徐州) 지역까지 밀고 올라갔다가 패퇴하였다. 섣불리 진출하다가 호되게 데인 동진 조정은 북벌에 대해서 신중한 자세를 취했고, 후조와 염위가 치열하게 싸우고 각지의 군웅들이 독립하는 가운데에서도 섣불리 북벌에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환온이 북벌을 주창하다가 조정에서 계속 거부하자 홧김에 동진의 수도 건강을 향해서 무력시위까지 벌일 정도였다. 동진이 줏어먹지 못하고 있던 떡밥은 북방의 연(燕)과 저족의 진(秦)이 꿀꺽 삼켜 버렸다.

사실 환온이 무력 시위까지 벌이며 북벌을 요구하던 무렵은, 혼란에 빠진 후조에서 떨어져나와 동진에 항복한 지역들이 많아 북벌에 아주 유리한 시점이었다. 산동 일대의 세력들도 동진에 복속을 표명하고 있었고, 심지어 낙양의 군벌도 복속해 있었다. 그러나 환온의 세력이 더 강해질 것을 두려워한 동진 조정에서는 환온의 북벌 요구를 계속 거부하고 있었다. 반면 은호가 352년에 북벌을 개시하겠다고 표문을 올리자 동진 조정은 이를 허락한다. 환온으로서는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은호가 벌인 북벌은 처음부터 난항을 겪었다. 출진을 개시하자마자 하남 지역의 군벌들이 들고 일어나 교착상태에 빠진 것이다. 그나마 성과를 냈던 것은 강족의 요양이 부중을 이끌고 항복한 사건과 전국새(傳國璽)를 되찾은 사건이었다. 염위의 업이 포위된 기회를 틈타 북벌군은 업에 지원군을 보내주는 조건으로 전국새를 되찾아 건강으로 호송할 수 있었다. (그나마 지원군 약속도 공수표로 끝났다. ㅡㅡ;)

북벌군의 장수 사상(謝尙)은 허창을 포위하였는데, 허창의 군벌 장우(張遇)는 이때 진에 항복하여 예주자사에 임명되어 있던 참이었다. 당연히 진의 황제 부건이 구원군을 파견하였고, 결국 사상은 크게 패배하고 말았다. 완패한 사상을 구한 것은 용병으로 종군하고 있던 요양의 강족 군대였다. 겨울에 이르러서야 겨우 허창을 점령하고 하남 일대를 장악하는데 성공하여 간신히 체면치레는 할 수 있었다.

353년, 은호는 2차 북벌을 일으킨다. 그러나 2차 북벌은 1차보다 더 위험한 도박이었다. 당시 은호는 진의 중신이었던 양안과 뇌약아를 매수하여 부건을 암살하도록 지시하였는데, 우연찮게도 양안과 뇌약아가 행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진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은호는 이 사건을 자신이 사주한 암살이 성공한 것으로 착각하여 7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북벌을 개시한다. 그러나 선봉으로 나선 요양이 배신을 함으로써 은호의 북벌군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결국 북벌에 완전히 실패하고 만 은호는 완전히 실각하고 말았다. 한때 환온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북부군이지만, 은호의 실각과 북벌의 실패로 인해 세력을 크게 잃고 말았으며, 조정에서도 더 이상 환온의 북벌 요구를 거절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침내 354년, 환온의 북벌군이 출정을 개시하였다.

1차 북벌로 이미 하남 일대를 평정하였기 때문에 환온의 목표는 부건의 진이었다. 환온은 양주(梁州 : 한중 일대)의 사마훈에게 장안의 서쪽을 공격하도록 하고 자신은 본군을 이끌고 무관(武關)으로 나아갔다. 완벽한 양동작전이었다. 사마훈이 장안 서쪽을 마음껏 약탈하고 다니는 동안 환온은 장안을 직접 압박하여 주력군을 묶어 두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하서의 양 정권도 사마훈에 호응해서 진의 서부 지역을 공격하였다. 부건으로서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환온의 북벌군이 관중에서 한창 싸우고 있을 때, 한 젊은이가 찾아왔다. 권위나 실력 모두 둘째가라면 서러운 귀인 환온을 앞에 두고도 낡은 베옷의 이 젊은이는 안하무인으로 환온이 해야 할 바를 담담하게 설파한다. 어떻게 보자면 웃기는 노릇이니 환온으로서는 그냥 내쳐버려도 될 접견이었다. 그러나 환온도 궁금한 점이 있었다.

"내가 천자의 명령을 받들고 장차 정예군 10만으로 백성을 위해 적을 없애려고 한다. 그런데 왜 삼진(三秦)의 호걸들은 나에게 호응하지 않는 것인가?"

"공이 멀리서 찾아와 적지에 들어섰고 장안을 지척에 두고 있소. 하지만 파수를 건너지 못하고 있으니, 백성들도 아직 공의 마음을 알 수 없소. 그래서 오지 않는 것이오."

환온에게는 가슴이 서늘해지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당시 환온은 100여 년 전 제갈량이 겪었던 고질적인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보급 문제. 환온은 봄에 거두는 보리를 현지에서 탈취하여 군량으로 삼으려고 하였는데, 부건 측에서 미리 청야작전을 벌여 현지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성한을 정벌할 때에도 보급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진격했었던 환온이었다. 애초에 보급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어쨌든 보급은 수월하지 않고 적의 저항이 거세지고 있었으니 환온으로서도 답답한 상태였다.

환온은 젊은이를 참모로 기용한다. 이미 한계에 달한 북벌을 지속하는 것은 이득이 없었기 때문에 환온은 관중의 백성 3천여 호를 이끌고 귀환하였다. 그러나 환온을 진땀흘리게 했던 젊은이는 환온과 함께 가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환온을 만나기 전처럼 산 속에 은거하였다. 이 젊은이의 이름은 왕맹(王猛). 오호의 쟁패에 한 축을 담당할 인물이다.

덧글

  • 自重自愛 2009/03/19 23:50 # 답글

    궁금한 게 있는데, 개부의동삼사는 언제부터 등장하는 관명인지?
  • 야스페르츠 2009/03/20 09:15 #

    커헉... 니름권을 행사하겠습니다. ㅡㅡ;;
  • 自重自愛 2009/03/20 09:26 #

    니름권이 뭡니까? -_-

    저는 개부의동삼사가 북위가 동서로 쪼개졌을 때 서위에서 처음 등장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야스페르츠님 글대로라면 제가 아는 게 틀렸겠구나 싶어서요.
  • 야스페르츠 2009/03/20 09:28 #

    하하하.... 아무튼 자치통감에는 그렇게 나와 있네요. ^^ 저는 관직체계 같은 것에는 젬병인지라... ㅡㅡ;
  • 올드캣 2009/03/20 11:54 #

    삼국시대부터 본 것으로 기억합니다.

    관부를 열 자격(개부) + 삼공과 동등한 대우(의동삼사), 위나라의 곽회나 왕릉, 제갈탄이나 왕창, 손일 등이 있고, 서진 시대에도 보협(보즐 아들)이나 고영(고옹 손자) 등이 있는데, 대충 한 지역을 통수하는 방면군 사령관이나 총독, 그 정도 지위 같습니다. 군부 최고위는 아니고, 그 다음이나 다다음 정도...
  • 自重自愛 2009/03/20 12:51 #

    올드캣/아, 감사합니다. [삼국지]를 보고도 기억을 못하다니..... -_-;;;;
  • 子聞之曰是禮也 2009/03/21 10:05 #

    부(府)는 관부(官府)라기보다 막부(幕府)에 더 가깝지 않을까요?

  • 푸른별빛 2009/03/20 00:29 # 답글

    왕맹의 등장이군요! 저 때 환온이 왕맹을 설득해서 데려갔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 야스페르츠 2009/03/20 09:15 #

    글쎄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요. 어쩌면 환씨의 왕조가 성립되었을지도...
  • 한단인 2009/03/20 09:02 # 답글

    아닛! 이럴수가.. 그 전설적인 명재상이 저렇게 가버리다니..

    제갈량이 유표의 스카웃 제의를 뻥차버린 것보다 더한 사건이군요.
  • 야스페르츠 2009/03/20 09:17 #

    저때 왕맹의 나이가 29세였으니, 수경선생 정도의 안목이라도 알아보기는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
  • asianote 2009/03/20 09:42 # 삭제 답글

    제갈량을 버린 넘이니 나중에 물먹는건 당연한 이치! 제갈량 없는 유비가 된 부견의 최후가 인상적이었지요.
  • 야스페르츠 2009/03/20 16:08 #

    뭐 제갈량을 버린 것은 아니지요. 제갈량에게 버림받았다고 해야 할까요? ^^;;
  • 윙후사르 2009/03/20 15:35 # 삭제 답글

    제가 알기론 환온이 왕맹을 버린 것도 아니고 왕맹 자신은 환온을 따르는 것을 진지하게 검토했다고 합니다. 다만 스승이 절대 반대해서 못 갔다고 합니다.
  • 야스페르츠 2009/03/20 16:09 #

    네. 그렇죠. 환온은 같이 가자고 했는데 왕맹이 거절하고 남았습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 에드워디안 2010/11/14 10:31 # 답글

    환온을 견제하기 위해 은호를 등용한 회계왕 사마욱은 훗날 환온에 의해 간문제로 즉위하였죠. 언제 어떻게 폐위될 지 몰라 노심초사하다가 1년만에 죽었습니다.-_-

    저 때 전국새를 되찾음으로써, 동진 조정의 기쁨이 대단했다고 하지요. 옥새가 건강에 도착하자 백관들이 총출동하여 축하 의식을 가질 정도였으니... 그리고 환온의 1차 북벌 당시, 부생이 동진군의 진영을 십 여 차례나 들락거리며 수많은 將士들을 죽이는 활약(?)을 펼치기도 했다네요. 전투는 전진의 대패로 끝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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