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3/10 22:18

오호(五胡)의 쟁패 14 - Genocide 역사

348년, 석호의 태자 석선이 참혹하게 처형당하면서 조의 태자 자리는 비게 되었다. 벌써 두번이나 태자를 갈아치운 석호로서는 새로 세우게 될 태자도 안심할 수 없었다.

어찌하여 오로지 나쁜 아들만 낳아서 나이가 20세만 넘으면 번번히 아버지를 죽이고자 하는가!
何爲專生惡子,年逾二十輒欲殺父!


석호는 결국 10세의 어린 아들 석세(石世)를 태자로 삼아 반란의 싹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석세가 아주 어렸기 때문에 장시와 장거, 이농 등을 붙여 주어 태자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리고 세월은 흘러 6개월 후, 석호는 병석에 눕게 되었다. 태자 석세와 국가의 존망이 걱정된 석호는 석세를 보좌할 수 있도록 팽성왕 석준(石遵)과 연왕 석빈(石斌)을 요직에 임명하였다. 명을 받고 두 사람이 수도 업으로 귀환하는 동안 석호의 병세는 더욱 깊어졌고 태자의 모후 유씨(劉氏)는 석준이나 석빈이 보필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결국 석빈을 속여 귀환을 방해하다가 살해하였으며, 석준은 석호를 만나보지도 못한 채 관중(關中)을 방어하기 위해 떠났다.

마침내 349년 4월 23일, 석호가 죽고 11세의 석세가 황제에 즉위하였다. 당연히 태후가 된 유씨가 섭정을 하게 되었으며, 장시와 더불어 정권을 장악하였다. 석세를 보필하라고 붙여준 장시, 장거, 이농 등은 정권을 잡고 나자 자신들끼리 분열하여 싸우기 시작하였으며, 다툼에서 밀린 이농은 광종(廣宗)으로 달아나 반군을 조직하였으며, 장거가 이들을 포위하였다.


한편 관중을 향해 이동하던 석준은 하내(河內) 지역에서 석호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마침 반란을 진압하고 귀환중이던 요익중, 포홍, 석민(石閔) 등이 석준을 만나 황위를 빼앗을 것을 권하였고, 석준은 그들의 권유에 따라 칼끝을 돌려 업을 향했다. 사실상 수도 업의 군대는 이농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진해 있었기 때문에 석준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입성할 수 있었다.

결국 석세는 재위 33일 만에 폐위·살해되고, 석준이 황위에 오른다.

석준의 즉위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바로 석민이었다. 석민은 본래 성씨가 염(冉)으로, 311년에 석호의 양자가 되어 자랐으며 석호의 치세 때 많은 전공을 세웠던 바 있다. 석준은 뛰어난 무장이었던 석민에게 황태자의 자리를 약속하고 쿠데타에 참여하게 하였는데, 쿠데타에 성공한 후에는 석민을 제쳐두고 다른 이를 태자로 삼았다. 사실, 석민은 애초부터 석호와 피가 섞인 사이가 아니므로 태자가 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인지, 석민 자신도 태자가 되지 못한 불만은 그다지 표시하지 않은 것 같다. 석준 역시 석민이 원한을 품었을지도 모르는데도 그를 중용하여 여러 전선에서 활약하게 하였다.

석준이 즉위하였지만, 아직 혼란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석준의 즉위 소식을 들은 패왕 석충(石沖)은 계(薊)에서 거병하여 업을 향해 진격하였으며, 관중에서는 낙평왕 석포(石苞)가 반란을 획책하였다. 북방에서는 모용황의 연이, 남방에서는 동진의 환온이 조의 혼란을 틈타 기회를 엿보기 시작하였다. 동진에서는 직접 실력 행사에 나서 수춘을 점령하고 한때 서주(徐州)를 위협하기도 하였으나 이농의 반격으로 수춘까지 도로 빼앗겼다. 혼란에 빠져 있다고는 해도 아직 북방의 실력은 강력했다.

석준을 석민을 보내 석충의 반란을 진압하였으며, 관중에서 반란을 일으킨 석포는 동진의 양주(梁州 : 섬서성 남부)에서 관중을 위협하였기 때문에 이를 막느라 진격하지 못하였다. 석준은 석포의 위기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석포를 체포하고 관중을 안정시켰다. 아직 북방의 연도 기회를 노리고 있을 뿐 움직이지는 않고 있었다.

11월, 대부분의 혼란이 정리되어 한숨을 돌리게 된 석준은 드디어 위협적인 세력으로 성장한 석민을 제거할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모의는 의양왕 석감(石鑒)이 배신하는 바람에 석민에게 들통나게 되었으며, 석민은 석준을 폐위하고 석감을 황제에 옹립하였다. 석준은,"내가 오히려 이와 같거늘 석감이라고 며칠이나 가겠는가." 라고 말하며 폐위·살해되었다.

석감이 즉위하였지만, 사실상 조의 실권은 석민이 쥐고 있었다. 여기에 황제가 고작 반년 만에 쿠데타로 교체되었으니 간신히 안정을 되찾은 조에는 다시 혼란이 시작되었다. 중원으로 이주하여 살고 있던 저족들이 포홍을 수장으로 하여 다시 관중을 향해 이주하기 시작하였으며, 석감은 포홍의 세력을 두려워하여 포홍을 관중을 진무하는 관직에 임명하였다. 양국(襄國)에 주둔하고 있던 신흥왕 석지(石祗)가 요익중, 포홍 등과 연계하여 석민을 제거하기 위해 거병하였으며, 석민은 이농과 함께 이를 토벌하기 위해 출진하려 하였다. 황제 석감은 이때를 틈타 석민을 암살하려 하다가 실패하였으며, 부하에게 모든 잘못을 뒤집어 씌우고 자신은 석민에게 다시 항복하였다.

한족 출신이었던 석민은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이민족, 즉 호족(胡族)에 대해서 강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석민은 수도 안의 호족들이 무기를 소지하지 못하게 명을 내렸고, 이에 더해서 성 밖의 한족들을 불러들였다. 위기를 느낀 호족들은 탈출하려 하였으며, 석민은 석민대로 호족들이 탈출하려 하는 것을 보고 호족에 대해서 위기를 느꼈다. 결국, 끔찍한 명령이 내려진다.

조의 사람으로 호족 한 사람의 목을 베어 봉양문으로 보낸 자는, 문관(관리)는 3등급을 승진시키고, 무관(사병)은 모두 아문(牙門 : 장교)으로 삼을 것이다.
趙人斬一胡首送鳳陽門者,文官進位三等,武官悉拜牙門。


마침내 대량 학살이 시작되었다. 하룻밤만에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수도 지역에서만 도합 20여만 명이 살해당했다. 또한 지방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에도 전령을 보내니 주로 지휘관 급에 있었던 호족들을 비롯하여 많은 이들이 살해되었다. 심지어 코가 높거나 수염이 많은 사람은 호족으로 오인되어 죽기도 하였으니, 살해된 자의 반수가 이렇게 오해로 살해되었다고 한다.(내가 이때 살았다면 죽었겠군... ㅎㄷㄷ)

사실상 이 학살극으로 조의 석씨 왕조의 생명은 끝이 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석민의 세력 역시 업 인근에 국한되어 있었으며, 각지에서 석민에 대항하여 반란이 일어나고 독립적인 세력들이 구축되었다. 그 가운데 두각을 나타냈던 것이 바로 저족의 포홍, 강족의 요익중이다.

350년 윤정월, 석감은 마침내 폐위되고 석민이 황제에 즉위하였다. 국호를 고쳐 대위(大魏)라고 하였으니, 5호16국에는 끼지 못하였지만 5호의 쟁패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국가 염위(冉魏)의 탄생이다.



덧글

  • 카구츠치 2009/03/10 22:40 # 답글

    흠.... 전개된 사실로 봐서는 지리멸렬한 나라였을 것 같은데,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주목되네요.
  • 야스페르츠 2009/03/11 09:13 #

    역할이야 뭐... 멍석을 깔아 주었다고나 할까요? ^^
  • 한단인 2009/03/10 23:42 # 답글

    오호.. 염위는 그냥 지나가는 찌질이 나라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보군요. 혹 전진과 전연이 중원으로 나타나는데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서 그런가요?
  • 야스페르츠 2009/03/11 09:14 #

    뭐, 엄밀하게 말해서 염위 보다는 차라리 전진 멸망 후에 등장하는 양(凉) 시리즈들이 더 찌질할지도 모릅니다. ㅡㅡ;
  • 초록불 2009/03/11 00:42 # 답글

    갈수록 흥미진진합니다.
  • 야스페르츠 2009/03/11 09:14 #

    ^^ 감사합니다.
  • 自重自愛 2009/03/11 17:18 # 답글

    석호의 고민은 태자밀건법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만주족은 갈족의 후예. (뭔소리야)
  • 야스페르츠 2009/03/11 22:29 #

    갈족은 멸문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만주족은 어디서?? (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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