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2/21 00:13

오호(五胡)의 쟁패 8 - 낙양의 결전 역사

328년 7월, 후조의 장수 석호(石虎)는 4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지관(軹關)을 지나 전조의 하동(河東)을 공격하였다. 전조가 병주 지역에 가지고 있던 최후의 거점을 공략한 것이다. 하동은 곧 무너지고, 석호는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포판(蒲阪)을 공격하였다. 포판이 떨어지고 나면, 전조의 수도인 장안까지는 그야말로 코앞이었다.

석호의 공격 소식을 전달받은 유요는 일단 하서의 양 정권과 구지의 양난적(楊難敵)에 대비하고 난 뒤, 10만에 달하는 대군을 일으켜 포판의 구원에 나섰다. 유요의 대군이 위관(衛關 : 동관)에 집결하여 황하를 건너자, 석호는 중과부적임을 깨닫고 포위를 풀어 퇴각에 나섰다.

전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퇴각이라고 한다. 석호의 퇴각 역시 그러했다. 유요는 퇴각하는 석호를 재빨리 추격하였다. 그리하여 8월에 이르러 고후(高候)에서 따라잡혔으니, 결국 석호는 크게 패배하였다. 이때의 전투 경과에 대해서 <자치통감>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시체가 200여 리에 누워있고, 물자와 무기를 빼앗은 것이 억을 헤아렸다.
枕尸二百餘里,收其資仗億計


석호의 패배로 인해 후조의 방어선은 거의 무너지다시피 하였고, 유요는 낙양을 노리고 다시 황하를 건넜다. 낙양을 지키던 석생(石生)은 농성전을 결의하였으며, 유요는 낙양을 포위하고 방죽을 무너뜨려서 수공을 펼쳤다. 한편으로 주변 지역을 정리하여 형양에서 하내에 이르는 낙양 방어의 주요 거점들을 모두 장악하였다. 그리하여 유요의 군사들은 후조의 수도였던 양국(襄國)을 지척에 두게 되었다.

수춘을 넘보다가 목숨을 잃을 뻔 했던 "갈피대책" 사건 이후 석륵에게 찾아온 두 번째 대위기였다. 유요의 병력은 강력하고, 이미 요소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구원군을 파견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낙양에 고립된 석생이 성을 굳게 지켰기 때문에 유요는 후조의 중심을 향해서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은 계속 흘러 3개월이 지났다. 겨울이 되도록 석생의 농성은 길어지고, 석륵의 적극적인 공세도 없자 유요는 긴장을 풀었다. 총신들과 진중에서 술을 마시며 노는 나날이 이어졌고 이에 비례하듯이 사졸들도 고생이 심해져 쇠약해져 갔다. 유요는 술에 취해서 간언을 하는 부하를 참수하고 요충지에 대한 방어도 소홀히 하였으며 병사들을 위무하지도 않았다.

반면 석륵은 낙양을 구원하기 위해서 절치부심, 칼을 갈고 있었다. 11월이 되어 석륵은 직접 출진하여 낙양을 구원할 생각을 하고 주위의 신하들에게 의견을 묻는다.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는 의견과, 과감하게 진격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타났고, 석륵은 결단을 내린다. 주저하는 신하들의 목을 베고(신하들 지못미 ㅡㅡ;;) 출진을 결의한 것이다.

석륵은 각지의 장수들에게 병력을 모아 형양에 집결하도록 명령을 내리는 한편 석륵 자신도 보기 4만의 병력을 이끌고 출진하였다. 때는 겨울이었기 때문에 바람이 심하고 황하도 얼어붙어 있던 시기였다. 그런데 석륵이 황하에 도착하니, 얼음이 녹고 바람이 그쳐서 석륵은 쉽게 황하를 도하할 수 있었다. 석륵이 도하하고 나자 다시 얼음이 얼고 바람이 세차게 몰아쳤다고 한다.


어쨌거나, 황하를 건넌 석륵은 함께 종군한 주전파 신하인 서광(徐光)에게 말하였다.


“유요가 성고관에 많은 군사를 두면 상책일 것이고, 낙수를 막고 있으면 그 다음이고, 앉아서 낙양을 지키고 있으면 사로잡을 수 있을 뿐이다.”
曜盛兵成皋關,上計也;阻洛水,其次也;坐守洛陽者成擒也。

※ 낙양 전투도 (푸른색 실선은 석호의 진격로, 붉은색 실선은 유요의 진격로, 붉은 반원은 유요의 진출 범위, 청색 점선은 석륵의 반격로)

12월 을해일(1일), 후조의 여러 군사들이 마침내 성고관(成皋關 : 삼국지의 주요 무대 가운데 하나였던 사수관·호뢰관을 말함, 낙양을 방어하는 주요 관문 중 하나로 형양 근방에 있음)에 집결하였다. 그 병력은 보병이 6만, 기병이 2만 7천에 이르렀다. 석륵은 성고관을 지키는 병력이 없음을 보고 크게 기뻐하였다. 석륵이 기뻐하는 모습을 <진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가 다시 이마에 대고 말하였다. “하늘이시여!”
舉手指天,又自指額曰:「天也!」


승리를 확신한 석륵은 빠르고 은밀하게 진격하기 위해 갑옷을 벗어들어 몸을 가볍게 하고 말에게 재갈을 물려 소리가 나지 않게 하였다. 좁은 길을 통해 밤낮으로 달린 석륵은 단숨에 낙수까지 내달렸다. 두 번째 고비였던 낙수 역시 무인지경이었다.

한편 여전히 술독에 빠져 있던 유요는 석륵이 황하를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겨우 형양의 방위병력을 증강시키는 것을 의논하기 시작하였다. 당연히, 의논이 끝나기도 전에 석륵은 성고관을 통과하였으며, 그것도 모르던 유요는 성고관의 북쪽에 있던 황마관(黃馬關)을 막도록 병력을 파견하였다.그리고 얼마 후 낙수를 지키던 척후병이 석륵의 선봉대와 교전을 치르고 포로를 잡아 보내왔다. 포로는 석륵의 군세가 대단하다는 말하였고, 유요는 그제서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포위를 풀어 성의 서쪽에 포진하였다.


유요의 진형도 석륵에게는 상당히 유리한 상태였던 것 같다. 기록에 따르면 10여 만의 무리가 남북으로 10여 리에 걸쳐서 뻗어 있었다고 하는데, 석륵은 이러한 유요의 포진을 보고 아주 기뻐하였다고 한다.


“나에게 축하할 만하다!”
可以賀我矣!


석륵은 보기 4만 명의 병력을 인솔하고 낙양성에 입성하였다. 나머지 4만7천 명의 병력은 낙양성 남북에 포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석호는 성의 북쪽에서 3만 명의 보병을 이끌었으며, 석감과 석총이 각기 정예 기병 8천 명 씩을 가지고 양익을 맡았다.

기묘일(5일)의 아침이 밝았다. 석륵과 유요가 처음으로 정면 승부를 치르게 되는 날이었다. 그러나 이 전투는 시작부터 승패가 결정되어 있었다. 유요는 국운을 건 대승부를 앞두고도 술을 한 말이 넘도록 마시고 취한 채로 출진하였다. 게다가 그가 항상 타던 붉은 말(적토마?? -_-;)도 상태가 좋지 않아 낮선 말을 탔다. 시작부터 불길한 싸움이었다.


석호가 3만의 보병을 이끌고 성의 북쪽에서 서쪽으로 진격하면서 유요의 중군(中軍)을 공격하였다. 석감과 석총의 기병 1만6천 명은 성의 서쪽에서 북쪽으로 가며 유요군의 선봉대와 맞붙어 서양문(西陽門 : 낙양성의 남쪽 첫번째 문)에서 크게 싸웠다. 한편 석륵은 직접 병력을 이끌고 창개문(閶闔門 : 낙양 서성의 북쪽 첫번째 문)으로 출진하여 협공을 펼쳤다고 한다.


전투의 전체적인 모습이 쉽게 떠오르지는 않지만, 夾擊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유요의 병력이 석륵과 석호, 석감 등에게 포위되었던 것 같다. 이러한 상황에서 술에 취한채 지휘하던 유요는 격전이 벌어지고 있던 서양문에 이르렀다. 진을 지휘하면서 성문 근처의 평지로 잘못 내려섰던 것 같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기병을 이끌던 석감이 몰아쳤고, 유요의 군사들은 마침내 패주하기 시작하였다.


유요는 익숙하지 못한 말을 몰고 달아나다가 말이 발을 헛디뎌 얼음 위로 내동댕이쳐졌다. 석감에게 포로로 잡히기까지 10여 군데에 창칼을 맞았다고 한다. 석륵이 크게 승리하였으니 참수한 수급이 5만에 달했다. 석륵은 더 이상의 추격은 하지 말 것을 명하였다. 적의 총사령관이자 황제인 유요를 사로잡았으니 사실상 전쟁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유요는 오래지않아 석륵에게 처형당하였으며, 유요의 뒤를 이어 관중에서 전조를 계승한 유희(劉熙)는 장안을 버리고 서쪽의 진주(秦州 : 감숙성 동남부)로 도망쳤다. 그러나 그렇게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잠시 뿐, 329년 9월에 석호가 공격해와 마지막 남은 전조의 세력을 뿌리 뽑아 버렸다.


유연이 한나라를 건국한지 26년, 6명의 황제를 거쳐 흉노의 선우 씨족이 세운 국가는 이렇게 허무한 역사를 마쳤다. 그리고 하북의 패권은 흉노의 하위 부족에 불과했던 갈족 출신의 석륵에게 넘어갔다.


덧글

  • 한단인 2009/02/21 00:30 # 답글

    미치겠네.. 짤방으로 올라온 지도를 보면서 왜 자꾸 게임 '와룡전'이 생각이 날까요... 게임 금단현상인가...OTL
  • 야스페르츠 2009/02/21 00:37 #

    ㅋㅋ 와룡전... 진짜 초 고전 게임이로군요. 왠지 지도 모양이 비슷한 것 같기도 하네요.
  • 악희惡戱 2009/02/21 00:53 # 답글

    사실 진짜 캐막장은 유요 같이 어이없게 목숨 여럿 버리는 것들이죠-_-
  • 야스페르츠 2009/02/21 08:57 #

    허허... 그렇다면, 비수대전 같은 케이스야말로 진짜 캐막장인가효?? ^^;;
  • 소시민 2009/02/21 09:10 # 답글

    석호라면 폭군계의 레전드 그 분이군요...
  • 야스페르츠 2009/02/21 16:13 #

    둘째가라면 서러울 폭군이죠. ㅡㅡ;
  • asianote 2009/02/21 13:01 # 삭제 답글

    석륵이라면 본인은 자신을 광무제급으로 생각했다는데 과연 능력자라고 생각됩니다.
  • 야스페르츠 2009/02/21 16:14 #

    이 시대에서 등장한 인물들 중에서는 정말 최고 수준에 속할만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 自重自愛 2009/02/21 21:45 # 답글

    솔직히 석륵을 좀 미화하고 유요를 일부러 깎아내린 듯한 느낌이..... 물론 결과를 놓고 보자면 유요가 진건 사실입니다만. -_-

    유요가 성고관이나 낙수를 지키지 않은 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제 3자가 보기에 납득할 수 없는 이유겠지만 어찌되었건. -_-)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어서 안타깝습니다. -_-
  • 야스페르츠 2009/02/22 11:41 #

    뭐, 술에 취해 있었다는 기록을 무작정 무시해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요. ^^;
  • 다복솔군 2010/01/27 13:19 # 답글

    근데 대체 갈피대책이란 무엇입니까? =_=;; 몇번을 검색해도 찾을 수가 없어요 ㅠㅠ
  • 야스페르츠 2010/01/27 15:17 #

    "무의미한 약탈 전쟁을 그만두고 하북의 기주 일대를 중심으로 세력을 구축할 것을 건의"한 것이 갈피대책입니다. ^^
  • blue 2010/03/29 03:50 # 답글

    성고(成皋)는 전국 시대에는 한(韓)의 영토였는데, 진이 어떻게든 뺏으려고 하고 다른 나라들이 연합해서 까지 그 진격을 막은 것 보니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거점이었나 봅니다. 그게 삼국 시대에는 사수관, 호뢰관으로 되었었군요. 유요의 진격로는 함곡관을 통한 것인데, 석호의 진격로는 상당히 험준한 산악지대를 통과하는 것으로 되어있군요. 제가 아는 수준에서는 동쪽에서 관중으로 진격하려면 함곡관 루트, 남쪽의 무관 루트, 그리고 태원을 경유하는 북쪽 루트 뿐인데, 관련해서 알고 계시면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사실 저도 역사책에서 본 것과 지도를 비교하는 정도의 지식 밖에 없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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