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2/17 00:19

오호(五胡)의 쟁패 6 - 난세의 별천지 역사

300년 경, 팔왕의 난, 311년 영가의 난을 거치면서 중국 대륙은 혼란의 극한을 향해 치달았다. 동서남북, 중앙과 변방, 한족과 호족의 구분 없이, 중국 전토는 수많은 이민족의 준동, 셀 수도 없는 반란으로 끔찍한 혼란 속에 있었다. 인세가 혼란스러우니 하늘도 혼란스러웠는지, 각지에는 기근이 들어 혼란을 더욱 부채질했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 시대에도 별천지와 같은 평온을 유지했던 곳이 있었다. 너무나도 평안했기에 역사의 중심에 들지 못했지만, 역사의 중심에 서지 못했기에 또 다시 평안했다. 그곳은 바로 하서(河西 : 감숙성 중서부, 황하 서쪽의 땅)와 촉(蜀 : 사천성)이다.


사천에 들어선 파저족의 정권 성(成)의 건국에 대해서는 이미 전술한 바 있다. 304년 10월에 성도왕(成都王)에 즉위하였던 이웅(李雄)은 306년에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대성(大成)이라 하였다.

그.리.고.

사실상 성과 이웅에 대한 기록은 여기서 끝이다. 종종 짤막한 기사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역사에서는 변방에 속했고, 땅 자체도 워낙에 평온했기에 성의 황제 이웅은 오히려 역사 속에서 많은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진서> 재기를 살펴보면, 성을 건국하기 이전인 이특·이류가 1권을 구성하는데 반해, 성이 건국되어 멸망하기까지 약 40년, 5대를 전한 성한 왕조의 기록은 고작 1권이다.

<진서> 재기는 이웅의 죽음을 기록한 이후 그의 치세에 대해서 이렇게 평했다.

해내(海內 : 천하)가 크게 혼란하였을 때에도 촉은 홀로 아무런 일이 없었다.
時海內大亂,而蜀獨無事。


역사에 많은 기록을 남기지 못한 치세가 오히려 태평성대의 훌륭한 치세라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직접 기록을 남겼던 중국의 역대 왕조였다면, 태평성대 속에서도 많은 기록을 남겼겠지만, 진 왕조라는 외국의 눈에 의해 기록되었던 이웅의 치세는 무사무탈했기에 역사 속에서도 그 흔적을 많이 남기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렇게나 평온했던 성도, 이웅의 사후 후계자 문제로 시끄러워졌고, 그 결과 등극한 한 사람의 폭군으로 인해 태평성대의 꿈에서 깨어나게 된다.



한편, 하서 지역에는 301년부터 한족인 장궤(張軌)가 반 독립적인 정권을 꾸려가고 있다고 전술한 바 있다. 하서 지역은 진 왕조 시기에 양주(凉州)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강(羌), 저(氐), 선비(鮮卑) 등의 이민족들이 많아 언제나 위험천만한 지역이었다.

장궤가 이 지역에 부임한 직후에는 참 여러가지 사건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기록이라는 것은 참 아이러니한 것이, 양주 역시 변방 지역이었기 때문에 장궤가 하서에서 했던 여러 활약들 역시 변방에 걸맞게 짤막하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장궤가 모두 평정하고 위엄을 떨쳤다.

그리고 하서 지역은 참으로 평온하고 평온했다.

물론, 완전히 역사의 주요 무대에서 동떨어져 있던 촉과 달리 하서는 역사의 무대에서 상당히 가까운 편에 속했다. 그렇기에 장궤는 진 왕조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복속되어 있음을 분명하게 했다. 그러나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그의 정권은 사실상의 독립적인 국가나 마찬가지였다.

진 왕조는 이미 망조에 들었고, 장궤, 그리고 그의 아들 장식(張寔)은 겉으로는 진 왕조의 보위를 위해 힘쓰는 것처럼 지원군을 보내고, 장안에서 버티던 사마업의 임시정부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러나 실상은 자신들의 영지인 하서 지역이 전화에 휩쓸리는 것을 막고자 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다.

민제(愍帝 : 사마업)의 장안 정부가 무너진 이후에도, 관중 일대에는 사마보(司馬保)가 진왕(秦王)을 자칭하면서 저항군(?)을 이끌었는데, 장식은 사마보를 여러 면에서 지원하면서도 사마보의 군대가 하서로 들어서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 때를 두고 <자치통감>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옹주와 진주의 백성들 가운데 죽은 사람이 열에 8~9명이었으나 홀로 양주만은 안전하였다.
雍, 秦之民, 死者什八九, 獨凉州安全。


하서의 장씨 정권이 본격적으로 완전히 독립된 국가를 건국하게 되는 때는 320년, 장식의 동생 장무(張茂)가 사사로이 정권을 이어받으면서부터로 보고 있다. 그 이전에도 장궤에서 장식으로 세습되기는 했지만, 표면적으로는 장안의 민제에게 량주자사로 임명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320년에 이루어진 장무의 승계는 전적으로 독자적인 것이었다. 물론 명목상 아직까지 하서 정권은 진 왕조의 조정과 관계를 끊지 않고 있었다.

하서 정권의 특징적인 것 가운데 하나는 연호이다.

기본적으로 독립국가가 아닌 이상 진 왕실의 연호를 쓰는 것이 법도이다. 하서 정권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독특하게도 하서 정권은 장안의 민제가 멸망한 이후에도 민제의 연호인 건흥(建興)을 계속 사용하였다. 민제의 건흥 연호는 313년부터 시작되었는데, 316년에 건흥 연호가 사실상 폐지되고 건업에서 다시 일어난 진 왕조에서 세운 연호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하서 정권은 건흥 연호를 계속 이어서 사용하였으며, 361년까지 49년 동안이나 건흥 연호를 계속 사용한다.

한편, 그러한 와중에도 대내적으로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던 흔적도 보인다. 정말로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세일원제처럼 보이는 6명의 왕, 6개의 연호가 전해진다.(정확하게는 7명, 7개이지만 자세한 것은 후술하겠음)

장무가 이끄는 하서 정권은 323년, 장안을 중심으로 다시 일어난 흉노의 조(趙 : 전조)의 침공을 맞는다. 사마보를 대신 내세워 하서를 보위하려던 교묘한 술책은 사마보가 무너짐으로써 끝이 나고, 결국 하서의 영토가 적의 침략에 노출된 것이다.

그러나 조로서도 하서의 국력은 함부로 넘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묘한 힘겨루기와 인내력 대결을 거쳐, 장무는 마침내 유요의 조에 신속을 결정하였고, 유요 역시 하서 정권의 힘을 인정하여 사실상의 독립국가로 존재하도록 인정하였다. 그리고 바로 이때, 하서 정권은 공식적(?)으로 양왕(凉王)에 책봉됨으로써 양(凉 : 전량)이 성립되었다.


덧글

  • 을파소 2009/02/17 00:51 # 답글

    후대에 보는 재미는 태평성대보다는 전쟁이 더 낫지만, 당대에 사는 건 정반대일 수 밖에 없겠죠.
  • 야스페르츠 2009/02/17 10:00 #

    태평성대는 포스팅할 거리가 없어서 초큼 그렇다능. ㅡㅡ;
  • 한단인 2009/02/17 01:13 # 답글

    개인적으로 이런 재밌는 포스팅은 저희 카페에서도 연재가 되었으면 하는 무례한 희망사항이 있다능..(응?)
  • 야스페르츠 2009/02/17 10:01 #

    헐... 한단인 님이 운영하는 카페가 어디더라... 역사문 카페였던가요??
  • 한단인 2009/02/17 20:16 #

    그럽지요. ㅎㅎ
  • blue 2010/03/28 22:38 # 답글

    지도를 보면, 蜀지방은 한중을 경유해서 관중으로 가는 북쪽 경로와 양양으로 가는 동쪽 경로, 그리고 지금의 중경 근처인 검중을 통해서 동쪽으로 가는 경로만 막아버리면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곳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원래 땅 자체가 비옥한 곳이라서 자체적으로 먹고 살만하니 외부의 간섭없이 살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삼국시대의 촉을 제외하고는 의외로 쉽게 침범당하는 것 같은데, 아마도 이런 천혜의 자연적 조건을 너무 믿은 나머지 방비를 안 했을 것이라는 또다른 추측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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