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2/07 00:23

오호(五胡)의 쟁패 4 - 천하에 부는 바람 역사

시대의 주인공 역할을 하고 있는 흉노에게서 눈을 돌려 나머지 4호와 천하의 정세를 살펴보자.

진 왕조는 8왕의 난이 한창이던 무렵부터 이미 전국을 통치할 능력을 거의 상실한 상태였다.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이를 진압하기에도 벅찬 마당에 종실왕들끼리 피비린내나는 정권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으니, 당시의 국내가 얼마나 혼란했을지는 안봐도 뻔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장성 너머에는 여러 선비족 일파들이 세력을 키우고 있었고, 감숙 및 섬서 일대에도 저족, 강족 등이 서서히 흘러들어와 있었다. 선비족은 차라리 장성 너머에 있었으니 잠시 제쳐두더라도, 강족과 저족은 후한 시대부터 관중으로 대거 이주되기도 하여 진 시대에 이르면 관중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고 일컬어질 정도였으니 걱정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진의 강통(江統)은 융인(戎人 : 저, 강족)과 적인(狄人 : 흉노)이 중화를 어지럽히고 있으니 그 원인부터 끊어야 한다는 <사융론(徙戎論)>을 지어 바치기도 하였을 정도다. 그러나 이미 중국의 영역 내부로 깊숙하게 자리잡고 있는 이민족들을 색출해서 이주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흉노가 준동하기 이전에 이미 중국 영내의 이민족들은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8왕의 난이 소강상태에 있었던 296년에서 298년까지, 관중 일대에는 큰 기근이 들어 유랑민이 많이 발생했다. 이러한 유랑민을 이끌었던 것이 파저(巴氐)의 이특(李特)·이류(李流) 형제였다. 이들 유랑민들은 한중(漢中)을 거쳐 촉(蜀 : 사천)으로 흘러들어가 살았다. 이특은 촉으로 들어가는 길에 검각에 이르러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유선이 이와 같은 땅을 가지고도 다른 사람에게 항복하였으니, 어찌 재주 없는 용렬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300년, 8왕의 난이 막 일어났을 무렵, 익주(益州)에서는 조흠(趙)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특 형제는 조흠에게 협력하였는데, 301년에 조흠이 이특의 형 이상을 죽이자 이특은 반격해서 성도를 함락하고 조흠의 반란군을 격파하였다. 마침 조흠을 토벌하기 위해 나상(羅尙)이 진격중이었는데, 이특은 나상에게 성도를 내주고 그 공로로 관직을 수여받고 봉작도 받았다. 그러나 나상은 이특을 따르는 유민들을 관중으로 돌려보내려 하였고, 이에 이특은 군대를 일으켜 나상을 공격하였다. 303년, 이특은 성도의 두 성곽 중 소성(小城)을 함락하고 나상을 태성(太城)에 몰아 넣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잠시 방심을 한 사이 습격을 당해 이특은 죽고 군대도 와해되었다. 이특의 동생 이류는 조카 이웅(李雄 : 이특의 아들)과 함께 다시 나상과 대결하였고 마침내 303년 말, 이웅은 나상을 물리치고 성도를 함락하였다.

304년 10월, 이웅이 성도왕에 즉위하니 흉노의 유연이 한왕에 즉위한 것과 같은 시기였다. 사천 지역이 진의 판도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다.


한편, 장성 너머에서 활약하던 선비는 탁발의로(拓跋猗盧)를 중심으로 하는 탁발부, 모용외(慕容廆)를 중심으로 하는 모용부가 세력을 크게 키우고 있었다.

탁발부는 주로 산서성 북부 및 내몽고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니, 산서의 흉노와 바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래서 탁발부는 진 왕실에 복종하면서 유연의 한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탁발의로는 진을 도와 흉노와 싸운 공으로 장성 안쪽의 일부 영역을 차지하는데 성공하여 더욱 세력을 키웠다.

모용부는 유주의 북쪽, 주로 요서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진 초기에는 요동 및 유주 일대를 침공하여 동북 변경을 많이 위협하였으나 영가의 난 이후에는 진의 잔존 세력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유주 일대를 장악해 나가고 있었다. 특히 모용외는 일세의 영걸로 뛰어난 정치를 펼쳤기 때문에 세력이 크게 성장하였다. 영가의 난 이후 북쪽으로 피난을 떠난 유민들은 진의 잔존 세력들이나 다른 선비 부족들을 견디지 못하고 대부분 모용외에게 흘러들어갔는데, 모용외는 이들을 잘 포섭하여 점점 더 세력을 키워 나갔다.


저족의 지도자 포홍(蒲洪)은 감숙성 동북부 일대에서 할거하였고, 강족의 지도자 요익중(姚弋仲)은 섬서성 서부 일대에서 할거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갈족은, 사실상 흉노족의 일파 가운데 하나로, 석륵이 이끄는 부중의 명칭이었다. 석륵이 태행산맥 동쪽을 평정하고 다녔던 것은 앞서 포스팅한 바 있다.

이로써 이 시대의 주인공들은 모두 모습을 드러냈다. 흉노, 갈, 저, 강, 선비. 이들 이민족들과, 여러 한족들, 그 외 크고 작은 소수 민족들이 중국의 영토 안에서 활약했던 시대. 오호십육국의 시작이다.


※ 영가의 난(311년) 당시의 중국의 판도


덧글

  • 한단인 2009/02/07 00:47 # 답글

    에..저번 포스팅에서 말씀을 드려볼까 생각중이었는데..

    각 5호의 색을 달리 채색하셨다면 보는데 구분이 좀 더 쉽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말들 말이죠.
  • 야스페르츠 2009/02/07 15:28 #

    헐...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역시 상상력이 빈곤하니까... ㅡㅡ;
  • 소시민 2009/02/07 10:16 # 답글

    "유선이 이와 같은 땅을 가지고도 다른 사람에게 항복하였으니, 어찌 재주 없는 용렬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 제갈량 지못미 (...)
  • 야스페르츠 2009/02/07 15:28 #

    이특은 그렇게 말한 주제에 방심하다 저세상으로 가버렸지요. ^^;
  • 나츠메 2009/02/11 23:39 # 답글

    위진 남북조는 백성 입장에서는 살기 팍팍한 시대인 듯..... 위에서 왕창 뜯어가고, 유목민에게 뜯기고,,,
  • blue 2010/03/29 03:33 # 답글

    아무리 좋은 땅이라도 인구가 적었으니 어떻게 할 수 없었겠죠. 중국 역사에서 사천성 지역이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후한 때부터니까요.
  • 고람거사 2013/04/08 16:12 # 삭제 답글

    당나라가 고구려와 백제에서 많은 사람을 잡아서 먼 서쪽으로 옮긴 것은 영가의 난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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