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1/30 00:04

오호(五胡)의 쟁패 1 - 안습의 진(晉)왕조 역사

265년, 사마염(司馬炎)이 조환(曹奐)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진(晉) 왕조를 개창한 이후 사마염(무제武帝)은 280년 오(吳)를 멸망시킴으로써 중국 전토를 통일하였다.

무제는 선양을 받아 진 왕조를 개창하자마자 자신의 경험 - 강력한 권신에 의한 왕위 찬탈 -을 토대로 자신과 같은 찬탈자를 방지하고 황실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각지에 사마씨 일족을 왕으로 책봉하였다. 이들이 황실이 위험할 때 힘을 합쳐 황실을 보위할 것을 기대했던 것이다. 이렇게 왕이 된 사마씨 일족이 27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바램과 달리 진 왕조는 막장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심지어 무제 자신조차도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었다. 무제는 호색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후궁으로 삼을 미인을 선발하기 위해 천하의 혼사를 금지해 버리는 대인배스러운 명령을 내리는가 하면,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난 후에는 강남의 미녀들에게 빠져들어 후궁의 수가 무려 1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의자왕 전설 같은 것은 명함도 내밀지 못할 수준이다. 황제 뿐 아니라 진 왕조의 공경대부들도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무제가 생존하던 시기에는 그럭저럭 안정된 국가를 유지하기는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무제 자신도 호색으로 인한 것인지는 몰라도 단명했다. 290년, 무제가 50대 중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뒤를 이은 혜제(惠帝)는 태자 시절에도 백치(白痴)라고 불렸을 정도로 무능한, 아니 저능한 황제였다. 황제가 무능하면 외척들이 득세하게 마련이다. 황제의 모후 양씨(楊氏), 황후인 가씨(賈氏)에 의한 척족 세도가 나타나는 가운데 이들의 장기말로 선택된 종실왕, 또는 이들에 대항한 종실왕들이 정권 재창출(?)을 위해 쟁탈전에 뛰어들면서 진 왕조는 극심한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중국을 통일한지 10년, 너무나도 짧은 평화였다.



팔왕(八王)의 난(亂)이라 부르는 이 정권 쟁탈전은 290년 경부터 시작되어 306년 혜제가 죽을 때까지 16년 동안 계속되었다. 팔왕의 난이 얼마나 막장이었는가는 혜제 때 사용된 연호의 변천만 살펴보아도 알 수 있다. 팔왕의 난 초반, 양씨와 가씨가 정권을 놓고 한바탕 피보라를 불러 일으켰던 시기, 290년에서 291년까지 겨우 2년 동안 연호는 영희(永熙), 영평(永平), 원강(元康)으로 3차례나 바뀌었다. 이후 가씨의 천하는 300년까지 계속되었으나 가씨의 실각 이후 다시 본격적인 팔왕의 쟁패가 시작되자, 고작 6년 동안 영강(永康), 영녕(永寧), 태안(太安), 영안(永安), 건무(建武), 영흥(永興), 광희(光熙)까지 7개나 되는 연호가 사용되었다. 사마륜(司馬倫)이 황위를 찬탈하여 사용한 건시(建始)까지 치면 8개나 된다. 연호의 변천은 팔왕이 부침하였던 경로와 대체로 일치한다.



 * 팔왕 및 여러 왕들의 봉국 위치와 주요 도시, 오호의 최초 근거지 : 팔왕의 봉국은 위와 같지만 실제 팔왕의 난 때에 팔왕은 자신의 봉국이 아닌 다른 곳에 근거를 두고 활약하는 경우도 많았다.

아무튼, 팔왕의 난이 벌어지는 동안, 중국 전토는 엉망이 된 정치 상황으로 인해 황폐화되었다. 특히 팔왕의 쟁패가 집중되었던 낙양과 장안 일대는 더 심했다. 그리고 팔왕의 본격적인 격돌이 벌어졌던 300년 이후의 내란은 각 왕들이 군사력 강화를 위해 이민족들을 용병으로 고용하면서 드디어 오호(五胡)를 중원 무대에 등장시켰다.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潁)은 흉노의 좌현왕(左賢王)이었던 유연(劉淵)을 용병으로 고용하였으며, 동영공(東瀛公) 사마등(司馬騰)은 북방의 선비(鮮卑)를 끌어들였다. 그 외에도 관중(關中)에는 강(羌)과 저(氐)족 역시 후한 말 이후로 지속적으로 이주해서 살고 있었다고 한다. 오호십육국시대의 주인공 오호가 드디어 모두 모인 것이다.


304년, 유연이 산서(山西)에서 한(漢)을 건국하고, 같은 해 파저족(巴氐族)의 이웅(李雄)이 사천 지방에서 성(成)을 건국하면서 오호십육국시대가 개막된다. 그러나 아직까지 진 왕조는 화북에서 살아남아 있었다.


팔왕의 난은 306년에 종결되고 회제(懷帝)가 즉위하였다. 그러나 이미 진 왕조는 중국 전체를 지배할만한 힘이 없는 상태였다.

산서의 흉노국가 한은 진 왕조에 대해서 적대적인 자세를 보이며 산서 일대를 평정하고 308년에는 황제를 자칭하였다. 북방의 선비 제부족들도 불온한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에 진 왕조는 모용부(慕容部)의 수장 모용외(慕容廆)를 선비도독(鮮卑都督)으로 임명하여 이를 통제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모용부가 다른 선비 부족들을 격파-통합하는 결과만 가져왔다. 대체로 병주와 유주·평주를 제외한 지역들은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상은 지방관이나 군벌에 의해 명목상의 종주권만 인정받은 채 자치가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이러한 점을 잘 보여주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동진 원제(元帝)의 일화이다. 원제 사마예(司馬睿)는 팔왕의 난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봉지인 낭야(琅邪)에서 머물고 있었다. 팔왕의 난이 끝난 직후 사마월(司馬越)에 의해 안동장군 도독양주제군사(安東將軍 都督揚州諸軍事)에 임명되는데 사마예는 측근 왕도(王導)가 서진 왕조의 쇠퇴를 예측하고 간언하자 이를 받아들어 건업(建業)으로 옮겨가 강동 지역을 평정하는데 주력한다.

또한, 팔왕의 난이 한창이던 301년, 장궤(張軌)는 팔왕의 난을 피해 양주자사(凉州刺史)를 자청하고 하서(河西) 지역에서 반독립적인 정권을 세우기도 하였다. 정권을 구축한 연대로만 따지면 16국 가운데 가장 먼저이다.


이렇듯, 팔왕의 난 이후 진 왕조는 사실상 중국 전토에 대한 통제권을 거의 상실하고 탈진 상태에 빠져 있었다.

311년, 한은 낙양(洛陽)을 공격하기 위해 남하하면서 하남(河南) 일대를 차례로 점령하였다.

팔왕 가운데 최후까지 살아남은 동해왕(東海王) 사마월이 이를 막기 위해 홀로 분투하는 가운데, 동해왕에 의해 옹립된 회제는 동해왕의 뒤통수를 때려 버렸다. 동해왕은 그대로 뒷목을 잡고 저세상으로 떠나고 말았다. 이제 방어작전을 지휘할 마지막 종실왕조차 세상을 등지고, 완전히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져든 낙양에서는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동해왕 사후 군권을 이어받은 태위(太尉) 왕연(王衍)은 동해왕의 관을 호송하겠다는 것을 핑계로 황제를 버려두고 수도를 떠나 버린다. 더 어이가 없었던 것은, 이렇게 떠나는 왕연의 뒤를 따라간 황족, 귀족 등이 10만 명에 달했다는 것이다. 수도에서 이런 대 행렬이 떠나가는 것을 빤히 보고만 있었던 회제가 신기할 따름이다. 여하튼, 수도를 떠난 어처구니 없는 행렬은 당연히 한군에 포착되어 몰살당했다. 이때 포로로 잡힌 사마씨 종실 왕들이 48명이나 되었다니 대체 수도에서 회제를 보위하고 있던 이들은 누구였는지 궁금할 뿐이다.

무방비상태의 낙양이 함락된 것은 311년 5월, 겨우 탈출해서 장안에 이르렀던 사마업(司馬鄴)은 일종의 임시정부를 이끌다가 313년에 회제가 처형되자 정식으로 황위에 올랐다. 그래봤자 이름 뿐인 황위, 한군의 침입에 근근이 버티던 민제(愍帝)도 317년에 항복하니 이로써 화북의 진 왕조는 완전히 끝장나게 된다.

짧게 보아 311년 낙양 함락 사건, 길게 보아 317년 화북의 진 왕조가 멸망하였던 이 사건을 영가(永嘉)의 난이라 부른다. 회제의 연호 영가 연간에 일어난 난리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오호의 쟁패는 본격적으로 막이 오른다.


==========

팔왕의 난만 살펴보아도 소위 대륙백제설이 얼마나 엉터리인지를 잘 알 수 있다. 박영규는 고이왕(234~286) 때 백제가 산동 반도로 진출했다고 주장한다. (물론 근거 같은 것은 아웃오브안중이다.) 그런데, 고이왕이 재위하던 시기는 서진 왕조가 막 개창되어서 통일을 완수할 때까지에 해당하며, 팔왕을 비롯한 서진의 여러 종실왕들의 봉지는 산동 반도를 아우르고 있다.

지도를 살펴보라. 동래왕(東萊王)의 영지는 박영규가 지도에 줄긋고 여기까지 우리땅임 하면서 자위하고 있는 바로 그 위치에 떡하니 위치해있다. 이뭐병.

 ※ 참고자료

<자치통감>, <진서> 등을 참고하고 싶었으나 능력이 부족하여 <영웅시대의 빛과 그늘>(박한제 저)에서 대강의 줄기를 가져다 썼음.

지도는 위키피디아의 서진 시대 지도에 진서 지리지 및 위키피디아를 참고하여 직접 표기하였음. (강줄기가 무성의하게 그어진 점은 자비를...[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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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엘레시엘 2009/01/30 00:03 # 답글

    역시 사상 최악의 개막장 통일왕조답군요 -_-;;;;
  • 야스페르츠 2009/01/30 09:13 #

    막장의 계보는 이후에도 계속됩니다. ^^;;
  • 을파소 2009/01/30 00:04 # 답글

    동래왕의 한자가 실은 東來王, 즉 동쪽에서 온 왕이며 동쪽은 백제이니, 동래왕은 백제가 책봉한 백제왕족이라고 하면 됩니다.(뭐 이 자식아?)
  •   2009/01/30 05:37 #

    저랑 같은 생각을 하셨군요 ㅡㅡ;;;
  • 야스페르츠 2009/01/30 09:14 #

    ㅎㄷㄷ... 동래라는 지명의 유래가 그렇게 된 거로군요.... 갑자기 동래군이 부산의 원래 위치라는 그들의 주장이 떠오릅니다. (아악!)
  • 악희惡戱 2009/01/30 00:07 # 답글

    저 시절에 50살 이상을 살았으면 단명까지는 아니겠군요.
    그나저나 후궁 1만명은 부럽군요...
  • 야스페르츠 2009/01/30 09:15 #

    부러우면 지는 겁니다. 후궁은 필요 없고 본처 한 명만 있어도 감지덕지.... ㅡㅡ;
  • matercide 2010/09/12 16:25 #

    본처 한 명은 나중에 없으니만 못한 존재가 될 거예요.
  • 초록불 2009/01/30 01:34 # 답글

    바로 유연의 한나라를 유비의 후손이 세운 나라라고 설정하여 만든 것이 <후삼국지>...
  • 야스페르츠 2009/01/30 09:15 #

    앗! 스포일러... ㅠㅠ
  • 아일턴 2009/01/30 08:51 # 답글

    통일따위.. 해봐야 이모양이라니까요;;;
    이전 시대에서 걸출한 인물들을 다 소비해 버린 모양입니다..
  • 야스페르츠 2009/01/30 13:34 #

    사실 이전 시대의 걸물이라는 것도 좀 과장된 측면이 많죠. ㅡㅡ;
  • 소시민 2009/01/30 09:52 # 답글

    그리고 팔왕의 본격적인 격돌이 벌어졌던 300년 이후의 내란은 각 왕들이 군사력 강화를 위해 이민족들을 용병으로 고용하면서 드디어 오호(五胡)를 중원 무대에 등장시켰다

    - 역시 서진의 멸망은 자신들이 자초한 일이군요 -_-
  • 야스페르츠 2009/01/30 13:34 #

    어떤 면에서 보자면 서로마의 멸망이 연상되기도 합니다.
  • leopord 2009/01/30 11:33 # 답글

    역시 자만은 멸망의 지름길인가 봅니다.=_=;;
  • 야스페르츠 2009/01/30 13:36 #

    ^^;
  • Jayn 2009/01/30 12:00 # 답글

    박한제 선생님! 저 책 아직 안 읽어봤는데..;; ㅠㅠㅠ
  • 야스페르츠 2009/01/30 13:36 #

    그냥 뭐 볼만한 책입니다. 기행문 형식이라 조금 독특하기도 하고요. 근데 저도 읽어본지 하도 오래라....
  • matercide 2010/09/12 16:25 #

    읽어봤는데 좋은 책입니다.
  • 耿君 2009/01/30 13:10 # 답글

    永嘉 하니까 이번에 안동 갔을 때 관아건물 현판에 걸려 있던 永嘉軒이 떠오르네요 (응?)
  • 야스페르츠 2009/01/30 13:37 #

    헉. 그것은 매식강단의 음모!! (퍽!)
  • 꿈의대화 2009/01/30 15:33 # 답글

    저는 왜 1만 후궁을 365일로 나누어 보았던 걸까요 (머엉;;)

    게다가 사마염의 제위 기간이 25년 이라니!! (하루에 한 사람과만 자도 1만 후궁을 다 만나려면
    27년이 넘게 걸릴텐데-_-)
  • 自重自愛 2009/01/30 23:26 #

    결론은 쓰리썸. (도주)
  • matercide 2010/09/12 16:29 # 답글

    저는 이 영가의 상란을 아주 부정적으로 평가합니다. 영가의 상란 뒤로 학술의 중심지인 魯,齊는 별볼일 없는 변방이 되었고, 호한융합이 일어나 한족의 문명이 더럽혀졌습니다. 뭐 문화란 원래 이렇게 융합하기도 한다, 문명이란 섞여야 발전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해서 문명의 다양성이 줄어든 것은 어찌합니까? 문명이 융합하면서 여러개의 문명이 하나로 줄어들었습니다. 거기다 수많은 비한족이 정체성을 잃고 한족에 동화되면서 오늘날 "한족"이라는 거대한 민족말살장치가 만들어졌고, 지도상의 영토였었던(漢의 世宗 武皇帝가 정복했으나 통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삼국시대 오나라에서 현지인이 사섭이 독립투쟁까지 일으킨) 월越은 명실상부한 한족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당연히 월족은 동화되었고요.

    이런 현상이 긍정적인 현상이겠습니까?
  • matercide 2010/09/12 16:31 # 답글

    쓸데없는 사실. 황족인 사마씨의 본관은 河內郡, 양씨의 본관은 弘農郡, 가씨는 河東郡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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