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1/30 22:24

나의 비극론 雜想

저는 비극을 좋아합니다....

혈기왕성·신체건장한 남자 녀석이 어쩌다 찔찔 짜는 슬픈 이야기나 좋아하게 되었는지 저도 잘 모릅니다만.... 아무튼, 워낙에 생겨먹은 취향이 너도 나도 잘 먹고 잘 사는 해피엔딩보다는 가슴을 에고 코끝이 아린 새드앤딩을 좋아합니다. 태생이 음침한 인생...(퍽!)

그러다보니 자연 나름대로 좋아하는 비극의 유형(?), 즉 비극론을 머리 속에 정립하기도 했죠.

오늘은 그 비극론이나 한 번 풀어 봐야겠습니다.



앞서 포스팅한 소설론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지만, 비극 중에서도 최악의 비극은 역시나 '뜬금없는 파국'이 되겠습니다. 뜬금없는 파국의 대표적인 예를 꼽아보자면, 손노리의 어스토니시아 스토리(아니면 포가튼 사가... 둘 중 어떤 건지 기억이 안남...ㅡㅡ;)를 들 수 있습니다. 열심히 싸워서 세상을 구한 것까지는 좋은데, 갑자기 무너지는 바닥 속으로 추락하는 여주인공.... ㅎㄷㄷ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찾아오는 비극은 슬프다기보다는, 잘 쳐주면 충격, 최악의 경우 허탈한 웃음만 나오게 마련이죠...

그런데 의외로 이런 생뚱맞은 비극이 많습니다. 게임 스토리에서야 비일비재하고...(대체 최종 보스 죽고 나면 왜 꼭 여주인공을 죽이는 거냐!!!) 디카프라오 주연의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도 참 생뚱맞았죠... 원작에서는 간발의 차이로 안타깝게 파국을 맞고, 또 그런 파국이 어느 정도 예견되어 있었기에 참 가슴아팠는데, 영화에서는 줄리엣이 깨어난 것을 보고 놀라서 약을 삼켜 버리는... ㅎㄷㄷ....


차악(?)의 비극 역시, 소설론의 2번 항목, "깡패같은 우연"에서나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덜컥 병 또는 사고로 죽음"...

위의 최악과 어느 정도 겹치기도 하겠습니다만, 병이나 사고로 죽는다는 그 자체를 비극의 소재로 삼는다기보다, 병이나 사고로 죽어가는 과정을 비극의 소재로 삼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약간 차이라고나 할까요... 그나마 이야기 자체가 병이 깊어가는(죽어가는) 과정에 철저하게 집중한다면, 참 최루성 이야기로는 제격입니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 같은 경우가 좋은 예겠죠. 이 영화는 사실 차악보다는 조금 더 낫습니다. 적어도, "깡패같은 우연"으로 병에 걸리지 않기 때문이죠. 아예 영화의 시작부터 병에 대한 복선을 치밀하게 깔고 시작하고 있으니 이 정도면 중간은 한다고 봅니다.


중간의 비극, 위에서 언급했던 것입니다. 병·사고나, 뜬금없는 파국을 치밀한 복선으로 예고하는 수준이라면, 그나마 나쁘지 않은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슬픔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가능하다고나 할까요... 생뚱맞아서 허탈한 것보다야 당연히 훨씬 낫습니다.


차선(?)의 비극이라면, 역시 "예정된 파국"이라 할 것입니다. 사실 이 정도의 비극을 구성할 수준이라면 탁월한 스토리텔러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해피엔딩과 새드엔딩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맞추면서 독자들의 심장을 쥐락펴락 할 수 있다면, 최고의 이야기꾼이겠죠. 사실, 이건 굳이 비극이 아니더라도 소설이라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슬아슬한 균형 끝에 해피엔딩으로 끝내느냐, 새드엔딩으로 끝맺느냐는 작가의 취향(?)이자 예정된 것일 테구요. (저라면 무조건 새드앤딩으로... 퍽!)


최선의 비극, 저는 이것을 "원죄의 비극"이라고 이름붙였습니다. 예정된 파국보다 한발자국 더 들어갔다고나 할까요?? 예정된 파국은, 예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슬아슬한 균형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파국의 경계선을 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 그대로 원죄를 가진 이 비극은, 균형을 아슬아슬하게 맞춰가면서도, 마지막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도 비극으로 끝맺을 수 밖에 없는 이야기입니다.

먼저 읽었던 <숙세가>를 예로 들자면, 혜랑과 금지의 사랑은 정말 한 발자국만 잘못 내딛어도 파국으로 치달을 상황이었지만, 끝내 마지막 순간까지 그 경계를 넘지 않습니다. (사실 마지막에도 넘지 않았습니다.... ^^;;)  하지만 많은 "원수의 딸을 사랑하는 이야기"들은, 특히 비극을 지향하는 이야기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도, 끝내 원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탁월한(?) 결말을 내어 놓습니다. 창세기전 시리즈 중 <서풍의 광시곡>이 대표적입니다. 시라노와 메르세데스의 러브 스토리는 정말 파국으로 치닫는 이야기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시라노가 독이 있는 것을 알면서 술잔을 드는 장면은 가히 압권...

사실 제 멋대로 예정이니 원죄니 하는 잣대를 붙여 놓았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누가 그걸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 그냥 쉽게 말하자면, 희망의 끈을 정말 마지막 순간까지 놓치지 않는 것이 예정된 파국이라면, 어느 순간부터 끝을 모르고 파국으로 치닫는 것이 원죄의 비극이라 할 겁니다....


그러나, 사실 위에서 꼽은 비극들보다 더한 비극을, 저는 마음 속에 아주 확실하게 정해 놓고 있습니다. 이미 위에서 언급한 비극들의 기준조차 철저하게 제 멋대로지만, 최고의 비극은 더 제 멋대로 입니다...ㅡㅡ;

제가 정말 최고로 손꼽는 비극은, 드라마 <모래시계>, <창세기전2>의 결말입니다.

둘의 공통점은???

네...... 주인공이 자기 손으로, 어쩔 수 없이 사랑하는 연인 또는 절친한 친구를 죽이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주인공이 연인이나 친구를 살해하게 되는 비극은 참 상투적인 비극의 소재죠. 그러나, 위의 두 작품은 그 중에서도 가장 비극적입니다. 대부분의 연인·친구 살해 비극(?)은 모르는 상태에서 저지르거나, 최악의 경우 실수로 저지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피살자(?)가 무엇인가 대의(?)를 위해 주인공의 손에 스스로 목숨을 던지는 이야기도 있지요. 그러나, 저는 아직까지 저 두 작품을 제외하고 저런 완벽한 비극을 본 적은 없습니다. 연인·친구의 손에, 명확한 이유를 가지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이야기... 참 비극적이지 않습니까??

사실 이야기의 과정에서 최루성을 보존(?)하는 데는 <모래시계> 식의 결말은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어쨌거나 이런 결말은 정말 최후의 장면에서나 겨우 보여줄 수 있는, 아주 연출하기 어려운 결말이거든요. 중간에 이런 상황을 만들어 놓고 어떻게든 자극해서 눈물을 짜내려면... 정말 연출할 길이 막막합니다.

연출은 어렵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의 비극성은 최고로 꼽을만 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할 수 없이, 단 하나의 결말 밖에는 방법이 없게 만드는 처절함. 슬픔... 또한, 이 이야기는 비극인 동시에 아름다운 상승까지도 가능하게 합니다. <창세기전2>의 경우가 그렇죠. 연인의 손에 죽음을 맞으면서, 그로써 완성되는 사랑... 비극적이면서도 아름답죠.


왠지 용두사미가 되는 듯 합니다만, 어쨌든 제가 생각하는 비극의 순위를 이렇게 읊어보았습니다. 이런 쓸데 없는 짓은 왜 했냐고 물으신다면... 커플들은 다 비극으로 끝나라는 저주..(퍽×100)


덧글

  • 한단인 2008/11/30 22:27 # 답글

    으윽..저는 비극을 미친듯이 싫어해서..

    단, 맨 마지막 단락은 아주 심하게 동감이라능...(퍽X100)
  • 야스페르츠 2008/12/01 11:41 #

    마지막 단락과 같은 내용에 공감된다는 것이 진짜 비극이죠... ㅠㅠ
  • 한단인 2008/12/01 16:23 #

    어흙...
  • 상규 2008/12/01 14:48 # 삭제 답글

    창세기전2 마지막 장면에서, 이올린이 흑태자를 찌를 때.
    푸욱하는 미디음이 왜그맇게 슬프게 들리던지.
    오히려 요즘 그래픽이 정말 좋은 게임들을 보더라도
    그같은 감동은 또 느끼기 힘들더군
  • 야스페르츠 2008/12/01 15:36 #

    맞아맞아.. 그래픽이 화려할수록 심금을 울리는 건 약해지는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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