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1/18 22:55

불사신 진개 補. 유사역사학 비판

불사신 진개

《환단고기》 〈북부여기〉의 오류에 관하여 일전에 포스팅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 《동사고이》를 살펴보는 도중 관련 내용을 발견하여 이렇게 보충을 합니다.


1. 조선후(朝鮮侯)가 왕을 칭하다.


《삼국지》에 인용된 《위략》에 조선후가 칭왕을 한 기록이 있습니다. 안정복은 《위략》의 기사를 분석하여 주나라를 높이려는 목적으로 연나라를 정벌하고자 했던 조선이 먼저 칭왕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연나라의 칭왕 및 연 정벌 시도 이후에 조선후의 칭왕이 있었을 것으로 보았죠. 그렇다면, 조선후의 칭왕은 BC 323년 이후의 일입니다. (《동사고이》 ‘연백칭왕’ 참조)


기자조선 및 유교적 명분론을 따지지 않는다고 치더라도, 기록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조선의 칭왕’은 연나라가 칭왕할 무렵의 일이므로, 역시 시기적으로 큰 차이는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2. 진개 사건

BC300년 전후의 사건이라고 합니다.


3. 진의 통일 및 조선왕 비의 복속

《위략》의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뒤, 몽염(蒙恬)을 시켜서 장성을 쌓게 하여 요동에까지 이르렀다. 이때에 조선왕 비(否)가 왕이 되었는데, 진나라의 습격을 두려워한 나머지 정략상 진나라에 복속은 하였으나 조회에는 나가지 않았다. 비가 죽고 그 아들 준(準)이 즉위하였다. 그 뒤 20여년이 지나 [중국에서] 진[승]과 항[우]가 기병하여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후략)
及秦幷天下, 使蒙恬築長城, 到遼東. 時朝鮮王否立, 畏秦襲之, 略服屬秦, 不肯朝會. 否死, 其子準立. 二十餘年而陳·項起, 天下亂



안정복도 지적했다시피, 이 기록은 연대로 볼 때 터무니없는 내용입니다. 진시황의 통일은 BC 221년, 장성을 쌓은 것이 BC 214년(《자치통감》 참조)부터입니다. 조선왕 비가 복속한 것이 이 무렵이며, 비의 뒤를 이어 준이 즉위한 것은 이보다 더 후의 일입니다. 그런데 준의 즉위로부터 20여년 후에 진승-오광의 난(BC 209년)이 일어났다는...... 6년 밖에 안되는데 20여년이라니.... OTL...


《사기》에는 천하를 통일한 후에 36군을 설치하는 기록 속에서 조선이 복속되었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내용이 있습니다. 대략 진시황의 통일 무렵에 복속되었다고 추산해도 진승 오광의 난과는 10여 년 밖에 차이가 없으니, 역시나 《위략》의 기록은 오류가 되죠.


어쨌거나 BC220~10년 사이에 복속된 것으로 보아야 하겠죠. 그리고 준왕의 즉위는 복속된 이후의 일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비왕이 죽고 준이 즉위하는 부분에서 안정복은 다음과 같은 솔깃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최씨(崔氏)의 사론[동국통감 중 최부(崔)의 사론] 및 《보편(補編)》[경세서보편(經世書補編)]에 모두 이해에 붙이므로 이를 따른다.
崔氏論及補編, 繫于是年, 今從之.


이에 따르면, 앞서 포스팅 떡밥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BC 221년에 싸그리 몰려 있는 고조선 기사”의 시초가 《동국통감》이라는 말이 될지도 모른다는....

《동국통감》의 내용은 직접 확인하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일단 《동국통감》 자체가 단군에서 삼한까지를 외기(外紀)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동사강목》처럼 확실한 기년을 설정한 편년체로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다행히 최부(崔)의 《금남집》에서 《동국통감》에 실린 사론을 모아둔 것을 찾는데 성공했습니다.

至四十代孫否。當始皇二十六年庚辰。畏秦服屬焉。否死。子準立。

《동국통감》에도 이보다 상세한 기록이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진개 사건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조차 없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다시 원점.


어쨌거나, 진개 사건에서 조선왕 준의 즉위까지의 복잡한 역사적 부침을 BC221년에 몰아서 서술하고 있는 편년체 사서는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 무렵, 즉 고조선 시기의 역사 자체가 편년체로 구성하기에는 너무 기록도 부족하고 내용도 혼란스럽기 때문이겠죠.

율곡의 〈기자실기〉에서도 기년을 정확하게 서술하고 있지 않으며, 그 외에 제가 찾아볼 수 있었던 여러 사료들에도 이 시기의 기년은 거의 설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대부분의 기록들이 진개(秦開)의 조선 공격과 비왕 및 준왕의 기사를 완전히 별개의 내용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진개의 기록 자체가 원래 원본 사료부터 비왕이 등장하기 훨씬 이전에 등장합니다. 정확한 기년은 설정되어 있지 않지만, 대부분의 기록이 분명하게 진개의 기록과 비-준의 기록을 분리하고, 또한 진개의 기록을 더 앞에 두고 있습니다.

모든 기록을 찾아본 것은 아니지만, 진개의 기록을 비-준의 기록보다 더 뒤(단순한 기록에서의 위치)에 두고 있는 것은 《동사강목》이 유일하고, 최초인 듯 합니다.

《환단고기》의 해당 기록은 기록된 순서나 기년이 《동사강목》과 흡사합니다. 이전에 한단인 님께서 《환단고기》가 《동사강목》을 베꼈을 가능성을 언급한 점이 걸리는 대목입니다. 게다가 더 결정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환단고기》 〈북부여기〉 단군해모수 임진 31년에는 연, 제, 조나라의 백성이 도망해서 귀순하는 자가 수만명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찾아본 국내 기록 속에는 이 무렵에 귀순한 중국인의 수를 명시한 것도 없을 뿐 아니라, 기년도 설정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저렇게 귀순하는 중국인의 기록에서 바로 자연스럽게 "위만"으로 넘어갑니다. 물론 "진승 오광의 난" 또는 "진말의 혼란기"에 일어난 일이라는 기록을 빼놓지 않고 있지만, 그 정확한 기년을 기록한 것은 없습니다.

오로지 《동사강목》에서만, 연, 제, 조 백성의 귀순 기록을 정확한 기년으로 서술하고 있고, 특히 수만명이라는 수까지 명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서, 원문을 대조해본 결과는 참담할 정도입니다.


二十餘年而陳·項起, 天下亂, 燕·齊·趙民愁苦, 稍稍亡往準, 《삼국지(위략)》

漢初大亂, 燕·齊·趙人往避地者數萬口, 《후한서》

及二世立, 天下大亂, 燕·齊·趙民愁苦, 稍稍亡歸朝鮮者, 數萬口.《동사강목》

 陳勝起兵, 秦人大亂, 燕·齊·趙民亡歸番朝鮮者, 數萬口,《환단고기》



위에는 참고삼아 해당 내용의 편린을 찾아볼 수 있는 《위략》과 《후한서》의 기록을 넣었습니다. 동사강목은 《위략》과 《후한서》의 기록을 적절하게 조합하여 구성한 점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동사강목》에서, 푸른색으로 표시한 부분을 삭제하고 밑줄친 몇몇 단어를 재야사학적으로 교체하면 《환단고기》와 《동사강목》의 해당 부분은 거의 완전히 일치합니다...


이정도의 증거라면, 《환단고기》의 내용 중 일부를 《동사강목》에서 베꼈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베낄 때도 잘못 베껴주는 센스는 절대 잊지 않는 우리의 이유립 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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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Shaw님은 율곡의 〈기자실기〉에서 비왕이 죽은 후에 진나라가 전국을 통일하는 내부모순이 있었다고 말씀하신 바 있는데요, 원문을 살펴보니, 그것은 끊어읽기의 오류인 것 같습니다.

及秦幷天下。築長地抵遼東。朝鮮王否畏秦服。屬。否薨。子準立十餘年。而秦滅燕, 齊, 趙。民多亡入朝鮮。

라고 끊어져 있지만, 허목의 〈동사〉에는 비슷한 내용이 이렇게 끊어져 있습니다.

太子準立。秦滅。燕趙之民多亡入朝鮮。

즉, 멸망한 것은 연, 제, 조나라가 아니라 진나라인 것이죠. 이것은 뒤이어 나타나는 '民多亡入朝鮮'으로도 확인됩니다. 연, 제, 조나라의 백성들이 망명해오는 사건은 《동사강목》에는 BC 209년의 일로 나타납니다. 즉, 진나라 말기의 혼란기에 있었던 일이죠.

저도 한독은 일천한지라 확신은 못하겠지만, 왠지 그런 것 같다능.. (꼬리말기....)


덧글

  • 소하 2008/11/19 03:37 # 답글

    대체로 연소왕의 제나라 정벌 이후로 보더군요. 결정적인 자료가 나오기 전까지는, 이 연대가 가장 지지를 많이 받고 타당한 것 같습니다. <위략>의 기사에 대해서는 대부분 부정적인 견해가 다수입니다. 그리고 난데없이 등장하는 번조선에서 웃으면 되는 건가요?
  • 야스페르츠 2008/11/19 09:23 #

    번조선.. ㅋㅋ
  • 2012/07/21 21:17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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