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2/24 14:48

祖와 宗의 차이는 무엇인가... 역사

네이버 지식in에서 노닐다보면, 하루에 한 번 쯤은 반드시 올라오는 질문이 있다.

조선 왕들에 붙는 '조'와 '종'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물론, 이에 붙는 대답들도 가관이다.


가장 충격적인 대답은 아래의 물건들.

종은 문과에 더 능했다는 거고요. 조는 그나라의 시조나 무과에 더 능했다는 뜻이예요.

또는,

적장자가 계승하면 종, 반정이나 기타 사건으로 방계가 왕위를 계승하여 계통이 새로 바뀌면 조입니다.



물론 다른 대답들도 그다지 훌륭하지는 못하다.

특히 가장 일반적으로 나타나며, 또한 가장 많이 채택되는 답변은 아래의 물건이다.

묘호에 조나 종을 붙이는데 그 차이를 말하자면 

공이 많은 임금은 '조'가 붙고 덕이 많은 임금이 '종'이라고 보면되겠습니다. 


사실, 나 역시 조종의 차이가 헷갈리는 것은 매한가지이다.

'조'로 추존된 각 왕들이 왜, 어떻게 '조'로 되었는지는 대략적으로 알고 있지만, 그 역시 명확하지는 못하다.


그래서 한 번, 조로 추존된 왕들에 대해서 한번 알아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1. 태조(太祖)

말이 필요 없다. 국조를 '조'라 부르지 않으면 뭐라고 부를까... 그러나 태조의 선대에도 '조'가 있음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은 듯 싶다.

목조(穆祖)-익조(翼祖)-도조(度祖)-환조(桓祖)로 이어지는 4대조를 추존하였던 것이다.

아래는 태조실록 1년 11월 6일의 기사이다.

사대(四代) 선조의 존호(尊號)를 책봉(冊封)해 올렸다. 황고조실(皇高祖室)의 책문(冊文)은 이러하였다.
“집을 변화시켜 나라를 세웠으니 실로 여러 대 쌓은 공로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시호(諡號)를 올려 이름을 바꾸매, 이에 존숭(尊崇)하는 전례(典禮)를 거행합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황고조(皇高祖)께서는 성품이 인애(仁愛)와 효성에 전일했으며, 덕은 온화(溫和)와 선미(善美)를 구비하였습니다. 영구한 계획을 세워 후세의 사람에게 계시(啓示)하여 처음으로 제왕의 대업(大業)에 터전을 닦고, 안일(安逸)하지 않는 데 정주(定住)해서 그 동지(動止)를 삼가하여 능히 천심(天心)을 기쁘게 하였습니다. 공열(功烈)을 삼한(三韓)에 나타내셨으며, 본손(本孫)과 지손(支孫)을 백세에 성하게 하였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황고조비(皇高祖妣)께서는 인자하고 온화하고 조용하고 아름답고 유순하고 정숙하고 전일하여, 알[卵]을 남긴 상서를 받은 것은 은(殷)나라의
간적(簡狄)과 같았으나, 애기를 밴 경사를 얻은 것은 주(周)나라 태임(太任)에게 짝할 만했습니다. 이미 무궁한 세대(世代)에 국운을 연장했으니, 곧 처음에서 발단(發端)된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외람되이 황고조비(皇高祖妣)의 도움을 입어 큰 왕업(王業)을 받았으므로, 이에 비천한 정성을 다하여 휘호(徽號)를 받들어 황고조(皇高祖)의 시호(諡號)를 올려 ‘목왕(穆王)’이라 하고, 황고조비(皇高祖妣)의 시호는 ‘효비(孝妃)’라 하였으니, 밝게 돌보아서 번성한 복을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황증조실(皇曾祖室)의 책호문은 이러하였다.
집을 변화시켜 나라를 세운 것은 실로 적선(積善)의 공로에 말미암은 것이며, 조(祖)를 높이고 종(宗)을 공겸함은 이름을 바꾸는 예절을 삼가하는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황증조(皇曾祖)께서는 충성하고 효도하고 검소하고 근실하여, 뜻이 백성에게 있었으므로 실로 가이 없는 은혜가 있었으며, 덕은 후손에게 전하였으므로 길이 크게 나타나는 계책을 끼쳤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황증조비(皇曾祖妣)께서는 천성이 조용하고 전일함을 타고났으며, 몸으론 정숙(貞淑)함을 실천하였습니다. 반드시 공경하고 반드시 경계하매 다만 군자의 좋은 배필이었으며, 비행(非行)도 없고 작태(作態)도 없으매, 이것이 규문(閨門)의 아름다운 법도[懿範]였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다행히 증조비(曾祖妣)의 도움을 힘입어 처음으로 큰 왕업을 세웠으니, 큰 은혜를 갚고자 한다면 진실로 헤아리기가 어렵겠습니다. 감히 휘호(徽號)를 올리오니, 현양(顯揚)하는 마음이 배나 간절합니다. 삼가 책호(冊號)를 받들어 황증조(皇曾祖)의 시호를 올려 ‘익왕(翼王)’이라 하고, 황증조비(皇曾祖妣)의 시호는 ‘정비(貞妃)’라 하였으니, 저의 정성을 흠향하여 번성한 복을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황조실(皇祖室)의 책호문은 이러하였다.
공 있는 이는 조(祖)로 하고 덕 있는 이는 종(宗)으로 하니, 효도는 어버이를 높이는 것보다 큰 것이 없으며, 시호(諡號)로써 이름을 바꾸게 되니 예의는 마땅히 왕으로 추존(追尊)함을 먼저해야 될 것입니다. 이에 옛 전적(典籍)을 상고하여 감히 특수한 칭호를 올립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황조(皇祖)께서는 아름답고 온유(溫柔)하고 공손하고 용감하고 굳세어서, 처음으로 제왕의 대업(大業)을 세워서 오늘날의 경사(慶事)에 이르게 하고, 후손에게 계획을 전하여 천세(千歲)의 업(業)을 빛나게 열어 주었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황조비(皇祖妣)께서는 행실이 부지런하고 검소함을 겸하였으며, 덕은 엄숙하고 화목함을 구비하였습니다. 일찍이 예로써 정한 상서에 부합(符合)하여 내치(內治)를 엄격히 하였으며, 장경(莊敬)의 도리를 나타내어 후손에게 좋은 계책을 전하였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외람되이 용렬한 자질로써 큰 명령을 받게 되었으니, 비록 이것이 세상의 인정(人情)의 추대인 것이지만, 실상은 조비(祖妣)의 도움이 가(加)해진 것입니다. 삼가 책호(冊號)를 받들어 황조(皇祖)의 시호를 올려 ‘도왕(度王)’이라 하고, 황조비(皇祖妣)의 시호는 ‘경비(敬妃)’라 하였으니, 삼가 바라옵건대, 영명(英明)께서는 이 책호(冊號)를 받으시고, 높이 위에 계시면서 항상 자손을 도와주시고 빛나신 그 영령께서는 길이 나라에 복을 주소서.”
황고실(皇考室)의 책호문은 이러하였다.
“나라를 세우고 집을 계승하매 효도는 왕으로 추존(追尊)하는 것보다 먼저할 것이 없으며, 시호를 보고 행실을 알게 되매 예의는 존숭(尊崇)하는 데 삼가해야 될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황고(皇考)께서는 천성이 매우 깊으시고 자질은 영특하여서 무공(武功)을 원근(遠近) 지방에 펴서 나라에 근실하였으며, 큰 명령을 후손에게 전하여 그 경사를 견고히 하였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황비(皇妣)께서는 마음은 정정(貞靜)함에 두고 덕은 유순함을 지켰으며, 지위는 바르게 중도에 위치하여 꼭 가인(家人)의 도리에 합당하였으며, 덕은 돈독히 아래에 미쳐 진실로
규목(樛木)의 기풍에 부합하였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다행히 여러 대에 쌓인 경사를 계승하여 유신(維新)의 왕업(王業)을 창건하였으므로, 마땅히 이름을 바꾸는 전례(典禮)를 거행하여 근본을 잊지 않는 정성을 밝힙니다. 이에 강일(剛日)을 점쳐서 가려 아름다운 덕을 현양(顯揚)합니다. 삼가 책호(冊號)를 받들어 황고(皇考)의 시호를 올려 ‘환왕(桓王)’이라 하고, 황비(皇妣)의 시호는 ‘의비(懿妃)’라 하였으니, 굽어보심이 빛남이 있어 나머지 복을 무궁한 세대에 내려 주소서.”

이렇게 4대조까지를 추증하여 祖의 시호를 올렸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조와 종을 구분하는 기준인듯 보이는 글귀들도 찾아볼 수 있다. 허나 한학이나 경학에는 까막눈인지라 어디서 나온 말인지는 알 길이 없다... 아무튼, 태조와, 태조의 4대조에 대해 추증하여 올린 시호는 이러했다.

2. 세조(世祖)

아래는 예종실록 즉위년 9월 24일의 기사이다.

임금이 말하기를,
대행 대왕께서 재조(再造)한 공덕은 일국의 신민으로 누가 알지 못하겠는가? 묘호(廟號)를 세조(世祖)라고 일컬을 수 없는가?
하니, 하동군(河東君) 정인지(鄭麟趾) 등이 아뢰기를,
“여덟 글자는 신 등이 감히 제한한 바가 아닙니다. 우리 나라 조종(祖宗)의 시호가 모두 4자·6자·8자에 그쳤기 때문에 이를 모방하여 의논한 것입니다. 세조는 우리 조종에 세종(世宗)이 있기 때문에 감히 의논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한(漢)나라 때에 세조가 있고 또 세종이 있었는데, 이제 세조로 하는 것이 어찌 거리낌이 있겠는가?”
하니, 모두 말하기를,
“이는 신 등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또 한계희가 재차 신 등에게 이르기를, ‘어찌 여덟 자로 한정할 것인가?’ 하였으나, 상교(上敎)라고 전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성상의 뜻을 알지 못하였으니, 대죄(待罪)하기를 청합니다.”
하고, 한계희가 또 아뢰기를,
“신이 명백하게 전하지 못하였으니, 신도 대죄하겠습니다.”
하였다. 한참 있다가 중관(中官)에게 술을 대접하도록 명하고 다시 의논하여 고쳐서 계달하게 하였다. 시호를 ‘승천 체도 지덕 융공 열문 영무 성신 명예 인효 대왕(承天體道至德隆功烈文英武聖神明睿仁孝大王)’으로 하고, 묘호는 ‘세조(世祖)’로 하여 권감이 계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인효(仁孝) 위에 의숙(懿肅)을 더하고, 능호(陵號)는 태릉(泰陵)으로, 전호(殿號)는 영창(永昌)으로 하라.”
하고, 인하여 대죄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재조(再造)한 공덕이라는 것은 나라를 다시 일으킨 것을 말한다. 즉, 세조는 나라를 다시 일으켰다는 명분으로 '조'가 추증된 것이다. 결국 계유정난을 통한 집권을 말하는 것이리라.

3. 선조(祖)

광해군일기 즉위년 2월 8일

빈청에서 대신이 아뢰기를,
“대행 대왕의 묘호(廟號)를 지금 바야흐로 의정(議定)하고 있는데 신들의 의견은 모두 ‘대행 대왕께서는 나라를 빛내고 난(亂)을 다스린 전고에 없던 큰 공렬이 있으니, 진실로 조(祖)라고 일컫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예로부터 제왕이 공을 세운 경우에는 조(祖)라고 일컫고 덕(德)이 있는 경우에는 종(宗)이라고 일컫는 뜻이 이 때문인 것입니다. 지금 묘호를 조라고 일컫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감히 여쭙니다.”
하니, 답하기를,
“나의 뜻도 이와 같으니 아뢴 내용대로 조라고 일컫는 것이 매우 온당하겠다.”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이 꽤나 분주하게 벌어진 것 같다. 2월 10일에는 정언(正言) 이사경, 13일에는 홍문관, 17일에는 예조, 심지어 21일에는 '조'로 하자고 처음 주장하였던 빈청 대신들조차 입장을 번복하고 나선다.

그리고 결국 25일, 묘호는 선종(宣宗)으로 결정된다.

대행 대왕의 휘호(徽號)를 소문 의무 성경 달효 대왕(昭文毅武聖敬達孝大王)이라고 올리고, 묘호(廟號)는 선종(宣宗)이라고 하고, 전호(殿號)는 영모전(永慕殿)이라고 하고, 능호(陵號)는 숙릉(肅陵)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조호(祖號)'를 관철시키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는지, 8년 7월 12일에 비망기(備忘記)로 다시 선조로 고칠 것을 전교한다.

비망기에 이르기를,
“나라를 세워 처음 대업(大業)을 창설한 분은 우리 성조(聖祖)이시고, 윤리를 바루어 거듭 밝혀 조종을 빛나게 한 분은 선왕이시다. 선왕의 공렬이 저와 같이 우뚝하고 찬란하니, 조(祖)라는 칭호를 올려야 참으로 인정과 예법에 흡족할 것인데, 지난 무신년에 내가 경황이 없어 밖의 의논만을 따르다가 흠전(欠典)이 많게 되었다. 그래서 늘 가슴에 한이 되어 자나깨나 마음이 편치가 않다. 우리 조정의
광묘(光廟)께서 이미 조호(祖號)를 받으셨고 역대 임금 가운데 조(祖)라고 일컬어진 분이 또한 한두 분이 아니다.
돌아보건대, 내가 덕없는 몸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형편없어 우환이 날로 심해져서 밤낮 두려움을 가지고 지내는데, 여러 사람들의 뜻을 물리치지 못하여 장차 큰 존호를 받게 되었다.
우러러 생각건대, 선왕께서 정응태(丁應泰)의 무함을 당하여 대명(待命)을 하기까지 하였는데 다행히 성스러운 천자께서 만리 밖 우리 나라의 사정을 환히 살피시고 칙서를 내려서 위로해주시어 지극한 원통함을 깨끗이 씻었으니, 그 하늘을 감동시킨 정성과 나라를 다시 재건하신 공렬은 실로 전후 역사에 견줄 자가 없다. 지금 마땅히 선왕과 두 분 선후(先后)께 존호를 먼저 올려야 하고 아울러 선왕께 조호(祖號)를 올려야 한다. 친제(親祭)를 하고 고묘(告廟)를 한 뒤에 호(號)를 정하여 전(箋)을 올리는 것이 일의 이치에 합당하겠다. 속히 상세히 의논하여 거행하라고 해조에 말하라.”


※ 효종실록 즉위년 5월 23일자 기사에는
허균(許筠), 이이첨(李爾瞻) 등의 무리가 없는 사실을 엮어 만들어 공을 나라를 빛낸 공에 비기어 존호(尊號) 올리기를 광해(光海)에게 청했습니다. 광해는 혼자 담당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다시 조로 호칭하는 의논을 일으켰는데, 당시에는 문헌(文獻)에 밝고 경력이 많은 사람으로서 나라를 위해 말을 다 하기를 윤근수처럼 할 만한 자가 없었으므로 드디어 그 의논이 시행되었습니다.
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광해군일기를 찾아봐도 해당 내용은 없는 것 같다... (워낙에 대충 찾아본지라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결국 위와 같은 전교를 통해서 결국 선조로 관철시킨다.

빈청이 모여 의논하여, 선종 대왕(宣宗大王)의 추상 존호를 계통 광헌 응도 융조(啓統光憲凝道隆祚)라고 하고, 묘호를 선조(宣祖)라 하고, 의인 왕후(懿仁王后) 추상 존호의 망(望)에 현숙(顯淑)과 장숙(莊淑)과 명덕(明德)이라 하고, 공성 왕후(恭聖王后) 추상 존호의 망에 현휘(顯徽)와 정순(貞順)과 명순(明順)이라고 하였다.

4. 인조(仁祖)

인조는 효종 즉위년 5월 15일에 묘호를 열조(烈祖)로 하였다가 다시 23일에 인조(仁祖)로 고쳤다.

인조의 묘호 역시 수많은 중신들의 반발에 부닥쳤는데 효종은 모든 간언을 단호하게 내쳐버린다. 효종이 얼마나 단호했는지는 대사헌 김집이 7월 5일 올린 상소에서도 드러난다.

삼가 여이징의 소에 대한 비답(批答)을 보건대, 말씀이 엄하고 뜻이 준엄하여 자못 신하가 들을 수 있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신 역시 묘호에 대해서 어리석은 소견을 올렸습니다마는 이번에는 감히 조목조목 나누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군신은 부자와 같으니 부자 사이에 무슨 말인들 다하지 못하겠습니까. 대체로 임금이 간언(諫言)을 듣는 도는 오직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을 뿐입니다. 비록 그 말이 쓰기에 합당하지 않더라도 답하시는 말씀은 반드시 조용하고 평온하게 하여 화기(和氣)를 잃지 않아야지 절대로 불평스런 말씀을 드러내서 뭇신하들로 하여금 임금의 속마음을 의논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거의 투정에 가까운 이 상소를 보면, 신하들이 효종의 단호한 태도에 조금 겁을 먹은 것 같기도 하다.

5. 영조(英祖)

영조의 시호는 원래 영종(英宗)이었다. 그러나 고종 26년에 영조로 묘호를 고치게 된다. 묘호를 고칠 것을 상소한 것은 봉조하 김상헌으로, 아래와 같은 상소를 올렸다.

봉조하(奉朝賀) 김상현(金尙鉉)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이 듣건대, 종묘(宗廟)의 예에 공이 있는 임금을 ‘조(祖)’라 하고 덕이 있는 임금을 ‘종(宗)’이라 한 것은 칭호를 매우 중시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모든 임금들이 전해 온 큰 전례(典禮)이며 또한 만대에 변치 않을 큰 의리이고 공론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전례를 중시하는데, 삼가 생각건대, 우리 태조(太祖), 세조(世祖), 선조(宣祖), 인조(仁祖), 순조(純祖)의 다섯 성조(聖祖)의 묘호(廟號)의 높음이 그 사이에 가장 성대합니다. ‘조’라 하건 ‘종’이라 하건 높이 받드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공이 있으면 반드시 ‘조’라고 칭하는 것은 보통과 다른 것을 구별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영종 대왕(英宗大王)은 세상에 드문 임금으로서 매우 어려운 때를 당하여 여러 흉악한 자들을 소탕하고 종묘사직을 다시 편안하게 안정시켰습니다. 임금 자리에 52년간 있었는데, 천덕(天德)과 왕도(王道)가 순전히 바른 데서 나와 삼황 오제(三皇五帝)처럼 대단히 큰 공을 이루었으므로 승하하신 지 이미 수백 년이나 되었지만, 온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즐거움과 이익을 누리며 잊지 못하고 있으니, 아! 성대합니다. (후략)


6. 정조(正祖)

정조 역시 처음 시호는 정종(正宗)이었다. 그러나 고종 36년에 정조로 고치게 된다. 그런데 이 때의 묘호개정은 이전의 묘호와는 조금 성격이 다르다.

고종은 1897년(고종 34년) 대한제국을 건국(?)하고 황제에 즉위한다. 나라를 세운 사람이 조(祖)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또한 태조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국조의 4대조까지 조로 추존하는 것이 기본적인 예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고종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순조의 아들 익종(翼宗)의 양아들로 입적해 있었다. 그래서 고종은 황제로 즉위한 후 4대조를 황제로 추존하면서 '조'의 묘호를 올린 것이다. (그 외 추가로 태조도 황제로 추존하였다.)

장조(莊祖 : 사도세자) - 정조(正祖) - 순조(純祖) - 문조(文祖 : 익종)의 4대조이다.

그런데, 여기서 순조의 경우는 조금 특수하다. 순조는 고종이 추존하기 이전부터 순조였기 때문이다.

7. 순조(純祖)

순조는 처음 시호가 순종(純宗)이었다. 그러나 철종 8년 8월에 순조로 고치게 된다. 그런데, 순조로 고칠 것을 주청하였던 이학수의 상소문에는 이전까지 없던 내용이 등장한다.

(전략)
《대대례(大戴禮)》에 이르기를, ‘시호(諡號)란 것은 행동에 대한 실적(實蹟)이다.’라 하였고,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그의 시호를 듣고서 그의 정치를 알 수 있다.’라고 하였으니, 순고의 행적을 헤아려보고 순고의 정치를 상고해 보건대 조(祖)라 일컫는 것이 역시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논하는 자들은 말하기를, ‘왕업(王業)을 창시한 임금을 조(祖)라 일컫고 계통(系統)을 이은 임금을 종(宗)이라 일컬었음은 고금(古今)의 떳떳한 법식이었습니다. 전한(前漢)·후한(後漢) 4백여 년 동안에는 오직 고조(高祖)와 세조(世祖)뿐이었고 송(宋)나라 3백여 년에도 오직 태조(太祖)뿐이었으며, 송 고종(宋高宗)의 묘호를 의정할 때에도 더욱 오래도록 곤란해 하였습니다. 명(明)나라에는 오직 태조(太祖)와 성조(成祖)뿐이었고 우리 나라에는 오직 태조 대왕·세조 대왕·선조 대왕·인조 대왕뿐이었으니, 시호를 내리는 의전(儀典)에 대해서는 지극히 엄중하였습니다. 한 문제(漢文帝), 당(唐)나라의 태종(太宗)·현종(玄宗), 진 원제(晉元帝), 송 고종은 비록 백세토록 불천지묘(不遷之廟)는 되었으나 모두 조(祖)라고 일컫지는 못하였습니다.’라고 하기에, 신도 역시 말하기를, ‘조(祖)는 공로(功勞)요 종(宗)은 덕화(德化)로서 두 가지가 모두 성대하고 아름다워서 조가 반드시 종보다 우월한 것은 아니고 종이 반드시 조보다 깎이는 것은 아니지만 특별히 당면(當面)한 시기에 의하여 그 칭호를 달리했을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세조 대왕과 인조 대왕은 계통을 이은 임금으로 조(祖)라고 일컬었으며, 선조 대왕은 종계(宗系)를 바르게 밝혔고 왜란(倭亂)을 평정하였기 때문에 조라고 일컬었으니, 이는 참으로 우리 선군(先君)들께서 이미 시행했던 전례(典禮)이었고 우리 나라의 예제(禮制)에도 역시 마땅하였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고루하고 촌스러운 말을 정신(廷臣)들에게 널리 하문하여 만일 경대부(卿大夫)들의 생각이 같다면, 이것은 일국(一國)의 동일하고 공평한 견해이며 영구히 바꾸지 못할 의논이 될 수 있습니다.

즉, 세조와 인조가 조(祖)가 된 것은 새로 계통을 이었다는 말, 즉 반정으로 다시 왕위를 이었다는 의미가 된다.

이 내용을 보고 나니 다시금 생각나는 인물이 있다. 바로 중종(中宗)이다. 중종 역시 연산군을 폐위하고 옹립된 군주로, 세조, 인조와 비슷하게 새로 계통을 이었다. 그렇다면, 중종의 묘호에 대한 의논이 있었을까.

물론 있었다. 인종 1년 1월 6일에는 인종과 중신들이 중종의 묘호를 두고 옥신각신하는 내용이 나타나고 있다.

인종은 중종을 중조(中祖)로 고치자는 의견의 근거로 대략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잡은 중흥(中興)의 공'을 내세운다. 그런데 이에 반대하는 중신들의 의견 가운데에 솔깃한 부분이 있다.

세조를 조로 칭한 것은 아우로서 형을 이었기 때문인데 대행 대왕께서는 중흥하였어도 바로 성종(成宗)의 계통을 이었으니 조로 칭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세조는 계통을 새로이 해서 '조'가 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발언이다. 인종 또한 이러한 의심을 증폭시켜 주는 발언을 한다.

부왕께서는 성종의 계통을 이으셨다 해도 그 사이에 폐왕(廢王)이 재위하였으므로 세조와 문종(文宗) 사이에 노산(魯山)이 재위한 일과 서로 다르지 않을 듯한데, 어찌하여 유독 조호(祖號)를 칭해 올릴 수 없단 말인가?

그런데, 7일에는 중신들이 이에 반하는 의견을 내놓는다.

어제 세조께서 노산을 잇고 대행 대왕께서 폐왕을 이으셨다는 뜻으로 전교하셨습니다만, 노산과 폐왕은 모두 도리를 잃은 임금이므로 강봉(降封)하여 군(君)이라 칭하였으니 대를 이을 수가 없습니다. 대행 대왕께서는 성종을 승습(承襲)하여 즉위하셨으니 조(祖)로 칭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어설피 해석하면, '중종은 성종의 정통을 이었으니 종이 맞다'라고 해석될 수도 있겠으나, 그 안에는, 세조 역시 계통을 새로 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대체 어떤 것이 맞는 의견일까...

결국, 조선 시대에도 조(祖)와 종(宗)은 다양한 기준과 의미로 적용되었다는 것 밖에는 다른 결론이 없을 듯 싶다.



이거 웬지 용두사미인 듯........ OTL.


덧글

  • 엘레시엘 2008/02/24 15:40 # 답글

    ...읽어보니 '그때그때 편한대로' 뭔가 권위를 부여하고 싶으면 몇가지 전례 들어서 조로 바꿔버리는 듯한 느낌.
    근데 그렇다 쳐도 조선 왕조에는 '조'가 너무 난립하네요 -_-;
  • 한단인 2008/02/24 19:54 # 답글

    훗..뭐 이거 엿장수 맘대로던데요
  • 초록불 2008/02/24 20:36 # 답글

    음냐... 마지막은 잘못 이해하셨습니다. 인종의 이야기는 세조도 대통을 이었지만 조라고 했다. 세조가 조가 된 것은 왕조를 중흥한 이유다. 그러니 중종도 조로 해달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이에 대해서 중신들은 그게 아니다. 세조는 대통이 끊어진 것을 다시 세운 것이다. 그러니까 조가 된 거고, 중종은 성종의 대를 이은 것이니 조로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이 논리는 매우 정연한 것이어서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 초록불 2008/02/24 20:38 # 답글

    에.. 자세히 나와 있어서 좋습니다. 저도 예전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http://orumi.egloos.com/257021
  • 꼬깔 2008/02/24 22:43 # 삭제 답글

    늘 궁금하던 것이었는데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
  • 야스페르츠 2008/02/25 00:32 # 답글

    엘레시엘 & 한단인 님// 정말, 그때그때 달라요...

    초록불 님// 아... 그런 의미였군요....

    꼬깔 님// 과찬이십니다.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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