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1/21 00:10

러시아 혁명 역사

또 다시 세시간 만에 날조해낸 레포트이다. 이건 정말 날조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는 퀄리티다. (털썩)

그래소 애써 쓴 것이니 그냥 한번 올려나 본다. 


1. 러시아 혁명의 배경


19세기의 러시아는 강력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유럽 열강의 일원으로 활약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정치·사회·경제적으로 유럽에서 가장 후진적인 국가 중 하나였다. 정치적으로는 황제(차르) 1인의 지배를 받는 전제국가였고, 경제적으로는 농노제가 유지되는 상태였다. 귀족과 농노의 신분으로 구성된 신분제 사회이자 시민계층이 형성되지 못한 신민(臣民)사회였다.

러시아 사회의 문제점은 1856년 크림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즉위한 차르 알렉산드르 2세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대개혁’을 추진하였다. 1861년 농노제가 철폐되고 강력한 산업화 정책을 추진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정치·사회적으로는 전제정치와 신분제가 유지되고 있는 한계가 있었다. 그 결과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러시아는 극도로 불균등한 발전을 특징으로 하는 사회의 모습을 띠었다.1)

러시아의 지식인 계층인 인텔리겐치아는 근대적 이념을 기초로 19세기 말부터 혁명적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인텔리겐치아는 인민주의 이념에 기초한 사회혁명당,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등을 창당하여 혁명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특히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멘셰비키와 볼셰비키로 나뉘어 서로 다른 혁명 활동을 추구하였다. 또한 자유주의에 입각한 부르주아 및 지주들도 입헌체제를 본격적으로 요구하였다.

한편 19세기 말부터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도시와 공업지역에 노동자 계급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조직적인 활동과 인텔리겐치아 혁명가들의 선동이 결합되면서 1890년대부터 전제체제 타도를 목표로 한 정치투쟁이 차츰 강화되었다. 농민들 또한 농노해방을 통해 형성된 촌락 공동체를 중심으로 조직적인 농민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총체적인 위기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차르 정부는 러·일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러시아 사회는 급격하게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2. 제1차 러시아혁명 (1905년 혁명)


1905년 1월 9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들이 겨울 궁전 앞에서 벌인 시위에 수비대가 무차별 사격을 가하는 ‘피의 일요일’ 사건이 벌어졌다. 차르 정부의 강경한 반응에 노동자와 농민들은 대대적으로 봉기하였다. 아울러 이 과정에서 이들은 자체적인 대표기관들을 형성하였다. 노동자대표 소비에트와 전 러시아 농민동맹이 그것이다.

이러한 혁명 상황을 두고 여러 사회주의혁명 정당들은 각기 이론적인 면에서 이견을 보이기는 했으나 전제정부 타도라는 공통된 목표를 중심으로 공동전선을 펼쳤다. 또한 자유주의자들도 급진적인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차르 정부는 10월 선언을 통해 자유주의자들의 입헌 요구를 수용함으로써 기사회생하였다. 두마(의회)에 입법권을 부여하는 등의 선언을 통해 혁명운동의 열기를 식힌 다음 체제유지를 위한 개혁을 시도하였다. 스톨리핀의 체제개혁은 10월 선언을 통해 혁명세력이 쟁취한 정치적 권리를 박탈하고 반동적인 정책을 펼쳤다. 이로써 1905년의 혁명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정부의 반동적인 정책과 이에 대항하는 간헐적인 투쟁은 지속되면서 미묘한 균형상태가 계속 유지되었다.


3. 2월 혁명


1914년 제1차세계대전이 시작되자 국민의 애국적 정렬로 일시적인 사회적 안정이 이룩되었다. 그러나 군사적 패배와 더불어 전시 체제로 후방의 경제적 피폐까지 더해져 혁명의 움직임은 손쓸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마침내 1917년 2월 하순,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일어난 대규모의 시위로 차르 니콜라이 2세는 퇴위하고 입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임시정부가 성립되었다.

2월 혁명의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은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병사 소비에트였다. 그러나 소비에트는 멘셰비키 및 사회혁명당 지도부의 영향으로 공식적인 권력 장악을 거부하였다. 멘셰비키는 2단계 혁명론에 입각하여 2월 혁명을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으로 설정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의 대표기관인 소비에트는 정부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리하여 프롤레타리아적 소비에트와 부르주아적 임시정부가 공존하는 ‘이원적 권력’ 상태가 성립했다.

임시정부는 자유주의적 개혁을 지향함과 동시에 제국주의적 팽창정책을 지지했다. 소비에트 역시 혁명적 방위주의를 내세워 조기 강화에 소극적이었다. 결국 전쟁은 계속 진행되었고 자유주의적 개혁은 전쟁의 뒤로 밀려나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임시정부에 대한 노동자·병사의 지지가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자유주의자들은 사회주의 소비에트를 권력에 참여시키려 하였으며 전쟁은 계속되는 가운데 자유주의자와 사회혁명당, 멘셰비키 등은 인민의 지지를 잃어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위스에 망명해있던 레닌은 4월 테제를 발표하였다. 4월 테제는 즉각적으로 민주적 강화를 체결하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집중하며 모든 토지와 공장을 국유화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레닌과 그에 동조하는 트로츠키의 지도 아래 볼셰비키는 7월에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켰다. 봉기는 무자비한 임시정부의 진압으로 실패하여 볼셰비키 조직은 막대한 손상을 입었지만 임시정부의 위상은 한층 더 추락하였다. 새로이 수반이 된 케렌스키는 독재적인 정국 운영을 시작하여 민중과의 연결 고리를 완전히 상실하였다.


4. 10월 혁명과 소련의 성립


7월 위기 이후 레닌의 볼셰비키는 무장봉기노선을 걸었다. 이에 임시정부는 군부에 의지해 혁명세력을 누르려고 하였는데 이 역할을 위해 발탁된 코르닐로프 장군이 8월 26일 군사독재를 수립하려는 반란을 일으켰다. 케렌스키 정부는 쿠데타를 막기 위해 소비에트, 심지어 볼셰비키에까지 협력을 요청하였다. 사회주의 세력 및 민중의 저항으로 쿠데타는 실패하였으나 이로 인해 사회적 무정부상태가 도래하고 위기는 만성화되었다.

볼셰비키의 세력은 더욱 강화되었으며 레닌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 아래 볼셰비키 단독의 정부 수립을 위한 폭력혁명을 주장하였다. 결국 10월에 이르면 공공연하게 봉기 준비가 진행되었으며 10월 24일 저녁부터 봉기가 시작되어 임시정부는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권력을 내주었다. 그 동안 스몰니에서 열리고 있던 제2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는 소비에트 공화국이 선포되고 새로운 혁명정부로서 레닌을 의장으로 하는 인민위원회의의 구성이 선포되었다.

볼셰비키의 권력기반은 각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11, 12월에는 좌파 사회혁명당이 입각하여 두 사회주의 정당의 연립정권이 형성되었다. 11월 12일에는 헌법제정회의 선거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투표 결과 우파 사회혁명당이 50%를 넘는 압도적인 다수의석을 차지하고 볼셰비키는 24% 가량의 득표율과 의석을 차지하는데 그쳤다. 이는 대도시 지역에서 볼셰비키의 지지가 압도적이었으나 농촌 배후지에서는 볼셰비키의 지지가 약했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투표결과는 볼셰비키 정부에게 심각한 위기였다. 결국 레닌은 헌법제정회의를 해산시키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또한 독일 등과 단독강화를 체결하여 전쟁에서 가까스로 벗어났다. 그러나 곧 볼셰비키 정부는 심각한 위기와 전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단독강화에 반대한 좌파 사회혁명당이 탈퇴함으로써 볼셰비키는 모든 정파로부터 고립되었으며 연합국이 일으킨 간섭전쟁 및 반볼셰비키 세력의 군사적 저항에 직면하였다. 또한 내전으로 인한 농촌의 피폐로 농민들의 불만도 증대되었다. 결국 러시아의 내전은 연합국의 지원을 받는 반동적인 백군과의 전쟁 뿐 아니라 다른 사회주의 정파들과의 대립, 농민과 노동자의 저항 등 모든 방면에서 전개되었다. 이러한 대립 세력에 대한 볼셰비키의 대응은 대부분 강경한 탄압이었다. 이리하여 혁명적 이념의 부분적인 유보 및 왜곡마저 감수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가혹한 상황 아래서 신생 소비에트 공화국의 역사는 시작되었다.2)


5. 러시아 혁명에 대한 평가


러시아 혁명을 통해 성립된 소련이 전 세계 역사에 끼친 영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자본주의는 대대적인 수정을 거쳐 사회주의에 대한 면역력을 키워야 했으며 많은 제3세계 국가들은 소련식 사회발전의 모델을 채택하여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이처럼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소련이 탄생하도록 한 러시아 혁명에 대한 평가는 다양한 방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소련이 해체되기 이전 러시아 혁명에 대한 평가는 양극단을 달렸다. 소련 역사학계의 공식적인 입장이나 사회주의 혁명에 찬성하는 측에서는 러시아 혁명을 러시아 민중의 오랜 여망을 구현시킨 사건으로 규정하였다. 이와 반대로 혁명에 적대적인 측에서는 혁명의 정당성을 부정하고 권력 지향적인 소수 권력가의 ‘쿠데타’로 규정하였다. 한편 밑으로부터의 혁명을 강조한 수정주의 역사가들은 혁명의 주역을 소수의 볼셰비키가 아니라 민중이라고 규정하였다.3) 그러나 소련이 해체된 후 러시아 혁명에 대한 평가는 압도적으로 부정적인 방향으로 쏠리게 되었다.4)

이처럼 러시아 혁명에 대한 견해는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에 대한 올바른 평가는 혁명 이후에 전개된 역사적 과정에만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 자체에 대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다방면의 고찰을 통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주석 및 참고문헌 

1) 한정숙 「러시아 혁명」 <서양사 강의> 한울 아카데미, 1992, 456쪽.

2) 한정숙 「러시아 혁명」 <서양사 강의> 한울 아카데미, 1992, 486쪽.

3) 박원용 「사회주의 몰락 이후 러시아 혁명 해석의 흐름」 <역사와 경계> 부산경남사학회, 2002, 99~100쪽.

4) 한정숙 「러시아 혁명」 <서양사 강의> 한울 아카데미, 1992, 487쪽.


덧글

  • 한단인 2007/11/21 02:49 # 답글

    이걸 3시간 만에 하셨다구요? 후덜덜 ;;;

    ...졸업논문을 두달째 끌고 있는 저란 놈은.. ;;;
  • 야스페르츠 2007/11/21 11:18 # 답글

    사실 <서양사 강의>라는 책을 고대로 요약한 것 뿐인데요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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