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2/05 17:38

성은 방이요, 이름은 명록이라.

심심해서 만들어 본 방명록입니다.



이 블로그는 환국신민과 대륙견공의 입성을 환영합니다. (견공은 때려잡아 삶아먹을 수 있으니 주의)

키보드 배틀을 권장하는 블로그 입니다.

최근에는 연재물 하나 시작하는 우를 범하여 딴짓할 여력이 부족합니다. 그래도 배틀은 뜹니다.

현피 환영. 혼자 세상을 관조하며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드립니다.


일단 이 방명록은 오호의 쟁패 연재가 끝날 때까지 상단에 위치합니다.

2009/12/07 00:17

잡담 잡담

1. 남자는 본디 본능에 충실한 짐승이다.


2. 삭신이 쑤시네.


3. 위키백과의 어떤 분, 매번 당하기만 하더니 이제 공격(?)하러 블로그에 찾아올 줄도 알고. 꽤 발전했군.

뭐, 매번 헛소리만 찌끄리다 가긴 하지만...


4. 근데 그 위키백과의 어떤 분.....................................................


여자다.

여자가 역사에 관심을 갖다니. 보기 드문 케이스.... 근데 그래봤자 사이비.

자기 입으로는 나이가 많다고 하니 그럼 아줌마? 흠흠


5. 돈지랄 그만하자.



2009/12/05 17:37

떡춘오프 공지입니다. 잡담

12월 19일 오후 5시 신촌 토즈를 예약했습니다.

원래 미플로 하려고 했는데 미플이 일찍 문을 닫는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토즈로 장소를 옮겼습니다.


찾아오시는 길은 이렇습네다.


떡춘이 있는 풍경 이라는 이름으로 예약이 되어 있어요.


모임에 참가하기로 하신 분들은 여기에 비밀글로 연락처를 달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아아.




우리 즐겁게 수다를 불태워 보아요~~~~~

그리고, 오시고 싶어 하신 모든 분들을 초대하고 싶었습니다만, 아무래도 인원 문제가 좀 있을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다 모시지 못했습니다.

신청해주신 분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다음 기회를 기약해 보아요~




2009/12/05 17:30

떡춘 오프 공지 - 떡춘이 있는 풍경~

떡춘 마감에 부쳐 (부제 : 떡춘 오프합시다!)

드디어! 떡춘이 있는 풍경~ 떡밥춘추 오프 모임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잡혔습니다아아아아!!!!!!!!!!



떡춘위 멤버들의 시간 조율을 거쳐 드디어 날짜와 시간이 정해졌습지요.


날짜는 12월 19일(토), 시간은 저녁 6시, 장소는 신촌 미플!!


시간을 저녁 5시로 수정합니다.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황금 같은 연말, 주말을 불태워 보도록 함이 어떠할런지요! 후히 후히



참가 인원은 떡춘 멤버 6~7명에, 앞선 포스팅에서 신청(?)하신 분들 중에서 우선적으로 7~8분을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의향을 보이신 분들은 일단 우선권을 드립니다. 인원이 넘치더라도 가능한 모두 모여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피치못할 사정으로 못오시는 분이 계셔서 정원을 채우지 못했을 경우에 한해서 추가로 신청(?)을 받겠습니다.



구체적인 계획은 딱 이거다 하고 잡혀 있지는 않아요.

일단 미플에 모여서 음료를 마시면서 적당히 입방아를 찧다가 음식을 흡입하러 이동하는 것이 기본 골격이 되겠습니다.



또한 특별 이벤트도 몇 개 있을 것 같습니다.

아직 확실하게 정해진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모임을 기획하는 입장에서 뭔가 재미있는게 있으면 좋잖아요.


일단 현재 남아있는 <떡밥춘추> 2호를 경매에 붙여볼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떡춘위 멤버 전원의 사인이 들어있는 초레어 아이템!!!! (누가 그딴거 산대? 퍽!)


또는 소장도서나 각자의 레어 아이템을 소개하고 즉석 좌판을 벌여보아도 괜춘하겠지효.

저도 특별한 레어 아이템 하나를 가져가 볼까 생각 중입니다. 후후



무튼 각설하고, 드디어 뜨거운 밤을 불태울 때가 왔습니다!

역밸의 강호제현SOLO 여러분! 우리 모두 모여 보아요~!!!!

※ 짤방은 초록불 님 블로그에서 슬쩍해서 손을 좀 보았음.

2009/12/04 23:30

오호망양(五胡望洋) 26 - 용호상박 역사

오르도스.

많은 유목민족들의 터전이자 한족 왕조들이 유목민족들을 경영하였던 땅이다. 오호십육국 시대의 혼란기 속에서 오르도스 지방에는 흉노 철불부의 유위진(劉衛辰)이 세력을 잡고 있었다. 그러나 탁발부가 흥성하면서 철불부를 멸망시켰고 오르도스를 삼켜버렸다. 이로써 탁발부의 위와 강족의 후진 정권은 오르도스 사막을 경계로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위와 후진, 용과 호랑이의 첫 대결은 바로 이 오르도스 평원에서 시작되었다.


원래, 탁발부와 후진 정권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탁발규는 후진 정권과 선린을 위해 혼인 동맹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요흥은 탁발규가 모용씨를 이미 왕후로 세웠다는 사실을 알고 혼인 동맹을 파탄냈고, 탁발규는 보복으로 402년 초부터 오르도스 일대를 공격한다.

오르도스 지역에는 고평을 지키는 몰혁간(沒奕干) 외에도 출불(黜弗), 소고연(素古延) 등의 유목 부락들이 후진 정권에 복속해 있었다. 탁발규는 군소 부락들을 습격하는 한편 고평을 공격하여 몰혁간을 패주시켰다. 한편으로 병주의 평양에서도 하동 일대를 공격하는 등 국경 전체에 걸친 파상 공세가 이어졌다. 북위의 공격으로 관중의 여러 성들이 동요했다. 낮에도 성문을 걸어 잠글 정도였다.

요흥은 위를 정벌하기 위해 군대를 준비하기 시작한다.

402년 여름이 되자 요흥은 대규모 군대를 발동해서 위 정권의 지배하에 있는 병주를 향해 출병하였다. 선봉으로 요평(姚平)이 이끄는 4만 명이 나서고 요흥은 4만 7천 명의 본군을 이끌고 뒤따랐다. 일찍 출발한 선봉 요평은 위의 건성(乾城)을 60여 일 동안 공격한 끝에 함락하고 더 앞으로 나아가서 시벽(柴壁)에 이르렀다.


이에 맞서는 위의 진용은 탁발순, 장손비 등이 이끄는 선봉대와 탁발규가 직접 이끄는 본대였다. 탁발규가 영안(永安)에 도착하자 요평은 2백의 기병을 보내 척후를 시켰다. 그러나 척후병은 장손비에게 걸려 오히려 사로잡혔고, 요평은 일단 물러서 시벽을 지켰다.

탁발규는 시평을 포위하고 분수(汾水)를 막아 요흥의 진로를 차단하려고 하였다. 요흥은 시벽의 맞은편인 천도(天渡)를 점거하여 시벽의 포위를 뚫고 보급로를 이으려고 하였는데, 탁발규는 이러한 의도를 파악하고 분수에 부교를 설치하여 천도까지 점거해 버린다. 요흥은 포판에 발이 묶여서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여름을 고스란히 보내고 가을이 되어서야 요흥은 포판을 나와 진격하였다. 탁발규는 3만의 병력으로 길목인 몽갱(蒙坑)에서 요흥과 맞붙었다. 전투 결과 요흥은 1000여 명의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으며, 탁발규는 길목들을 틀어쥐고 시벽에 대한 포위를 더욱 강화한다.

요흥은 분수의 서쪽에서 지형에 의지해 대치했다. 탁발규의 군대는 분수의 서쪽으로 튀어나와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부교만 파괴할 수 있다면 탁발규는 고립되고 만다. 요흥은 분수 상류로 유격병을 보내서 나무를 베어 강물에 떠내려 보내 부교를 파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위군 역시 바보는 아니었기에, 떠내려 오는 나무들은 모두 물 밖으로 끌어내져 땔감이 되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겨울이 되었다. 보급이 끊겨 고통받고 있던 요평은 마침내 최후의 힘을 끌어모아 포위망 돌파를 시도하였다. 요흥도 이를 보고 강 건너편에서 북을 두드리고 함성을 지르면서 격려하였는데 그것 말고 실질적인 도움은 불가능했다. 힘이 다한 요평은 분수로 뛰어들어 자살했고, 요평 휘하의 4만여 군대는 모두 위군의 포로가 되고 만다.

승기를 탄 탁발규는 요흥을 거세게 공격하였고 요흥은 포판까지 퇴각한다. 포판에는 후진 정권의 살림꾼 요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요서는 싸우지 않고 포판을 굳게 지킨다.

※ 405년 경의 세력판도



포판에서의 대치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후진 정권과 우호 관계에 있던 북방의 유연(柔然)이 위의 본토를 위협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탁발규는 미련없이 군사를 되돌렸고, 이로써 용과 호랑이의 싸움은 사실상 무승부로 마무리되었다. 후진 정권은 위 정권을 선공하였다가 주요 장수를 잃고 4만에 달하는 군대를 상실했고, 위 정권은 후진 정권의 침공을 성공리에 방어하고 반격까지 한 셈이다. 전체적으로는 위 정권의 우세였지만, 결과적으로는 특별한 결과는 나타나지 않은 셈이다.


진과 위 양대 정권은 이때의 결전을 끝으로 내부 안정화에 주력한다. 위 정권은 북방의 유연과 오랜 전쟁에 접어들었고, 진 정권은 서쪽으로 시선을 돌려 후량 정권을 흡수하고 남, 북, 서량을 속국화하는 등 내부적으로 안정을 꾀하였다. 그리하여 이 결전 이후 405년 경까지 진 정권은 오랫동안 평화를 누렸으며, 위 정권 역시 북방의 소란을 제외하면 평화로운 시기였다.

이러한 평화가 가능했던 원인은 무엇보다 남쪽의 동진 정권이 격심한 혼란에 빠져 있었던 것에 있다. 당시 동진은 내란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환현(桓玄)이 쿠데타를 일으키는 등 온 나라가 휘청대고 있었다. 각지에서 내란으로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그 혼란 통에 한수와 회수 이북의 10여 개 군이 후진 정권에 항복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405년에 환현이 유유(劉裕)에게 패하여 축출되었을 무렵이 되면 환현의 세력권이던 형주 일대가 혼란해지면서 촉 땅에서 독립국가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역사상 후촉(後蜀)이라 불리는 정권의 탄생이다.

그러나 이런 혼란도 유유라는 걸출한 인물의 등장으로 어느 정도 종식되고, 강남과 화북, 파촉까지 진동시킬 대 사건이 가까워온다. 다시 북벌이 시작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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