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은 방이요, 이름은 명록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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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이 방명록은 오호의 쟁패 연재가 끝날 때까지 상단에 위치합니다.
오호망양(五胡望洋) 17 - 콩가루 집안 역사
396년 4월, 모용수가 진중에서 병사하면서 위기에 빠졌었던 탁발규의 대 정권은 기사회생한다. 뒤를 이은 모용보는 X맨이 되어 활약(?)하고 있었고, 탁발규는 하늘이 내린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세력을 다시 회복해 나간다. 모용수에게 빼앗겼던 세력을 즉시 회복한 것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연의 북방에서 번속해 있던 유현의 잔당을 토벌하여 연의 영토로 향하는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이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탁발규는 7월에 이르러 연호를 황시(皇始)로 고치고 천자를 자칭한다.
그리고 8월, 탁발규는 후연에 대한 대대적인 정벌을 개시한다. 사료에 따르면 병력이 40만, 본군은 병주 일대로 전진하고, 별동대로 유주를 공략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된 탁발규의 후연 정벌은 수백 년 후에 징기스칸이 금나라를 정벌하던 때와 거의 비슷한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야전에서의 압도적 우세를 바탕으로 탁발규의 군사들은 화북 평원을 무인지경으로 드나들었고, 후연군은 몇몇 거점 도시에서 농성전으로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병주 일대는 손쉽게 석권하였고, 중산을 포위하는데까지도 일사천리였으나 대부분이 기병이고 공성전에 대한 경험도 부족했던 군사들은 끝내 중요 거점을 함락하는데는 실패하고 만다. 후연은 중산, 업, 신도 등의 거점을 중심으로 농성전을 벌였고, 탁발규의 공성전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농성하는 측도 공격해 오는 적을 격파할 수는 있어도 그 승리를 바탕으로 전세를 뒤집을 수는 없는 기묘한 대치 상황이 계속되었다.
세월은 살 같이 흘러 397년이 밝았다. 연의 중요 거점 가운데 하나였던 신도가 함락되자, 모용보는 전세를 역전시켜 보고자 병력을 모아 반격을 준비한다. 반격을 위해 모용보는 궁중의 보물까지 풀어 도적떼까지 동원하였다. 탁발규는 신도를 공격하기 위해 중산을 떠나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모용보의 반격은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탁발규가 돌아오면서 전쟁이 시작된지 수개월 만에 양군이 결전에 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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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타수를 경계로 북쪽에는 후연군이, 남쪽에는 탁발부군이 대치하고 있던 2월 정축일(9일) 밤, 모용보는 몰래 강을 건너 정예병 1만을 파견, 탁발부의 진영을 습격하였다. 바람을 타고 불을 지르면서 시작된 기습은 대 성공이었다. 적군은 혼란에 빠져 패주하고, 탁발규는 맨발로 도주할 정도였다. 후연의 장수 걸특진(乞特眞)은 탁발규의 장막까지 접수하고 그 의관을 습득하였다. 누가 봐도 명백한 탁발규의 패배였다.
그런데, 여기서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모집된 병사들이 이유도 없이 스스로 놀라 서로 베고 쏘았다.
募兵無故自驚,互相斫射。
원인을 알 수 없는 혼란이었다. 그것도 적의 진영 안에서 벌어진 혼란. 군영 밖에 단신으로 달아났던 탁발규는 이 모습을 보고 즉시 북을 두드리면서 흩어진 병사를 모았다. 어렵사리 병사를 모은 탁발규는 기병을 보내 혼란에 빠진 연군을 공격했고, 마침내 크게 승리한다.
정예병을 뽑아 보낸 결전이 패배로 끝나자 모용보는 전의를 상실하고 중산으로 퇴각한다. 탁발규는 기병을 풀어 퇴각하는 모용보군을 두들겼고, 모용보는 패배를 거듭하면서 간신히 중산으로 퇴각한다. 후연 최후의 결전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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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된 농성은 길고 고통스러웠다. 게다가 내부에서는 모반의 기운이 점차 불거져 나오고 있었다. 불안의 씨앗은 바로 모용린이었다. 성 안에는 상당히 많은 수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고, 모용륭 등의 주전파는 성문을 열고 뛰쳐나가 탁발부와 결전을 벌여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모용보로부터 군권을 위임받고 있던 모용린은 이러한 주전파의 주장을 모두 묵살하였고, 심지어 모용보가 윤허한 출정조차도 가로막았다. 이렇게 모용린이 출정을 저지한 것이 4차례나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3월의 어느날, 모용륭의 출정을 또 한 번 가로막았던 모용린은 밤이 되자 마침내 마각을 드러냈다. 금군을 빼앗아 모용보를 시해하려 한 것이다. 다행히 금군을 지휘하던 모용정의 희생으로 모용린의 음모는 실패했고, 모용린은 성을 빠져나가 산 속으로 숨었다.
성안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군권을 사실상 장악하고 있었던 모용린이 모반을 일으켰다가 도망친 상황이니 얼마나 혼란스러웠을까. 게다가 문제는 그것 하나만이 아니였다. 모용린은 모용보로부터 군권을 위임받은 총 책임자. 그러므로 성 밖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모용린은 어느 곳의 병력이든 "합법적"으로 차지할 수 있었다. 당시 유주를 지키던 모용회가 구원군을 이끌고 중산으로 향해 오고 있던 중이었는데, 모용린이 이 군대를 탈취하게 되면 모용보는 그대로 끝장이다.
이제는 중산을 지키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연나라를 지탱하는 두 기둥 모용륭과 모용농도 의견은 같았다. 3월 임자일(14일) 밤, 모용보는 1만의 기병만 이끌고 몰래 중산을 빠져나와 모용회의 군대를 향해 말을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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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중산, 아직 성안에는 수만의 병력이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성문도 활짝 열린 채로 덩그러니 버려졌다. 성안에 남은 사람들도 우왕좌왕하기 바빴다. 탁발규는 즉시 성을 점령하려고 하였는데, 장군 왕건(王建)의 간언을 따라 아침에 입성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그리고 그 사이, 성안에서는 황족이었던 모용상(慕容詳)이 지도자로 추대되어 농성을 결의하였다. 결국 탁발규는 중산을 함락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친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항복을 권하는 탁발규에게 돌아온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무리는 적고 아는 것은 없으나, 다시 참함피에서 있었던 무리처럼 될까 두려우니 몇 개월이라도 명을 연장하려고 할 뿐이다."
群小無知,恐復如參合之眾,故苟延旬月之命耳。
참합피에서 수만 명의 투항군을 갱살했던 업보가 이렇게 돌아온 것이다. 탁발규는 중산 낙성을 막았던 왕건 장군의 얼굴에 침이나 뱉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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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을 떠난 모용보는 계(薊)에 이르러 모용회의 군대와 만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만남 또한 불행의 시작이었다. 콩가루 집안이 어디 가겠나.
모용회는 모용보의 장남이었는데, 모용보는 겨우 11살짜리 아들 모용책을 총애해서 장남을 제쳐두고 꼬꼬마 아이를 태자로 세운 바 있다. 이것만으로도 모용회가 불만을 품기에는 충분했는데, 여기에 더해서 때이른 개혁 정책으로 인해 모용회의 반감은 공공연한 수준에 이를 정도였다. 이런 상황이니 모용회의 심기가 좋을리가 없었다.
모용륭과 모용농은 모용보에게 아버지의 위엄을 보여 모용회를 책망하고 다스릴 것을 권했지만, 소심한 모용보는 그러지도 못하고 모용회의 군대를 해체해서 약화시킬 생각만 할 뿐이었다. 모용회는 모용회대로 삐뚤어져 나갈 뿐이었다.
25세의 혈기왕성한 모용회는 어떻게든 탁발부 군대와 싸울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정작 도망쳐온 모용보는 연나라의 구도(舊都)인 용성으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모용보를 추격해온 탁발부의 군사를 맞아 이를 격파한 모용회는 더욱 기고만장했고, 아버지는 아무 말도 못하고 숙부인 모용륭이 타이를 뿐이었다. 모용회가 반란을 일으켜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태자도 아니었고, 병권도 빼앗길 지경이었다. 게다가 용성 지역은 과거 모용농과 모용륭이 주둔하면서 안정시켰던 지방이라 신참인 모용회보다 모용농 등의 입김이 더 강했다. 이대로 용성으로 돌아간다면 모용회에게는 권력을 잃을 일만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4월 계유일(6일), 마침내 모용회의 반란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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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회의 도당이었던 구니귀(仇尼歸) 등을 보내 모용농과 모용륭을 습격한다. 모용륭은 머물고 있던 장막에서 참살당했지만, 모용농은 장막 안으로 들어온 구니귀에게 큰 부상을 입고도 오히려 구니귀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당장에 주위를 장악한 것은 모용회였으므로 모용농은 구니귀를 붙잡고 산 속으로 도망쳐 숨어 기회를 노린다.
모용회는 모용보에게로 가서 말한다.
"모용농과 모용륭이 반역을 도모하였는데, 신이 이미 그들을 제거했습니다."
누가 봐도 뻔한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모용보라고 해서 눈치가 없지는 않다. 지금 모용회에게 거슬렀다가는 오히려 상황이 악화될 수 있었다.
"내가 두 왕을 의심한 것이 오래되었는데, 그들을 제거했다니 아주 잘한 일이다."
다음날 아침, 모용회는 삼엄한 경계를 갖추고 용성을 향해 출발하였다. 출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그들의 앞을 피투성이의 남자가 가로막았다. 도망쳤던 모용농이었다. 모용농을 발견한 모용보는 모용회가 나서기 전에 먼저 나서서 모용농을 꾸짖고 그를 체포한다. 그리고 모용농을 신문하기 위해 자리를 펴니, 모용회도 어쩔 수 없이 이를 따라 신문 자리에 참석하였다.
삼엄한 신문 자리였지만, 적어도 그 자리만은 모용회의 세력보다 모용농·모용보의 세력이 더 많았다. 은밀한 눈빛이 오가고, 장군 모여등이 모용회의 목을 베려 하였는데, 모용회가 재빠르게 도망치는 통에 목에 상처를 내는 정도로 그치고 말았다. 모용회를 단숨에 제거하려던 계획이 실패한 것이다.
모용회가 자신의 군영으로 도망치는 사이 모용보와 모용농은 소수의 기병만 거느리고 200여 리를 달린 끝에 용성에 입성하는데 성공한다. 모용회의 반란은 사실상 실패한 것이다. 모용회는 군사력을 바탕으로 태자 자리를 요구하기도 하는 등 위세를 떨쳤지만, 결국 전투에서 패배하여 단신으로 도주했고, 중산에 이르러 모용상에게 처형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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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7년 여름, 후연의 황제 모용보는 용성을 중심으로 나라를 다시 추스르기 시작한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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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POPs 키워드가 없다고 자꾸 뜨네요. 이전에 팝스 키워드로 걸었었던 단어도 있는데 없다는 것을 보니 팝스에 뭔가 문제가 있나 봅니다. ㅡㅡ;;
초록불조직지심체... 잡담

아놔.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라는 제목이 이렇게 절묘하게 잘려서 나올 줄이야.....
빡씬 회사 업무에 소소한 재미를 주신 초록불 님께(?) 이 캡쳐를 바칩니다. ㅎㅎㅎ

오호망양(五胡望洋) 17 - 虎父犬子 역사
모용보의 아들 모용회를 연의 배후지라고 할 수 있는 유주 및 평주로 보내고, 유주·평주의 정예병을 이끌고 있던 모용륭, 모용성 등을 불러들이는 한편, 396년이 되자 기주 지역에서도 병사를 모으기 시작한다. 그러나 참합피의 패전은 그 여파가 남아 있었던 것 같다. 기주에서 병사를 징발하는 일을 담당했던 평규(平規)가 열심히 모은 병력을 이끌고 모반을 일으켰던 것이다. 평규의 반란은 모용수가 직접 출정하여 분쇄하긴 했지만, 평규는 황하를 건너 산동 지역에서 힘을 모으며 재기를 기약했다.
모용수는 이렇게 후방이 불안한 와중에도 목표였던 탁발규에 대한 공격을 무리하게 개시한다. 역시, 배후의 위협보다는 탁발규에 의한 북방의 위협이 더 두려웠던 것이리라. 또한, 모용수는 배후의 위협이 가시화되기 전에 북방을 평정하고 돌아올 심산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계획은 충분히 현실성이 있었다. 모용수의 능력이 범상치 않았던 것은 수십 년 전부터 인구에 회자되던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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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수는 탁발부를 기습할 심산이었던 것 같다. 용성(龍城)의 정예병을 불러 올 정도로 요란하게 원정을 준비한 것이니 기습이라 말하기 애매하긴 하지만, 정작 모용수의 진로는 기습의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출정 시점이 3월, 음력 3월이니 한창 농번기였을 시점인데다가 배후에 평규의 반란을 놓아두고 출정할리가 없으리라 판단해도 큰 무리는 없다. 그러니 출정 자체도 허를 찌른 것이었고, 당연히 비밀리에 출발하여 진로도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잡았다.
<자치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모용수는 중산을 떠나 북쪽으로 올라간 후 청령(靑嶺)을 넘어 천문(川文)을 지나면서 산을 뚫고 길을 내서 운중(雲中)으로 향했다고 한다. 운중은 내몽고에 위치한 곳으로 예로부터 북방 민족의 중요 거점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운중으로 향했다는 기록을 따르자니 운중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평성(平城 : 산서성 대동시)이 걸린다. 목표는 운중이었다고 하는데 이후 탁발규의 행보나 모용수의 진로 등을 살펴보자면 목표는 운중이 아니라 평성인 것 같기도 하다. 운중은 당나라 시기에 평성 지역을 일컫는 지명이었던 만큼 두 지명이 같은 지역을 가리키는데 혼동된 것이거나, 아니면 운중으로 향하는 도중에 평성을 맞닥뜨렸다고 보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아무튼, 모용수의 기습은 성공적이어서 평성을 수비하고 있던 탁발건이 전사하였다. 탁발건의 전사 소식과 모용수군의 등장이 알려지면서 북방의 여러 부락들이 이반하는 등 북방은 상당히 혼란해졌다고 한다. 탁발규도 음산 북쪽으로 다시 피했다고 할 만큼 모용수의 위력은 대단했다.
그러나, 운명은 모용수의 편이 아니었다.
모용수가 평성을 점령하고 군사를 풀어 주변을 평정하고 있을 무렵, 참합피로 향하여 앞서 학살당한 병사들의 유골을 마주치게 되었다. "해골이 산처럼 쌓여 있다. 積骸如山"라고 할 정도였으니, 전날의 패배를 떠올리며 얼마나 비통한 심정이었을까. 유골을 모아 제사를 지내는데 병사들이 통곡하는 소리가 산과 계곡을 놀라게 할 정도였다고 한다. 모용수 역시 비통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피를 토하면서 쓰러지고 말았다.
모용수, 당시 나이 71세. 친정을 감행하기에는 너무 많은 나이였다. 이미 전 해부터 병으로 몸이 약해진 터에, 게다가 기습을 위해 힘겨운 산길을 달려 왔으니 탈이 나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결국 모용수는 수레에 누워 평성에 주둔하고, 각지에 흩어져 있던 연군들도 퇴각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퇴각하던 도중인 396년 여름, 4월 계미일(10일)에 의리의 영웅 모용수가 세상을 떠난다. 허망한 최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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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수의 사후 뒤를 이은 것은 태자 모용보였다. 모용보는 태자로 책봉되었을 때부터 후계자의 자질을 의심받았던 불운한 사람이었다. 모용보의 능력이 부족했다기보다는, 모용보의 경쟁자들이 너무나도 대단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모용보를 대신하여 태자감으로 회자되던 이는 모용보의 배다른 동생들인 모용농과 모용륭이었다. 모용농은 비수대전 이후 모용수가 거병했을 때부터 맹활약을 펼쳐 후연 건국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준재였고, 모용륭 역시 각지의 전선에서 혁혁한 전과를 세웠던 인재였다. 대권주자(?) 중에는 모용린도 있었는데, 모용린의 경우 능력은 인정받았으나 음흉한 면이 있다고 평가받았다.
이러한 세간의 평가가 당사자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리가 없다. 모용보와 모용린 두 사람 모두 이러한 평가를 듣고 나서 삐딱선을 탄 감이 없지않아 있다. 특히 모용린의 경우 타고난 성정도 음모가의 기질이 있었던 듯, 참합피 패전의 원인 중 하나를 제공했던 점도 의심스럽고 여러모로 반골 기질이 다분했다. 모용보 역시 세간의 평가에 앙심을 품고, 황제에 즉위한 뒤에 앙갚음을 하기도 했다.
태자 모용보에 대한 평가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승평의 시대를 만나면 족히 수성의 주군이 될 것 太子遭承平之世,足為守成之主"이라는 부분이다. 이는 모용보가 무인 보다는 문인의 기질이 강했다는 반증이 될 법도 한데, 모용보가 즉위하자마자 착수했던 일이 바로 이러한 "꼰대"가 저지를 만한 것이었다.
연의 주군 모용보가 사족(士族)의 옛 호적을 정하는데, 깨끗한지 혼탁한지를 구분하고, 호구를 교열하였으며, 군영의 음덕으로 받은 호구를 파하여 모두 군현에 소속시켰다.
燕主寶定士族舊籍,分辨清濁,校閱戶口,罷軍營封廕之戶,悉屬郡縣。
<진서> 재기에는 모용수가 유언으로 남긴 것을 따랐다고 나타나지만, 아무리 유언이었다고 해도 새로 즉위한 왕이 즉위하자마자 추진할 만한 일은 아니다. 게다가 북방의 위협, 황하 너머에 반란군마저 남아 있는 상황에서 이런 정책을 추진한다는 것은 참 이해하기 어렵다. 민심이 어지러워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고, 더불어 사족, 즉 기득권층의 반발까지 나타나면서 연의 정세는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상황에 이른다.
기득권층의 반발을 짐작케하는 기록은 곳곳에서 나타난다. 모용보는 종실왕들이 소유한 부곡(部曲)에까지 손을 댔던 모양인데, 당연히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종실들이 이러한 개혁(?)을 순순히 따를리 만무하다. 심지어 모용보의 아들 모용회(慕容會)도 반발을 할 정도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연나라를 떠받치는 기둥 가운데 하나였던 모용농 역시 이러한 정책의 희생양이 되었다. 자신 소유의 부곡 수만 명을 이끌고 모용보의 명에 따라 부임지인 병주 진양으로 향했는데, 마침 흉년이 드는 바람에 오히려 민심을 잃고 만다.
게다가, 모용보는 꼰대답지 않게 후계자 문제로 엄청난 분쟁의 씨앗을 만들고 만다. 모용보의 아들 모용회는 24세의 어린 나이였지만 능력을 인정받아 유주·평주 일대를 수비하는 중책을 맡기도 하는 청년이었다. 당연히 모용수는 모용회를 총애하면서 모용보에게 태자로 삼을 것을 종용했는데, 모용보는 11세의 꼬꼬마 모용책(慕容策)을 총애하였고, 마침 다른 아들들의 부추김도 있고 해서 황제에 즉위한 후 모용책을 태자로 삼는다. 당연히 대권에서 밀려난 모용회는 공공연하게 모용보에게 반감을 표시할 정도로 원한을 품는다.
한마디로 나라 꼴이 엉망진창이었던 게다.
그리고, 이렇게 잘 익은 떡을 가만히 놓아둘 탁발규가 아니었다.

모용수가 죽은지 채 반 년도 지나지 않아 그가 수십 년 동안 온갖 고생을 하면서 이룩해 놓은 제국에 먹구름이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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